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능력을 밝히신 예수님! (막4:26~29)
오늘 본문의 말씀을 가리켜서, 흔히들 “자라나는 씨의 비유”(The Parable of the Growing Seed)라고 부릅니다. 이 비유는 마가복음에만 유일하게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말씀의 능력을 우리에게 밝히셨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는 이중 목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가 예수님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감추어버리는 심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더욱 풍성하게 알려주는 은혜였습니다.
마가복음 4장은 “여러 땅의 비유”로 시작합니다. 이는 비유 중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들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여러 땅의 비유”를 통해서,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까닭을 밝히셨습니다.
그 다음에 “등불 비유”와 아울러 “그릇 비유”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이 두 비유를 통해서, 말씀을 듣는 자세를 강조하셨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는 증인의 자세로 들어야 합니다. 믿음의 자세로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감사함의 자세로 들어야 합니다.
그 뒤를 이어서,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자라나는 씨의 비유”가 나옵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싹이 납니다. 잘 자랍니다. 그리고 풍성하게 결실을 합니다. 그 결과 씨를 뿌린 사람에게 추수의 기쁨을 안겨줍니다.
이들 비유들의 논리적인 순서는 이러합니다. “여러 땅의 비유”처럼,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등불 비유”와 “그릇 비유”처럼, 우리는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자라나는 씨의 비유”처럼, 말씀이 스스로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면 이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 시간 말씀의 능력을 다시 한번 분명하게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충실한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말씀에는 생명력이 있습니다(26~27절).
막4:26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예수님은 이 비유를 “하나님의 나라는”하면서 시작하셨습니다. 말씀의 능력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성장하며 완성되어 갑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기 쉽게 설명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세 개의 명사, 곧 사람과 씨와 땅이 등장합니다. 그러면 이 세 가지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습니까? 다시 말해서 사람과 씨와 땅, 이 세 가지 중에서 오늘 본문의 비유가 강조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선 오늘 본문에서 사람이 하는 역할은 단 두 가지뿐입니다. 씨를 뿌리는 것과 추수하는 것입니다. 물을 주는 일, 잡초를 뽑기 위해 김을 매는 일, 거름을 주는 일 등등은 다 생략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사람을 강조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은 땅을 강조합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는 “여러 땅의 비유”처럼, 여러 종류의 땅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오직 한 가지의 땅만 나올 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땅도 아닙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사람도 아니고 땅도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씨가 싹이 나고, 자라서, 결실을 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오늘 본문은 씨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가리켜서, “자라나는 씨의 비유”라고 부릅니다.
오늘 본문 앞에 있는 14절을 보면, 예수님은 “여러 땅의 비유”를 이와 같이 해석하셨습니다.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요.” 그러니까 씨는 말씀을 뜻합니다. 뿌리는 사람은 말씀을 전하는 자를 뜻합니다. 그리고 땅은 말씀을 듣는 사람의 마음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와 같은 사실을 이미 깨달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에는 비유의 내용만 나올 뿐, 비유에 대한 해석은 따로 없습니다. 굳이 예수님의 설명이 없더라도, 그들은 이 비유가 의미하는 바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오늘 본문 전체가 강조하는 바는 씨에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26절이 밝히고 있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에서 시작됩니까?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리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을 전하는 일에서 시작이 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이 롬10:14에서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하나님의 나라는 말씀을 전파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적으로 힘써 말씀을 전파해야 합니다.
막4:27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립니다. 그런 후에 그가 하루 온종일 그 곳을 지키며 앉아있지는 않습니다. 밤이 되면 잠을 잡니다. 낮이면 잠에서 깹니다. 물론 필요에 따라서 때로는 물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김을 매면서 잡초를 뽑기도 합니다.
그런 중에 씨가 싹트고 자라기 시작합니다. 물론 씨를 뿌린 사람이 씨를 나게 하고 자라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바와 같이, 씨를 뿌린 사람은 어떻게 싹이 트고 자라는지를 알지도 못합니다.
과학자들이 인조 콩을 만들었습니다. 자연산 콩과 크기도 같고, 모양도 같고, 성분도 전혀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땅에 심고, 최적의 환경을 부여했습니다. 그러나 인조 콩은 싹트지 않았습니다. 그 속에 생명이 없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애굽의 피라미드에서 곡식의 씨들이 들어있는 항아리가 발굴되었습니다. 그 씨들은 수천 년이 지난 것들이었습니다. 좋은 땅에 그 씨들을 심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씨들은 싹이 터서 자라더니 결실을 했습니다. 그 속에 생명이 있었던 것입니다.
씨가 나서 자라는 것은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히4:12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역사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벧전1:23을 보면, 우리가 거듭난 것은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다고 밝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생명을 줍니다.
행7:60을 보면, 스데반이 “이 말을 하고 자니라”고 했습니다. 스데반은 말씀을 전한 후에, 돌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전한 말씀은 사울이라는 청년의 마음에서 싹이 나고 자랐습니다. 결국 말씀은 사울을 거듭나게 해서, 그를 위대한 사도로 만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씨가 싹틔우고 자라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고전3:6 말씀과 같이, 사람은 심고 물을 줄뿐입니다.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결과에 대해서 걱정하지 맙시다. 우리는 열심히 씨를 뿌리면 됩니다.
씨가 좋은 땅에 떨어지면, 저절로 싹이 나서 자랍니다. 씨에는 생명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말씀을 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말씀 자체가 살아 역사합니다. 말씀에는 생명이 있으며, 또한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생명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말씀에는 성장력이 있습니다(28절).
막4: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여기서 예수님은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은 열매를 맺는 과정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가지를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들 수가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씨”가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애굽의 피라미드에서 발굴된 항아리 속의 씨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수천 년 동안, 그 씨들은 항아리 속에서 씨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씨를 땅에 뿌리니까, 비로소 그것들은 자라서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와 같이 씨는 땅에 뿌려져야만 열매를 맺습니다.
역으로 땅에 씨가 뿌려지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아무리 좋은 땅이더라도, 땅 자체로는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좋은 땅에도 씨가 뿌려져야만 합니다. 그래야 씨가 잘 자라서 열매를 맺습니다. 씨에 있는 성장력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의 “땅”이란 땅과 그 곳에 뿌려진 씨를 포함해서 일컫는 말씀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스스로 열매를 맺기까지 계속해서 자랍니다. 왜냐하면 씨가 좋은 땅에 뿌려지면, 그 씨 안에 내재해 있는 성장력이 발휘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의도는 무엇입니까? 씨를 뿌리는 사람이 열매를 맺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땅이, 곧 땅에 뿌려진 씨가 열매를 맺기까지 스스로 자라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씨에는 창조주 하나님이 주신 성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이 심었던 것처럼, 우리도 말씀을 전할 따름입니다. 아볼로가 물을 주었던 것처럼, 우리도 기도하며 사랑으로 보살필 따름입니다.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이와 같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사람의 힘이나 노력으로 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전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예비하신 착하고 좋은 마음이 있어서, 말씀이 그 안에서 열매를 맺기까지 저절로 자라게 됩니다.
곧 이어 예수님은 열매를 맺기까지의 과정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씨가 나서 성장하는 과정을 세 단계로 요약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싹입니다. 다음에는 이삭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강조하시는 점은 무엇입니까? 씨에 있는 성장력입니다. 씨가 좋은 땅에 뿌려지면, 그 씨는 계속해서 자랍니다. 그 씨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 되기까지 잠시도 멈추지 않고 계속하여 성장합니다.
물론 씨가 자라나는 과정을 우리의 눈으로는 감지할 수는 없습니다. 그만큼 서서히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 될 때까지 씨는 중단 없이 자랍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에는 성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착하고 좋은 마음에 전해지면, 말씀은 계속해서 성장합니다. 처음에는 싹을 냅니다. 다음에는 이삭을 냅니다.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 되게 합니다.
빌1: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이와 같이 하나님이 시작하신 것은 하나님이 친히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에는 성장력이 있어서, 싹이 나면 다음에는 이삭을 내고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 되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씨를 뿌리는 사람이 열매를 맺게 한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열매를 맺어보겠다고 이런 훈련도 받아보고, 저런 훈련도 받아봅니다. 또한 이런 방법도 써보고, 저런 방법도 써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생각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스스로 열매를 맺기까지 자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생명력이 있고, 성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전해야 할 것은 나의 이야기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람의 말에 생명력이 있고 성장력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해야 할 것은 오직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열심히 말씀을 전하지만, 열매가 맺히지를 않습니까? 낙심하지 맙시다.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습니다. 단지 열매를 맺기까지, 다소의 시간이 걸릴 뿐입니다. 그리고 성장하는 과정이 눈에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해봅시다. 요6:63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생명의 말씀을 힘써 밝히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너무나도 많은 저항과 장애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배척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작정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그의 열두 제자들 가운데 하나가 그를 배신할 것과, 나머지 제자들도 모두 다 그를 버릴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계속해서 혼신의 힘을 다하여 말씀으로 그의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과연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 안에서 싹이 나고, 이삭이 되며,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나라는 점차 커져서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고도 바르게 전하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자라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역사하면서,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 되기까지 계속해서 자라날 것입니다.
셋째로, 말씀에는 결실력이 있습니다(29절).
막4: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씨에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씨가 좋은 땅에 뿌려지면, 그 씨는 싹을 틔웁니다. 또한 씨에는 성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씨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 되기까지 계속해서 성장합니다. 그러나 씨는 싹이 나서 끊임없이 자라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씨에는 가장 중요한 결실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 되면, 씨는 더 이상 자라지를 않습니다. 그 대신 열매를 익게 합니다.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리는 이유는 씨에 있는 결실력을 궁극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댑니다. 낫을 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추수하기 위함입니다. 오랫동안 이 때를 기다려왔습니다. 그러므로 지체할 이유가 없습니다.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고 추수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낫을 대는 이가 누구입니까? 논리적으로 보아서 가장 자연스러운 대답은 바로 오늘 본문 26절에 나오는 사람, 곧 씨를 땅에 뿌린 사람일 것입니다. 물론 그가 직접 낫을 댈 수도 있고, 또는 일꾼들을 시켜서 낫을 댈 수도 있습니다.
이러하든지 저러하든지 씨를 뿌린 사람에게는 추수의 기쁨이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농부는 씨에 결실력이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약5:7 말씀과 같이, 농부는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보면서 추수할 때까지 길이 참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우리는 단지 말씀을 전할뿐입니다. 나머지는 하나님이 하십니다. 말씀이 스스로 살아 역사하며, 말씀이 스스로 성장하며, 말씀이 스스로 열매를 맺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말씀을 전한 우리에게 추수의 기쁨을 안겨주십니다.
시126: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시126: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씨를 뿌리면, 뒤에 가서 단을 거두게 됩니다. 씨에는 생명력이 있고, 성장력이 있고, 결실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울면서라도 씨를 뿌려야 합니다. 추수할 때는 씨를 뿌린 자의 눈물이 웃음으로, 또한 슬픔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에도 생명력이 있고, 성장력이 있고, 결실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울면서라도, 눈물을 흘리면서라도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수고를 잊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반드시 추수의 기쁨을 허락하십니다.
예컨대 우리가 어떤 사람을 전도했습니다. 믿음의 싹이 나서, 그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의 믿음이 자라더니, 그가 받은 직분에 충성을 다합니다. 이제는 영적으로 성숙해서, 곧잘 다른 사람을 전도합니다. 그의 모습을 지켜보는 우리에게는 큰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에게서 전도를 받은 사람도 똑같은 과정을 거칩니다. 믿음의 싹이 나고, 자라나서, 열매를 맺습니다. 이러한 식으로 우리가 뿌린 말씀은 삼십 배로, 육십 배로, 백 배로, 점차 그 열매를 더해갑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나라는 계속해서 확장되어 갑니다.
그러면 장차 우리는 그리스도의 날에, 하나님께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받게 됩니다. 또한 단12:3에 약속된 바와 같이, 우리는 하늘의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게 됩니다. 바로 이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주어질 추수의 기쁨입니다.
오늘 우리는 “자라나는 씨의 비유”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았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은 말씀의 능력을 밝히셨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에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에는 성장력이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에는 결실력이 있습니다.
이제 말씀의 능력을 아셨습니까? 그렇다면 시19:10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하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게 여깁시다. 그리해서 우리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늘 충만하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말씀의 능력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고후2:17 말씀과 같이, 세상의 허탄한 이야기로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만들지 맙시다. 오직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만을 순수하게 전합시다. 그리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는 일에 귀하게 쓰임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기를 바라십니까? 그렇다면 딤후4:2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합시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힘씁시다. 그리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추수의 기쁨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십니까? 그럴지라도 갈6:9 말씀처럼, 포기하지 맙시다. 때가 이르면 거둡니다. 낙심하지 말고, 더욱 힘써 말씀을 전합시다. 그리해서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으로 풍성하게 거두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살고 있습니다. 이 어두운 세상에 생명의 말씀을 밝히면서, 우리 자신을 빛들로 나타냅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셔서,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해서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열매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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