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를 해석하신 예수님! (막4:10~20)
지난 주일에 우리는 “여러 땅의 비유”를 서론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갔습니다. 여러 종류의 사람이 여러 종류의 씨를 뿌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한 사람이 같은 한 종류의 씨를 뿌렸습니다. 문제는 땅에 있었습니다.
먼저 세 종류의 좋지 못한 땅이 나옵니다. 첫째, 길 가였습니다. 아예 싹이 나지를 못했습니다. 둘째, 돌밭이었습니다. 싹은 나지만, 태양 빛에 타서 말라죽었습니다. 셋째, 가시떨기가 있는 땅이었습니다. 계속해서 자라기는 하지만, 가시에 기운이 막혀서 결실하지 못했습니다.
반대로 세 종류의 좋은 땅이 있었습니다. 첫째, 삼십 배로 결실한 땅이었습니다. 둘째, 육십 배로 결실한 땅이었습니다. 셋째, 백 배로 결실한 땅이었습니다. 좋은 땅은 각기 그 토질에 따라서, 그에 상응하도록 풍성한 결실을 맺었습니다.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그들 모두가 늘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친히 “여러 땅의 비유”를 해석하시며, 그 의미를 설명하시는 내용입니다.
첫째로, 비유에 대한 질문입니다(10절).
막4:10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 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와 더불어 그 비유들에 대하여 물으니
예수님은 배에 올라 앉으셔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평소와는 달리,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셨습니다. 귀신을 내쫓지도 아니하셨습니다. 그저 예수님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사실들만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가운데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예수님은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기도 하시고, 또한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날 따라 예수님은 그와 같은 이적을 베풀지 아니하셨습니다.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의 대부분은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적과 예수님이 주시는 떡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하여, 또한 예수님의 말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큰 무리가 떠나고, 예수님이 홀로 계실 때였습니다. 예수님 곁에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와, 또한 열둘은 아니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남아있었습니다. 열둘은 예수님이 원해서 택하신 자들이었고, 그 나머지는 그들이 원해서 스스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다함께 비유들에 대하여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이 때 그들은 두 가지를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마13:10에 의하면, 그들은 예수님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또한 눅8:9에 의하면, 그들은 비유의 뜻을 물었습니다.
이에 따라 오늘 본문 11절과 12절에서,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를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3절 이하에서, 예수님은 “여러 땅의 비유”를 친히 해석하시며 그 의미를 그들에게 설명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리는 비유에 대해서 묻지도 않고,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참 가족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좋지 못한 땅이었습니다. 그들은 들을 귀 있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10절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관심을 기울이며, 예수님을 떠나지 않고 예수님에게 비유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참 가족이었습니다. 그들은 좋은 땅이었습니다. 그들은 들을 귀 있는 자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예수님을 믿어서,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좋은 땅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들을 귀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밝히시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분명하게 깨닫기 바랍니다.
둘째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입니다(11~12절).
막4:11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여기에 예수님이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신 이유가 나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비유가 가진 이중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밝히기도 하시고, 그 반대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감추어버리기도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주어진 “너희”는 누구입니까? 막3:35 말씀과 같이, 예수님의 참 가족인 사람입니다. 막4:8 말씀과 같이, 좋은 땅에 해당하는 사람입니다. 막4:9 말씀과 같이, 들을 귀 있는 자입니다. 또한 막4:10 말씀과 같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눅8:10 말씀과 같이, 이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이들은 장차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더 자세하게 깨우쳐주셨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감추어진 “외인”은 누구입니까? 앞서 말씀드린 “너희”와는 반대가 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참 가족이 아닌 자입니다. 좋지 못한 땅에 해당하는 자입니다. 들을 귀가 없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관심이 없는 자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마7:6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아니하시고, 또한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아니하셨습니다.
막4:12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이는 구약성경 사6:9과 10절에서 인용된 말씀입니다. 선지자 이사야 때 유다 백성들은 그들의 불신앙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도 그들의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이사야 5장에서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른바 포도원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기름진 산에 극상품의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정성을 다해서 포도원을 가꾸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바라는 것은 좋은 포도였습니다. 그런데 포도나무는 들포도를 맺었습니다. 맛이 쓰며 악취가 나서, 전혀 먹을 수 없는 포도였습니다. 그래서 포도원 주인은 그 포도원을 허물어버리고, 그 포도원을 황폐하게 했습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포도원은 유다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에게 정의와 공의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는 달리, 유다 백성들은 오로지 거짓과 포학을 일삼았습니다.
결국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그들의 땅은 황폐케 되어야 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야 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심판의 말씀을 선포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이사야를 선지자로 부르셨습니다.
이사야 6장 초반부에서, 하나님은 이사야를 성결케 하셨습니다. 그런 후에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나님의 물으심에 이사야는 이와 같이 대답했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그러자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그가 전할 말씀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밝히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12절에서 예수님이 인용하신 사6:9과 10절 말씀입니다. 범죄한 유대 백성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뿐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에게 주어진 사명을 깨닫고, 조심스럽게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주여, 그러면 내가 어느 때까지 주의 심판을 외치리이까?”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유다의 모든 성읍들과 모든 토지들이 황폐하게 될 때까지라고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유다 백성들은 철저하게 멸망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사야 6장의 마지막 절인 13절은 이와 같이 끝맺음을 합니다. 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루터기가 남는 것처럼, 유다 백성들 가운데서도 거룩한 씨가 그 그루터기로 남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에게 포도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유다 백성들에게는 그 비유가 심판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을 배척하는 유대인들에게는 그 비유들이 심판이었습니다.
그 동안 예수님은 말씀과 이적을 통하여, 그가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하고도 충분하게 드러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에게 사탄이 들렸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죽여야한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따라서 이제 더 이상 그들에게 주어질 은혜는 없습니다. 은혜의 문은 완전히 닫혀버렸습니다. 그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직 심판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더 이상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직접적인 표현으로 말씀하시지 않고, 오로지 비유로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멸망당할 유다 백성들 가운데, 거룩한 씨가 그루터기로 남아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했지만,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소수의 사람들이 남아있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예수님의 비유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우치는 은혜였습니다.
마13:16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눈은 봄으로, 우리의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얻게 된 축복과 특권이 너무나도 큽니다. 이 놀라우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말씀에 담겨진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힘써 배워나가도록 합시다.
셋째로, 비유에 대한 해석입니다(13~20절).
막4:13 또 이르시되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
예수님은 비유를 해석하시기 앞서 이 비유의 중요성에 대해서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를 알지 못하면, 다른 비유들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이 비유를 바르게 이해해야만, 다른 비유들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이 비유는 중요하면서도, 예수님의 비유들 가운데 가장 기본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비유가 의미하는 바를 바르게 잘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비유를 올바르게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막4:14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여기에서 “뿌리는 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습니다. 물론 일차적으로는 예수님이 말씀을 “뿌리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서 말씀을 “뿌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누구라도 말씀을 전하는 자는 모두 “뿌리는 자”에 해당합니다.
뿌리는 자가 뿌리는 것은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눅8:11에 의하면,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여러 땅의 비유”에 나오는 씨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뿌리는 자가 뿌려야 할 씨는 정해져 있습니다.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씨를 뿌리는 자는 오로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만을 뿌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변경할 수도 가감할 수도 없습니다. 만일 사람들의 가려운 귀를 긁어주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바꾸면,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다른 복음입니다. 바울은 갈1:9에서,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강하게 경고하면서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롬10:17 말씀과 같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기 때문입니다. 또한 벧전1:23 말씀과 같이,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은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전도를 한 후에, 가시적인 효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낙심합니다. 그래서 뿌리는 씨에 문제가 있든지, 아니면 뿌리는 방법이나 기술에 문제가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면서 무슨 특별한 훈련이라도 받아야 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뿌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막4:27 말씀과 같이, 우리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다시 말해서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가운데, 씨가 나서 자랍니다. 그 이유는 고전3:6과 7절에서 밝히고 있듯이, 하나님이 자라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막4:15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이미 말씀드린 대로, “여러 땅의 비유”에 나오는 “씨”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뿌리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할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땅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여러 종류의 땅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오늘 본문에 “마음”이라는 단어가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마13:19은 기록하기를,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눅8:12은 기록하기를,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나오는 “땅”은 사람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씨에 있지 않습니다. 씨를 뿌리는 자에게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땅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사람의 마음 상태가 문제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길 가는 어떠한 마음입니까? 길 가는 경작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 위로 사람들이 지나다니기 때문에 단단합니다. 마찬가지로 길 가는 완고하고 완악한 마음, 굳을 대로 굳은 마음을 가리킵니다.
길 가에 뿌려진 씨는 땅 속으로 파고들지 못하고, 그대로 땅위에 남아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새들이 와서 먹어버립니다. 마찬가지로 길 가와 같은 마음에 뿌려진 말씀은 그 마음속으로 파고들지 못합니다. 그러면 사탄이 즉시 와서 말씀을 빼앗아버립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완악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수록,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고 이를 갈았습니다. 그러더니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요8:44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그들은 그들의 아비 사탄에게서 났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들의 아비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멸망의 자식이 되어,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막4:16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막4:17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돌밭은 암반 위에 있는 땅을 의미합니다. 암반 위에는 수분이 고여있습니다. 흙도 얕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떨어진 씨는 곧 싹이 납니다. 또한 영양분이 위로만 올라가기 때문에, 한 동안은 잘 자랍니다. 그러나 뿌리가 없기 때문에, 결국은 햇빛에 타서 말라죽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돌밭은 어떤 마음을 가리킵니까? 한 마디로 경박한 마음, 깊지 못한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은 감정에 쉽게 좌우됩니다. 그래서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기는 합니다. 그리고 한 동안은 남들보다도 더 뜨겁게 잘 믿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기쁘거나 감동이 된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을 받은 증거가 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마5:4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또한 약4:9도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바리새인처럼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며 기뻐하는 자에게는 구원이 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리처럼 애통하는 심정으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자에게 구원이 임합니다. 물론 우리가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기쁨 자체가 구원의 증거는 될 수 없습니다.
말씀을 전할 때, 사람의 감정에 호소하지 맙시다. 사람의 감정은 하루에도 수십 번 변하기 떄문입니다. 감정에 따라 말씀을 듣는 사람은 “즉시” 기쁨으로 말씀을 받기는 합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인한 환난이나 박해가 오면, 그 때도 “곧,” “즉시” 넘어지고 맙니다.
요한복음 6장을 보면, 예수님이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그러자 그 다음 날도 많은 사람들이 기쁨으로 예수님에게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그 날도 예수님이 그들에게 주실 떡을 바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떡을 주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생명의 떡에 대해서만 말씀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자신의 죽으심에 대해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자 요6:66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나가 버렸습니다.
그들은 바로 돌밭과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말씀으로 인하여 그들이 받을 환난이나 박해를 생각하자, 예수님의 말씀이 더 이상 기쁘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반면에 고린도후서 12장에 나오는 사도 바울을 생각해봅시다. 그의 육체에는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세 번이나 간절하게 주께 간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육체에 있는 가시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때 바울은 그의 육체에 가시가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약함을 오히려 감사하며, 기뻐하며, 자랑했습니다. 돌밭과 같이 감정에 좌우되는 얕은 마음이 되지 맙시다. 말씀을 붙들고 모든 환난과 핍박을 이겨내는 깊은 마음이 됩시다.
막4:18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막4:19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어떤 땅에는 가시떨기의 실뿌리가 남아있습니다. 이런 땅에 떨어진 씨는 계속해서 가시떨기와 생존경쟁을 해야 합니다. 비록 싹이 나서 자라더라도, 가시떨기에 막혀서 잎이나 가지가 제대로 뻗지를 못합니다. 그 결과 추수 때가 되어도, 결국은 결실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가시떨기의 땅은 어떤 마음을 가리킵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이중적인 마음입니다. 마6:24 말씀의 표현을 빌리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또한 약1:8 말씀의 표현을 빌리면, 어느 한 곳에 정함이 없는 두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에 뿌려진 말씀의 결과는 어떠합니까? 오늘 본문 19절에서 밝히고 있듯이, 마음속에 있는 온갖 세상적인 생각들과 욕망들이 가시떨기의 역할을 합니다. 그 결과 이 곳에 뿌려진 말씀은 그러한 것들에 기운이 막혀서, 아무런 결실을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 넘긴 가룟 유다가 그러했습니다. 딤후4:10에서 보는 대로, 이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린 데마가 그러했습니다. 또한 마19:22에서 보는 대로,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면서 예수님을 떠난 부자 청년이 그러했습니다.
약4:4 말씀과 같이,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요일1:15 말씀과 같이, 세상을 사랑하면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마6:33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합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더하실 것입니다.
막4:20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여기에 좋은 땅이 나옵니다. 흙이 단단한 길 가와는 달리, 좋은 땅은 흙이 부드럽습니다. 흙이 얕은 돌밭과는 달리, 좋은 땅은 흙이 깊습니다. 가시떨기가 있는 땅과는 달리, 좋은 땅에는 전연 잡초가 없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좋은 땅은 어떤 마음을 가리키겠습니까? 부드러워서 말씀을 잘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감정에 따라서 말씀을 피상적으로 받지 않고, 말씀을 깊이 있게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하여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물론 저절로 좋은 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땅은 가만히 내버려두면, 자연스럽게 좋지 못한 땅이 됩니다. 따라서 좋은 땅을 얻기 위해서는, 땅을 경작해서 흙을 부드럽게 만들어야 합니다. 땅속에 있는 암반을 제거해야 합니다. 가시떨기와 같은 잡초도 없애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절로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이 되지는 않습니다.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을 만들어야 합니다. 물론 그것이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의 의지로는 될 수가 없습니다. 오직 그 일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가 있습니다.
신34:6 말씀과 같이, 우리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시51:10에서 다윗이 하나님께 간구했던 것처럼,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옵소서”라고 우리도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정하게 하셔서,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지저분한 것들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그 결과 우리의 마음은 좋은 땅이 되어서, 우리에게 뿌려진 말씀이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로 결실할 것입니다.
여기에 세 종류의 결실이 나옵니다. 삼십 배의 결실과 육십 배의 결실과 백 배의 결실입니다. 그 당시의 일반적인 결실은 7.5 배를 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들 세 종류의 결실은 모두 다 기대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수확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의도는 삼십 배의 결실을 맺은 사람은 육십 배의 결실을 맺도록 하고, 육십 배의 결실을 맺은 사람은 백 배의 결실을 맺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맡기신 은사는 서로 다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각각 그 재능대로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두 달란트를 받은 종은 두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은 다섯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두 종에게 똑같은 칭찬을 했습니다. 그리고 두 종 모두를 똑같이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두 종 모두가 주인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똑같이 주인에게 충성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의도는 무엇입니까?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는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이 있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삼십 배, 또는 육십 배, 또는 백 배와 같이 놀랍고도 엄청난 역사를 행하신다는 뜻입니다.
그 당시에 예수님을 배척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길 가나, 돌밭이나, 가시떨기가 있는 땅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 제자들을 통하여, 예수님을 믿는 자의 수는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 등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먼저 나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나의 마음이 길 가나 돌밭이나 가시떨기가 있는 땅과 같아서는 안 됩니다. 결실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은 좋은 땅과 같아서, 풍성하게 결실하기 바랍니다.
아울러 부지런히 씨를 뿌립시다. 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합시다. 더욱 힘써 생명의 말씀을 밝힙시다. 더 많은 씨를 뿌릴수록, 좋은 땅에 떨어질 확률은 그만큼 더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그 나머지는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하나님이 그것들을 자라나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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