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기막힌 새벽5. - 김동호 목사
끈 떨어진 연
외국에 나가서 학위를 마치고 돌아온 후배 목사가 전화를 걸어왔기에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거의 6년 가까운 세월을 외국에 나가 처음에는 불가능처럼 느껴졌던 공부를 하나님의 은혜 안에 다 마치고 고국에 돌아왔지만 막상 고국에 돌아오니 자기를 기다리는 자리가 없어서 벌써 몇 달 동안 임지를 결정하지 못하고 지낸다는 것이었습니다. 공부를 하는 동안에는 학위만 마치고 돌아가면 고국에서 일할 자리는 문제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막연히 하고 큰 걱정을 하지 않았는데 막상 돌아와보니 학교에도 자리가 없고 교회도 자리가 쉽지 않아 최근에는 아주 당황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배 목사는 자신의 요즘 심경을 ‘끈 떨어진 연’ 같다는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끈 떨어진 연….얼마나 힘이 들면 자신의 심경을 그렇게 표현하였을까 충분히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원래 나는 그 후배를 개인적으로 잘 알지 못하는데 그가 학교 선배라는 끈(?) 하나를 가지고 나를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큰 기대를 하고 온 것은 아니겠지만 끈을 찾는 심정으로 나한테까지 찾아온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그 마음도 충분히 이해하면서 나는 그 후배 목사에게 내 경험 하나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나는 비교적 교계에서 좋고 튼튼한 끈(?)을 가지고 목회를 시작한 사람이었습니다. 국민학교 1학년 때부터 자라난 교회에서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어 부목사 생활을 하다가 영락교회 부목사로 가게 되었는데 나를 키워주신 모교회의 목사님이 총회장도 역임하시고 교계에서 존경받는 목사님이셨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 한마디는 거의 보증수표와 같은 것이 되곤 하였습니다.
그러던 목사님께서 내가 담임목회를 시작한 지 몇 달도 되지 않아 강단에서 설교를 하다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얼마나 가슴이 철렁하였는지 모릅니다. 물론 목사님이 걱정되어서이기도 했지만 보다 더 큰 이유는 솔직히 말해서 나의 큰 울타리가 무너진다는 느낌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 우리 목사님 지금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건강하셔서 제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 최소한 10년은 저를 더 봐주셔야만 합니다.”
그 기도를 하자마자 그 기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하나님보다 목사님을 더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즉시 다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제가 잘못하였습니다. 제가 하나님보다 목사님을 더 의지하고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목사님을 저의 영적인 아버지와 같이 존경하고 섬기기는 하겠으나 제 목회의 울타리나 기둥으로 의지하거나 이용하지 않겠습니다. 앞으로 저와 저의 목회를 오직 하나님께만 걸고 살겠습니다.”
그 이후로 정말 그런 마음으로 살아왔습니다. 목사님께서 보이지 않는 울타리가 되어 주신 것은 사실이나 그 힘을 인간적으로 이용하려고 하거나 의지하려고 하는 마음을 힘써서 가지지 않았습니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울타리를 늘 바라보면서 그 울타리로 만족하고 그 울타리만의 지하면서 목회 하려고 나름대로 애를 써 왔던 것입니다.
그 믿음과 생각이 옳았습니다. 인간적인 누구의 힘도 이용하지 않았으나 그 힘을 이용한 것보다 더 좋은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 내가 노력한 것 이상으로 훨씬 더 잘 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리고 그것이 다 하나님이 나의 울타리가 되어 주셨기 때문임을 압니다.
위와 같은 이야기를 후배 목사에게 해주면서 지금 끊어졌다고 생각하는 끈은 끈이 아님을 일러주었습니다. 그와 같은 끈은 끊어지는 것이 좋은 것이니 이왕에 잘 끊어진 끈 이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도 해주었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끈이십니다. 기둥이십니다. 울타리이십니다. 그 끈은 절대로 끊어지는 법이 없으며 그 기둥과 울타리는 절대로 무너지는 법이 없습니다. 그것을 다윗은 시편 18편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시 18:2)
다윗은 그 믿음으로 언제나 승리하였으며 성공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18장 1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아멘!
꿈 깬 것 같으리라
결혼 후 몇 년 동안 살림을 아내에게 맡기지 못하고 어머니에게 맡긴 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무녀독남 외아들로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결혼하자마자 가정의 경제권을 아내에게 넘겨주면 어머니의 충격이 너무 클 것 같아서였습니다.
몇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그중 가장 큰 문제는 가을이 되면 일 년 먹을 쌀을 몇가마씩 미리 사서 광에 쌓아 두신다는 것입니다. 겨울과 봄이 지나고 여름이 되기 시작하면 슬슬 쌀에서 냄새가 나기 시작하고 종종 밥 속에서 벌레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께 왜 일 년 먹을 쌀을 미리 사서 이렇게 벌레 나오고 냄새나는 밥을 먹게 하느냐고, 매달 그때마다 쌀을 사시라고 일러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러마 약속하신 어머니는 또 그 다음 가을에도 일 년 먹을 쌀을 사 오셨습니다.
나중에야 나는 어머니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제시대와 6.25전쟁통에, 그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 일 년 먹을 쌀을 쌓아 두고 살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그때의 한을 품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름마다 쌀을 말리고 벌레를 골라내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하시면서도 일 년 먹을 쌀을 몇 가마씩 사다 놓곤 하셨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광에 쌀가마가 그득하면 마음이 든든하고 또 올 한 해는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이 드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열두 개 여전도회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연세가 제일 많으신 제1여전도회가 제일 돈이 많습니다. 회원들의 회비를 아끼고 아껴서 모아 놓으신 돈들이 몇천만 원이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재작년 말에는 그런 돈을 강제로 빼앗다시피(?)하여 개척교회를 시작하는 어느 목사님께 2천5백만 원을 지원해 드렸고 미국 장로교 총회에 채플을 건축하는 데도 만 불을 헌금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도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아직도 제1여전도회에는 숨겨놓은 돈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돈을 모아 놓느냐고 물으면 이 다음에 예배당 지을 때 교회 의자 해 놓으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해는 하지만 그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전도하자고 모은 회비를 전도는 하지 않고 모았다가 그것으로 교회 의자를 해 놓는다는 것은 절대로 옳은 일이 아닙니다. 여전도회의 돈으로는 절대로 교회 의자 못 하시게 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는데 제대로 알아들으셨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전도하자고 낸 회원들의 회비를 그해에 다 쓰지 못하고 남겨두는 것은 직무유기입니다. 그 돈을 쓰지 않았다는 것은 전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 돈으로 전도해서 그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었을 사람이 예수를 믿지 못하고 죽었다면 그 영혼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할 것입니까?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한 일은 교회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쓰라고 건강과 재능과 물질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쓰지 아니하고 자꾸 그것을 모아두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의지하고 더 나아가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명백한 직무유기요 더 나아가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직무유기요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신뢰하고 의지하고 살았으니 불신앙인 것입니다.
나는 어렸을 때 돈을 줍는 꿈을 아주 자주 꾸곤 하였습니다. 집이 넉넉지 못하여 용돈이 늘 궁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길을 가다가 돈을 줍는데 조금 가다보면 또 돈이 떨어져 있고 조금 가다 보면 또 돈이 떨어져 있어서 횡재한 기분으로 돈을 가득 줍는 꿈을 꾸곤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꿈이 깨면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습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데 그때마다 ‘가게에 가서 사탕 하나라도 사 먹고 꿈을 깼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을 하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꿈을 꿀 때는 적당히 돈을 줍다가 정말 가게에 가서 사탕을 사먹기도 하였는데 그런 꿈이라도 꾸게 되면 깼을 때 조금 덜 아쉽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다음에 하나님 나라에 가면 우리들 모두는 아마 다 꿈 깬 것 같을 것입니다. 열심히 벌기는 하였는데 가치 있고 의미 있는 하나님의 일에 한 푼 제대로 써 보지도 못하고 빈손으로 꿈을 깬 것과 같은 아쉬움이 있을 것입니다.
귀머거리 독사
오늘 새벽에 시편 58편을 읽었습니다. 다윗은 이 시편에서 ‘귀머거리 도사’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4절)
예수님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곤 하셨습니다. 귀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귀는 있어도 들을 귀는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히 영적인 귀가 먹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영적인 귀머거리가 되면 사람은 자연스럽게 악인이 됩니다. 악인이 되는 가장 자연스러운 과정은 영적인 귀가 먹기 시작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영적인 귀머거리가 되면 사람은 자연스럽게 악인이 됩니다. 악인이 되는 가장 자연스러운 과정은 영적인 귀가 먹기 시작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롬 10:17)그런데 그 말씀을 듣지 못하게 되니 믿음이 생길 수 없고 믿음이 생기지 않으니 인간은 자연계와 더불어 먹고 마시는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말을 듣지 못하는 농아는 말을 하지 못합니다. 저들의 장애는 성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말을 하지 못합니다. 영적인 귀머거리 역시 의와 진리를 말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58편 1절에서, 너희가 당연히 공의를 말하겠거늘 어찌 잠잠하느뇨‘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적인 농아는 의든 불의든 전혀 말하지 못하나 영적인 농아는 의는 말하지 못하나 불의는 말한다는 면에서 구별됩니다. 의를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의를 말하지 못하는 것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고 불의를 말하는 사람으로 발전하게 된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다윗이 “귀머거리 독사”라고 표현을 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영적인 귀가 먹으면 인간은 누구나 악인이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독과 같은 악을 발하는 독사가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귀가 열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얼마나 우리의 삶에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외국어를 배우려는 학생들은 길거리에 다니면서도 휴대용 녹음기에 리시버를 귀에 꼽고 다니면 자기가 배우려고 하는 외국어를 듣습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공부하고 노력하면 드디어 귀가 뚫리고 입이 열려서 외국어를 듣고 말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외국어를 오래 공부하였다고 하여도 집중적인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외국어를 자유스럽게 듣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학교 아니 초등학교 때부터 그렇게 오랫동안 영어를 공부하고도 영어를 잘 듣지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것이 바로 그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에 말씀에 집중하지 아니하고 듣고 다니면 평생을 공부해도 영어 한마디 변변히 하지 못하는 것처럼 평생 설교를 통하여 말씀을 들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영적인 농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들 주위에는 그와 같은 영적인 농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73년도 처음 모교회에서 유년부 전도사가 아이들에게 설교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는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다 합한것이 유년부라고 하였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에게 설교를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에게 설교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였습니다.
하지만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도 은혜를 받는 설교를 하고 싶었습니다. 생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설교를 하였는데 아이들이 알아듣지 못하고 떠들면 한 주간 내내 괴로웠습니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도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 연구하고 생각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의 입장과 수준에서 성경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아이들도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말씀을 풀어가는 방법들이 꿈속에서 깨달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머리맡에 볼펜과 메모지를 놓고 자곤 하였습니다. 꿈속에서 깨달은 방법으로 설교를 하니 정말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도 은혜를 받았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뿐 아니라 6학년 아이들과 교사들도 같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나는 그때 성경을 깊이 읽고 은혜 받는 법을 터득하였습니다. 한번 눈이 뜨이고 귀가 열리니 다음부터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습니다. 나의 설교는 지금도 쉽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자랑이 될 수는 없지만 나는 비교적 다른 사람들보다 설교 준비를 쉽게 합니다. 성경이 쉽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쉽고 빨리 읽으며 은혜를 받게 된 것이 근데 아이들에게 설교하기 위하여 말씀과 열심히 씨름을 하여 말씀을 보는 눈이 트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적인 귀가 트이고 영적인 눈이 띄어야만 합니다. 건성으로 성전 뜰만 밟고 다니면 귀머거리가 되고 맙니다. 영적인 귀머거리가 되면 영적인 벙어리가 되며 영적인 귀머거리와 벙어리가 되면 자연 악인이 되고 다윗이 말한 귀머거리 독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영적인 귀와 눈이 열리기 위하여 발버둥치는 간절함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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