갈2:20(3): 갈2:20, 골3:1-4 2010.9.12(일)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아름다운 주일날, 여러분이 평소에 많이 생각하지 않았을 질문 하나를 드리겠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도 모르게 죽어 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급히 호적초본이 필요해서 동사무소에 갔습니다. 주민등록번호를 불러 주고 호적초본 두 통을 떼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랬더니 직원이 컴퓨터를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 갸우뚱 합니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직원이 말합니다. “이상한데요. 호적상으로는 손님이 사망했다고 되어 있어요”. 그 말을 들은 사람은 기절할 뻔 했습니다. “뭐라고요? 죽어요? 누가 죽어요? 내가요?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내가 죽어요? 지금 무슨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리고 컴퓨터를 보았더니 호적에 빨간 줄이 쳐져있고 “누구 누구 사망”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자기가 졸지에 죽어 있는 것입니다. 멀쩡하게 살아 있는 사람이 죽어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황당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를 믿는 여러분에게는 이미 이 황당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아십니까? 오늘 말씀 보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혼자 죽으신 것이 아니라 나도 죽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십자가에 못박혔다면 누구도 살 수 없습니다. 어떻게 나도 모르게 내가 죽을 수 있는가? 나는 정말 죽었는가? 정말 황당한 일입니다. 나도 모르게 내가 죽다니. 그래서 성경을 찾아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내가 죽었다”는 말이 너무 많이 나옵니다. 그 중에 몇 구절만 읽으면 이렇습니다.
롬6: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롬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롬6: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롬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갈2: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골2:20,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오늘 말씀 골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그리고 딤후2:11,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여러분은 이 말씀들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황당하지 않습니까? 멀쩡히 살아 있는 나보고 죽었다니. 정말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두 가지 죽음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 말씀이 의미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우선 나보고 죽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시 한번 보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 속에 나보고 죽으라는 말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 말씀은 내가 죽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누군가 나를 위해 죽었다는 말입니다. 누가 죽었습니까? 그리스도가 죽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신앙생활하면서 자기를 죽이고 사는 것이 쉽습니까? 칠십 평생을 목회하신 한 목사님이 은퇴식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평생 목회하면서 자기 집을 팔아 교회에 바친 교인도 보았고, 자기 땅을 팔아 하나님께 바친 교인도 보았지만, 자기 성질 죽여 하나님께 바친 교인은 못 보았습니다”. 집팔고 땅팔아 하나님께 바치는 것보다 자기 고약한 성질 죽여 하나님을 따르기가 더 어렵다는 말입니다.
제가 재작년, 시카고에 부흥회를 갔습니다. 부흥회를 마치고 한 집사님이 식사를 대접한다고 해서 갔습니다. 그가 “목사님 말씀에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은혜를 받았느냐고 물었더니 내가 죽고 예수로 사는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동안 자기를 힘들게 한 많은 사람들 때문에 억울하고 답답하지만 이제는 다 용서하며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이 사람이 은혜를 받았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식사하는 중 이 사람이 한 말이 마음을 걸렸습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나중에 보니까 그 사람들은 죽지 않았더군요”. 여러분, 죽은 사람이 어떻게 남이 안 죽은 것을 압니까? 나는 죽었는 데 남은 안죽었다면 억울하기라도 하다는 말입니까? 이렇게 사람은 죽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어느 수도원에서 한 젊은이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다녔습니다. “나는 죽었다.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다”. 그러자 한 노인이 그를 불러 조용히 말했습니다. “형제여, 그대의 육신이 떠나가기 까지 너무 자신만만하지 마시오. 형제는 형제가 죽었다고 말하고 다니지만 아직 사탄은 죽지 않았소”.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육체를 이기기도 어렵고 세상 유혹과 죄를 정복하기도 어렵습니다. 설령 우리가 노력한다 해도 이길 수 없는 것이 사단입니다. 사단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너무 자신만만해서 안됩니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말은 내가 스스로 죽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죽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죽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함께”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이 “함께”라는 말은 우리가 죽게 된 진정한 이유를 말합니다, 우리가 죽을 때 그리스도가 무슨 일을 하셨는지 하셨는지 설명합니다. 자, 여기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죄짓고 십자가에 달렸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는 두 가지로 죽습니다. 하나는 법적으로 죽습니다. 죄짓고 십자가에 달리는 순간 그는 법적으로 죽습니다. 호적에서 이름이 사라집니다. 이름 위에 빨간 줄이 그어집니다. 죄의 심판을 받아 십자가에서 삶을 마쳤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에 달리면 끝납니다. 어떤 법도 다시 처벌하지 않습니다.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수의 죽음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법적으로 죽었으나 아직 육체적으로 죽지 않았습니다. 십자가가 잔인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십자가 죄수는 한 순간에 죽지 않습니다. 교수형이나 총살형은 한 순간에 죽습니다. 그러나 십자가형은 못이 박힌 순간부터 머리, 손발에서 피가 흐르는 순간, 고통으로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나중에는 횡경막이 내려 앉아 결국 숨을 쉬지 못하고 심장이 멎어 죽는 순간까지 시산이 걸립니다. 시간은 죄수에 따라 다릅니다. 예수님은 여섯 시간 걸렸습니다. 어떤 죄수는 못을 박히자 마자 죽습니다. 어떤 죄수는 하루 이틀 혹은 사흘이상 발버둥치다 죽습니다. 일주일이상 죽지 않고 버틴 사람도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죽는 것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에는 두 가지 죽음이 있습니다. 먼저 법적으로 죽고 다음 육체적으로 죽습니다. 법적으로는 순간적으로 죽고 육체적으로는 시간이 걸립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갈2:20은 어떤 죽음을 말하는지 아십니까? 법적인 죽음입니다. 법적인 죽음은 실제 우리 육체가 죽는 죽음이 아닙니다. 도적적인 죽음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격과 성품이 달라지는 죽음이 아닙니다. 법적인 죽음입니다. 다시 보겠습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문법적인 형태는 수동형입니다. 내가 나를 못박은 것이 아니라 누군가 나를 못박은 것입니다. 나는 나를 못박은 행위의 주체가 아닙니다. 누군가가 나를 못박았습니다. 수동형은 나 아닌 다른 사람이 행한 행동이 나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입니다. 시제도 과거형입니다. ”못박혔나니“. 지금 내가 나를 못박은 것이 아닙니다. 나는 행동의 주인도 아니고 주체도 아닙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내가 주체로 행동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그때 있었든 없었든 그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자신을 못박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행동이 나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는 그때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데 다른 사람이 죽은 것으로 내가 죽은 것을 대신해 주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은혜의 죽음입니다.
그런데 같은 갈라디아에 나오는 갈5:24은 다릅니다. 갈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밖았느니라”. 갈5:24은 내가 나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입니다. 행위의 주체가 나입니다. 그나마 현재형입니다. 지금 내가 나를 못박는 것입니다. 헬라어 현재형은 현재진행형을 가르키기도 합니다. 지금 내가 계속 나를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그래서 크게 두 가지 죽음이 있습니다. 하나는 갈2:20절의 죽음이고, 다른 하나는 갈5:24절의 죽음입니다. 갈2:20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입니다. 갈5:24절은 “내가 내 정과 욕심을 스스로 못박는 것”입니다. 갈2:20은 법적인 죽음입니다. 갈5:24절은 육체적 죽음, 도덕적 죽음입니다. 갈2:20은 순식간에 나도 모르게 일어났습니다. 갈5:24은 내가 평생에 걸쳐 할 나의 죽음입니다. 고전15:31에 나오는 죽음이 이 죽음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내가 날마다 죽는 것은 나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 평생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을 따라가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이 죽어야 할 두 가지 죽음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과거의 죽음이요, 또 하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현재적 죽음입니다. 하나는 “죽었다". 다른 하나는 “죽으라”입니다. “죽었다”, “죽으라”, 어떤 것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죽음입니다. 둘 다 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영적인 과정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그럼년 이 둘 중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성경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을 때 우리가 함께 죽었다는 증거로 가득차 있습니다. 먼저 구약의 증거입니다. 구약에서는 매년 유월절마다 대제사장이 두 마리의 양을 잡습니다. 하나는 자기를 위하여 하나는 백성을 위하여 잡습니다. 먼저 자기를 위하여 한 마리를 잡을 때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합니다. “여호아여, 내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 양을 대신 드립니다”. 이 때 양은 대제사장의 죄를 뒤집어 씁니다. 그리고 죽입니다. 양이 죽는 순간 대제사장의 죄도 함께 죽습니다. 또 한 마리를 잡습니다. 또 안수하여 백성의 죄를 그에게 뒤집어 씌웁니다. “여호아여, 백성들의 모든 죄를 이 양에게 전가시킵니다. 양과 함께 백성을 사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양을 먼 광야로 내쫓습니다. 양이 사라지는 순간, 백성들의 죄도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멀리 사라집니다. 본래 사람이 죄를 지었는 데 양이 책임집니다. 소위 동일화의 원리입니다. 양과 사람은 하나님앞에서 같은 존재입니다. 양이 죽을 때 사람도 함께 죽고 양의 죽음으로 결국 사람이 삽니다. 이것이 구약의 “함께”입니다.
신약으로 오면 바라바가 나옵니다. 바라바는 강도며 살인자였습니다. 그가 어느날 예수님과 함께 백성앞에 섰습니다. 유월절이 되면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관습 때문에 빌라도가 묻습니다. “너희는 이 둘중 누구를 놓아주기를 바라느냐? 강도 바라바냐 자칭 하나님의 아들 예수냐?” 사람들이 소리쳤습니다. “바라바요, 바라바는 놓고 예수는 죽이시요”. 결국 빌라도는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예수님이 죽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바라바도 함께 죽었습니다. 예수님 대신 바라바가 살았다면 예수님이 십자가 질 때 바라바는 함께 십자가 진 것입니다. 본래 바라바가 져야 할 십자가를 예수님이 질 때 그 십자가는 “함께” 진 것입니다. 결국 죄없는 예수님이 죽을 때 바라바도 함께 죽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죽은 후 바라바는 살았습니다. 신약성경의 “함께”입니다.
“함께”의 원리를 가르쳐 준 또 하나의 사건이 오른쪽 강도입니다. 여러분은 오른편 강도 이야기를 아십니까? 십자가 좌우에 두 강도가 있었습니다. 왼쪽 강도는 예수님을 비방했고 오른쪽 강도는 예수님을 향해 구원을 호소했습니다. 예수님이 오른쪽 강도에게 말씀했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리고 예수님이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렇다면 둘은 같은 운명입니다. 예수님이 죽을 때 오른편 강도도 함께 죽었습니다. 죽은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갔을 때 그도 역시 함께 올라 갔습니다. 그리고 낙원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함께”입니다.
여러분은 우리와 예수님이 “함께”의 운명을 짊어진 동일한 존재라는 것을 아십니까? 2002년 월드컵은 우리에게 두고 두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우리 선수 11명이 세계 강호들을 상대로 싸웠습니다. 폴란드, 미국, 포르투갈을 차례로 이겼습니다. 11명 선수가 이길 때 대한민국 전체가 환호했습니다. 그러다가 독일에게 질 때 대한민국 전체가 탄식했습니다. 11명 선수 따로 있고 대한민국 국민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11명이 곧 대한민국이었습니다. 11명이 이길 때 대한민국이 함께 이기고 11명이 질 때 대한민국이 함께 졌습니다. 올해는 한일합방으로 나라를 잃은 경술 국치 100주년입니다. 1910년 8월 29일, 이완용과 을사오적이 일본 대표앞에서 한일합방문서에 조인했습니다. 그때 문서에 서명한 사람은 이완용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완용이 나라를 대표하여 서명하자마자 전 조선이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갔습니다. 일본 군대가 들어오고 중앙청에 일장기가 올라갔습니다. 이완용 한 사람이 한 일이 모든 조선 국민들이 한 일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한일합방은 무효다. 우리는 절대 승복할 수 없다”고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945년 연합군의 승리로 일본이 항복했습니다. 그때 조선은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일제시대에 어떻게 살았건 상관없이 한국사람은 모두 해방을 얻었습니다. “나는 일제시대때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어. 나는 해방을 맞을 자격이 없어“ 해도 그는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나라가 망할 때도 함께 망했고 나라가 해방될 때 함께 해방되었습니다. 나라와 백성은 운명을 같이 했습니다. 이것이 ”함께“ 입니다.
성경도 이 “함께”의 원리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고전15:22절 말씀입니다. ”아담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아담과 그리스도는 전 인류를 대표한 존재였습니다. 아담은 우리 죽음의 대표하고 그리스도는 우리 생명을 대표했습니다. 아담이 에덴에서 범죄할 때 우리도 함께 범죄했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을 때 우리도 함께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안식후 첫날, 무덤문을 박차고 부활했을 때 우리도 함께 부활했습니다. 롬6:8절이 그 말씀입니다. 롬6: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두 가지의 ”함께“ 가 있습니다. ”함께“ 죽고 ”함께“ 살았습니다.
이 함께 죽고 함께 산 원리를 보여준 것이 세례입니다. 여러분은 세례 받으셨습니까? 세례는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죽는 성경적 진리를 재현한 것입니다. 세례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두 가지 죽음을 하나의 사건으로 묶어 고백합니다. 롬6:10입니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두 가지 죽음이 있습니다. 한번에 죽는 순간적 죽음이 있고 최종적으로 부활에 이르는 지속적 죽음이 있습니다. 세례는 크게 두 가지 사건입니다. 하나는 물로 들어가고 또 하나는 물에서 나옵니다. 물로 들어갈 때 옷을 벗습니다. 자기를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로 들어갑니다. 히브리 개념에서 강이나 바다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물로 들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로 들어간 장면이나 요단강에 들어간 장면을 보면 압니다. 그들은 홍해바다에 목숨 걸고 들어갔습니다. 죽으면 죽으라 하고 요단강에 들어갔습니다. 초대교회 교부 키릴이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베헤모트라는 용이 물 속에 사는데 그 곳에 내려가셔서 용의 세력을 깨뜨리셨다”.
세례는 단지 물속에 들어가 몸을 적시는 것이 아닙니다. 용이 살고 죽음이 사는 물속에 자신을 빠뜨려 죽이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물이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세례자가 물속에 자기를 맡기면 물이 그를 삼켜 죽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죽음입니다. 그리고 물에서 올라옵니다. 올라오면서 새 옷을 갈아 입습니다. 십자가 성호를 긋고 성령을 상징하는 기름을 머리에 바릅니다. 그리고 성찬에 참여하여 떡과 포도주를 받습니다. 세례는 죽음으로 시작해서 생명으로 마칩니다. 옷을 벗고 물속에 들어감으로 죽고 물에서 나와 새 옷을 입고 성령을 받아 성찬에 참여함으로 삽니다. 골2:12의 말씀이 이 말씀입니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다는 것은 우리가 실제로 그 분이 달린 나무 막대기에 매달린다는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힐 때 우리는 거기 없었고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다는 것은 그 분과 믿음으로 동화되어 그가 죽을 때 우리도 죽고 그가 살 때 우리도 산 것을 말합니다. 이 축복을 저와 여러분은 이미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은 것을 아십니까? 단순히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깨닫고 확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사실을 확신하면 삶의 놀라운 혁명적 변화를 가져옵니다.
죽은 자가 세상을 살립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을 믿고 선포한 사람들입니다. 미국 선교사로 중국에서 오랫동안 선교했던 웟치만 니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는 성경에서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죽으신 것은 알고 있었으나 자신이 여전히 죄가운데 있다는 사실 때문에 매우 괴로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롬6:11을 읽었습니다. ”이와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그때 그 눈에 띈 단어는 ”여기라“라는 단어였습니다. 그 단어를 보는 순간 불연듯 깨달았습니다. ”아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충분치 않구나. 그것을 내가 받아들이고 여겨야 하는구나“. 여긴다는 말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확신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그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소리치고 다녔습니다. “형제님은 제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리고 형제님도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을 아십니까?” 이 믿음이 그를 살렸습니다. 그때부터 그가 위대한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자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자기를 죽었다고 여기고 사는 사람입니다. 내가 살려고 발버둥치니까 세상이 어렵지 내가 죽었다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아브라함 링컨보다 약 100년전에 태어나 노예해방을 위해 일한 죤 울만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노예제도는 성경과 배치된다고 믿고 노예제도 옹호자들과 목숨걸고 싸웠습니다. 그가 정의의 투사로 그 일을 하게 된 데는 사연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가 병에 걸려 병원에 누어 있었습니다. 그때 한 환상을 보았는 데 갑자기 부드러운 음악소리가 들리고 천사들이 나타난 환상이었습니다. 그 천사들이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울먼은 죽었다. 존 울먼은 죽었다“. 울만은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죽다니. 나는 살아 있는데“. 그때 천사들이 날아와 성경을 읽어 주었습니다. 갈2:20이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때 울먼은 자기가 그리스도안에 죽고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미 죽고 다시 살았다면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그가 용기를 갖고 노예해방을 위해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면 두려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살려고 바등대야 두렵지 이미 죽었는 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살려 달라고 애원해야 약하지 죽일테면 죽여봐라 하는 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하나님이 쓰신 사람들은 이것을 믿고 확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프리카 탄자니아에 선교하러 간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가 너무 열악한 선교상황 때문에 낙심하고 의기소침해 있었습니다. 자녀들은 자라가고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갈까 말까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갈2:20을 읽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때 그가 깨달았습니다. “아, 나는 이미 죽었구나. 이미 죽은 사람이 무엇을 두려워 하는가? 죽은 사람이 어디를 가는가? 하나님이 보낸 이곳에서 순교하리라”. 그 정신으로 선교에 열심하여 탄자니아에서 큰 대학을 세웠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능력이 여기서 나옵니다. 내가 살아 있으니 비겁해지고 살아 있으니 놀라고 살아 있으니 약해지지 죽었는 데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재작년인가 건국대학교의 한 의사 부부가 200억이 넘는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습니다. 독실한 크리스쳔으로 평생 번 재산을 아들 딸에게 남기지 않고 몽땅 사회에 환원했습니다. 다만 그 돈이 심장병환자, 소외된 노인, 버려진 고아들을 위해 쓰여지기를 바랬습니다. 국민일보 기자가 찾아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돈을 내 놓으셨습니까?” 그 부부가 딱 한 마디 했습니다. “죽은 자가 뭐 자기 재산이 따로 있나요?”. 이것이 갈2:20절이 말하는 자유입니다. 그 정신 가지면 욕심이 사라집니다. 그 믿음 가지면 자유를 얻습니다. 그 확신 가지면 능력이 생깁니다. 자기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고백하고 확신한 사람은 모든 삶의 분야에서 능력있는 삶을 삽니다. 자기가 죽었으니 욕심이 없고 자기가 죽었으니 트릭도 쓰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면 성공합니다.
솔직히 한번 자신을 돌아 보십시오. 왜 힘듭니까? 다른 말 하지 마세요. 정직해지세요. 자기가 죽지 않고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자주 상처를 받습니까? 다른 사람 이야기 그만 하세요. 내가 죽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이미 그리스도안에서 죽었는 데 그것을 모르고 있거나 그것을 확실히 믿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목회자인 저도 오랫동안 힘들게 살았습니다. 왜 그럴까 많이 고민했으나 답이 없었습니다. 어느날 가까운 데서 답을 찾았습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것이 해답이었습니다. “아, 나는 죽었구나. 그런데 죽은 내가 목회하고 있었구나. 죽었으니 목회의 야망도 버리고 죽었으니 목회의 기교도 버리자. 이제 나는 나 대신 살아 계신 예수님으로 목회하게 하리라”. 그 순간부터 목회가 쉬어 졌습니다. 인생을 쉽게 사는 법을 붙잡으세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매일 매일 외치고 사세요. “나는 죽었다. 나는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죽었다. 그 대신 내 안에 예수님이 산다. 예수님이 주신 은혜와 능력으로 산다”. 이것을 외치고 고백하면 그때부터 세상은 쉬어 집니다. 나는 이미 죽었습니다. 법적으로 나는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의 주인은 오직 예수님입니다. 나는 하늘에 속했습니다. 그 분이 나의 능력입니다. 그 분이 나의 희망입니다. 그 분이 나의 생명입니다. 그 축복을 받기를 바랍니다.
갈2:20(3): 갈2:20, 골3:1-4 2010.9.12(일)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롬6: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롬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롬6: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롬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갈2: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골2:20,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골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딤후2:11,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두 가지 죽음이 있습니다.
십자가에는 두 가지 죽음이 있습니다.
(1) 법적인 죽음(갈2:20)
(2) 육체적인 죽음(갈5:24)
갈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밖았느니라”.
고전15:31,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고전15:22, ”아담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롬6: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죽은 자가 세상을 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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