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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
본문 - 창세기 16장 1 - 14절

본문 - 창세기 16장 1 - 14절(개역개정)

1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3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
4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5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6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7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8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9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10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12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14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유명한 추리소설 작가 아가사 크리스티라는 분이 고고학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기자들이 고고학자와 결혼한 소감을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성에게는 고고학자가 최고의 남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여자가 늙으면 늙을수록 더 관심과 흥미를 갖게 될 것이니까요” 재미있는 대답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늙는 것을 비관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름답게 표현합니다. 잠 16:31에서는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사람이 늙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기도 합니다. 60세에 정년을 하면 적어도 20년을 더 살아야 하는데 노후대책이 되어 있는 사람은 모르지만 노후대책이 되어있지 않은 사람은 그 20년이 힘든 시간일 것입니다. 특히 자식이 없는 사람에게 노년은 더욱 슬픈 시간일 것입니다. 자식 농사 잘 짓는 것 만한 노후대책도 없는 것입니다.
   아브람과 사래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고향을 떠나온 지 10년이 지났습니다. 아브람의 나이는 85세고 사래의 나이는 75세입니다. 그런데 둘 사이에는 아직 자식이 없습니다. 자식이 없다는 것은 사래에게 큰 근심거리였을 것입니다. ‘앞으로 더 늙어질 텐데 자식이 없다면 누가 우리 부부를 봉양할 것인가’라는 생각에 조급해집니다. 그래서 사래가 여러 가지로 궁리를 하다가 몸종 하갈을 통해서 자식을 보기로 합니다. 사래의 말을 들은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을 하였더니 하갈이 임신을 하게 됩니다. 하갈은 임신을 하니 교만해집니다. 교만해진 하갈이 자기 주인인 사래를 멸시합니다. 화가 난 사래가 하갈을 학대합니다. 그 학대가 얼마나 심했던지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을 칩니다.
   도망을 친 하갈이 광야에서 헤매고 있을 때에 샘물 곁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하갈에게 나타납니다. “네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는 중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에게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복종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갈의 씨가 번성하여 그 수를 셀 수 없이 많아지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또 아들을 낳을 텐데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 하갈이 하나님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뜻은 ‘나를 살피시는 살아계신 이의 우물’입니다.

   이 본문의 내용에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몇 가지 교훈을 주십니다.

1. 육신의 생각대로 살지 말아야 합니다(2절).
   사람이 무슨 일이든지 빨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쥴리안 헉슬리라는 유명한 학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한번은 영국의 런던에서 열리는 학술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런던에 한 정거장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기차가 연착되는 바람에 시간이 늦었습니다. 그래서 서둘러 마차에 탄 후 마부에게 부탁합니다. “여보시오 내가 큰 회의에 참석해야 하는데 시간이 늦었소. 빨리 달려가 주시오! 빨리!” 그래서 그 마부가 빨리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가다보니 이상한 곳으로 갑니다. “아니 마부 어디로 가는 것이요?” 그가 깜짝 놀라 물었더니 마부가 대답합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저보고 빨리만 달리라고 하셨지 어디로 가라는 말씀은 해주시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자화상이 아닙니까? 사람들은 열심히 땀 흘려 살고 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에 몰두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방향을 잡지 못하고 열심히만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래는 자기 나이가 75세인데도 자식이 없으니 하갈을 통해서 자식을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사래의 이런 행동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행동이 아닙니다. 육신적인 생각이 만들어낸 행동입니다. 그 육신적인 생각은 사래에게 방향을 잃고 빠른 것만 추구하게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10년 전에 아브람을 부르시면서 세 가지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첫째, 큰 민족을 이루어 주겠다. 둘째,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겠다. 셋째,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다. 여기서 첫 번째 약속이 이루어지려면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반드시 자식을 주셔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에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키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라는 인간적인 생각을 한 것입니다.
   육신적인 생각에 빠진 사래는 구체적이 행동을 하게 됩니다. 하갈을 남편에게 줍니다. 2절을 읽겠습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사래의 말대로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을 하고 하갈이 임신을 하게 됩니다.
   아브람과 사래의 육신적인 행동의 결과로 가정생활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갈이 교만해져서 주인인 사래를 멸시합니다. 사래는 마음에 상처를 받습니다. 그리고 화가 나서 아브람에게 따집니다. 5절을 보니 사래가 아브람에게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아브람과 사래의 관계는 참으로 평화로웠습니다. 사랑하고 복종하는 관계였습니다. 사래는 아브람을 ‘주’라고 부를 정도로 순종적인 생활을 했는데 이 일로 남편에게 대드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마음이 상한 사래는 하갈을 학대합니다. 그 모습을 보는 아브람의 마음이 편했겠습니까? 결코 편안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브람과 사래의 가정이 이전에는 천국과 같았는데 이제는 모든 평화가 깨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하갈이 사래를 피해서 도망을 치는 상황까지 발전합니다.
   아브람과 사래의 육신적인 행동의 결과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갈을 통해서 낳은 아들이 이스마엘인데 이 이스마엘이 쓰라린 역사의 불씨가 됩니다.
   그로부터 14년 후에 사래가 약속의 아들 이삭을 낳습니다. 두 이복형제가 자라면서 형인 이스마엘이 동생인 이삭을 자주 구박합니다. 이를 지켜보던 사라는 결국 하갈과 이스마엘 모자를 사막으로 내쫓아버립니다. 그런데 역사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로부터 4000년이 지난 현재, 아브람과 사래의 육신적인 행동의 후유증은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 간의 피비린내 나는 대결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성경과 코란에 의하면 이삭의 자손이 이스라엘 민족이고 이스마엘의 자손이 아랍민족입니다. 몇 년 전 발생한 9.11 테러사건과 요즘 뉴스를 통해서 자주 접하게 되는 자살 테러는 이삭의 후예들과 이스마엘의 후예들 간의 싸움인 것입니다. 아브람과 사래의 육신적인 행동이 심어놓은 씨앗입니다.
   아브람과 사래의 육신적인 행동으로 인하여 아브람 개인의 신앙에도 큰 고통이 따르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13년 간 침묵하셨습니다. 영적인 사람들에게 가장 큰 고통은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영적인 사람에게는 물질적인 고통보다 하나님의 침묵이 더 힘듭니다. 육신의 질병보다 하나님의 침묵이 더 힘듭니다. 하나님만 함께 하신다는 확신만 있다면 물질적인 어려움도 육신적인 연약함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생활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상관없지만 믿음의 사람들이 육신의 생각대로 살아가면 그만큼 손해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부잣집 주인이 가마꾼들에게 “개가 집을 나갔으니 개를 좀 찾아오너라”고 했답니다. 그러나 가마꾼들은 “주인님, 우리는 가마를 메는 일을 하는 사람이지 개 찾는 심부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거절했답니다. 그러자 주인이 이렇게 지시했답니다. “그래? 그럼 내가 개를 찾을 테니 너희들은 가마를 메라” 그래서 하루 종일 들로 산으로 다니며 찾아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 다음날 또 나갔으나 헛수고만 했고, 사흘째 되는 날까지 찾았으나 힘만 들고 고생만 했습니다. 그제 서야 가마꾼들이 “주인님, 개는 저희가 찾을 테니 주인님은 앉아 계십시오.”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육신의 생각은 사망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육신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영의 생각을 따라가십시오.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살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으면 인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고 말씀하신지 10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루어지지는 않았어도 무슨 증거라도 있어야 할텐데 아무런 증거도 없으니 사래가 인간적인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바라보면 사래가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10년을 기다렸다면 잘 기다려준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 정도의 기다림이 아니었습니다.
   기다림은 믿음의 다른 표현입니다. 사래는 하나님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녀는 아브람과 자신의 나이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틀렸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100세에도 아이를 낳게 하실 수 있는 분인데 사래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조급해하다가 인내하지 못하고 사고를 친 것입니다.
   사람은 조급합니다. 우리의 문제는 너무 급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으면서도 기다리지 못해서 망치는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으면 기다려야 하는데 기다리지 못하고 행동을 합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여러분! 범사에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한 때는 우리가 조급해 한다고 앞당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열매를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가을에 추수할 열매는 봄부터 안달을 한다고 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면 때가 되면 열매를 따게 됩니다.
   아브람에 비해서 이삭은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40세에 결혼해서 20년 동안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처럼 편법을 쓰지 않고 기도하면서 기다렸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한꺼번에 두 아들을 주셨습니다. 이삭 시대에도 아브람의 대처럼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아버지처럼 애굽에 내려가지 않고 참고 그 땅에 머물면서 농사를 지었더니 100 배의 소득을 올렸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우물을 팠습니다. 그 당시 우물은 요즘으로 말하면 큰 기업체를 하나 가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랄 사람들이 이삭의 우물을 막아버립니다. 이삭이 또 다시 우물을 파니 빼앗아버립니다. 아버지 아브라함 같으면 그들과 한 판 승부를 벌였을 텐데 이삭은 아무 소리 하지 않고 우물을 내주었습니다. 이삭은 참고 또 참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삭이 승리하게 하십니다. 창 26장에 이 이야기가 나오는데 창 26장에서만 이삭은 여섯 번이나 우물을 팝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본 그랄 사람들이 이삭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삭을 찾아와서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 ��우리가 분명히 보았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으로 살다가 힘들고 어려워도 끝까지 참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십시오. 하나님께서 사람의 머리로 계산 할 수 없는 기적이 일으켜주실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 받은 약속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도 때때로 환경을 보면 낙심 될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답답합니다. 조급증이 나서 힘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성경말씀을 붙잡고 살아갑니다. 갈 6:9은 말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강철왕 데일 카네기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크게 성공한 사람이지만 젊은 시절에는 가난한 세일즈맨이었습니다. 쉽게 낙심하고 열등감에 빠져 있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림 한 점을 보게 되었습니다. 개펄 위에 덩그러니 놓인 배의 그림이었습니다. 마치 자기 신세를 묘사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 밑에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밀물은 반드시 온다!” 그는 이 말에 큰 감동을 받고 마음을 다져먹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외쳤습니다. “그래, 좋다! 밀물이 오면 나는 큰 바다에 나가리라!” 결국 하나님이 그를 믿음이 있는 부자, 기부금을 가장 많이 내는 부자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아브람과 사래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갈 3:14대로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으면 반드시 지키시는 약속에 신실하신 분입니다. 현재의 썰물로 낙심하지 마십시오. 때가 되면 반드시 축복의 밀물이 옵니다.

3. 사람은 분수를 지키며 질서 있게 살아야 합니다.
   사래의 몸종이었던 하갈이 임신을 하게 되니 자신의 분수를 넘어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인 사래는 임신을 못하고 자기는 임신을 하게 되니 교만해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분수에 맞지 않게 여주인을 멸시하다가 학대를 당하게 됩니다.
   사실 하갈은 사래의 은혜를 입은 여자입니다. 사래는 하갈을 단순히 아이만 낳도록 하지 않고, 아브람에게 정식 아내로 주었습니다. 3절에 보면 하갈을 아브람에게 ‘첩’으로 주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첩’이란 원래 뜻은 ‘아내’, ‘부인’이라는 의미입니다. 일부다처제를 인정하던 고대 사회에서 ‘첩’은 부인의 지위와 신분을 가진 여인을 의미합니다.
   하갈의 신분은 여종에서 갑자기 첩으로 바뀌어졌습니다. 그 당시에는 종은 목숨까지도 주인이 마음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종은 짐이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학대를 받지 않으면서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누구 덕입니까? 누구 덕에 하갈의 신분이 종에서 첩으로 바뀌었습니까? 하갈이 능력이 있어서 그렇게 되었습니까? 행동을 잘해서 그렇게 되었습니까? 머리가 좋아서 그렇게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여주인 사래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래의 은혜를 입어 하갈이 아브람의 첩이 되었고 아브람의 아이까지 임신하게 되니 은혜를 원수로 갚았습니다. 여주인 사래를 깔보고 멸시합니다. 여기 ‘멸시’라는 말의 원래 의미는 ‘작게 보다’ ‘얕보다’는 뜻입니다. 오랫동안 아이가 없는 여주인과 달리 자기가 임신을 하게 되니 하갈이 자기의 분수를 지키지 못했던 것입니다.
   6절에 보니 분수를 지키지 못하고 교만해진 결과 하갈은 사래의 학대를 받습니다. 여기 ‘학대’라는 말은 ‘폭력을 가하다. 함부로 다루다’는 뜻입니다. 출 1:12에 보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애굽의 왕이 다스리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 사람들로부터 학대를 받았습니다. 그 때 쓰여 졌던 단어가 바로 본문 나오는 ‘학대’라는 단어입니다.
   하갈은 사래의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광야로 도망을 쳤습니다. 당시 여종은 어떤 일이 있어도 주인으로부터 도망할 수 없습니다. 만약 도망했다가 붙잡히면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갈은 이러한 위험을 무릅쓰고 더 이상 견디지 못해 광야로 도망을 쳤습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임신을 한 상태로 광야로 도망을 갔겠습니까? 아시다시피 광야에 마실 물이 있습니까? 먹을 양식이 있습니까? 그런데 광야로 도망을 한 것입니다. 그만큼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갈이 학대 받게 된 것은 자업자득입니다. 스스로 분수를 지키지 못하고 교만하게 행동하다가 그 지경이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너무 모르고 교만합니다. 옛날 어느 양반 댁 아가씨가 하녀와 외출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여쁜 아가씨가 길을 걸어가자, 길가에 서있던 도령들이 한마디씩 했습니다. “와- 예쁘다.” 우쭐해진 아가씨가 못 들은 척 하고 하녀에게 물었습니다. “얘, 저 사람들이 뭐라 그러니?” 그러자 하녀가 말했습니다. “저더러 그러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아가씨”
   하갈이 분수를 모르니 8절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하갈을 부를 때 “사래의 여종 하갈아”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분수를 모르고 행동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 귀합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지만 질서는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라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질서를 지키고 분수에 맞게 행동해야 합니다.
   학교에 가면 학생들은 선생님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선생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 안 됩니다. 요즘 채벌이 금지 되면서 교권이 땅에 떨어지고 있습니다. 초등학생들이 덩치가 커지니까 여선생님들을 우습게 보는 사례가 생기고 있습니다. 심지어 학생이 선생님에게 폭행을 가하는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고 하니 이 나라의 장래가 걱정입니다. 적당한 채벌은 있어야 합니다.
   회사에 가면 상사를 존경하고 주 안에서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뒤에서 욕하면 안 됩니다. 상사에게 앞에서 하듯이 뒤에서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남들이 상사 욕한다고 덩달아 욕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세대 차이 때문에 답답한 경우도 있지만 순종해야 합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성경은 교회가 주님에게 복종하듯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말씀합니다.
   교회에서도 자기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교회의 질서는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인 줄 알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개인적으로 다 소중한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교회에서 질서를 지켜야 합니다.
   관계에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경계선을 지켜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하갈은 그것을 지키지 못해서 어려움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도 이 경계선을 넘어섰기 때문에 에덴에서 추방당한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자신의 분수를 알고 질서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4. 하나님은 부족하고 허물투성이인 사람도 살피시는 분입니다.
   광야로 나간 하갈은 임신한 몸으로 뜨겁게 내려 쪼이는 태양아래서 헤매다가 지쳤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보낸 천사가 하갈에게 나타났습니다. 천사가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하갈이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9절 보니 천사가 하갈에게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스마엘에 관한 예언의 말씀을 줍니다.
   하갈은 스스로의 잘못 때문에 학대를 받았고 집에서 도망을 나왔습니다. 하갈을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정말 불상한 여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찾아왔던 것입니다.
   이 때 하갈이 자기는 사람에게는 버림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자기를 버리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직역하면 ‘나를 계속 살펴보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하는 자를 친히 시야에 두시고 살펴보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갈의 깨달음이 우리의 깨달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살피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눈으로 나를 살펴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시다는 사실만으로도 힘을 얻어야 합니다.
   계 5:6에서 그리스도를 어린양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 어린양은 눈이 일곱 개나 됩니다. 그 일곱 눈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의 눈이 일곱 개나 된다는 표현은, 주님은 정확하게 보시는 분시고, 샅샅이 세밀하게 우리의 내용을 보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를 보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믿는 사람들이 어떤 어려움 속에 있어도 그것을 아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 어려움 속에서 함께 하시며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우상에게 절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풀무불 속에 집어 던져집니다. 풀무불 속에 던져질 때는 그들만 있는 것 같았는데 그들이 풀무불 속에 들어간 후에 보니 그 가운데 주님이 계셨습니다. 분명히 풀무불 속에 던져진 사람들은 세 명인데 왕이 보니 네 명이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본 왕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단 3:25)
   풀무불 속에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보셨고 그들에게 찾아오셔서 그들을 보살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머리털 하나 타거나 그슬리지 않고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를 보살펴주십니다. 우리를 절대로 버리지 않으십니다. 시 139:1-5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5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영국의 청교도 가운데 크롬웰이라는 유명한 장군이 있었습니다. 크롬웰 장군은 나라 일이 하도 어렵고 답답해서, 한때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이면 일어나서 기도를 했었습니다. 크롬웰 장군의 부관 역시 크리스천으로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상관인 크롬웰 장군이 밤잠을 자지 못하고 날마다 기도하는 것을 보고, 너무 걱정되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장군님! 기도하시는 것도 좋지만, 잠도 주무시고 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크롬웰 장군은 크게 소리를 지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 잠을 잘 수가 있단 말인가?” 부관은 뜻밖에도 빙그레 웃으면서 “ 장군님, 죄송합니다만,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장군님은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성경의 약속을 믿으시는지요?”, “아 믿지! 믿고 말고”라고 대답하자, 부관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분에게 맡기시고 잠시 주무시지요.” 그런데 이 한마디가 크롬웰 장군의 마음에 부딪혔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비록 상황에 어렵고 힘들어도 두려워하지 않고 믿음으로 극복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살피신다는 믿음으로 담대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언제나 하나님의 시선을 느끼면서 산다면 한부로 말하고 한부로 행동할 수 없을 것입니다.
   1973년 11월 새벽 3시에 있었던 일입니다. 지프차를 타고 조선소 건립하는 것을 돌아보던 정주영 회장이 튀어나온 바위를 피하려다 그만 수심 12미터 바다에 빠졌습니다. 요즘 승용차 같으면 문이 열리지 않아 어렵겠지만 그 지프차는 천으로 되어 있어서 문을 박차고 올라올 수 있었습니다. 기둥을 세우려고 박아 놓은 철근을 용케 붙잡은 정 회장이 800미터를 헤엄쳐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도 정 회장은 구두를 신고 헤엄쳐 나왔습니다. 홀가분하게 구두를 벗고 싶었지만 나중에 사원들 앞에서 더 초라해 보이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도 우리의 삶이 달라지고 옷차림이 달라집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시선을 느끼면서 살아보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살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 운전기사가 정비소에 와서 차를 수리한 다음 영수증을 가지고 와서 말했습니다. “사장님, 여기에 부품을 몇 개 더 교환했다고 써 주세요.”, “안 됩니다. 그렇게 못합니다.”. “그렇게 해주시면 내가 우리 회사에 가서 돈을 더 받아 가지고 사장님께도 나누어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그런 짓은 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러면 나도 좋고 사장님도 좋은데 왜 안 해요?”, “우리는 그런 것 하지 않습니다.”, “다른 정비소는 다 그렇게 해주는데 왜 이 정비소만 안 해줘요?”, “다른 데서는 다 그렇게 해주어도 우리는 안 합니다. 그런 곳으로 가 보세요.” 그러자 운전기사가 “고맙습니다. 사실 나는 운수 회사 사장인데 믿을 만한 정비소를 찾기 위해 일부러 해 본 말입니다. 이제야 내가 원하던 정비소를 찾았습니다. 우리 회사의 모든 차를 여기로 보낼 테니 잘 정비해 주세요.”라고 했답니다.
   우리는 우리를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서 삽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일곱 눈으로 우리를 너무나 정확하게 샅샅이 세밀하게 보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 중에도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보기에는 바보 같이 보이고 미련한 것 같아도 그것이 잘 되는 길인 줄 알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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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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