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11:11-12 2011.2.13(일)
천국문은 열려있다
성지순례를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언제나 예수님이 사신 발자취를 밟으면 행복합니다.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은 행복합니다. 예수님 때문입니다. 올 한 해 우리 모둔 교우들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행복은 어디에서 올까요? 몇 주전에 그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우유공장에서 우유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젖소에게 우유가 나온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다른 것이 행복을 주지 않습니다. 가정, 직장, 학교, 심지어 교회도 행복의 근원이 아닙니다. 굳이 말하자면 행복의 가공공장입니다. 행복의 유일한 근원은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수도가 있습니다. 이 수도에는 수도꼭지가 있습니다. 이 수도꼭지에 관하여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1940년대 중국 본토에서 모택동에게 패하고 대만으로 피신한 장개석 군대중에 그런 사람이 있었답니다. 이들은 틀기만 하면 물이 콸콸 쏟아지는 수도꼭지를 보고 너무 너무 신기했습니다. 그래서 너도 나도 철물점에서 가서 수도꼭지를 샀습니다. 그리고 대만에 와서 그것을 벽에 박았습니다. 그리고틀엇는 데 그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수도꼭지만 장치하면 거기에서 물이 나온 줄로 알았습니다. 어떻습니까?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옵니까? 물이 나올 리 없지 않습니까? 물은 저수지에서 오거나 수원지에서 오지 않습니까? 가끔 우리가 하나님 믿으면서 속는 것이 이것입니다. 다른 무엇에서 행복이 나오는 줄 알고 그것만 바라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수도 파이프가 닿지 않으면 행복의 생수가 공급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생수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2월로 오면서 하나님은 우리의 관심을 천국으로 향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믿음으로 성장하기 원하느냐? 그렇다면 천국을 사모하라“. 천국은 우리에게 소중한 곳이면서도 우리가 너무 자주 잊고 사는 곳입니다. 우리는 보통 천국은 죽은 다음에 가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천국? 때가 되면 가는 곳이야. 나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어. 차차 이야기해“. 이것은 죽은 다음에 가는 천국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은 죽은 다음에 가는 곳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모든 공간입니다. 천국이 얼마나 중요한지 성경은 천국에서 시작해서 천국으로 마칩니다. 성경은 에덴으로 시작합니다. 에덴은 천국의 모형이었습니다. 요한 계시록은 새 하늘과 새 땅, 천국의 완성으로 마칩니다. 예수님이 천국에서 와서 천국을 살다가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평생 선포한 메시지가 천국입니다. 막1:14-15,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5개의 큰 교훈을 말씀하셨는 데 마5-7장, 산상수훈, 10장, 13장, 18장, 20장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교훈의 공통점은 천국입니다. 천국을 우리가 어떻게 이룰 것인가? 천국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 이것이 예수님이 가르친 모든 교훈의 주제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에서 오셔서 천국을 이루신 후 천국으로 돌아 가셨습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천국은 하늘에 있습니다. 펄시 콜레 목사님이 쓴 책이 있습니다. “내가 본 천국”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콜레 목사님이 남미의 아마존강 지역에 사는 원주민들을 선교하기 위해 정글을 여행하다가 환상중에 천국과 지옥을 보고 쓴 책입니다. 이 책에 보면 천국의 크기가 나옵니다. 사방 2400킬로의 사각형 모양입니다. 그 중앙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는 높이가 80킬로입니다. 제가 그 책을 읽으며 생각했습니다. “천국이 생각보다 작군”. 사방 2400킬로면 한반도 서너배 가량입니다. 지구가 얼마나 넓고 지금까지 하나님 믿은 성도가 얼마나 많은 데 한반도의 서너 배밖에 안됩니까? 아마도 천국은 그보다 훨씬 클 것입니다. 문제는 천국의 문제가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천국이 아무리 넓어도 내가 못들어가면 소용이 없고 천국이 아무리 좁아도 믿는 사람은 다 들어갑니다. 예수님이 말씀한 천국은 우리가 죽어서 들어가는 천국 이상입니다. 천국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게십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공간은 여기 있건 저기 있건 모두 천국입니다. 우리는 살아서 천국을 이루다가 죽어서 천국에 갑니다. 죽어서 가는 천국이 있고 살아서 이루는 천국이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사나 죽으나 천국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천국으로 불렀습니다. 우리는 살아서 천국을 이루고 죽어서 천국으로 갑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천국을 이루며 살아야 합니까? 저는 자동문의 원리를 통하여 천국을 배웠습니다. 쇼핑 센터나 백화점 같은 데 가면 자동문이 있습니다. 우리가 열지 않았는 데 가까이 가면 자동적으로 열립니다. 문이 열리면 바로 들어가야 합니다. 시간을 놓치면 문이 닫힙니다. 문은 열릴 때 들어가야 합니다. 따라서 자동문의 원리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문은 열리게 되어 있다. 둘째 가까이 가야 열린다. 셋째 열릴 때 들어가야 한다. 여러분, 오늘 전도주일을 맞아 우리 모두 천국을 이루기를 원합니까? 세 가지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천국문은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세례 요한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세례요한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세례 요한을 대단하게 평가했습니다. 마11:11, “여자가 낳은 자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이것은 참으로 대단한 평가입니다. 모든 사람은 여자에게서 태어납니다. 따라서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든 인류를 의미합니다. 그러면 세례요한은 모든 인류중에서 가장 위대하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평가입니까? 다른 사람이 그렇게 평가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자신이 그렇게 평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세상에서 태어난 사람중 세례 요한이 가장 위대하다 했다면 실로 대단한 평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왜 세례요한이 가장 위대합니까? 세례요한이 처음으로 천국문을 열었기 때문입니다. 12절입니다. 마11: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세례요한이 한 일은 천국을 침노했다는 것입니다. ”침노했다“는 말은 길을 열었다는 말입니다. 굳게 닫힌 문을 연 것입니다. 히브리어로는 "하포레츠", 영어로는 "breaker"입니다. "길을 깼다. 문을 부쉈다”는 말입니다. 천국이 만일 길이라면 그동안 그 길은 닫혀 있었습니다. 한번도 그 길을 가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처음으로 그 길을 열었습니다. 마치 장보고가 청해진을 연 것처럼, 고선지 장군이 천산산맥을 연 것처럼, 컬럼버스가 신대륙을 연 것처럼 세례 요한이 처음으로 그 길을 열었습니다. 천국이 마치 문이라면 굳게 닫힌 문을 세례 요한이 처음으로 열었습니다. 하도 굳게 닫혀 있어 공성퇴를 쏘아 문을 부수고 군사들이 달려가 문으로 들어갔습니다. 마치 여리고 성처럼 굳게 닫힌 문을 여호수아가 연 것처럼 세례요한이 굳게 닫힌 천국문을 열었습니다. 그것이 “침노”입니다.
그때로부터 천국에 놀라운 변화가 생겼습니다. 다시 12절을 보면 천국은 친노당하고 침노하게 되어 있습니다. 한번 열기가 어렵지 한번 열리면 그때부터 천국은 누구나 들어갈 수 있습니다. 순서를 보십시오. “침노당하고 침노합니다”. 한번은 열리고 한번은 엽니다. 먼저는 수동형이고 다음은 능동형입니다. 천국은 누구나 열 수 있지만 우리가 열기 전에 이미 열려 있습니다. 천국이 세례요한 이후로 누구에게 열려있다는 것이 얼마나 은혜입니까? 우리가 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언제나 열려 있어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들어갈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이 이 땅에서 이루고 그리고 나중에 죽은 후에 들어갈 천국이 여러분에게 언제나 열려 있다는 것을 믿습니까? 여러분은 홍해 바다를 아십니까? 우리는 홍해 바다를 모세가 지팡이로 갈랐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십계”가 그런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러나 모세가 홍해바다를 가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갈랐습니다. 홍해바다는 모새가 연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열린 것입니다. 홍해 바다는 하나님이 그 백성을 살리기 위해 이미 열어 놓은 것입니다. 모세가 한 것은 바다를 향하여 지팡이만 든 것입니다.
여리고는 어떻습니까? 사실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에서 한 일이 없습니다. 양각 나팔을 불며 하루에 한 바뀌씩 돌고 마지막에 일곱 바뀌 돈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날 여리고가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마지막 날 여리고가 무너지는 장면을 보면 놀랍습니다. 수6:20절입니다.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그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하고”. 자, 백성이 한 것은 나팔소리를 듣고 소리지른 것 뿐인데 여리고가 무너졌다. 믿어집니까? 여러분, 소리지른다고 건물이 무너집니까? 한번 실험해 보실래요? 소리만 지르면 건물이 무너지는지 세종로 4거리에 가서 소리질러 보십시오. 건물이 무너지기는 커녕 고성방가로 경찰서에 끌려 가야 할지 모릅니다.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데 무너졌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미 무너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소리질렀기 때문에 무너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 무너지게 해 좋고 너희들도 무엇인가 해야 하기 때문에 와서 소리나 질러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지만 사람들도 압니다. “아, 우리가 소리질러서 무너진 것이 아니구나. 하나님이 이미 무너지게 하셨구나”.
여러분, 이 원리를 알면 신앙생활이 언제나 쉽습니다. 교회 부흥은 되는 교회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교회나 부흥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성장은 되는 지역이 있고 안되는 지역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니며 도저히 교회가 성장할 수 없는 곳에서도 성장하는 많은 교회들을 보았습니다. 모스크바에 한국 신학교가 있습니다. 주로 야간에 가르치고 교수진도 변변치 않습니다. 그런데 그 학교에서 공부한 러시아 목회자들이 교회만 세우면 성장합니다. 얼어붙은 동토의 땅, 러시아에도 교회만 세우면 300명, 600명 자랍니다. 그런가 하면 아주 더운 적도의 나라 인도네시아에 갔습니다. 적도 밑에 자바섬이 있습니다. 자바섬에는 미신을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지역에 세운 교회중에 13000명이나 모인 교회가 있었습니다. 수요일에만 1500명이 나옵니다. 미국은 되고 러시아는 안되는 것이 아닙니다. 날씨가 좋은 나라에서는 되고 더운 나라에서는 안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어디나 부흥되게 되어 있고 교회 성장은 곧 하나님의 뜻입니다.
저는 컴맹입니다. 목회자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저는 아무 것도 못합니다. 한번은 컴퓨터가 안돼서 목회자를 불렀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이 몇 번 만지니까 컴퓨터가 됩니다. 그 뿐 아니라 그가 여기 저기 만지니까 많은 프로그램이 기능합니다. 그가 옆에 앉아 이런 저런 기능을 보여 주었는데 제가 신기해서 물었습니다. “아니 이 컴퓨터로 그것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랬더니 그가 말합니다. “목사님, 본래부터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더니 다른 기능도 보여줍니다. 제가 또 물었습니다. “그것도 이 컴퓨터로 가능합니까?” 그랬더니 그가 말합니다. “목사님, 이것도 본래부터 가능한 겁니다.” 그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제가 그의 말을 듣고 은혜받았습니다. “본래부터 되는 것입니다”. 본래 되는 것을 제가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 믿음으로 대답해 보시겠습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묻든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예. 본래부터 되는 것입니다”. 묻습니다. 믿는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대답합니다. “예, 본래부터 되는 것입니다”. 사업하는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사업은 어떻습니까?” 대답입니다. “예, 본래부터 되는 것입니다”.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 진학을 꿈꾸는 학생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의 미래는 어떻습니까?“ 대답입니다. ”본래부터 되는 것입니다. 본래부터 잘 되게 되어 있습니다“. 또 묻습니다. 한신교회는 어떻습니까? 대답입니다. ”본래부터 되는 것입니다“. 한 가지 다른 질문으로 묻습니다. ”전도는 어떻습니까?“ 본래부터 잘 안되는 것입니까? 본래부터 잘 되게 되어 있습니까? 대답입니다. ”본래부터 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해봐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이 잘 되게 되어 있습니다. 무엇이거나 원리는 같습니다. 홍해가 열려 있듯이 여리고가 무너지게 되어 있듯이 믿는 자앞에서 안되는 일은 없습니다. 본래부터 잘 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자동문의 두 번째 원리가 있습니다.
가까이 가야 문이 열립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홍해바다를 열어 놓았어도 홍해바다는 가까이 가야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은혜가 많은 하나님이라도 모세가 왕궁에 있는 데 미리부터 홍해를 열어주지 않습니다. 홍해는 모세가 백성을 데리고 간절한 심정으로 그 앞에 설 때 열렸습니다. 여리고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성들이 나팔을 불며 성을 일곱 바뀌 돌 때 무너졌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떠나라” 명령하신 후 그가 가나안 땅에 도착할 때까지 한 말씀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같으면 고향을 떠나 가나안에 도착할 때까지 얼마나 고생하냐 얼마나 힘드냐 아브라함에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도착한 다음에야 말씀하시고 그 후에 또 다른 길을 인도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까이 와야 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왜 우리에게 기도하라 말합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몰라서 그렇습니까? 다 아십니다. 그래도 기도하라 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야 열리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책에 보면 이런 유머가 나옵니다. 숲속에 사는 한 유대인 농부가 장작을 패야 하는 데 그날따라 귀찮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오늘은 제가 힘듭니다. 하나님이 대신 패주세요”. 하나님이 말씀했습니다. “네가 해라”. 할 수 없이 농부는 투덜거리며 장작을 패려고 도끼를 들었습니다. 막 도끼를 들어 장작을 패려는 순간 하늘에서 번쩍 번개가 쳤습니다. 그 순간 장작이 패졌습니다. 농부가 놀라서 하나님께 소리쳤습니다. “하나님, 놀랐습니다. 벼락까지 쳐주시고”. 하나님이 말씀했습니다. “뭘 그런 것 다 가지고. 네가 도끼를 들 때까지 내가 기다린 것 뿐이야”.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다 하실 수 있습니다. 장작도 패주시고 사업도 해주시고 공부도 해주시고 목회도 해주시고 전도도 해주시고 하나님의 번개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도끼는 우리가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박사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서관에는 우리가 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큰 사업가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출근하고 일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목회자에게 우뢰와 같은 설교를 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준비는 목회자가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한신교회를 민족을 구원하는 큰 교회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는 우리가 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이미 열어놓은 부흥을 위하여 전도는 여러분이 하시겠습니까? "부흥도 하나님이 하시고 전도도 하나님이 하세요“. 하겠습니까? 우리 교회 곽준상장로님이 계십니다. 작년 여름에 전도에 도전받아 3개월동안 37명을 전도했습니다. 장로님이 말합니다. ”전도는 나가야 합니다. 나가면 전도됩니다. 그동안 왜 안나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전도 안된 것은 나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가면 반드시 예비된 영혼을 만납니다“. 우리가 도끼를 들면 벼락은 하나님이 칩니다. 하나님이 벼락칠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도끼를 들어야 하나님도 벼락을 칩니다. 기도도 전도도 가까이 가야 열립니다. 자동문의 세 번째 원리가 있습니다.
열릴 때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길을 열어 주시고 우리가 가까이 갈 때 열리게 하지만 반드시 문이 열릴 때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앞에 문은 열리지만 영원히 열리지 않습니다. 모든 인생의 원리가 똑같습니다. 학업도 문이 열릴 때 계속 해야 합니다. 때가 지나면 못합니다. 사업도 문이 열릴 때 열심히 해야 합니다. 불경기가 오면 어렵습니다. 영적인 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아시아 교회중 필라델피아 교회가 있습니다. 지금의 터키 서쪽 해안 지역에 있습니다. 이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계3:8, “볼찌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필라델피아는 아시아의 관문이었습니다. 그 문으로 아시아 사람은 로마로 가고 로마 사람은 아시아로 갔습니다. 다만 그 문은 아무 때나 열리지 않았습니다. 열린 시간에만 사람들이 출입했습니다. 문이 닫히면 들어가지도 나가지도 못합니다. 모든 영적 세계에도 문이 있습니다. 문이 열려야 가고 문이 닫히면 못 갑니다. 바울은 그것을 “믿음의 문”이라고 불렀습니다. 고전 16:8-9입니다. “내가 오순절까지 에배소에 유하려 함은 내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니라”. 그렇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천국문이요 그 문으로 영혼들은 들어오며 나갑니다.
하나님은 문을 열지만 어느 때나 문을 열어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문을 열 때 우리는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중국교회가 문이 열리고 있는 데 더 일찍 열릴 뻔 했습니다. 1269년, 스페인 출신의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왔는 데 그 때는 징기스칸이 다스릴 때입니다. 이름을 원나라라 불렀습니다. 마침 중국을 여행하던 마르코 폴로가 징기스칸을 직접 만나 그와 사귀고 서양의 존재와 그 발달한 문화와 종교를 소개했습니다. 그 말에 감동을 받은 징기스칸이 편지를 썼습니다. “이 나라에 서양의 과학과 종교가 필요하니 서양의 과학과 종교를 가르칠 선생을 보내달라”. 그런데 그 편지를 받은 스페인이 즉시 행동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꾸물대다가 프란치스칸 소속 선교사 두 사람을 보냈는 데 이미 25년이 지난 뒤였고 무엇보다 징기스칸이 죽은 뒤였습니다. 선교사는 중국에 갔으나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이미 문이 닫힌 후였습니다. 만일 그때 중국에 선교사가 들어갔더라면 중국뿐 아니라 한국도 일찍이 복음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한국은 그 반대였습니다. 문이 열렸으나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아 기회를 놓쳤습니다.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공식적으로는 1884년, 언더우드와 아펜셀러를 통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이전에 복음의 문이 열렸습니다. 1832년, 화란 선교사 구쯜라프를 통해서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그를 영접하지 않았고 쇄국정책으로 배마저도 항구에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구쯜라프는 얼마동안 머물다가 돌아갔는 데 언더우드가 이 땅에 발을 딛기 62년 전이었습니다. 그때 만일 복음이 들어왔다면 이 민족은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하고 아름다운 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1998년 이 땅에 교회를 세운 이래 전도의 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기도하며 하나님이 문열어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전도의 문을 열어 2009년부터 판교신도시가 입주를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영혼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최선을 다했으나 우리의 경험과 기도는 부족했습니다. 시간은 가고 아파트 문은 닫혀 갔습니다. 그때 얼마나 제가 마음이 아팟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올 해 또 다시 전도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6단지 1300세대가 순환형 아파트에서 분양아파트로 바뀌면서 4월 이후 입주될 예정이고 서해 그랑불 약 천 세대가 7월부터 입주할 예정입니다. 이번 기회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두 번째 기회입니다. 이번 기회만은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전교인이 기도와 몸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합심이 최고의 전도 전략입니다. 무엇이든지 한 가지 이상에 참여해야 합니다. 방관자가 없어야 합니다. 우리가 도끼를 들면 하나남이 벼락을 칠 것입니다.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오래전에 미국 테네시주 오크리지 지역에 한 작은 교회가 있었습니다. 숲처럼 조용하기만 한 이 지역에 어느 때부턴가 활기가 넘치기 시작했습니다. 정부 시책에 따라 이 지역에 커다란 핵 공장이 들어선 이후 사방에서 몰려온 임시 노동자들로 초만원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담임목사는 이것을 하나님이 주신 전도의 기회로 보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기 위해 교회 지도자들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한결 같이 전도를 반대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그 지역에 온 노동자들이 교회의 수준과 맞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임시직일 뿐이며 아무 재산이나 신분이 없기 때문에 자신들과 어울릴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 주에도 대화를 계속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노동자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할 수 없이 담임목사는 그 교회를 사임하고 말았습니다.
몇 년 후 담임목사는 우연히 그 지역을 지나가면서 옛날 교회를 보고 싶었습니다. 복잡한 주차장을 지나 한참동안 교회를 찾았을 때 그는 뜻밖에 교회가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건물에는 깜박거리는 네온사인과 함께 이렇게 선전하고 있었습니다. “바비큐, 당신이 즐길 수 있는 모든 것이 여기 있음”. 교회는 바비큐라는 술집으로 변한 것이었습니다. 아직도 대낮인데도 사람들은 그곳에 모여 고래고래 술을 마시며 싸움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때 교회는 전도하지 않아서 망해 버리고 술집이 교회를 사서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교회가 열심히 전도했다면 노동자들이 술집에 모여 그렇게 싸우지 않아도 될 것이었습니다. 목사는 가슴을 치며 그 지역을 떠났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잃어버리면 교회도 망하고 사회도 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잡으면 교회도 부흥하고 그 교회가 서 있는 지역사회가 복을 받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기회를 붙잡겠습니까? 놓치겠습니까? 미국의 교회처럼 전도하겠습니까? 술집이 되게 하겠습니까? 천국은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제 가까이 가야 합니다. 기도의 도끼를 들어야 응답의 벼락이 내리고 전도의 도끼를 들어야 부흥의 벼락이 칩니다. 우리 모두 마음을 합쳐 우리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가는 천국을 이룹시다.
마11:11-12 2011.2.13(일)
천국문은 열려있다
막1:14-15,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
천국문은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마11:11, “여자가 낳은 자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마11: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수6:20,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그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하고”.
가까이 가야 문이 열립니다.
열릴 때 들어가야 합니다
계3:8, “볼찌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고전16:8-9, “내가 오순절까지 에배소에 유하려 함은 내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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