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 (막8:1~10)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데리시고, 한 동안 갈릴리를 떠나 이방 땅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두로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그 곳에서 예수님은 한 이방 여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를 구원하시며, 또한 그의 딸에게서 귀신을 내쫓아주셨습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은 그 위쪽에 있는 시돈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는 시돈을 지나셔서, 갈릴리 호수 동남쪽에 있는 데가볼리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셔서, 갈릴리 호수 오른편에 이르셨습니다.
그 때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님에게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서, 각종 장애가 있는 자들을 데리고 예수님에게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그들의 장애를 다 고쳐주셨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이방 땅에서 행하신 마지막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곳에 모인 이방인들에게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적을 베푸셔서, 그들 모두를 배부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방 땅에 계신 동안,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무엇을 가르치시기를 바라셨을까요? 한 마디로 예수님은 그들에게 예수님의 지상명령, 곧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할 준비를 갖추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이방 땅으로 가셔서, 한 이방 여자를 구원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이방인들이 가진 장애들을 다 고쳐주셨습니다. 아울러 이방인들에게 먹을 것이 없을 때, 예수님은 그들을 배불리 먹여주셨습니다.
이런 일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무엇을 깨달았겠습니까? 예수님은 세상의 구주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이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 이후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오늘 본문을 세 대지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무리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1~3절).
막8:1 그 무렵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 오른편에 있는 어떤 산에 오르셨습니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모여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각종 장애가 있는 자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의 발 앞에 앉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장애를 온전하게 고쳐주셨습니다.
그러한 소문을 듣고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오늘 본문 2절 말씀과 같이, 그 때 예수님은 사흘을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런 가운데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은 큰 무리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일전에 벳새다 빈들에 큰 무리가 모인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남자만 오천 명이 모였습니다. 이번에도 데가볼리 지방 근처에 있는 갈릴리 호숫가에 또다시 큰 무리가 모였습니다. 마15:38 말씀처럼, 이 때도 남자만 사천 명이었습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 때 벳새다 빈들에 모였던 큰 무리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반면에 이번에 갈릴리 호숫가에 모인 큰 무리는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아무튼 이번에도 여자들과 어린아이들까지 포함하면, 일만 오천 명은 족히 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먹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들은 갈릴리 호숫가의 광야에서 사흘이나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따라서 설사 그들이 먹을 것을 가지고 왔었더라도, 이제는 동이 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물론 사람이 사흘을 굶는다고, 죽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사십 일이나 금식하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람들을 그냥 돌려보내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굶긴 채로 돌려보내지를 아니하셨습니다.
요6:6 말씀처럼, 예수님은 친히 어떻게 하실 지를 아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서 말씀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그들을 불러서 말씀하셨습니까? 예수님은 그들 역시 이방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함께 품기 바라셨던 것입니다.
막8:2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막8:3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
예수님은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일전에 벳새다 빈들에 모인 유대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때 예수님은 갈릴리 호숫가에 모인 이방인들도 유대인들처럼 똑같이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게 적대심을 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부정하게 여기면서, 아예 이방인들과는 상종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바로 그와 같은 환경에서 지금껏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인들만 불쌍히 여기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인들도 똑같이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구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구주이실 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구주도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이 때 예수님은 이방의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까? 예수님은 그들이 처한 힘든 상황을 이해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그들 이방 무리가 처한 어려운 상태를 네 가지로 설명하셨습니다.
첫째,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나 지났습니다. 오늘 본문 4절 말씀처럼, 그 곳은 광야였습니다. 낮에는 햇빛이 뜨거웠습니다. 밤이면 땅바닥에서 잠을 자야 했습니다. 그와 같이 열악한 환경에서 그들은 이미 사흘이나 보냈습니다.
둘째,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근처에는 인가가 없었기 때문에, 먹을 것이 없으면 굶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지켜보느라고, 예수님의 곁을 잠시도 떠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셋째, 만일 그들이 굶은 채 집으로 간다면 그들은 길에서 기진할 것입니다. 지금은 그들이 예수님 때문에 열광하느라고, 허기진 것을 잊어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집으로 돌아간다면, 그들은 분명 가는 길에서 맥이 다 빠지고 말 것입니다.
넷째,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데가볼리 지방은 열 개의 도시로 이루어졌습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가까운 곳도 있었지만, 멀리 떨어진 곳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멀리서 온 사람들이 굶고 간다면, 가는 길에 그들은 더욱 기진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긍휼은 제한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도 불쌍히 여기시며, 이방인들도 불쌍히 여기십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예수님에게 나아오면, 예수님은 그의 필요를 아시고 그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리고는 그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예수님의 긍휼은 그 넓이도 무한하시지만, 그 깊이 또한 무한하십니다. 예수님은 두로 지방에서 한 이방 여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를 구원해주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갈릴리 호숫가에서 사람들이 데리고 온 각종 장애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장애를 전부 다 고쳐주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그들이 일생 동안 짊어지고 가야할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먹을 것이 없는 이방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 모두를 배부르게 먹이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그들 모두에게 그 날 하루의 일용할 양식까지도 넉넉하게 공급해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크고도 영원한 것부터 일상의 사소한 것까지 모든 면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가면,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며 우리의 문제를 다 해결해주십니다. 예수님의 긍휼은 무궁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무리를 배부르게 하신 예수님(4~7절).
막8:4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왜 이 때 제자들은 이와 같은 대답을 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이 벳새다 빈들에서 행하신 놀라운 이적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습니까?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그들은 그 때의 일을 잊어버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대답에서 “배부르게”라는 단어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사람들을 먹이는 것이 아닙니다. 배부르게 먹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사람들을 먹이시면, 배부르게 먹이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던 때가 언제였습니까? 바로 벳새다 빈들에서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때의 일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에 이와 같은 대답을 했던 것입니다.
이 때 제자들이 한 답변의 의도는 이와 같았습니다. “주여, 우리는 할 수가 없나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능히 하실 수 있나이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곳에 모인 무리가 이방인들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면, 예수님은 얼마든지 그 곳에 모인 무리를 배부르게 하실 수가 있으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점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치 않았습니다. 단지 그들은 과연 예수님이 이방인들을 배부르게 하실 것인가에 대해서 의문을 품었던 것입니다.
막8:5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이로소이다 하거늘
예수님은 제자들을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능력을 의심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이 세상의 구주이심을 밝히 보이셔야 했습니다. 그래야 그들이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떡이 몇 개 있는지 물으셨습니다. 그들은 일곱이라고 답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생선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벳새다 빈들에서 떡과 생선으로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신 것을 기억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7절 말씀과 같이, 그들은 그들에게 있는 작은 생선 두어 마리도 떡과 함께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물론 그 많은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기에는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전에 안드레가 했던 말처럼, 이것들이 이 많은 사람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묻는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들이 배워야 할 것은 이방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막8:6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나누어 주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누어 주더라
막8:7 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지라 이에 축복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나누어 주게 하시니
이는 예수님이 이적을 행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호숫가에 모인 이방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이적을 베푸셔서 그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우리는 이 때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을 일곱 과정으로 나누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무리를 명하여 땅에 앉게 하셨습니다. 벳새다 빈들에서와 같이 오십 명씩 떼를 지어 앉게 하셨을 것입니다. 단지 그 때는 봄철이어서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여름 햇볕에 잔디가 다 말랐기 때문에, 그냥 땅에 앉게 하셨습니다.
둘째, 떡 일곱 개를 가지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들에게 있는 떡 일곱 개를 예수님에게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그것들을 받으셔서 손에 쥐셨습니다. 보잘것없는 것이라도 예수님께 드리면, 예수님은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다시금 안겨주십니다.
셋째, 예수님은 축사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떡 일곱 개를 축복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그 떡을 먹는 무리를 축복하셨다는 뜻도 아닙니다.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다는 뜻입니다.
넷째, 예수님은 떡을 떼셨습니다. 이는 식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우리 나라도 어른이 숟가락을 들면, 그 때부터 온 가족의 식사가 시작됩니다. 마찬가지로 이 때도 예수님이 떡을 떼심으로, 드디어 식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다섯째, 예수님은 떡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이 때의 동사 “주다”가 미완료형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이 때 이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새로운 떡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무리가 배부르기까지, 예수님은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떡을 주셨습니다.
여섯째, 예수님이 주신 떡을 제자들은 무리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귀하게 쓰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우리도 귀하게 쓰시기를 바라십니다.
일곱째, 예수님은 생선도 그와 같이 하셨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예수님이 작은 생선 두어 마리를 가지시고 축복하셨다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 역시 하나님께 감사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무리가 떡과 생선을 곁들여서 맛있게 먹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벳새다 빈들에서 유대인들을 위하여 떡과 생선을 창조하셨습니다. 또다시 예수님은 갈릴리 호숫가에서 이방인들을 위하여 떡과 생선을 창조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일은 예수님만이 하십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14:9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예수님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지금도 변함없이 우리의 심령을 채워주십니다.
“주 예수 해변서 떡을 떼사 무리를 먹이어 주심같이, 영생의 양식을 나에게도 풍족히 나누어주옵소서. 생명의 말씀인 나의 주여 목말라 주님을 찾나이다. 해변서 무리를 먹임같이 갈급한 내 심령 채우소서.” 예수님은 언제나 나의 갈급한 심령을 채워주십니다.
셋째로, 무리를 흩어 보내신 예수님(8~11절).
막8:8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으며
막8:9 사람은 약 사천 명이었더라....
사흘이나 광야에서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매우 허기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 그들이 먹은 것은 겨우 허기를 면할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배불리 먹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긍휼은 항상 풍성하시며, 또한 예수님의 역사는 언제나 온전하십니다.
모두가 다 배불리 먹고 난 후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남은 조각을 거두었습니다. 일전에 벳새다 빈들에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때의 일을 기억하면서, 그들은 이번에도 남은 조각을 버리지 않고 다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벳새다 빈들에서는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였습니다. 그러나 이 때는 남은 조각이 일곱 광주리였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났습니까? 바구니와 광주리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바구니는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것으로, 그 용량이 광주리보다는 적습니다.
반면에 광주리는 이방인이 들고 다니는 것으로, 유대인의 바구니보다는 그 속에 들어가는 양이 훨씬 많습니다. 예컨대 행9:25 말씀을 보면, 바울이 광주리에 담겨 다메섹을 탈출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방인의 광주리는 그 안에 사람이 들어갈 만큼 큽니다.
따라서 아마도 이번에 거둔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는 저번에 거둔 남은 조각 열두 바구니보다도 더 많은 양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미 사흘이나 광야에서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도 저번보다는 더 많은 양의 음식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무리를 배부르게 하시고, 또한 그의 제자들도 배부르게 먹도록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나 거두게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은 그들이 며칠 동안 먹을 양식을 한꺼번에 공급하지는 아니하셨습니다. 오직 일용할 양식만 공급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는 풍성하시지만, 예수님의 역사는 또한 정확하십니다. 예수님은 전혀 부족하지도 않고, 또한 조금이라도 낭비함이 없도록 세밀하게 역사하셨습니다. 물론 이것도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때 모인 무리의 수는 약 사천 명이었습니다. 물론 마15:38 말씀과 같이, 그 수에는 여자와 어린이는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전체의 수는 일만 오천 명이 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때 엄청난 양의 떡과 생선이 예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던 것입니다.
막8:9 ....예수께서 그들을 흩어 보내시고
막8:10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시니라
예수님은 그 곳에 모인 무리를 흩어 보내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그 곳에서 사흘을 보냈습니다. 그 동안 예수님은 그들이 데리고 온 장애자들을 다 고쳐주셨습니다. 또한 그들이 돌아가는 길에 기진하지 않도록, 예수님은 그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도 말씀하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사흘이나 그들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영과 육으로 그들의 필요를 다 채워주신 후에, 비로소 그들을 흩어 보내셨습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은 곧 그의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시고, 갈릴리 호수 서편에 있는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그 곳은 갈릴리의 게네사렛 땅에서 조금 남쪽으로 떨어져 있었습니다. 마15:39 말씀과 같이, 그 곳은 마가단 지경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아무튼 짧으면 몇 주, 길면 몇 달 동안,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이방 지역을 두루 다니셨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다시금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갈릴리로 되돌아오셨습니다. 그 동안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방 땅에서 무엇을 배웠겠습니까?
예수님은 세상의 구주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이방인들에게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았기 때문에, 그 이후 그들은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들은 그들이 맺은 열매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러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 자신을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우리에게 무엇인들 못 주시겠습니까?
예수님의 날개 밑에 거합시다. 예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를 지키시며, 또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받았음으로,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 예수님의 향기를 만방에 널리 퍼뜨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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