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구주이신 예수님! (막 7:24~30)
요4:42 말씀과 요일4:14 말씀을 보면,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의 구주”라고 부릅니다. 이는 예수님이 유대인의 구주이실 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구주도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방인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사실은 구약성경도 이미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예컨대 사42:6을 보면, 하나님은 메시야를 “이방의 빛”이 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사49:6에 의하면,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그의 구원이 땅 끝까지 이르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몹시도 경멸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부정하게 여기면서, 이방인의 몸에 닿으면 자신들이 더러워진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방인과는 아예 신체접촉을 하려고 들지를 않았습니다.
물론 요4:22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바라시는 바는 유대인들만 구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유대인들을 통해서 모든 이방인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라고 명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 예수님은 유대교를 정면으로 배격하셨습니다. 유대교는 그들의 전통을 중시해서, 음식을 먹기 전에는 손을 잘 씻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씻지 아니한 손, 곧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으면, 사람이 더러워진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음식물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모든 악한 생각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세상의 구주로서 한 이방 여자를 구원하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모든 음식물에 이어서, 모든 사람을 깨끗하다 하신 셈이십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오늘 본문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이방 지역으로 가신 예수님(24절).
막7:24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지금까지 예수님은 갈릴리의 여러 촌을 두루 다니시며 사역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의 게네사렛 땅에 있는 어떤 집에서 일어나셨습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은 거기를 떠나서, 이방 지역인 두로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두로는 지중해의 한 해변 도시로서, 갈릴리에서 북쪽으로 약 5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 당시 두로는 그 위쪽의 또 다른 해변 도시 시돈과 더불어서 베니게에 속했습니다. 베니게, 곧 페니키아는 오늘날의 레바논에 해당합니다.
오늘 본문 바로 다음절인 막7:31을 보면, 예수님은 두로에서 시돈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곳에서 갈릴리 호수 오른쪽에 있는 데가볼리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그런 후 예수님은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 오른편에 이르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때 예수님은 이방 땅에서 상당히 오랜 시간을 보내신 것입니다. 짧으면 몇 주, 길면 몇 달 정도 예수님은 이방 지역에서 지내셨을 것입니다. 아무튼 오늘 본문 말씀대로, 예수님은 갈릴리를 떠나셔서 이방 땅인 두로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그러면 왜 이 때 예수님은 먼 이 방 땅으로 가셨습니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서였습니까?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두로나 시돈에서, 또는 데가볼리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는 기록은 전연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두로 지방에 있는 한 집에 들어가셔서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했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때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과 함께 이방 땅으로 가신 이유와 목적을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 때 예수님이 이방 땅으로 가신 것은 그 곳에서 공적으로 사역하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과 함께 그 곳에서 조용한 시간을 보내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전에도 이와 같은 시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시고, 한적한 곳 벳새다 빈들로 가셨습니다. 그러나 벳새다 빈들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오병이어로 그들 모두를 배불리 먹여주셨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게네사렛 땅으로 가셨습니다. 그러자 그 곳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서, 예수님에게 모든 병자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다 고쳐주셨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놀라우신 능력을 보고서는,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 자기들의 임금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을 이방 나라인 로마의 통치에서, 또한 역시 이방인인 분봉 왕 헤롯의 통치에서 벗어나게 해주시기를 바랐습니다.
이두매 사람, 곧 에돔 사람의 피가 흐르고 있는 분봉 왕 헤롯은 세례 요한을 목베어 죽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서, 자기가 죽인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마저 죽이기를 바랐습니다.
또한 그 당시 유대교의 주축을 이루고 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도 호시탐탐 예수님을 죽여 없앨 수 있는 빌미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자신들의 종교를 정면으로 배격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할 때 예수님은 따로 그의 제자들과만 함께 하는 시간이 필요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예수님은 그들을 집중적으로 가르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데리시고, 이방 땅으로 가셨던 것입니다.
다시금 오늘 본문을 봅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했지만, 숨길 수 없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이 두로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것은 당연할 일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막3:7~8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예수님의 소문은 이미 두로 지방에 널리 퍼져있었습니다.
아마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여자도 그 때 갈릴리 바다로 갔던 두로 사람들 가운데 섞여 있었을 것입니다. 그 곳에서 그 여자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들었고, 또한 예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능력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15:22 말씀처럼, 그 여자는 예수님이 바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여자는 뜻밖에도 예수님이 자기 지방으로 오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얼른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둘째로, 이방 여자를 용납하신 예수님(25~28절).
막7: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막7: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그 여자에게는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이 있었습니다. 더러운 귀신은 말 그대로, 그 여자의 어린 딸에게 온갖 더럽고도 악한 짓들을 행했을 것입니다. 그 여자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즉시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찾아왔습니다.
그 여자는 예수님에게 와서,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렸습니다. 막5:22 말씀을 보면,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유대인이었습니다. 반면에 그 여자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 여자는 헬라인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종종 이방인 전체가 헬라인이라고 표현됩니다. 알렉산더가 세상을 제패한 이래로, 헬라 문화가 온 세계에 꽃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단적인 예로 신약성경도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롬1:16 말씀을 보면, 복음이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헬라인은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유대인과 헬라인이 서로 대조적으로 사용될 때, 헬라인은 유대인을 제외한 전체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아무튼 그 여자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그 여자는 수로보니게 족속이었습니다. 수로보니게는 수로와 보니게를 합친 단어입니다. 앞에 나오는 “수로”는 수리아를 의미하고, 뒤에 나오는 “보니게”는 베니게를 의미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두로는 베니게에 속한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뒤에 로마가 베니게를 점령하고 난 뒤, 로마는 베니게를 보다 넓은 지역인 수리아에 속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수로보니게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마15:22 말씀을 보면, 그 여자를 가나안 여자라고 불렀습니다. 신7:2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이미 오래 전에 그 여자의 조상들은 가나안 땅을 떠나서, 베니게로 옮겨가서 살았을 것입니다.
아무튼 유대인이었던 회당장 야이로도, 또한 헬라인이었던 수로보니게 족속의 여자도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렸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예수님은 세상의 구주이시기 때문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가 예수님에게 엎드려 경배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 여자는 예수님에게 경배하면서,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물론 그 여자는 그 동안 자기 족속들이 대대로 믿어왔던 신들 곧 바알과 아세라, 또는 아스다롯에게 똑같은 간구를 해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부 부질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살전1:9 말씀과 같이, 그 여자는 과거의 헛된 우상들을 다 버리고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 곧 예수님에게 나아와서 경배하며 간구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사용된 동사 “간구하다”의 시제는 미완료형입니다.
그러니까 그 여자는 예수님에게 계속해서 반복하며 간구했던 것입니다. 왜 그 여자는 예수님에게 계속해서 간구했습니까? 마15:23 말씀이 밝히듯이, 그 여자의 계속되는 간구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제자들이 보다 못해서, 예수님에게 나아와 한 말씀 여쭈었습니다. “이러다가는 온 동네가 떠들썩하겠습니다. 그러니 가타부타 그 여자에게 대답을 주셔서, 그를 얼른 돌려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제야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여자의 계속되는 간구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님은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셨습니까? 이는 예수님에게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도 아니며, 예수님에게 능력이 없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의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하셨습니다. 롬4:20 말씀처럼, 하나님은 그 시험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그 여자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시려고, 의도적으로 그를 시험하셨던 것입니다.
막7: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수로보니게 여자의 간구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님은 하나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언뜻 보면, 예수님의 대답은 매우 냉정하게 들립니다. 마치 예수님이 그 여자의 간구를 매정하게 거절하신 것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나오는 “개”는 흔히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경멸하며 부르는 말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면서 이방인들은 개와 같이 더럽고 부정하다고 여겼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자가 간구할 때, 처음에는 예수님이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더니 이제는 예수님이 그의 대답 속에서 “개”라는 단어를 노골적으로 사용하심으로, 이방인이 그것도 이방인 여자가 들을 때 모욕감을 느낄 수 있게 하셨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그 여자를 구원하실 의향이 있으신가 없으신가? 그와 같이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예수님은 그 여자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시려고 계속적으로 시험하셨던 것입니다.
예컨대 베다니의 나사로가 병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소식을 들으셨지만, 얼른 베다니로 가셔서 그를 고쳐주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미루셨습니다. 이는 요11:15 말씀과 같이,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믿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듯했지만, 결국은 다 떠나갔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피상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여자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셔서, 구원에 이르는 참 믿음을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시려 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주목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예수님의 대답은 매정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이방인의 구원을 배제하시는 말씀을 하지는 아니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라는 단어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때 예수님은 구원의 순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원이 먼저는 유대인에게입니다. 그리고 난 뒤에 헬라인 곧 이방인에게입니다. 예수님은 이방인의 구원을 배제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있음을 은연중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막7:28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수로보니게 여자의 대답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아니, 유대인이면 다예요? 당신들이 뭐가 그리 잘 났다고, 우리를 더러운 개처럼 취급하나요?” 아마도 그 여자는 입을 삐쭉거리면서 그와 같이 반문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바라시는 대로, 그 여자는 매우 신앙적인 대답을 했습니다. “주여 옳소이다.” 그는 예수님을 주라고 불렀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바알이나 아세라, 또는 아스다롯이 그의 주가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예수님만이 변함없는 그의 주였습니다.
또한 수로보니게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조금도 불평하거나 원망하거나 반박하지 않았습니다. 그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그 동안 더러운 개와 같이, 더러운 우상들을 섬겨왔던 이방인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면서 그 여자는 예수님의 비유를 그대로 받아, 또 다시 예수님에게 간구했습니다.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는 달리, 그 여자는 자신을 낮추면서 오로지 예수님의 긍휼을 구할 따름이었습니다.
아울러 이 때 수로보니게 여자는 예수님의 비유를 올바르게 이해했습니다. 상 아래 있는 개들이 먹는 부스러기라고 해서, 상에 앉은 아이들이 먹는 것과 종류가 다르지는 않습니다. 똑같은 상에 차려졌습니다. 똑같은 음식입니다. 똑같은 떡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의 계시는 똑같습니다. 믿음의 대상도 같습니다. 구원의 길도 같습니다. 예수님 이외의 다른 이로써는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사실을 이해했기에, 그 여자는 예수님에게 계속해서 간구했던 것입니다.
셋째로, 이방 여자를 구원하신 예수님(29~30절).
막7:29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이 말을 하였으니.” 예수님은 수로보니게 여자의 말을 기뻐하셨습니다.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마15:28은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 여자가 큰 믿음의 말을 한 것을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믿음이 크다 작다하는 것은 상대적인 말입니다. 예컨대 예수님은 종종 그의 제자들에게 믿음이 작다고 나무라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늘 함께 했습니다. 따라서 마땅히 큰 믿음을 가져야 했습니다. 그러하지 못할 때, 그들은 믿음이 작다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반면에 수로보니게 여자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는 성경도 없었고, 하나님의 약속도 없었습니다. 주변에는 우상들만 가득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적인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믿음이 크다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자는 예수님을 “주”라고 불렀습니다. 이제 더 이상 바알이나 아세라나 아스다롯이 그의 주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그의 주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롬10:9~10의 말씀과 같이, 그는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수로보니게 여자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교만하게 자기의 의를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겸손하게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얻게 해달라고 예수님에게 긍휼을 구할 뿐이었습니다.
또한 수로보니게 여자의 믿음은 확고했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냉정한 대답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해서 예수님에게 간구했습니다. 야곱이 얍복 나루에서 하나님을 끝까지 붙들었듯이, 그도 예수님에게 끝까지 매달렸습니다.
아울러 수로보니게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이 좀 심한 듯한 말씀을 하셨지만, 그는 조금도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시자, 그는 순종하면서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렇듯 수로보니게 여자는 이방인이었지만, 그는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는 겸손하게 예수님만 의지했습니다. 그의 믿음은 견고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은 그의 믿음이 크다고 칭찬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수로보니게 여자의 간구도 들어주셨습니다.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대로, 수로보니게 여자는 구하는 것을 받았습니다. 찾는 것을 찾아내었습니다. 그리고 두드린 것이 그에게 열려졌습니다.
막7: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수로보니게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자기 집에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자신의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워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과연 귀신이 그의 딸에게서 나갔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무한하십니다.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도 초월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아이가 있는 곳으로 친히 가시지 않으셨지만, 그 아이에게서 더러운 귀신을 완전히 내쫓아주셨습니다.
물론 귀신은 곱게 나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말 그대로 더러운 귀신입니다. 막1:26이나 막9:20 말씀처럼, 분명 더러운 귀신은 나가면서 그 아이에게 심한 경련을 일으켰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는 기진맥진한 채 침상에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세상의 구주이십니다. 수로보니게 여자를 구원하신 예수님은 나도 구원하셨습니다. 그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신 예수님은 나의 믿음도 견고하게 하십니다. 그의 간구를 들어주신 예수님은 나의 간구도 들어주십니다.
수로보니게 여자가 고백한 것처럼, 예수님은 나의 주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마음을 다하여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나의 목숨을 다하여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나의 뜻을 다하여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이러한 고백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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