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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듣는 자세를 강조하신 예수님! (막4:21~25)

듣는 자세를 강조하신 예수님! (막4:21~25)

 

오늘 본문 23절을 보면,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오늘 본문 24절을 보면,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는 이른바 “여러 땅의 비유”가 나옵니다. 크게 나누면 두 종류의 땅이 있습니다. 좋지 못한 땅과 좋은 땅입니다. 좋지 못한 땅은 결실하지 못하는 땅입니다. 반면에 좋은 땅은 결실을 하는 땅입니다.

길 가나 돌밭이나 가시떨기가 있는 땅은 좋지 못한 땅입니다. 길 가는 단단해서 아예 싹이 나지를 못합니다. 돌밭은 어느 정도는 자라지만, 흙이 얕아서 햇빛에 말라죽습니다. 가시떨기가 있는 땅은 계속 자라지만, 가시에 기운이 막혀서 결국은 결실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땅은 마음을 의미합니다. 길 가와 같은 마음은 아예 말씀을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돌밭과 같은 마음은 말씀을 받되, 그저 피상적으로만 감정적으로만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가시떨기가 있는 땅과 같은 마음은 세속적인 자세로 말씀을 받습니다.

히4:12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에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결실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의 마음 자세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어떻습니까? 눅8:15 말씀과 같이, 그는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습니다. 그는 말씀을 지킵니다. 또한 말씀 때문에 시련이 와도, 인내합니다. 그 결과 그는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로 풍성하게 결실을 합니다.

갓난아기들은 본능적으로 젖을 사모합니다. 마찬가지로 벧전2:2 말씀과 같이, 하나님은 영적으로 거듭난 사람에게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사람과 거듭나지 못한 사람 사이에는 말씀을 듣는 자세에 차이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서, 목자를 따라갑니다. 그러나 양은 타인의 음성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양이 타인의 음성을 들으면, 양은 타인을 따르지 않고 도리어 도망합니다.

마찬가지로 참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음성을 압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성도는 언제나 예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듣습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그저 세상의 허탄한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면 이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가를 밝히 깨닫기 바랍니다. 그리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풍성하게 결실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증인의 자세로 들어야 합니다(21절).


하나님의 말씀은 웃고 즐기기 위해서 듣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처세술을 습득하기 위해서 듣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증인의 자세로 들어야 합니다. 생명의 말씀을 받았으면, 생명의 말씀을 밝히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막4:21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여기에 나오는 “그들”은 무리가 아닙니다. 이미 무리는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본문 앞에 있는 10절 말씀과 같이, 그 때 예수님의 곁에는 열두 제자들과 더불어 예수님과 함께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이 말씀의 배경을 문맥적으로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말씀과 이적을 통해서, 자신이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모든 사람에게 분명하고도 충분하게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유대교의 지도자들과, 또한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내릴 결론은 분명하게 정해졌습니다. 예수님에게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는 결론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그들의 운명도 확실하게 정해졌습니다. 그들은 성령님을 모독하는 자가 되어,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는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그들에게 주어질 은혜는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심판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직접적인 표현으로 말씀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오로지 비유로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제자들만 있을 때,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모든 비유를 자세하게 설명해주셨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비유가 예수님을 배척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감추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가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은혜였습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더 풍성하게 알려졌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상황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잘못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자기들도 심판을 선포해야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보아너게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인의 마을을 불로 멸하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틀렸습니다. 심판은 오로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만이 심판의 여부를 결정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해야할 책임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여기서 하나의 비유를 들어서, 그들이 해야 할 사명을 밝히셨습니다.

오늘 본문 21절에 기록된 말씀은 일명 “등불 비유”라고 불립니다. 내용은 간단합니다. 그래서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등불의 목적은 어둠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어둠을 밝혀주는 도구는 등불이 유일했습니다. 

예수님의 “등불 비유”는 두 개의 질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째 질문입니다.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둔 등불은 어둠을 밝히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말”이라 함은 곡식을 담거나, 혹은 곡식을 될 때 사용하는 용기를 가리킵니다. “한 되” 또는 “한 말”이라고 할 때의 “말”입니다.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눅8:16은 “말 아래에 둔다”라는 말씀을 “그릇으로 덮는다”라는 말씀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녁이 되어서 집안이 어둡습니다. 그러면 집안을 밝히기 위하여 등불을 켭니다. 그런데 만일 그 등불을 말 아래에 두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말이 등불을 덮어서, 등불은 집안을 전혀 밝히지 못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등불은 곧 꺼지고 말 것입니다.

평상, 곧 침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에는 바닥에 담요를 깔고 잠을 잤습니다. 그리고 일어나면, 담요를 둘둘 말아서 한쪽에 치워놓았습니다. 만일 등불을 켜서 담요 아래에 두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등불이 꺼지든지, 아니면 등불이 담요를 태우든지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등불을 켜서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 아닙니다. 그와 같이 비상식적인 일을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곧 이어 예수님은 두 번째 질문을 하십니다.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대답은 물론 “예”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등경은 등불을 올려놓는 받침대를 의미합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가져오는 목적은 집안의 어둠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등불은 당연히 등경 위에 올려놓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온 집안을 환하게 비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등불 비유”의 내용은 간단해서,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등불 비유”가 뜻하는 영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등불 비유”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뒤에, 따로 이 비유를 그들에게 해석하시지는 아니하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오늘 본문 앞에 있는 13절에서 예수님은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 수 있겠느냐?”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여러 땅의 비유”를 해석해주셨습니다. 

그들은 “여러 땅의 비유”에 내포된 영적 진리를 분명하게 깨달았습니다. 따라서 같은 유형의 비유일 경우에, 예수님은 따로 설명하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굳이 예수님의 설명이 없더라도, 제자들은 “등불 비유”가 뜻하는 영적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 땅의 비유”에서 씨는 말씀을 뜻했습니다. “등불 비유”에서 등불도 역시 말씀을 뜻합니다. 시119:105을 보면,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제자들은 등불이 말씀을 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씨는 뿌려져야 합니다. 등불은 빛을 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이 공통적으로 뜻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도 전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는 들을 귀가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이것을 충분하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씨가 밭에 뿌려지는 것처럼, 복음은 세상에 전해져야 합니다. 등불이 빛을 내는 것처럼, 생명의 말씀은 밝혀져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언제나 증인의 자세로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 책임이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에게는 증인의 심정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등불이 빛을 낼까봐, 자기가 교회에 다니는 것을 남들이 알아 챌까봐, 그들은 등불을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감추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이십니까? 말씀을 들을 때마다, 증인의 자세로 들으십시오. 어두운 세상에서 자신을 빛으로 나타내십시오.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생명의 말씀을 밝히십시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예수님의 참된 제자입니다.


둘째로, 믿음의 자세로 들어야 합니다(22~23절).


이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그 지혜가 무한하십니다. 유한한 사람의 지혜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잘 이해되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언제나 믿음의 자세로 들어야 합니다.


막4:22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여기서 예수님은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똑같은 내용을 반복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언뜻 생각하면, 이 말씀이 아주 이해하기 어려운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이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숨기거나 감추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금은 그것을 드러내거나 나타낼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을 드러내거나 나타낼 때가 따로 있기 때문에, 지금은 그것을 숨기고 감추는 것입니다.

예컨대 자녀에게 줄 생일 선물이나 명절 선물을 샀습니다. 그러면 그 날이 오기까지는 그것을 숨기거나 감추어둡니다. 그러다가 그 날이 오면, 비로소 자녀에게 그것을 드러내고 나타냅니다. 다시 말해서 그 날이 되어서야, 그것을 자녀에게 선물로 줍니다.

오늘 본문 앞에 있는 11절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외인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드러내거나 나타내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배척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숨기시고 감추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배척하는 자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실 것입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은 사흘만에 살아나실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예수님을 배척하는 자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숨겨지고 감추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분간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드러나고 나타날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가 언제였습니까?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하셨을 때입니다.


막9: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예수님의 세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어떤 산에서, 예수님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언제까지였습니까?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실 때까지였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있을 때까지,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이 듣고 본 것을 숨기고 감추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있고 난 후에는 달랐습니다. 그 때부터는 그들이 듣고 본 것을 드러내고 나타내어야 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있기 전에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예수님이 대속의 죽임을 당하시고, 그 후에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시기 이전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증언은 완전할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충분히 훈련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고 난 후는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그들이 증언할 내용은 완전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충분하게 훈련도 받았습니다.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그 동안 숨긴 것을 이제는 드러내고, 그 동안 감춘 것을 이제는 나타내라고 명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제는 온 천하에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예수님의 지상 명령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의 지상 명령은 각 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에 빠짐없이 등장합니다. 그 가운데서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것은 마태복음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지상 명령은 사도행전 1장에서 또 다시 반복됩니다. 이 말씀도 역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마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마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서, 하나님이 정하신 뜻대로 다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다 계시되어 있습니다. 요10:35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폐하지 못합니다. 그대로 다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잘 납득이 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믿는 마음으로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섭리 가운데 주어진 말씀으로서, 단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대로 다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막4:23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예수님을 떠나간 무리에게는 들을 귀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적과 예수님이 주시는 떡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외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들을 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야 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사람이 거듭날 때, 들을 귀가 주어집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말씀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옵니다. 그는 말씀을 사모합니다. 말씀을 깨닫습니다. 말씀을 믿습니다.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전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이러한 증거가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셋째로, 감사함의 자세로 들어야 합니다(24~25절).


하나님은 우리에게 들을 귀를 주시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게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도록 하십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는 늘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막4:24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먼저 예수님은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이 말씀을 직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너희가 듣는 것을 보라.” 여기서 “보다”는 “알다, 깨닫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너희가 듣는 것을 깨달아 알아라”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들을 귀가 주어졌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더 깊이, 더 많이, 더 풍성하게 깨달아 알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의 크신 은혜가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곧 이어 예수님은 하나의 또 다른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여기서 “헤아리다”는 앞에 나오는 “말”과 같은 그릇으로 곡식의 분량을 헤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비유에 굳이 명칭을 부여한다면, “말의 비유,” 또는 “그릇의 비유”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시고 난 뒤에도, 이 비유를 해석하지 아니하셨습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비유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그래서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헤아리는 그릇으로 우리도 똑같이 헤아림을 받습니다. 예컨대 되로 헤아리면, 되로 헤아림을 받습니다. 말로 헤아리면, 말로 헤아림을 받습니다.

이것을 갈6:7에 있는 말씀으로 표현하면,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을 고후9:6에 있는 말씀으로 표현하면,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 비유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모든 사람이 쉽게 납득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이 비유가 뜻하는 영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 때도 예수님은 이 비유를 해석하지는 아니하셨습니다. 이 비유가 뜻하는 의미도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씨를 뿌리는 만큼 결실을 합니다. 따라서 많은 씨를 뿌리면, 그만큼 더 많은 결실을 합니다. 오늘 본문 24절 끝 부분을 보면, “더 받으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뿌리는 것의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합니다. 하나님이 풍성한 복을 내려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감사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감사한 마음으로 말씀을 전하면 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로 풍성하게 결실을 하도록 역사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이 비유의 의미입니다. 이는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막4:25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예수님은 여기서 영적인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을 말씀하십니다. 예컨대 들을 귀가 있는 자와 들을 귀가 없는 자를 비교해봅시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감사함으로 말씀을 듣습니다. 믿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힘써 말씀을 전합니다.

그는 자연스럽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더 깊이, 더 많이, 더 온전하게 알아갈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삶은 더욱 풍성해질 것입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축복으로, 그에게는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상이 주어질 것입니다.

반면에 들을 귀가 없는 자는 말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했다고 자부합니다. 마7:23에서 예수님은 그를 향해,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내게서 떠나가라”고 밝히 말씀하십니다. 이런 자에게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세에 대해서 강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증인의 심정으로 들어야 합니다. 믿음의 자세로 받아야 합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자세가 잘못 되었으면, 이 시간 바르게 고치도록 합시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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