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가족을 밝히신 예수님! (막3:31~35)
눅2:39을 보면, 갈릴리의 나사렛을 가리켜서 예수님의 “본 동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9:1을 보면, 갈릴리의 해변 마을 가버나움을 가리켜서 예수님의 “본 동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4:13에서 밝히고 있듯이, 예수님이 갈릴리의 나사렛에서 갈릴리의 또 다른 마을 가버나움으로 옮겨가셨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4장을 읽어보면, 예수님이 나사렛을 떠나서 가버나움으로 가신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은 나사렛의 회당에서 이사야 61장에 있는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그리고는 거기에 예언된 메시야가 바로 자신임을 밝히셨습니다. 그러나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불신앙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러자 회당에 있던 나사렛 사람들은 화를 내면서,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산 낭떠러지로 끌고 가서, 예수님을 그 아래로 밀쳐서 떨어뜨리려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기적을 베푸셔서, 그들 가운데로 피하여 지나가셨습니다.
나사렛을 떠나신 예수님은 그 곳에서 조금 떨어진 해변 마을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그 때부터 예수님의 “본 동네”는 더 이상 갈릴리의 나사렛이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갈릴리의 가버나움이 예수님의 “본 동네”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막3:20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막3:21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막1:29을 보면, 시몬 베드로의 집이 나옵니다. 그의 집은 가버나움에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2장을 보면, 사람들이 지붕을 뜯고서 한 중풍병자를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달아 내리는 광경이 나옵니다. 그 때의 장소는 시몬 베드로의 집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이 또다시 집에 들어가셨다고 했습니다. 이 때의 집도 역시 예수님의 본 동네 가버나움에 있는 시몬 베드로의 집이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예수님이 집에 들어가시자, 무리가 다시 몰려왔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은 식사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막1:9 말씀과 같이, 그 때 예수님의 친족들, 곧 그의 가족들은 갈릴리의 나사렛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가버나움의 집에 계시다는 사실과, 또한 그 곳으로 모여드는 무리 때문에 식사할 겨를도 없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들은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당하신 일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님이 괜스레 가버나움에서도 똑같은 일을 당하려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미쳤다고, 쓸데없이 정신 나간 짓을 하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붙들러 가버나움으로 달려왔습니다. 그들은 억지로라도 예수님을 나사렛으로 데리고 가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예수님을 보호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족들이 왔을 때,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에게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사탄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방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이 사탄보다 더 강한 자, 곧 하나님이심을 밝히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본문은 이 뒤를 이어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그의 참 가족이 누구이며, 그의 참 가족이 되는 길은 무엇인가를 밝히셨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차례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육적인 가족들이 등장합니다(31~32절).
막3:31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막2:2을 보면, 예수님이 가버나움의 집에 계실 때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집의 지붕을 뜯고서, 한 중풍병자를 예수님에게로 내려보냈습니다.
이 때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은 너무 많은 사람들 때문에, 쉽게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밖에 섰습니다. 그리고는 사람을 안으로 들여보내서, 예수님이 밖으로 나오시도록 불렀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그들이 예수님에게 가까이 가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들의 마음이었습니다.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던 사람들처럼, 마음만 있었다면 그들은 얼마든지 예수님께 직접 나아갈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대신해서 다른 사람을 안으로 들여보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동생들은 젊었습니다. 힘도 있을 나이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마음만 있었다면, 그들은 다른 사람을 들여보내지 않고서 자신들이 직접 들어갔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들에게는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지금 안에서 하고 계신 일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하던 일을 즉시 중단하고, 자기들과 함께 나사렛으로 돌아가기를 바랐습니다.
요7:5에서 밝히고 있듯이, 아직은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을 믿었다면, 그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도 안으로 들어가서,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을 것입니다.
물론 마리아는 예수님을 믿었을 것입니다. 그는 천사 가브리엘이 전해준 말을 들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남자를 알지 못할 때, 예수님이 그의 몸 속에서 성령님으로 잉태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목자들과 동방 박사들의 증언도 들었습니다.
그러기에 마리아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자기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실 자신의 구주이심을 믿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도 때로는 인간적이고 혈연적인 관점에서 예수님을 대하곤 했었습니다.
예컨대 열두 살 시절의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머물러 계실 때, 마리아는 근심하면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또한 가나의 혼례 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도, 마리아는 걱정을 하면서 예수님을 찾아서 그 사실을 일렀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때에도 마리아는 예수님의 신분과 예수님의 사역을 망각한 채, 인간적이고 혈연적인 관계에서만 예수님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자기가 예수님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데리러 가버나움으로 왔던 것입니다.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몸은 안에 있지만, 마음은 밖에 서있지는 않습니까? 내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겸손히 예수님의 발치에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막3:32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예수님은 앉은 무리에 둘러 쌓여있었습니다. 보냄을 받은 사람이 그들 모두를 헤치고 지나갈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날의 군대식으로 말하면, 그는 어느 지점에서 “앞으로 전달”하는 방식으로 자기의 말을 앞 사람에게 전했을 것입니다.
그의 말은 계속해서 앞으로 전달되어서, 나중에는 예수님 바로 앞에 앉은 사람들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마12:47 말씀처럼, 맨 앞줄에 앉은 한 사람이 예수님에게 그 말을 전했을 것입니다.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여기에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막6:3을 보면, 예수님을 배척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가리켜서 “마리아의 아들 목수”라고 칭했습니다. 예수님을 가리켜 “요셉의 아들 목수”라고 칭하지 않았던 것은 요셉이 이미 죽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막6: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여기에 예수님의 형제들 네 명의 이름과, 예수님의 누이들이 나옵니다. 이들은 모두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 태어난 자녀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들이었던 셈입니다. 그래서 눅2:7을 보면, 예수님이 마리아의 “첫아들”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천주교에서는 마리아의 영원 동정녀설을 주장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일평생 동정녀로 지냈다는 견해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형제들과 누이들이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전처 소생들이었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그들은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형제들과 누이들이 실상은 예수님의 사촌들을 가리킬 수도 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합니다. 이러한 견해들은 마리아를 높이려는 잘못된 태도에서 나왔습니다. 성경에는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눅11:27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눅11:28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여기에 나오는 여자는 마리아를 높이려고 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그는 전형적인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리아를 높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를 높이셨습니다.
이와 같이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라고 해서, 성경은 마리아를 높이지 않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동생들도 높이지를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예수님의 육적인 가족들은 예수님을 미쳤다고 여기면서 예수님의 사역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육적인 가족들도 본시는 우리와 똑같은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들도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를 높여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만 높여야 합니다. 곧이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의 참 가족을 우리에게 소개하십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영적인 가족들이 소개됩니다(33~34절).
그 때의 상황을 다시 한번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밝히 드러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가 외치기를,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밖에서 찾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참으로 당황케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상황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은 그 어떠한 상황도 다 주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황하지도 아니하시고, 난처한 표정을 짓지도 아니하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 때의 상황을 이용하셔서, 사람들에게 중요한 영적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막3:33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왜 예수님이 이와 같은 질문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의 가족들이 우려했던 것처럼, 예수님이 그의 가족조차도 몰라볼 정도로 미쳤기 때문이었습니까? 아니면 그 때 예수님은 기분이 나쁘셔서, 그의 가족을 무시해버리셨습니까?
물론 예수님은 그의 동생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님을 미쳤다고 여기면서, 예수님을 붙들러 온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은 그들을 결코 무시하지는 아니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9장을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의 어머니 마리아를 그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맡기셨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이렇듯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에도 그의 어머니 마리아를 돌아보실 만큼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동생들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예루살렘의 다락방에는 백이십 명 정도의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마음을 같이 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러다가 오순절을 맞이하여, 그들은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행1:14에 의하면, 그 곳에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아우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그 자리에는 여자들도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그 자리에는 예수님의 누이들도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그의 동생들을 다 구원하실 만큼, 그들 모두를 사랑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때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고 물으신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이 그의 가족들을 모른 체하시기 위한 것도 아니었고, 또한 예수님이 그의 가족들을 경멸하시기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질문을 통해서, 육적이고 혈연적인 관계보다 더 중요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과의 영적인 관계입니다. 예수님은 그와 영적인 관계를 맺은 이들을 그의 참 가족으로 여기셨습니다.
막3:34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예수님은 자신의 질문에 스스로 답변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주변에 둘러앉은 자들을 둘러보셨습니다. 그 곳에는 바로 얼마 전에,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둘러앉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12:49을 보면, 예수님이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라고 말씀했습니다. 말하자면 이 때 예수님은 눈으로 제자들을 둘러보시며, 또한 손으로 그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막3:5을 보면, 예수님은 “노하심으로” 바리새인들을 둘러보셨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잔잔한 미소와 함께 그의 제자들을 둘러보셨을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막1:18을 보면, 시몬과 안드레는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또한 막1:20을 보면,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의 아버지 세배대를 배에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또한 막2:14을 보면, 레위는 세관에 앉았다가 그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막10: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막10:30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예수님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자기의 육적인 가족을 버린 자는 그것의 백 배나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육적이고 혈연적인 가족을 잃는 대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영적인 가족들을 새롭게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육적인 가족의 수는 제한적이며, 일시적입니다. 이에 비해 영적인 가족의 수는 무수하며, 영원합니다. 그러기에 육적인 가족보다도 영적인 가족이 더 중요합니다. 뒤에 예수님의 동생들도 이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야고보서를 기록한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이었습니다. 그는 약1:1에서 자신을 가리켜 “예수님의 동생”이라고 부르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고 불렀습니다. 육적 관계보다 영적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그가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다서를 기록한 유다도 예수님의 동생이었습니다. 유다도 유1:1에서 자신을 가리켜 “예수님의 동생 유다”라고 칭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칭했습니다. 유다도 육적인 관계보다 영적 관계가 더 중요함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히2:11을 보면, 예수님은 우리를 그의 형제라고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예수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며, 참 가족입니다.
가족이라고 하면, 어떤 개념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까? 이해입니다. 사랑입니다. 따뜻함입니다. 보살핌입니다. 그리움입니다. 그러기에 찬송가 221장은 예수님의 참 가족들의 모습을 이와 같이 노래합니다. 우리의 모습이 이러해야 합니다.
“주 믿는 형제들 사랑의 사귐은 천국의 교제 같으니 참 좋은 친교라
하나님 보좌 앞 다 기도 드리니 우리의 믿음 소망이 주 안에 하나라
피차에 슬픔과 수고를 나누고 늘 동고동락하면서 참 사랑 나누리
또 이별할 때에 맘 비록 슬퍼도 주 안에 교제하면서 또 다시 만나리.”
셋째로,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되는 길이 설명됩니다(35절).
오늘 본문의 논리적인 순서는 이러합니다. 먼저 예수님의 육적 가족이 등장합니다. 그들이 밖에서 예수님을 찾자, 예수님은 그의 영적인 가족을 소개하시면서 그들이 예수님의 참 가족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은 그의 참 가족이 되는 길을 밝히셨습니다.
막3: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누구든지”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들어갑니다. 또한 여기에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동생들도 포함됩니다. 아울러 여기에는 우리 모두도 다 해당이 됩니다.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이라고 해서, 온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종종 예수님께로부터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사로잡히실 때, 그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을 그의 가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허물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또한 우리의 믿음도 한없이 부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를 그의 형제라고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그의 가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이는 분명 예수님의 놀라우신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바로 이 말씀 속에 한없이 부족한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의 가족이 되었는지 밝혀지고 있습니다. 또한 이 말씀 속에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되는 길이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이란 무엇을 가리킵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어떤 사람을 가리킵니까? 물론 예수님은 여기에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행위를 가리키고 있지는 않습니다.
눅18:11을 보면, 한 바리새인이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는 토색이나 불의나 간음을 행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또한 그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며,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었습니다.
물론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는 세리들이나 창녀들보다도 더 낳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을 그의 가족으로 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세리들이나 창녀들을 그의 가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는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요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을 믿어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에게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예수님의 가족이 되지 못하고, 영원한 멸망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세리들과 창녀들은 달랐습니다. 물론 그들은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는 흠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예수님을 믿어, 예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죄 사함을 받아, 영생을 얻었습니다.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나는 부족하고 허물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나를 택하여, 예수님을 믿게 하시고, 예수님의 가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늘 나를 돌보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천국에 가는 그 날까지 늘 친히 나를 거느리십니다.
이와 같이 놀라운 은혜를 받은 나입니다. 이 은혜를 생각하면서, 위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합시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나와 영원하게 한 가족이 된 나의 믿음의 형제들을 힘써 사랑합시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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