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의 본질을 밝히신 예수님! (막 8:31~33)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을 데리시고 갈릴리 북쪽에 있는 국경지대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으로 가셨을 때입니다. 그 곳에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시험하시려고, 먼저 그들에게 이와 같이 물어보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람들의 견해를 세 가지로 요약해서 대답했습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하고,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고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기 때문에, 그와 같이 초인적인 능력들을 행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이렇듯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능력들을 부인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보지는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그들이 생각하던 그리스도와 예수님 사이에는 너무도 많은 차이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그들이 유대교에서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는 믿지를 않았습니다. 그 대신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보다 앞서 하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선지자로 여겼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다시금 그의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때 베드로가 모든 제자들을 대표해서 이와 같이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보다 앞서 보내심을 받은 선지자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로부터 신앙 고백을 들으신 후에, 그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아직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예수님의 부활이 있기 이전이어서, 복음의 내용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상태에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심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들은 기껏해야 예수님을 병 고치시는 자 또는 놀라운 이적을 행하시는 자 정도로만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그리스도로 오신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그리스도로 오신 목적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하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며 부활하시기 전까지는,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의 제자들에게 경고하셨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그가 그리스도로서 하셔야 할 사역을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까지 그리스도를 잘못 이해하면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그리스도의 사역입니다(31절).
막8: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인자”(人子)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는 말 그대로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동시에 사람의 아들이십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로서 하셔야 할 사역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를 칭하실 때, 인자라는 칭호를 즐겨 사용하셨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본질적인 사역을 네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많은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둘째,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는 것입니다. 셋째,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넷째, 사흘 만에 살아나는 것입니다. 차례대로 살펴봅니다.
첫째, 많은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많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질적으로는 심한 고난을 받으셨지만, 양적으로는 많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들의 예를 한번 들어봅니다.
지도자들의 질시, 사람들의 배척, 가룟 유다의 배신, 체포와 결박, 제자들의 도망, 베드로의 부인, 심문, 희롱, 침 뱉음, 주먹질, 옷 벗김, 채찍질, 가시관, 십자가에 못 박힘, 창으로 옆구리를 찔림 등등 실로 예수님은 많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둘째,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세 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유대인들의 최고 의결 기관인 산헤드린(Sanhedrin), 곧 공회를 형성하는 삼대 구성원들이었습니다.
장로들은 이스라엘의 각 지파나 부족을 대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성전 업무를 맡은 자들로서, 사두개파에 속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서기관들은 성경을 연구하며, 손으로 복사하며, 가르치는 사람들로서, 주로 바리새파에 속했습니다.
유대인들의 공회는 70명의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가룟 유다를 매수했습니다. 또한 거짓 증인들을 세웠습니다. 그리고는 형식적으로 세 번에 걸쳐서 예수님을 심문을 했습니다.
요18:13 말씀처럼, 예수님은 먼저 안나스 앞에서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그 후에 마26:57 말씀처럼, 예수님은 대제사장 가야바를 비롯한 공회 앞에서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마27:1 말씀처럼, 그 다음날 새벽 또다시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오늘날의 삼심 제도와 같은 요건을 형식적으로 갖추었습니다. 그런 후 그들은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님이 신성 모독을 했기 때문에, 사형에 해당한다고 판결했습니다.
셋째,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는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로마의 총독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그에게 온갖 거짓말로 예수님을 고발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죄가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놓으려고, 예수님을 분봉 왕 헤롯에게 보내보았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때려서 놓겠다고 말해보기도 하고, 그들에게 예수님과 바라바 가운데 한 사람을 택하라고 말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강하고도 끈질긴 압박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뜻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빌라도의 군인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넷째, 사흘만에 살아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금요일 오전에 십자가에 달리셔서, 금요일 오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다음날 토요일, 곧 안식일에 예수님은 무덤에 계셨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은 안식 후 첫 날, 곧 주일 새벽에 살아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금요일에 죽임을 당하셔서 주일에 살아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날짜를 계산할 때, 그 날이 몇 시간이든 그 날 당일도 하루로 간주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금요일, 토요일, 주일 해서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첫째, 많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둘째,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셨습니다. 셋째,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넷째, 사흘만에 살아나셨습니다. 바로 이 네 가지가 그리스도의 본질적인 사역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헬라어 원어성경을 보면, “인자가”라는 주어 앞에 “필히,” 또는 “반드시”라는 뜻을 나타내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이들 네 가지 사역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필히 하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버린 바 되시고, 죽임을 당하시고, 사흘만에 살아나실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습니다. 이는 창세 전에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뜻이요,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 세워놓으신 계획이었습니다.
사53:5 말씀입니다. 우리의 허물 때문에, 그리스도가 찔려야만 했습니다. 우리의 죄악 때문에, 그리스도가 상해야만 했습니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리스도는 징계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우리의 나음을 위해서, 그리스도는 채찍에 맞아야만 했습니다.
시16:10 말씀입니다. 행2:31 말씀처럼, 베드로는 이 말씀을 인용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죽임을 당하더라도,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외에도 구약의 선지자들은 그리스도가 많은 고난을 받고, 버린 바 되며,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일관되게 말씀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이러한 사역들을 필히 하셔야만 했습니다.
오늘 본문 31절은 이와 같이 끝맺음을 합니다.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확실하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리스도를 잘못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때부터 예수님은 비로소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로서 하셔야 할 본질적인 사역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가르치셨습니다. 막9:31에서도, 또한 막10:33~34에서도 예수님은 계속적으로 똑같은 가르치심을 그의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둘째로, 베드로의 항변입니다(32절).
막8:32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로서 행하셔야 할 사역을 드러내 놓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막2:20 말씀처럼, 이미 예수님은 자신의 수난을 밝히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은연중에 묵시적으로 밝히셨을 뿐입니다. 반면에 지금은 드러내 놓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용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었고, 또한 다른 방향으로 잘못 이해될 소지도 전연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무슨 뜻인지를 묻는 제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예수님의 말뜻을 분명하게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불쑥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했습니다. 물론 다른 제자들도 똑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항변하다”라는 동사는 아주 강한 어조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같은 단어가 30절에서는 “경고하다”로, 또한 33절에서는 “꾸짖다”로 번역되었습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예수님보다 나이가 많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베드로는 조금 전에 예수님께로부터 칭찬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사실을 알게 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베드로는 마치 자기가 하나님의 대언자라도 되는 양 아주 자만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예수님을 꾸짖는 식으로 예수님에게 경고를 했던 것입니다.
먼저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었습니다. 아마도 이 때 베드로는 예수님 뒤에서 자기 손으로 예수님의 옷을 힘껏 붙잡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때 베드로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시지 못하도록 붙드는 듯한 동작을 취했던 것입니다.
그런 후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항변했습니다. 마16:22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라고 불렀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보다는 오히려 부인하려고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밝히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받아들이려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베드로가 모든 제자들을 대표해서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했던 것입니다.
그 뒤로도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로서 많은 고난을 받고, 버린 바 되며,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막10:37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두 제자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에게 이와 같이 구했습니다.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그들은 영광의 그리스도만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베드로가 보여준 모습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발을 씻으시려고 하자,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베드로는 비천한 모습의 그리스도를 상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24장에서 엠마오 마을로 내려가던 두 제자가 보여준 모습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얼굴에 슬픈 빛을 띠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받은 고난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슬퍼하며 당혹스러워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계속적인 가르치심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하셔야 할 본질적인 사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고 들면, 우리도 이와 똑같은 모습을 보일 때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예컨대 우리에게 어떤 어려운 일이나, 우리가 원치 않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대체적으로 이와 같이 기도할 것입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내게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내게는 아무런 고난이 없어야 합니다. 내게는 언제나 영광만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에 대해 예수님은 어떠한 대답을 하십니까? 다음절에서 분명하게 밝혀집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책망입니다(33절).
막8: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예수님은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으셨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동작 세 가지가 등장합니다. 먼저 예수님은 돌이키셨습니다. 그 다음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셨습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꾸짖으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돌이키셨습니다. 예수님은 뒤로 돌아서신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베드로는 예수님 뒤에서 그의 손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시던 걸음을 멈추시고, 뒤를 향하여 그의 몸을 돌리셨습니다.
그 다음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대답했던 것도, 또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했던 것도 제자들 전체의 의견을 대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제자들을 둘러보셨습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꾸짖으셨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베드로를 대표적으로 꾸짖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의 엄한 책망을 받음으로,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도 다함께 예수님의 엄한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곧이어 예수님이 베드로를 꾸짖으신 내용이 나옵니다. 먼저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호통을 치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예수님의 갑작스런 호통에, 분명 베드로와 그 주변에 있는 모든 제자들은 다 함께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조금전 베드로는 마치 자기가 하나님이라도 되는 양, 감히 예수님을 책망하면서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곧바로 그는 예수님에게서 사탄이라는 심한 말로 불리면서까지 호되게 야단을 맞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고하면 안 됩니다. 사람은 자기가 선 줄로 생각하지 말고, 넘어질까 늘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이 때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부르셨습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할 때, 예수님은 그 배후에 있는 사탄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막고자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면, 사탄은 자기의 머리가 상해야 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사람들의 죄 값을 대신해서 지불하면, 사탄은 그들이 자기의 권세에서 벗어날 것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탄은 광야에서 세 번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그 때 사탄은 예수님을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이면서 말했습니다.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사탄은 예수님에게 십자가 없는 영광을 약속함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막으려 했습니다. 마4:10 말씀을 보면, 그 때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그리고 눅4:13 말씀을 보면, 그 이후 사탄은 얼마 동안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그 뒤로도 사탄은 호시탐탐 예수님의 십자가를 막을 기회를 노렸습니다. 그러다가 이번에 사탄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이용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막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아셨기 때문에, 이번에도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베드로를 꾸짖으신 이유가 구체적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33절 하반부 말씀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일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31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첫째, 많은 고난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둘째,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셔야 했습니다. 셋째, 죽임을 당하셔야 했습니다. 넷째, 사흘만에 살아나셔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 곧 예수님이 이 땅에서 그리스도로서 행하시도록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정해놓으신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이란 한 마디로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영광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베드로가 생각했던 사람의 일이란 무엇입니까? 베드로를 비롯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가 십자가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영광만을 바랐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일이란 한 마디로 십자가의 고난 없이 영광을 얻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사탄이 노리고 있는 바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십자가를 막으려는 사탄에게 동조한 셈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호통을 치셨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본질적인 사역을 제대로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했습니다. 롬8:18의 표현을 빌리면, 그는 장래의 영광을 생각하지 않고 현재의 고난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있고 난 후에, 베드로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베드로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의 일을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그가 그리스도의 본질적인 사역을 분명하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벧전2:21을 보면,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밝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벧전2:24에서, 그는 사53:5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그러니까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본질적인 사역을 분명하게 이해했던 것입니다.
벧전4:13~14입니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이렇듯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 곧 고난을 통해서 영광에 이르는 길을 확실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고난을 받고 계십니까? 낙망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고난을 통해서 영광에 이르게 됨을 생각하며 위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벧전5:10 말씀입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고난은 잠깐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친히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며, 오늘의 고난을 통해서 내일의 영광을 얻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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