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성장(4)마5:5 2011.1.30(일) 온유한 마음, 하나님의 마음
한 해동안 풍성한 생명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올 겨울만큼 추운 겨울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예년에 비해 눈도 많이 왔습니다. 그런데 눈이 춥기는 하지만 만져보면 얼마나 부드러운지. 작고 부드럽습니다. 그리고 곧 사라집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면 그 작은 눈 때문에 나무가 휘어져 있습니다. 어떤 나무는 부러진 나무도 있습니다. 그래서 한자 말에 “유능승강”이란 말이 있습니다.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말입니다. 물과 바위가 싸우면 누가 이기겠습니까? 물이 이깁니다. 부드러운 물이 강한 바위를 이깁니다. 그래서 생긴 것이 서귀포 용두암입니다. 오랜 세월 부드러운 바닷물이 강한 바위를 깍아내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해와 바람중에서 누가 사막을 가는 사람의 옷을 벗기겠습니까? 해입니다. 해가 따뜻하게 내려 쪼이면 옷을 벗지 말래도 벗습니다. 바람은 오히려 옷을 더 껴입게 합니다. 우리 입안에 있는 혀와 이중에서 누가 강하겠습니까? 혀입니다. 젊을 때는 이가 강한 듯 보입니다. 그러다가 나이 먹으면 점점 이가 빠지고 혀만 남습니다. 결국 부드러운 것이 이깁니다. 사람들은 강한 것을 좋아하지만 끝까지 남는 것은 부드러운 것입니다.
역사를 봐도 부드러운 자가 강한 자를 이깁니다. 독재자, 힘있는 자, 장기집권, 군대, 무기가 강해보여도 그때뿐입니다. 끝까지 역사를 이어가는 것은 약한 백성들, 힘없는 백성들입니다. 독일의 니체가 그랬습니다. 그는 강한 자가 지배하는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사람은 힘에 대한 의지 때문에 삽니다. 악이란 힘이 없을 때 오는 것이며 행복이란 힘이 있을 때오는 느낌이라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그런 눈으로 기독교를 보았더니 기독교는 너무 약자의 종교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십자가에 죽은 힘없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힘을 추구하던 그도 자기 자신 하나 못 이겨 자살로 인생을 끝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약하다고 생각한 기독교는 지금까지 죽고 않고 살아 역사를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세상의 원리는 항상 “부드러운 자가 강한 자를 이긴다”는 것입니다. 역사상 그것은 가장 힘있게 말하고 몸으로까지 보여준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한 산상수훈의 핵심은 “부드럽게 살면 행복하다” 하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긍휼이 여기는 자, 화평케 하는 자, 모두 부드러운 사람입니다. 천국은 강한 자는 살 수 없습니다. 부드러운 사람이 사는 곳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예수님은 한번도 “너 자신을 위해 남을 핍박해라”, “어떻게든지 남을 이겨라” 말씀한 적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6장, 7장으로 가면 더 분명합니다. “자기를 미워하는 원수를 사랑해라. 누가 네 오른 뺨을 치거든 왼 뺨도 돌려대라. 누가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리도 가 주어라. 누가 속옷을 달라고 하거든 겉옷까지 주어라. 원수를 사랑하는 것을 물론 그를 위해 기도까지 해주어라”. 도무지 이치에 안맞는 말씀입니다. 만일 그렇게 산다면 이 세상에서 성공은 커녕 실패하기에 딱 맞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주님, 도무지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그렇게 살면 실패할 수밖에 없어요”라고 말하면 마7:25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세운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그러니 더 이상 말도 못합니다. “부드러운 것이 강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강조하시는 말씀, 이것이 예수님의 교훈, 산상수훈입니다.
여러분은 부드러운 사람이 더 행복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더 오래살고, 부드러운 사람이 더 건강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정말 예수님 말씀처럼 부드러워져서 정말로 강한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까? 오늘 말씀이 그 원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 무엇이 온유입니까? 어떻게 온유한 자가 될 수 있습니까?
온유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한 “온유”는 부드러운 것입니다. 겉으로만 부드러운 것이 아니라 속으로 부드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이것이 잘 안됩니다. 겉으로 부드러울 수는 있습니다. 이것을 “온순하다“ 합니다. 그러나 온순과 온유는 다릅니다. 온순은 겉이 부드러운 것이고 온유는 속이 부드러운 것입니다. 누구나 겉으로 부드러울 수 있지만 속까지 부드러워지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속에 있는 죄때문입니다. 죄는 속에 나쁜 것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이기적인 생각, 교만, 자기중심주의, 자기 유익, 감정, 인간적 야망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속까지 부드러워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온유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이 가지신 본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온유한 분인지. 성경을 보면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지은 죄를 심판하지만 죄를 지었다고 다 망하게 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두 번이나 거짓말을 했습니다. 믿음의 조상으로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덮어주고 사랑합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그에게 아들을 주고 땅을 주고 축복권을 줍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아브라함의 행위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사사시대 사람들이 바알을 섬기고 하나님을 잊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여 외적을 통해 그들을 치셨지만 하나님은 또한 사사들을 세워 나라를 구해줍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13번이나 같은 죄를 범합니다. 그래서 사사기에 많이 니오는 말이 “또”입니다. 삿3:12,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아의 목전에 또 악을 행하여”. 이 “또”가 사사기에 13번이나 반복되고 심지어 거룩해야 할 레위인이 토막살인까지 범합니다. 그랬으면 우리 같으면 벌써 끝났습니다. 가만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래 참고 견디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사사 삼손때 가장 많이 속을 썩었지만 그것까지 참았습니다. 그리고 나타난 것은 사무엘이요 다윗왕국입니다. 하나님이 사사시대 인내하지 않았더라면 이스라엘 나라도, 다윗 왕국도 없었습니다.
그 다윗이 후에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남편이 있는 여자 밧세바를 취하여 간음하고 그 남편 우리아를 전장터에 보내 고의로 죽게 했습니다. 그 결과 나라가 시끄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키고 나라 여기 저기서 많은 소동과 환란이 나타났습니다. 그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끝까지 온유하셨습니다. 밧세바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 다윗의 나라를 이어가고 결국 그 뿌리에서 예수님이 태어나게 했습니다. 여러분은 솔로몬이 밧세바의 아들인 것을 아십니까? 우리 생각에는 다윗을 범죄케 한 밧세바를 하나님이 살려준 것도 마음에 안듭니다. 그 죄인의 아들 솔로몬을 다윗을 이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한 것도 불만입니다. 우리같으면 절대 밧세바를 용서도 못하고 솔로몬도 왕이 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온유하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용서하시며 솔로몬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절대 자신의 뜻을 바꾸지 않으실 것을 아십니까? 하나님은 한번 뜻을 정하면 절대 바꾸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여덟 번이나 뜻을 바꾸셨습니다. 시내산밑에서 금송아지 섬기는 사람들을 보고 하나님이 진노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진멸하겠다고 공언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간절히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뜻을 돌이켜 살려 주었습니다. 요나가 우상의 나라, 하나님을 반역한 나라, 니느웨 백성에게 회개하라고 선포했습니다. 요나의 선포를 듣고 모든 니느웨 백성이 회개하자 하나님의 뜻을 바꾸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죄짓고 바벨론에 포로잡혀 갔습니다. 그때 에레미아를 통해 하나님이 말씀했습니다. 렘18:8,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여러분, 어떤 사람이 뜻을 돌이켰다는 것은 그 뜻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고백한 것 아닙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 불완전하다는 말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대신 금송아지 섬긴 것이 잘한 일입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이 그들을 멸하시는 것이 잘못이 아니잖아요? 우상을 섬기며 이스라엘을 침략하고 백성을 노예로 잡아간 니느웨 백성이 잘 했다는 것입니까? 그들을 멸망시키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잘못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왜 자신의 뜻을 바꾸십니까? 완전하신 하나님이 왜 뜻을 돌이킴으로서 자신의 불완전성을 드러냅니까? 그럴 이유가 무엇입니까? 온유하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뜻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서라도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진정한 온유는 자기를 버리고 남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온유한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들입니다. 성경에서 대표적으로 온유한 사람이 모세입니다. 모세는 아내가 죽자 구스 여자를 아내로 취했습니다. 이때 모세의 누이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했습니다. 비방만 한 것이 아니라 모세의 리더십에도 도전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이 말을 들은 모세의 마음이 편하지 안않았을 것은 당연합니다. 모세가 누구입니까? 한 성미하던 사람입니다. 젊을 때 모세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사람을 둘이나 죽여 모래에 파묻은 사람입니다. 분노와 혈기도 만만치 않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때는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하나님앞에 세우자 분노하고 소리치는 것이 부질없는 일임을 알았습니다. 형제들이 자기에 대하여 비방하는 것은 비방들을만한 일이 있기 때문이요 지도력에 대하여 말한 것도 자기가 완전한 지도자가 아니기 때문에 들을만한 이야기였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보니까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참았습니다. 억지로 참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참았습니다. 그리고 기다렸습니다. 때가 되자 하나님이 개입했습니다. 미리암이 문둥병이 걸렸습니다. 오히려 문둥병을 보자 모세의 마음에 불쌍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미리암의 문둥병을 고쳐 주옵소서”. 기분 나쁜 말을 듣고 참는 것도 온유한 마음이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도 온유한 마음, 그리고 미리암의 문둥병을 고쳐달라고 기도한 것도 온유한 마음이었습니다. 누구나 하나님의 마음을 픔으면 이렇게 됩니다. 내가 가진 본래의 마음으로는 이렇게 안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임하면 이렇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 학자 아더 핑크는 말했습니다. “온유는 하나님에 대해 자기고집을 꺾는 것이고 사람들에 대해 악한 의지를 꺾는 것이다”.
예수님의 온유를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지신 온유를 우리에게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낳은 사람중에서 가장 온유한 분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온유해진 것은 약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입니다. 본래 약한 분도 아니요 약할 필요도 없는 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신 그 분이 스스로 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종이 되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음부에 내려갔습니다. 더 이상 온유해 질 수 없는 데 까지 온유해 지셨습니다.
몇 년전 로마에 갔을 때 가장 인상적인 것이 콜로세움이었습니다. 콜로세움은 주후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거기서 잡아온 유대인 포로 4만명을 동원하여 지은 경기장입니다. 이 경기장은 본래 검투사의 격투 시합장으로 유명했습니다. 검투사들을 나오게 해 지하에서 오랫동안 굶긴 짐승들과 싸우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면서 박수를 치며 좋아했습니다. 그러던 경기장이 핍박의 시대를 맞이하여 기독교인들을 죽이는 순교장으로 변했습니다. 네로 이후 수 십, 수백만의 기독교인들이 이 “콜로세움” 경기장에서 죽어 갔습니다. 아무 힘도 없었던 기독교인들은 맹수가 달려들면 서로 껴안고 찬송을 부르며 기도하다가 죽어갔습니다, 그러던 그 콜로세움이 지금은 매우 초라하고 나약한 모습으로 서 있었습니다. 그 건물을 보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당당했던 로마는 어디 갔나? 그때 힘으로, 칼로, 맹수로 기독교인들을 처형했던 그 강한 로마는 지금 어디 갔나?” 놀라운 것은 로마제국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기독교가 들어섰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세히 보았더니 콜로세움 한 가운데 십자가가 하나 서 있었습니다. 그 십자가는 매우 강력한 메시지로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십자가는 본래 약한 것입니다. 십자가는 강한 자앞에 힘없는 자가 당하는 무기력의 상징입니다. 자신의 옷을 벗기고 몸을 묶어 손과 발을 못박는 사람들앞에 자신을 노출당한 약한 자의 형틀입니다. 그런데 그 약한 십자가가 그 강한 로마 제국의 한 가운데 우뚝 서 있었습니다. 강한 로마는 가고 약한 십자가만 남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그 강한 로마 황제들은 가고 힘없이 죽은 예수님만 살아 남아서 오고 가는 수많은 순례자들의 경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약한 십자가가 강한 로마를 무너뜨렸습니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깁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의 비밀이 이것입니다. "십자가는 약하다. 그러나 결국 십자가가 이겼다. 그래서 십자가가 가장 강하다“. 예수님의 삶은 이것을 보여주신 삶이요 우리는 일생 그것을 배우며 삽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11:28-29,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양화진에 가면 초대 교회 우리 나라에 온 많은 미국, 카나다, 호주 선교사들이 있습니다. 그중 일본인도 한 명 있는 데 소다 가이치라는 사람입니다. 왜 그 많은 서양 선교사틈에 일본인이 있을까? 역사를 찾아 보았습니다. 소다 가이치는 1867년 일본에서 태어났습니다. 교사로 일하다 26세에 되던 해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 홍콩을 거쳐 타이완으로 갑니다. 그런데 객지에서 외로운 데다 믿음도 없어 하루 하류 무절제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술에 취해 거리를 헤매다 쓰러졌는 데 아무도 돌보지 않았습니다. 날씨는 추어 숨이 곧 넘어가는 데 사람들은 관심없이 제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 사람이 그 곁을 지나갔습니다. 아직 맥박이 뛰고 있는 것을 확인한 그는 그를 업고 여관으로 달려 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를 치료한 뒤 여관비까지 내주었습니다. 길바닥에서 술에 취해 객사할 뻔한 소다 가이치는 그 행인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러나 가이치는 자신을 죽음에서 구해 준 사람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다만 사람들을 통해 그가 조선인이라는 것만 알았습니다. 그 뒤에 그가 한국에 왔습니다. 자기 생명을 구해준 이름모를 한국인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한국에 왔습니다. 그리고 YMCA에서 일본어 선생으로 일하다가 월남 이상재 선생의 감화를 받고 기독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나이 95세까지 한국에 살면서 한국을 위해 일했습니다. 그는 가난한 일제시대, 버려진 수많은 아이들을 데려다가 자기 품에서 키웠습니다. 해방될 때까지 그가 직접 키운 고아만 천여 명에 달했습니다. 해방 이후 잠시 일본에 돌아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온 소다 가이치는 마지막까지 한국을 위해 일하다 죽었습니다.
정부는 그에게 일본인으로서는 최초로 문화훈장을 추서했고, 교회는 그를 기념하여 양화진에 묻었습니다. 지금도 양화진에 가면 주요한 선생이 쓴 묘비가 남아 있습니다. “언 손 품어주고 쓰린 마음 만져 주니 일생을 길다 말고 거룩한 길 걸었어라 고향이 따로 있든가 마음 둔 곳이어늘”. 그의 모든 일생은 방황의 시절, 그를 죽음에서 건진 한 무명의 한국인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닮은 사람, 지금까지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그 한 사람을 통해 일본인 하나가 구원받고 그로 인해 수많은 이 땅의 고아들이 살았으니 예수님 말이 맞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님을 배우면 이렇게 됩니다. 나를 살리고 남을 살리는 예수님의 온유, 우리 평생 예수님의 온유를 배우게 하소서.
성령의 은혜로 온유해집니다.
온유는 하나님의 성품이고 예수님을 통해서 배우지만 배운다고 우리가 금방 온유해지지 않습니다. “온유”란 헬라어로 “프라우스”라고 합니다. 이 말은 말듣지 않은 야생마를 힘들게 훈련하여 세월이 지난 후 사람의 말을 잘 듣게 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온유는 타고 난 것이 아닙니다. 본래부터 부드러운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은 오랜 세월 훈련하고 다스려야 합니다. 훈련하지 않으면 말은 뒷발길 할 수도 있고 사람을 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훈련을 통해서 발은 있지만 뒷발길하지 않고 입은 있으나 물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이 온유입니다. 그러니까 온유는 힘이 없는 것이 아니라 힘이 있으나 그 힘을 통제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할 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할 말이 있지만 그 말을 안하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말 다하고 뒤끝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할 말을 절제하고 뒤끝도 앞끝도 남기지 않는 것입니다. 온유는 그래서 무기력이 아닙니다. 온유는 이길 수 있지만 저주는 것입니다. 힘이 약해 지는 것은 온순이고 힘은 있으나 져주는 것이 온유입니다. 온순은 지면서 속으로 한을 품는 것이고 온유는 지면서 상대방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원수에게 지고 속으로 복수의 칼날을 품거나 그것 때문에 적대감이나 열등의식을 갖는 것은 온유가 아닙니다. 온유는 한 마디로 절제된 힘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절제된 힘을 갖습니까? 성령님이 주십니다. 성령의 은헤를 받으면 누구나 온유해 집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를 하나님앞에 복종시킵니다. 우리안에 성령님이 계시면 늘 우리를 복종시켜 하나님앞에 서게 합니다. 온유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갈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온유와 절제니”.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성품상 온순하지 못해도 온유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은혜를 받으면 온유해집니다. 성경에 나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온순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성령의 능력으로 온유해졌습니다. 모세가 그랬습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예수님도 사실은 온순한 분은 아니었습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기 위하여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신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유대교의 지도자들을 향하여 “이 독사의 자식들아. 이 회칠한 무덤들아, 뱀들아” 하고 외치신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온순한 분이 아니라 온유한 분이었습니다. 그는 온순한 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불의를 보고 분노할 수 있었고 그는 온유한 분이었기 때문에 자기 뜻을 버리고 십자가를 질 수 있었습니다.
세상을 살리는 힘이 온유입니다. 누가 물질축복을 받는지 아십니까? 사업 잘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온유한 사람입니다. 온유하다는 말은 물질에 대한 욕심으로부터 자신을 통제할 능력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세계적인 부자 워렌 버핏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전 세계에 76개의 투자 자회사를 가지고 있고, 매년 13조 원(132억 달러) 이상의 이익을 내는 버크셔 해서웨이의 회장입니다. 그가 큰 부자가 된 이유가 무엇일까? 물질을 통제하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가 돈이 많아도 그는 그 회사를 위하여 건물 단 한 개 층만 사용합니다. 그의 자신에 대해 또한 엄격합니다. 그의 연봉은 1억원 정도입니다. 지난 1980년 이후 31년째 한 번도 연봉을 올리지 않고 이 수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그는 회사에서 자신이 개인적으로 사용한 우편요금, 전화요금, 통신요금 등 5천만 원(5만 달러)을 회사 측에 돌려줍니다. 자신이 개인업무로 사용한 돈은 회사에서 가져가지 않습니다. 이것은 회사 돈을 자신의 돈인양 마구 쓰거나 사람들 몰래 회사 돈을 빼돌리는 사람들과는 그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것, 할 수 있는 자유와 함께 안할 수 있는 통제력을 갖는 것, 그것이 온유입니다.
<바늘 귀를 통과한 부자>라는 책을 읽다가 목회자의 자세를 가다듬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큰 교회의 목회자에 대한 글인데 도전이 되고 찔림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반길 일이지만 힘의 논리에 속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 한다. 돈의 힘, 권력의 힘, 사람의 힘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을 믿지 않게 될까 경계해야 한다.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가 성장할수록 하나님의 일을 인간적인 힘으로 하지 않도록 경계하고 근신해야 한다. 큰 교회 목회자는 신앙적으로 한 순간의 긴장도 풀어서는 안된다. 돈을 사용하지만 돈의 힘에 의존하지 않는 것, 권력이 있지만 그것으로 일을 이루지 않는 것, 사람을 동원하되 하나님의 일이 사람의 힘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아는 것, 말로 교인들을 움직이되 말이 교인간의 관계의 전부가 아님을 아는 것, 하나님의 종의 품위를 지키되 지나치게 대접받지 않으려는 마음을 갖는 것, 대가를 받을 때 마땅히 받는다고 생각하지 말고 할 수 있으면 사양할 줄 아는 것, 이것들을 알아야 큰 교회에서 목회하면서도 타락하지 않을 수 있다”. 저는 큰 교회 목사가 아니지만 늘 이 말을 가슴에 새기고 삽니다. 그리고 늘 몇 가지를 결심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대가를 늘 포기하며 살겠다. 나는 내가 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힘을 할 수 있는 한 안 쓰고 살겠다. 나는 내가 마땅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말을 가급적 아끼고 살겠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는 하늘에서 누릴 마땅한 권세도 스스로 포기하고 이 땅에서도 하나님으로 행사할 수 있는 당연한 힘도 사용하지 않고 사셨습니다. 그리고 죽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혀 하늘과 땅과 땅 아래를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온유하신 예수님이 하늘과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언제나 예수님 말씀이 맞습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온유한 자가 사업도 잘하고 온유한 자가 사람들의 마음도 얻고 온유한 자가 정치도 잘하고 온유한 자가 목회도 잘하고 모든 축복은 온유에서 온다. 평생 예수님처럼 온유한 자가 되시기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5:5 2011.1.30(일) 온유한 마음, 하나님의 마음
마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
온유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삿3:12,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아의 목전에 또 악을 행하여”.
렘18:8,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예수님의 온유를 배워야 합니다.
마11:28-29,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성령의 은혜로 온유해집니다.
갈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온유와 절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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