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로 가르치신 예수님! (막4:1~9)
예수님은 가시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시며, 권위 있는 새 교훈을 주셨습니다. 또한 병든 사람들을 고치셨습니다. 더러운 귀신들도 내쫓으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모든 사람들에게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큰 무리가 모여들곤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그들 대부분은 예수님이 전하시는 복음보다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적들에 관심이 많았을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가족들조차도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예수님을 미쳤다고 여기며 예수님을 붙들러 왔습니다. 심지어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는 사탄이 들렸으며, 예수님은 사탄을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라고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서, 그들의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따라서 그들로서는 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를 않았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상황에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까닭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내용을 아주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오늘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또는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이 비유로 가르치신 말씀이 나옵니다. 흔히들 이 비유를 가리켜 “씨 뿌리는 비유,” 또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씨, 또는 씨를 뿌리는 자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오히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여러 종류의 땅에 대해서만 자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세 종류의 좋지 못한 땅과 세 종류의 좋은 땅이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의 초점은 씨나 씨를 뿌리는 자에 있지 않고, 씨가 뿌려지는 땅에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굳이 이 비유에 명칭을 부여한다면, “씨 뿌리는 비유”나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아니라 “여러 땅의 비유”라고 불러야 타당할 것입니다.
이 한 가지 사실만 보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비유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비유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막4:13 또 이르시되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
이 비유를 제대로 알면, 다른 비유들도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다른 비유들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만큼 이 비유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비유는 예수님의 비유들 가운데서 가장 기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9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를 바르고도 분명하게 깨닫기 바랍니다.
첫째로, 비유의 배경입니다(1~2절).
막4:1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닷가 육지에 있더라
여기에 나오는 바닷가는 갈리리 바닷가를 가리킵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갈릴리 호숫가입니다. 그리고 이 곳은 아마도 예수님의 본 동네였던 갈릴리의 한 해변 마을인 가버나움의 바닷가였을 것입니다.
막1:16을 보면, 예수님은 이 곳에서 시몬과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을 그의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막2:13을 보면, 예수님은 이 곳에서 큰 무리를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막3:7을 보면,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의 박해를 피하여 이 곳으로 물러가셨습니다.
아무튼 이제 예수님은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이 때 큰 무리가 예수님에게로 모여들었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크다”라는 형용사가 헬라어에서는 최상급의 형태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몰려든 무리 가운데서는 가장 큰 무리가 이 때 모여들었습니다.
이들 무리는 질서라고는 전연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막3:9에 의하면, 이들은 예수님을 에워싸 밀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명하셨습니다. 또한 막3:20을 보면, 이들은 예수님에게 식사할 겨를도 주지를 않았습니다.
이 때에도 예수님은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 앉으셨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 때 예수님은 그에게로 모여든 무리를 피하시기 위해서 배에 올라서 앉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모여든 무리를 가르치시기 위해서 배에 올라가 앉으셨습니다.
막4:2 이에 예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그들에게 이르시되
비유가 무엇입니까? 쉽게 말하면, 어떤 사실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와 비슷한 다른 사실을 예로 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깊고도 오묘한 영적 진리를 표현하시기 위하여, 살아가면서 일상적으로 접하는 단순한 일들을 예로 드셨습니다.
구약성경에도 비유가 나옵니다. 예컨대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했을 때, 나단 선지자가 그를 찾아와서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한 성읍에 부자와 가난한 자가 있었습니다. 부자에게 어떤 행인이 찾아왔을 때, 부자는 가난한 자의 양 새끼를 빼앗아 잡았습니다.
이 때 나단 선지자는 비유로 말씀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부자가 가난한 자에게 행한 짓을 예로 들어서, 실제로는 다윗이 우리아에게 행한 짓을 가리켰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어떤 사실을 표현하기 위하여 그와 비슷한 다른 사실을 예로 드는 것을 비유라고 합니다.
막3:23을 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을 불러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 그가 사탄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아님을 밝히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 그가 사탄보다 강한 자 곧 하나님이심을 밝히셨습니다.
이 때를 제외하고서는, 지금까지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시지는 아니하셨습니다. 그 동안 예수님은 늘 직설적이고도 직접적인 표현으로 말씀하시며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막4:34을 보면, 이제 예수님은 더 이상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목적에 잘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이중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긍정적으로는, 믿는 자들에게 영적 진리를 분명하게 깨닫도록 하는 것입니다. 부정적으로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 영적 진리를 감추도록 하는 것입니다.
막4:11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막4:12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이미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의 비유란 일상적인 일을 예로 들어서 영적 진리를 표현한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이 주어졌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그들에게는 모든 비유를 해석하시면서, 그 비유들의 영적 의미를 깨우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예수님이 비유로 하신 말씀을 피상적으로 이해할 뿐입니다. 그들은 그 비유에 감추어진 깊은 영적 진리를 깨닫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들에게 비유의 의미를 설명하여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비유가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은혜이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이었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예수님은 말씀과 이적을 통하여, 그가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하고도 충분하게 드러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3:6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작정했습니다. 또한 막3:22 이하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예수님에게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결과 막3:29에서 예수님이 밝히신 바와 같이, 그들은 성령님을 모독하는 자가 되어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는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그들에게 주어질 은혜는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심판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 곧 영적 진리를 더 이상 직접적인 표현으로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오로지 비유로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난 후 제자들만 있을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모든 비유를 자세하게 해석해주셨습니다.
흔히들 예수님은 말씀을 쉽고도 재미있게 전하시기 위해서, 비유를 들어 설명하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영적 진리를 분명하게 하시며, 불신자들에게는 영적 진리를 감추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로, 비유의 내용입니다(3~8절).
막4:3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예수님의 비유, 곧 여러 땅의 비유는 “들으라”는 말씀으로 시작해서, 9절에서 다시금 “들으라”는 말씀으로 끝맺음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로 믿습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비유가 영적 진리를 감추기 위한 심판의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비유가 영적 진리를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은혜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선 여기에 씨가 나오고 또한 그것을 뿌리는 자가 나옵니다. 이들에 대한 말씀은 전혀 없습니다. 이들 앞에는 아무런 형용사도 수식어도 붙어있지를 않습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갔습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흔히들 기대하는 결실에 미치지 못할 경우, 씨에 문제가 있든지 아니면 씨를 뿌리는 자에게 문제가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틀린 생각입니다. 문제는 다른 데에 있습니다. 문제는 땅에 있습니다.
막4: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여기에 첫 번째 좋지 못한 땅이 나옵니다. 그것은 “길 가”라는 땅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시골의 밭에는 울타리가 따로 없습니다. 밭들 사이에 길이 나 있고, 그 길이 양쪽의 밭을 구분하는 경계선의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씨를 뿌리다보면,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길 가는 경작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 위로 사람들이 지나다니기 때문에 단단합니다. 그 결과 길 가에 떨어진 씨는 땅 속으로 파고들 수가 없습니다. 그 씨는 그대로 땅위에 남아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새들이 와서 그 씨를 먹어버립니다. 새들은 농부들을 아주 성가시게 만드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농부들이 허수아비를 세우곤 합니다. 아무튼 씨가 길 위에 떨어지면, 새들이 와서 먹어 버립니다. 아니면 눅8:5 말씀처럼,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밟히고 맙니다.
이와 같이 길 가에 떨어진 씨는 결실할 수가 없습니다. 새들이 먹어버리든지, 사람들에게 밟혀서 부수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이 사실을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막4:5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막4:6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여기에 두 번째 종류의 좋지 못한 땅이 나옵니다. 바로 돌밭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돌밭은 자갈이 많이 섞여있는 땅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씨를 뿌리기 전에, 농부는 쇠스랑이나 써레를 이용하여 크고 작은 돌들을 미리 다 제거하기 마련입니다.
눅8:6을 보면, 똑같은 내용을 가리켜 “바위 위에 떨어지매”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이 경우는 땅 속에 숨어있는 암반 위에 씨가 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암반 위에도 흙이 있습니다. 그러나 흙이 깊지 못하고 얕습니다.
암반 위에 떨어진 씨들은 즉시 싹이 나옵니다. 수분이 암반 밑으로 내려가지 못하니까, 오히려 다른 땅보다 수분이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암반 위에 있는 흙이 얕아서, 태양열도 빨리 받습니다. 그래서 곧 싹이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땅에 떨어진 씨는 즉시 싹이 나서 한 동안은 잘 자랍니다. 뿌리가 밑으로 내려가지 못하는 대신, 모든 영양분이 다 위로만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그렇더라도 이들은 결실하지 못합니다. 뿌리가 제대로 뻗지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여름철에 비가 오지를 않습니다. 따라서 모든 식물들은 뿌리를 통해서, 땅 아래 있는 수분을 흡수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뿌리가 없기 때문에, 여름철의 뜨거운 태양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은 다 타서 말라죽고 맙니다.
예컨대 어느 한 곳의 식물이 주변의 식물보다 더 빨리 성장합니다. 그러면 이것은 좋은 징조가 아니라, 나쁜 징조입니다. 그렇게 빨리 성장한 식물은 뿌리가 없어서, 곧 말라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은 이런 사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막4:7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고
여기에 세 번째 종류의 좋지 못한 땅이 나옵니다. 그것은 가시떨기의 실뿌리가 들어있는 땅입니다. 가시떨기의 실뿌리는 눈에 잘 뜨이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땅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가시떨기는 잡초의 일종입니다. 이스라엘 땅에는 가시떨기가 많습니다. 마28:29에 의하면, 총독의 군병들이 가시관을 엮어서 예수님의 머리에 씌었습니다. 예수님의 머리에 씌어진 가시관이 바로 이 가시떨기로 만든 관입니다. 헬라어로 똑같은 단어입니다.
아무튼 본시 잡초는 번식력이 강합니다. 가시떨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이런 땅에 떨어진 씨는 땅 속에서부터 가시떨기와 생존경쟁을 해야만 합니다. 가시떨기는 땅의 수분과 땅의 영양분을 빼앗아 갈 것입니다.
또한 농부가 뿌린 씨가 싹이 나서 자라더라도, 가시떨기가 그보다 더 빨리 자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가시떨기 때문에, 햇빛이 가리어질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가시떨기에 막혀서, 그 잎이나 가지가 제대로 뻗어나가지도 못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땅에 떨어진 씨도 가시떨기에게 기운이 막혀서, 결국은 결실하지 못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있는 온 무리는 이 말씀도 어렵지 않게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들 모두가 흔하게 경험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세 종류의 좋지 못한 땅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길 가입니다. 아예 싹이 나지 못합니다. 둘째, 돌밭입니다. 싹은 나지만 말라버립니다. 셋째, 가시떨기가 있는 땅입니다. 싹이 나서 추수 때까지 자라기는 하지만, 결실하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단계적으로 진행됩니다. 아예 싹이 나지 못하는 경우에서 시작해서, 그 다음에는 싹은 나지만 자라다가 말라죽는 경우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추수 때까지 자라기는 하지만 결실하지 못하는 경우로 발전됩니다.
그러나 세 경우 모두 다 결과는 똑같습니다. 결실하지 못하기는 매일반입니다. 그러므로 세 종류의 땅 모두 좋지 못한 땅입니다. 곧이어 예수님은 세 종류의 좋은 땅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모두 다 풍성하게 결실하는 땅들입니다.
막4: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좋은 땅”은 앞에 나온 세 종류의 좋지 못한 땅과 다릅니다. 길 가는 흙이 단단합니다. 그러나 좋은 땅은 흙이 부드럽습니다. 돌밭은 흙이 얕습니다. 그러나 좋은 땅은 흙이 깊습니다. 또한 가시떨기가 있는 땅과는 달리, 좋은 땅에는 잡초가 전연 없습니다.
따라서 길 가와는 달리, 좋은 땅에 떨어진 씨들은 싹이 나서 자랍니다. 돌밭과는 달리, 좋은 땅에 떨어진 씨들은 해가 돋아도 타거나 마르지 않고 무성하게 됩니다. 또한 가시떨기가 있는 땅과는 달리, 좋은 땅에 떨어진 씨들은 풍성하게 결실합니다.
물론 좋은 땅이라고 해서, 토질이 다 똑같지는 않습니다. 땅의 토질에 따라서 추수하는 양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삼십 배의 결실을 맺는 땅과, 육십 배의 결실을 맺는 땅과, 백 배의 결실을 맺는 땅으로 나누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그 당시의 농사 기술로서는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은 놀라우리 만치 엄청난 수확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땅의 토질에 따라서 결실하는 정도가 달라진다는 것은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이상과 같이 예수님은 세 종류의 좋지 못한 땅과, 그 반대로 세 종류의 좋은 땅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온 무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 모두가 늘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사실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씨가 길 가에 떨어지면, 새들이 와서 먹어 버립니다. 씨가 돌밭에 떨어지면, 싹이 나더라도 말라죽습니다. 씨가 가시떨기가 있는 땅에 떨어지면, 가시에 기운이 막혀 결실하지 못합니다. 반대로 씨가 좋은 땅에 떨어지면, 토질에 따라서 그에 상응하게 결실합니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래서 어떻다는 것입니까? 도대체 예수님은 무슨 의도로 이 말씀을 하셨습니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해석과 설명을 반드시 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비유의 영적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바로 여기에 예수님의 비유가 가진 이중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가 불신자들에게는 심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비유가 의미하는 바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가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는 모든 비유를 해석하시며, 그 의미를 깨닫게 해주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비유의 결과입니다(9절).
막4:9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비유의 목적이 이중적인 것처럼, 비유의 결과도 이중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실 때, 그 가운데는 들을 귀 있는 자가 있었습니다. 반대로 들을 귀 없는 자도 있었습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서, 영적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들을 귀가 없는 자는 예수님의 비유 안에 있는 영적 진리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의 비유를 하나의 단순하고도 평범한 이야기로만 듣게 될 뿐입니다.
그러면 들을 귀 있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막3:35의 표현을 빌리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입니다. 곧 하나님의 뜻대로 예수님을 믿어,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된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게 됩니다.
반대로 들을 귀 없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뜻과는 달리, 예수님을 배척하는 자들입니다. 또한 무리처럼 예수님에게 오더라도 자신의 이익만을 구하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감추어집니다.
들을 귀가 없는 사람은 비유만을 듣고 그것으로 끝납니다. 영적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이십니까? 그러면 다음 주에도 빠지지 말고 꼭 나오십시오. 예수님이 오늘의 비유를 해석해주시며,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르쳐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우리는 들을 귀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려주십니다. 고전4:2에 있듯이,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입니다. 그러므로 있는 자리에서 언제나 충성스럽게 생명의 말씀을 밝히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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