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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소망을 말씀하신 예수님! (막4:30~34)

소망을 말씀하신 예수님! (막4:30~34)

 

오늘 본문에는 이른바 “겨자씨 비유”(The Parable of the Mustard Seed)가 나옵니다. 비유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겨자씨는 매우 작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땅에 심으면, 아주 크게 자라납니다. 그래서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을 만큼 됩니다.

예수님은 “겨자씨 비유”를 들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작게 시작합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아주 커집니다. 욥8:7의 표현을 빌리면,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은 미약하지만 그 나중은 심히 창대하게 됩니다. 

마가복음 4장에는 여러 비유가 나옵니다. 크게 다섯 개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모든 비유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들 비유들을 차례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논리적인 연결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맨 먼저 “여러 땅의 비유”가 나옵니다. 길 가나 돌밭이나 가시떨기가 있는 땅에 떨어진 씨는 결실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등불 비유”가 나옵니다. 우리는 세상의 등불이 되어, 생명의 말씀을 밝혀야 합니다. 비록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더라도, 우리는 힘써 온 세상에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곧 이어 “그릇 비유”가 등장합니다. 작은 그릇 만큼 뿌리면 작은 그릇 만큼 적게 거둡니다. 그러나 큰 그릇 만큼 뿌리면 큰 그릇 만큼 많이 거둡니다. 말씀을 전하는 만큼 하나님의 나라는 커지기 때문에, 우리는 힘써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 뒤를 이어서 “자라나는 씨의 비유”가 나옵니다. 씨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에도 생명력과 성장력과 결실력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전한 말씀은 스스로 살아 역사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계속해서 자라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겨자씨 비유”가 등장합니다. 겨자씨 한 알처럼, 하나님의 나라도 아주 작게 시작합니다. 그러나 겨자씨가 자라나서 크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도 점점 자라서 나중에는 아주 커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겨자씨 비유”의 내용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이 시간 예수님이 주시는 소망이 우리 가운데 넘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나라는 아주 작게 시작합니다(30~31절).


막4:30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예수님은 두 개의 질문으로 “겨자씨 비유”를 시작하십니다. 첫째 질문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입니다. 둘째 질문은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입니다. 요약하면 “어떻게”와 “무엇으로”입니다. 실상은 똑같은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따라서 하실 말씀이 얼른 떠오르지를 않아서, 이와 같이 물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그들의 마음에 깊이 새기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막1:15에서 밝히고 있듯이,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의 뜻은 “기름 부음 받은 자”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를 세울 때, 기름을 부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리실 왕이심을 믿었던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곧 임할 줄로 생각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는, 나팔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지면서 천사들도 모습을 드러내리라고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곧 영광 가운데 임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두 제자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의 어머니 살로메와 함께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나라가 영광 가운데 임할 때, 그들 중 한 명은 예수님의 우편에, 다른 한 명은 예수님의 좌편에 앉게 하여 주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하나님의 나라가 곧 임할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그 당시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거부하며 배척했습니다. 또한 그들을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를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들을 멸하시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자신이 그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과연 하나님의 나라가 제대로 임할 것인지 제자들에게는 확신이 서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할 때 예수님은 “겨자씨 비유”를 들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바르게 이해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그들이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굳건한 소망을 가지기를 바라셨습니다.


막4:31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여기에 겨자씨가 나옵니다. 겨자씨는 여러 용도로 사용됩니다. 때로는 기름을 짜서 약용으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겨자씨의 주된 용도는 양념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요즘도 겨자를 냉면에 넣어서 먹기도 하고, 간장에 풀어서 생선회를 찍어 먹기도 합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여기서 하필이면 겨자씨로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하셨습니까? 왜 예수님은 밀이나 보리와 같은 곡식의 씨로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하지 아니하셨습니까? 그것은 겨자씨가 가진 특징과 또한 그것이 자랐을 때 보여주는 특징 때문이었습니다.

우선 겨자씨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겨자씨의 특징은 아주 작다는 것입니다. 눅13:19을 보면, 오늘 본문의 “땅”을 “채소밭”이라고 표현합니다. 겨자씨는 채소밭에 심는 식물의 씨 중에서는 가장 작습니다.

물론 겨자씨보다 더 작은 씨도 있습니다. 예컨대 난초의 씨입니다. 그러나 난초는 채소밭에서 식용으로 자라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채소밭에서 자라는 식물의 씨 가운데서는 겨자씨가 가장 작다는 뜻입니다. 아무튼 겨자씨는 매우 작은 것이 특징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아주 작은 것을 가리켜서 “깨알같다”라고 표현합니다. 유대인들은 겨자씨를 사용하여 같은 뜻을 표현합니다. 예컨대 눅17:6을 보면, 예수님은 아주 작은 믿음을 가리켜서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실제로 겨자씨는 깨알보다도 더 작습니다. 그러니 겨자씨가 얼마나 작은 지 짐작이 갈 것입니다. 더구나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겨자씨 한 움큼이 땅에 심긴 것이 아닙니다. 겨자씨 한 알이 땅에 심겼을 뿐입니다. 그러니 그것이 눈에 뜨일 리가 만무합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땅에 심긴 겨자씨 한 알이 눈에 드러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도 지금 당장은 눈에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아주 작게 시작했습니다.

눅17:20~21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징조들이 가시적으로는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할 것인지를 빈정거리듯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대답하시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 있다 또는 저기 있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하늘에서 빛이 번쩍번쩍 한다든지 온 천지에 나팔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이와 같이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그들 안에 임하였다는 말씀입니다. 단지 땅에 심긴 겨자씨 한 알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도 눈으로 감지되지 않을 뿐이었습니다.

그 당시로서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소망적인 생각을 가지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온 세상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단지 몇 명되지 않는 자기들만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 같았습니다.

실제로 눅12:32을 보면, 예수님은 그들을 “적은 무리”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분명한 소망을 주셨습니다. 물론 처음에 하나님의 나라는 아주 작아서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낙심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아주 작게 시작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이며, 하나님의 섭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주 작게 시작하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아주 크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겨자씨 한 알을 생각하면서, 소망을 잃지 말아야 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나라는 아주 크게 성장합니다(32절 상반부).


막4:32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겨자씨의 첫 번째 특징은 아주 작다는 것입니다. 겨자씨의 두 번째 특징은 아주 크게 자란다는 것입니다. 겨자씨는 다른 채소의 씨보다 훨씬 작지만, 그것들에 비해서 훨씬 더 크게 자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겨자씨로 비유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겨자씨가 자라나는 과정을 네 개의 동사로 설명하셨습니다. 첫째, “심기다”입니다. 둘째, “자라다”입니다. 셋째, “커지다”입니다. 넷째, “가지를 내다”입니다. 말하자면 겨자씨는 채소밭의 식물 가운데서 가장 작게 시작하여 가장 크게 자랍니다. 

사실 채소밭에 심긴 다른 식물들은 다 자라더라도 풀의 수준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겨자씨는 다릅니다. 겨자씨는 자라서 채소밭의 모든 풀보다 더 커집니다. 뿐만 아니라 겨자씨는 큰 가지를 냅니다. 말하자면 겨자씨는 나무의 수준까지 자란다는 뜻입니다.

겨자씨는 자라서 보통 삼 미터 정도 높이의 나무가 됩니다. 더 큰 것은 오 미터 이상으로 자랍니다. 그래서 말을 탄 사람이 그 가지 밑으로 지나다니기도 합니다. 채소밭에 겨자씨를 한 알만 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만큼 크게 자라기 때문입니다.

본시 겨자씨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습니다. 그러나 겨자씨는 채소밭의 모든 풀보다 더 크게 자랍니다. 나중에는 팔뚝만한 큰 가지를 낼만한 나무로 자랍니다. 이렇듯 아주 작게 시작해서 수십만 배, 수백만 배로 엄청나게 성장하는 것이 바로 겨자씨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특징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겨자씨로 비유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아주 작게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아주 크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잃지 말아야 했습니다.

사실 인간적인 견지에서 보면, 예수님이 탄생하신 베들레헴이나 그 곳의 말구유는 겨자씨 한 알처럼 미미했습니다. 예수님이 성장하신 나사렛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요1:46을 보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더군다나 로마인의 관점에서 보면, 이스라엘 전체도 겨자씨 한 알과 같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로마의 여러 식민지 가운데 하나에 불과할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 한 알처럼 아주 작게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을 다 합친다 하더라도, 역시 겨자씨 한 알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배우지를 못했습니다. 가진 것도 없었습니다. 사회적인 지위도 높지를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믿음이 처음부터 큰 것도 아니었습니다.

숫자적으로도 그들은 미미했습니다. 예수님은 열둘을 그의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은 변절할 사람이었습니다. 삼 년이 지나서 예수님이 승천하셨을 때,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제자들의 수도 기껏해야 백이십 명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 한 알처럼 아주 작게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나라는 아주 크게 성장해갔습니다. 겨자씨가 심긴 후,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듯이, 하나님의 나라도 점차 놀랍도록 커갔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성장한 것을 시각적으로 한번 살펴봅시다. 예수님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심으셨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겨자씨 한 알처럼 너무 작아서, 그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조차도 제대로 알아차리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루살렘을 넘어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 커졌습니다. 안디옥을 거쳐서 소아시아로 확대되었습니다. 그러더니 하나님의 나라는 큰 가지를 뻗어서, 지중해를 지나 유럽으로 넘어갔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계속 큰 가지를 내어서, 마게도냐를 거쳐 로마로 뻗어나갔습니다. 그러더니 온 유럽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왔습니다. 계속해서 그 가지는 영국으로, 미국으로 뻗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가지는 우리 나라에도 무성하게 뻗어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가지는 지금도 계속해서 성장하면서, 양 사방으로 힘있게 뻗어나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계11:15 말씀과 같이, 장차 이 세상의 모든 나라들은 예수님이 세세토록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겨자씨의 특징은 가장 작은 것으로 시작해서 가장 큰 것으로 자라나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실로 우리 기독교는 가장 작은 것으로 출발해서 오늘날에는 가장 큰 것으로 성장했습니다. 

우리의 현실이 겨자씨처럼 보잘것없어 보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에서 소망을 찾읍시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소망을 품고 있으면, 예수님은 우리의 소망을 이루어주십니다. 우리의 시작은 미약하더라도, 예수님은 우리의 나중을 심히 창대하게 하실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나라는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32절 하반부).


막4:32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겨자씨는 매우 작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땅에 심기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싹이 나서 자라기 시작합니다. 점점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집니다. 계속 자라서 큰 가지를 냅니다. 그러면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입니다. 그만큼 겨자씨는 크게 자랍니다.

다 자란 겨자나무는 큰 가지들로 울창합니다. 자연히 겨자나무 아래에는 좋은 그늘이 생깁니다. 그러면 새들은 그 그늘에 와서 더위도 피하며, 비바람도 피합니다. 더군다나 겨자씨는 새들에게 좋은 먹이가 되기 때문에, 많은 새들이 그 곳으로 몰려들 것입니다.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마13:32을 보면,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고 말씀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겨자나무가 큰 것은 오 미터까지 자랍니다. 그리고 그 가지도 큰 것은 팔뚝만합니다. 그러므로 공중의 새들은 겨자나무의 가지에 둥지를 틉니다.

물론 우리는 여기서 땅에 심긴 겨자씨가 그만큼 아주 크게 성장을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또 하나의 영적 진리를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겨자씨가 자라남으로 인해서, 그 지역에 사는 공중의 새들이 혜택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도 새들이 나무의 가지나 그 그늘 아래 깃들인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예컨대 겔17:23이나 겔31:6 그리고 단4:12을 보면, 같은 표현이 등장합니다. 한 나라가 든든히 서면, 자연히 그 보호 아래서 모든 이들이 안전하게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그 곳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여러 혜택을 누리게 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나라가 축복의 통로가 되어서, 그 곳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 심지어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조차도 다함께 하나님의 축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우리 나라를 생각해봅시다. 일찍이 선교사들에 의해서 복음이 전해지면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성장해감에 따라서, 우리 민족은 점차 크고도 많은 혜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곳곳에 학교와 병원이 섰습니다. 어린 아이와 여성들, 그리고 천민들의 지위가 향상되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리해서 이제는 우리도 많은 선교사들을 보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귀하게 쓰임을 받는 복된 나라가 되었습니다.

반면에 북한을 생각해봅시다. 그들은 복음을 거부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가 누리는 놀랍고도 많은 혜택들을 얻지를 못합니다. 지금도 그들은 어렵게 살면서, 다른 나라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충만하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우리 모두 축복의 통로로 살아갑시다. 우리 덕분에 우리 주변의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맛보게 합시다. 그리하면 자연히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겨자씨 비유”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작은 겨자씨 한 알에서 큰 가지를 내는 나무를 보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그 그늘에 깃들이는 새들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도 이와 같은 소망을 품고 살기를 바라십니다.

현실이 어렵습니까? 낙심하지 맙시다. 겨자씨 한 알을 생각하면서, 소망을 가집시다. 예수님이 우리의 소망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지금은 미약해도, 나중은 창대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힘들었을 때를 생각하면서, 다른 이들을 더 많이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듣기 싫어하는 사람들 때문에 낙심하지 맙시다. 씨를 뿌리다 보면, 좋지 못한 땅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성장하고 또 성장하고, 계속해서 성장합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좋은 땅들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막4:33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막4:34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예수님의 비유에는 이중 목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가 예수님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감추어버리는 심판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의 비유를 듣기는 들어도 깨달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가 예수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더욱 풍성하게 알려주는 은혜였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는 모든 비유를 해석하셨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더 깊이, 더 확실하게 알아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겨자씨 비유”의 내용만 나올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겨자씨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이 따로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누가 우리에게 “겨자씨 비유”를 해석하시며, 누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도록 해주십니까?

요14:16을 보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또 다른 보혜사가 계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혜사라는 말은 “곁에 있으며 돕는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보혜사가 되셔서,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더 깊이 깨달아 알도록 도우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예수님을 대신하는 또 다른 보혜사가 되셔서,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계시는 분은 누구이십니까?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요14:26 말씀과 같이, 이제는 성령님이 우리의 보혜사가 되셔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오늘 본문에는 “겨자씨 비유”에 대한 해석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우리에게 이 비유의 의미를 가르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서, 이와 같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차근차근 깨달아갑니다. 

우리에게는 보혜사 성령님이 영원토록 함께 하십니다. 날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삽시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망의 말씀을 붙들고 삽시다. 그리해서 예수님을 높이며, 또한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큰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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