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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성장(5) 마5:6 2011.2.20(일) 주린 마음, 채우시는 은혜

영적 성장(5) 5:6 2011.2.20() 주린 마음, 채우시는 은혜

예수님이 가르친 8가지 복의 4번째입니다. 여러분은 살면서 지독하게 목말라 본 적이 있습니까? 며칠전에 제가 음식을 짜게 먹었는지 계속해서 목말랐습니다. 물을 마셔도 안되고 우유를 마셔도 안되고 집사람에게 , 더 없어?” 했더니 식혜를 갖가 줍니다. 시원한 식혜를 한 사발 먹었더니 그때부터 갈증이 풀립니다. 사람 몸의 70%가 물입니다. 뇌와 뼈등 몇 가지 장기를 빼면 사람은 걸어다니는 물통입니다. 몸무게 70킬로인 사람은 몸에 물을 50킬로나 가지고 다니는 것입니다. 물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갈증은 인간이 경험하는 가장 큰 고통중의 하나입니다. 갈증이 나면 입술이 마르고 혓바닥이 깔깔해지면서 머리가 아픕니다. 정신이 혼미해지고 앞이 잘 안 보입니다. 그래서 헛깨비가 보인다고 합니다.

 

목마름과 함께 배고픔은 인간이 경험하는 또 하나의 고통입니다. 여러분, 배고파 보셨나요? 금식은 조금 낫습니다. 금식도 먹지 않는 것이지만 믿음으로 의지를 가지고 하기 때문에 조금 낫습니다. 그러나 힘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일어날 힘도 없고 심지어 눈 뜰 힘도 없습니다.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잠도 오지 않습니다. 배는 쪼륵 쪼륵한 데 잠은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긴긴 밤을 홀딱 새웁니다. 옛날 우리도 참 먹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보리죽에 고구마 하나, 그나마도 없을 때는 산에 가서 소나무 껍질, 칡넝쿨 캐서 먹고 살았습니다. 아직도 세상은 굶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전 세계의 절반 가량인 28억이 하루 2불 이하의 생활비로 삽니다. 매일 3만 명의 어린아이가 굶어 죽고 1,300만 명의 사람이 돈이 없어 전염병과 기생충 때문에 죽습니다.

 

그렇다고 세계에 먹을 것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극소수의 부자들이 부를 독점하고 있습니다. 남미같은 나라들은 1.6%의 재벌이 전 국토의 76%의 땅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가난의 문제는 자원의 문제가 아니라 분배의 문제입니다. 가난은 상류층보다 하류층에게, 백인보다 흑인에게, 남자보다 여자에게, 어른보다 어린이들에게 더 집중되고 있습니다. 여성들은 세계 노동시장의 3분의 2를 차자하고 전 세계 식량의 반절을 생산하지만, 전체 수입의 10퍼센트밖에 얻지 못하고, 세계 재산의 1퍼센트 이하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물질은 없는 것이 아니라 가진 사람에게 편중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목말라, 배고파 탄식하고 삽니다. 바로 이런 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6,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이요”. 주님의 말씀은 항상 우리에게 의문을 던집니다. 가난한 자 복이 있다고 하시더니, 애통하는 자 복이 있다, 온유한 자 복이 있다 하십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주리고 목마른 자 복이 있다 하십니다. 어떻게 굶고 사는 것이 복이겠습니까? 도대체 굶어보고 하신 말입니까? 삼일을 굶으면 담 안넘어갈 사람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목마른 것이 복입니까? 여름에 성지순례하다 보면 목이 마릅니다. 물병을 들고 다니며 쉴새 없이 마셔야 합니다. 그런데 목마른 것이 복이라고 가이드가 물병을 빼앗습니다. 어떻게 됩니까? 싸움날 일입니다. 왜 주님은 우리에게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 합니까? 어떤 의미의 주리고 목마른 것입니까?

 

하나님은 주리고 목마른 사람을 찾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육신의 주리고 목마름이 아닙니다. 육의 일을 통해 영의 일을 말씀합니다. 우리가 육의 양식을 찾는 것처럼 우리 영도 무엇인가를 찾습니다. 육이 먹을 음식과 마실 물을 찾는 것처럼 사람은 하나님을 찾습니다. 가끔 나는 무신론자다. 나는 하나님 필요없다호언장담하는 사람이 있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누구나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찾습니다. 엄마없는 아이가 기쁨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 떠난 인간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합니다. 57:21,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맞습니다. 하나님없이는 평안할 수 없습니다.

 

미운 오리새끼이야기가 있습니다. 백조가 어느날 오리알 속에 섞여 부화되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자기는 오리라고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백조는 오리와 달랐습니다. 백조는 오리와 사는 방식도 다르고 먹는 것도 달랐습니다. 어쩌다 오리처럼 시궁창에서 죽은 물고기 먹고 살았지만 마음은 늘 저 하늘에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느날 둑에 올라 멀리 파랗게 펼쳐진 하늘을 보았습니다. 갑자기 날고 싶어 날개를 활짝 폈습니다. 그랬더니 금방 하늘을 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면서 깨달았습니다. ”, 나는 오리가 아니고 백조였구나“.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오리가 사는 진흙탕입니다. 그 속에 몇 번 본능을 따라 오리처럼 살아 봅니다. 죽은 물고기 먹으며 사는 것도 재미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오래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늘을 나는 백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가야 행복합니다. 몇 년 전에 한 대학에서도 그런 조사를 했습니다. 전국 7개 도시 20세 이상 64세 이하의 남녀 1,503명을 대상으로 당신은 행복합니까?” 물었습니다. 그리고 경제력, 외모, 건강, 사회적 지위, 대외관계 등 16개 항목을 차례로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한국인 평균 행복지수가 57.71이 었습니다. 남성이 58.59, 여성이 56.87, 여성이 약간 낮았습니다. 다들 경제적으로는 괜찮은 데 학력도 괜찮고 사회적으로 잘 나가는 데 그것이 행복의 모든 조건은 아니었습니다. 다른 것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없이 우리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시편에서 다윗이 한 말과 같습니다. 16:2, “내가 여호아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나이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모든 행복은 결국 하나님에게 나온다는 것을 믿습니까? 우리의 본성은 오리처럼 진흙탕에서 살라고 속삭이지만 우리의 영혼은 백조처럼 살라고 소리칩니다. 어쩌다 한번 본성에 따라 살 수 있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어쩌다 술 한 잔 하고 진흙탕속에 딍글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일어나면 두통에 시달려야 합니다. 이것도 한 두 번이지 너무 싫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이 갈망을 성경은 주린 마음, 영혼의 목마름이라고 말합니다. 유대인 철학자 아브라함 허쉘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만족하는 사람은 진정 갈망해 본 적이 없다.” 말을 바꾸면 이렇습니다. “진정으로 갈망하는 사람만 만족한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갈망하지 않으면 무엇에도 만족을 느낄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신앙의 핵심은 성경끼고 주일날 교회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본질적인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주리고 목마른 마음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할 때 늘 조심할 것은 자신을 영적으로 부요한 자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랬습니다. 소아시아 7개 교회중의 하나인 라7오디게아교회를 향해 주님이 책망했습니다.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이번에 터키 성지순례하면서 이 라오디게아를 들렀습니다(사진). 라오디게아는 소아시아 7교회중 가장 넓고 비옥한 곳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사통팔달의 교통의 요지에 루커스 강까지 흘렀습니다. 멀리서는 히에로폴리스 뜨거운 온천 물까지 공급되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그야말로 부족할 것이 없는 도시였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이 도시는 교통이 좋아 일찍부터 은행과 고리대금업이 발달했습니다. 그래서 너무 돈이 많습니다. 하도 넉넉해 지진이 났을 때에도 로마 정부의 지원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이 지역은 유명한 의사와 병원이 많았습니다. 유명한 의사 헤로필로스가 이 지역 출신입니다. 그 중에서도 고약과 안약이 이 지역의 특산품이었습니다. 고약은 귓병에 좋고 안약은 눈병에 좋았습니다. 뿐 아닙니다. 이 지방 특산품중에 목양과 목화재배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짙고 검은 양털은 로마 제국 최고의 명품이었습니다. 이 정도 되니까 어떻습니까? 자신을 가난하다 여기겠습니까? 부족하다 생각하겠습니까? 절대 자신을 가난하다. 부족하다. 눈멀었다. 벌거벗었다 여기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여기 있습니다. 자신을 하나님앞에서 보지 못한 것입니다. 세상적으로만 평가한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부요했으나 영적으로는 가난했고 안약은 많았으나 영적으로는 눈멀었고 목화와 양털은 풍부했으나 영적으로는 벌거벗었습니다. 그것을 자신들만 모르고 있지 주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가난한 자로 하나님앞에 서는 것입니다. 눈먼 자로 하나님앞에 가는 것입니다. 벌거벗은 자로 하나님께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린 마음, 목마른 마음입니다.

 

예배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늑하고 웅장한 예배당 분위기입니까? 목회자의 유창한 설교입니까? 성가대의 아름다운 찬양입니까? 요즘은 첨단 하이테크와 음향, 영상도 필요합니다. 무엇이 예배의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까? 헌금입니까? 특송입니까? 냉온방 장치입니까? 가난한 마음입니다. “나는 벌거벗었습니다. 나는 눈멀었습니다. 나는 심히 곤고한 자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예배의 출발입니다. 목말라야 예배입니다. 예배의 가장 큰 저주는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직분자이기 때문에 나오고 봉사하러 나오는 것입니다. 주리고 목말라야 예배입니다. 목마르면 일찍 오라고 말 할 필요도 없습니다. 목마른 자는 누가 뭐래도 목숨걸고 물을 구합니다. 앉아서 물을 구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아모스가 잘 말했습니다. 4:8, “두 세 성읍 사람이 어떤 성읍으로 비틀거리며 물을 마시러 가서 만족히 마시지 못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목말라 죽게 된 사람은 비틀거리면서도 물을 찾습니다. 물을 찾으면 10분이고 20분이고 정신없이 물을 마십니다.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고 물을 마십니다. 이것이 예배하는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예배합니까? 목마른 자가 물을 찾는 심정으로 주일날 마다 교회로 옵니까? 목마른 사람이 정신없이 물을 마시는 심정으로 하늘의 생수를 마십니까? 목마른 사람은 나도 모르게 앞자리로 옵니다. 목마른 사람은 나도 모르게 아멘 합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내가 목마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마른 사람은 다윗이 말한 대로 예배합니다. 143:6,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셀라)”.

 

하나님의 사람들은 목마른 사슴처럼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일생을 하나님과 동행했던 로렌스 형제는 죽어가면서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 죽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내가 지난 40년 동안 해왔던 것을 하러 갑니다”.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가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세상에 왔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세상에 살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천국에 갑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안하고 쉬려고 천국에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천국에 갑니다. 우리는 예배하기 위해 교회에 왔고 또 예배하기 위해 세상으로 갑니다. 예배는 의식이나 제도가 아니라 주린 마음입니다. 예배는 비우고 채우는 것입니다. 예배는 주린 영혼을 은혜로 채우시는 하늘의 만나입니다. 예배는 갈한 영혼에 부으시는 하늘의 생수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니 성령의 기름 부으소서.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니 내 잔을 채워 주소서”.

 

고난은 우리를 주리게 하는 은혜의 체험입니다

주리고 목마른 것은 예배에서 뿐만 아닙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주리고 목마른 은혜를 체험하는 일생입니다. 어느날 제가 그림 한 점을 보았습니다. 유명한 화가 렘브란트가 그린 탕자의 귀향이라는 그림입니다(그림). 처음에는 가볍게 보았는 데 점점 그림에 빨려 갔습니다. 이 그림은 1세기 유대인의 삶의 자리에서 그리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전체적으로는 덜 유대적입니다. 복장도 조금 다르고 분위기도 유대적인 분위기가 아닙니다. 이 그림이 그려진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합니다. 그러나 이 그림이 말하려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주린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온 것입니다. 옷은 낡고 남루합니다. 신발을 닳았고 그나마 한 짝은 없습니다. 얼굴은 못먹어서 창백하고 힘은 없습니다. 하도 고민을 많이 해서 그런지 머리까지 빠졌습니다.

 

거기에 비해 아버지는 붉은 망토를 걸치고 있습니다. 부의 상징입니다. 양손에는 팔찌가 있습니다. 부자가 아니면 찰 수 없습니다. 머리는 희고 수염은 났지만 얼굴은 안타까운 마음과 불쌍한 마음과 반가운 마음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주변에 있는 냉소적인 모습과는 다릅니다. 아마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형이거나 이웃일 것입니다. 그들은 탕자를 문제아 보듯이 멀찍이 바라봅니다. 아버지의 모습과는 다릅니다. 질문은 이것입니다. 왜 아들은 주리고 목말랐는가? 왜 아들은 결국 아버지께 돌아왔는가? 물론 아들이 밖에 나가 돼지 쥐엄열매를 먹으며 고생한 것은 아버지 탓이 아닙니다. 아들이 스스로 한 일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아들의 고난이 결국 아버지께 돌아오게 했습니다. 아들이 밖에서 잘 나갔다면 아버지께 돌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 눈으로 우리가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을 볼 수 있을까요? 세상에서 우리는 많은 고난을 받고 삽니다. 제가 몇 주전에 교인들에게 기도제목을 받았습니다. 새벽마다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데 기도제목이 하도 구구절절해 제가 매일 아침마다 놀랍니다. 건강하게 보이는 분이 지병으로 고생합니다. 잘 나가던 사업이 갑자기 어려워져 고통스럽습니다. 자녀가 마음대로 살아주지 않아 눈이 침침할 만큼 기도해도 응답이 없습니다. 집이 안팔립니다. 장사가 안됩니다. 자녀의 앞길이 열리지 않습니다. 30, 40을 넘은 자식의 결혼문제 때문에 걱정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고통없이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가 하나님이라면 금방이라도 도와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왜 이렇게 인생은 고생하며 살아야 합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 아닙니까? 고통을 주시려면 안 믿는 자들에게 주셔야지 왜 믿는 자녀에게 고통을 주십니까?”

그때 읽은 말씀이 오늘의 말씀입니다.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이요”. 모든 고난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 이루어진 고난도 없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에게 고난이 있는 것입니까?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 주려야 하나님을 찾습니다. 목말라야 생수를 마십니다. 밖에 나가 거지가 된 아들만 아버지께 돌아옵니다. 고난은 하나님이 의도한 것은 아닐지라도 우리로 하여금 겸손하게 하고 낮아지게 하고 주리게 하고 목마르게 합니다. 고난자체는 좋은 것이 아니지만 고난을 통해 우리는 가난해 집니다. 부요속에서도 가난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안약이 있어도 나는 눈멀었습니다“.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목화와 양털이 풍부해도 나는 벌거벗었습니다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대기업 회장이면서 새벽기도에 나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래서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가 좋은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비극이 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나도 얻지 못한 비극과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 얻는 비극이다.”. 어떤 비극이 더 큰 비극이겠습니까?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 얻는 비극입니다. 원하는 것을 다 얻은 사람은 절대 주일날 교회 나오지 않습니다. 하와이에 있는 저 푸른 초원 골프장에 있습니다.

 

그러니 신앙인에게 고난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오죽하면 하나님이 자기를 경외하는 욥에게 고난을 주었겠습니까? 욥은 다섯 가지 고난을 받았습니다. 먼저 물질을 빼앗겼습니다. 스바사람이 쳐들어와서 그 많던 가축과 소유를 다 빼앗아 갑니다. 다음은 가족을 잃었습니다.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10남매가 하루 아침에 죽고 사랑하던 아내까지 곁을 떠납니다. 셋째 병에 걸립니다. 그렇게 건강했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가죽만 남습니다. 넷째 사람 때문에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나마 그들은 믿었던 친구들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 때문에 시험들었습니다. 그렇게도 믿었던 하나님이 그럴 줄 몰랐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사는 자기를 그렇게 내 팽개칠 줄 몰랐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살아계신가? 하나님은 공평하신가? 하나님은 사랑이신가? 묻고 또 물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들입니다.

 

그런데 가짓수는 다섯 가지지만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은 한 가지입니다. 주리고 목마른 마음입니다. 하나님외에 어떤 것도 의지하지 않게 하는 마음입니다. 물질, 좋습니다. 그러나 물질보다 물질을 주신 하나님이 더 중요합니다. 자녀나 아내, 사랑스럽습니다. 그러나 더 사랑해야 할 분이 하나님입니다. 친구, 믿을만 합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믿을 분은 하나님 한 분입니다. 내 몸,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몸의 살고 죽는 일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때로 하나님에 대한 회의나, 의심도 하나님께 나가는 데 필요합니다. 하나님께 가는 길이 소중하기 때문에 많은 장애물을 통과해서 가야 합니다. 그 다섯 가지 고난의 끝자락에서 욥은 문득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큰 소리로 고백했습니다. 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연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여러분도 세상에서 당한 고난을 하나님앞에 주리고 목마를 기회로 삼겠습니까? 모든 고난을 주리고 목말라 하나님께 나가는 기회로 삼겠습니까? 고난은 우리를 주리게 해 풍성하신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은혜의 기회입니다.

의를 위해 주리고 목마르면 채워줍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냥 주리고 목마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주리고목말라야 합니다. 여기서 란 말이 중요합니다. “란 말을 헬라어로는 디카이오수네"라고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의 옳바른 관계를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의로운 자가 복이 있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의로운 자가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습니다. 의를 소유한 자가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습니다. 왜 이 구별이 중요합니까? 신앙의 목표는 내가 의인되는 것이 아닙니다. 의로우신 분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가 그 분처럼 되는 것이 아니고 그 분을 사모하고 갈망하는 것입니다. 107:9절입니다.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우리가 의인되면 좋습니다. 그러나 좋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의인이 되면 하나님이 더 이상 필요치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의인되는 길이 딱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죄인인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주는 길입니다. 이것을 어려운 말로 칭의라고 합니다. 우리는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지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의롭다고 인정받는 최소한의 조건은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3:24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의인이 된 것이 아니라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우리가 매일 의로우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본래 죄인인 우리가 은혜로 의로워져 감사로 눈물로 의의 본체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린 마음입니다. 이것이 목마른 마음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갈망입니다. 63:1절과 같습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오늘 이 아침 하나님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무엇에 목말라 사느냐? 한번 물어 보십시오. 여러분은 무엇에 목말라 삽니까? 돈입니까? 명예입니까? 출세입니까? 지식입니까? 성공입니까? 행복입니까? 언젠가 미국에서 호주산 나도라는 음식을 먹어본 적이 있습니다. 나도는 우리 나라 메밀같은 것인 데 이것으로 분말로 만들어 빵을 만들면 밀가루로 만든 빵과 구별할 수 없습니다. 똑같습니다. 그런데 나도 가루에는 영양분이 없습니다. 그래서 빵처럼 먹을 수 있지만 배고픔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래 먹으면 영양실조로 죽게 됩니다. “나도처럼 우리는 보기는 좋은 데 영양분이 없는 것을 찾아 헤매지 않습니까? 꼭 교회만 와 예배만 드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자, 선교사만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일을 하든 그 일 자체보다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영국의 C.S.루이스가 아주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책이나 음악을 하나님보다 더 중요시하는 사람들에게 대한 말입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책이나 음악을 믿고 거기에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필경 우리를 배반할 것이다. 아름다움은 그 안에있지 않고 그것을 통해서우리에게 온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다. 책이나 음악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찾지 못한 꽃의 향기, 아직 듣지 못한 천상의 메아리, 아직 가보지 못한 나라의 소식일 뿐이다. 그것의 본질은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다”.

 

이 말을 통해 저는 이렇게 적용하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도 그 자체로 아름답지 않습니다. 안에아름다움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아름다움이 나타날 뿐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의 본질에는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귀로 들으면 거기서 하나님이 말씀하고 믿음의 눈으로 보면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보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난하고 주린 마음으로 보면 하나님이 보입니다. 가정, 부모, 자녀, 부부, 그 자체에 아름다움이 있지 않습니다. 부모도 때로 자식을 죽이고 자식도 부모를 버립니다. 아름다움은 그들을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갈망입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눈으로 아내를 보면, 남편을 보면 거기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가 하는 일, 학업, 직업, 취미, 목표, 성공을 보면 그 안에 하나님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자체를 이루려고 하지 않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나타내려는 것이 우리 삶의 목표입니다. 관건은 주리고 목마른 마음입니다. 주여, 나에게 주리고 목마른 마음을 주옵소서. 주리고 목마른 마음으로 예배하게 하소서. 주리고 목마른 마음으로 사업하고, 주리고 목마른 마음으로 공부하고, 주리고 목마른 마음으로 가정생활, 직장생활, 교회생활을 해서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나타나게 하옵소서.

 

 

 

 

 

 

 

 

 

 

 

 

 

 

 

 

 

 

 

 

 

 

 

 

 

 

 

영적 성장(5) 5:6 2011.2.20() 주린 마음, 채우시는 은혜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이요”.

 

하나님은 주리고 목마른 사람을 찾습니다

57:21,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16:2, “내가 여호아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나이다”.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라오디게아(사진)

 

4:8, “두 세 성읍 사람이 어떤 성읍으로 비틀거리며 물을 마시러 가서 만족히 마시지 못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43:6,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셀라)”.

 

고난은 우리를 주리게 하는 은혜의 체험입니다

탕자의 귀향”(그림)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이요”.

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연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의를 위해 주리고 목마르면 채워줍니다

107:9,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3:24,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63:1,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C.S.루이스, “책이나 음악을 믿고 거기에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필경 우리를 배반할 것이다. 아름다움은 그 안에있지 않고 그것을 통해서우리에게 온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다. 책이나 음악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것은 우리가 아직 찾지 못한 꽃의 향기, 아직 듣지 못한 천상의 메아리, 아직 가보지 못한 나라의 소식일 뿐이다. 그것의 본질은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