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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믿음의 이유를 밝히신 예수님! (막 8:35~38)

믿음의 이유를 밝히신 예수님! (막 8:35~38)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데리시고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그 곳에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들은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분명하게 자신들의 신앙을 예수님에게 고백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신앙 고백을 들으신 후, 자신이 이 땅에서 그리스도로서 하셔야 할 본질적인 사역을 네 가지로 밝히셨습니다. 첫째, 많은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둘째, 버린 바 되는 것입니다, 셋째,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넷째, 사흘 만에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역은 창세 전에 하나님이 정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시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영광만을 받으시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야 그들도 덩달아 영광을 누릴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했습니다. 이 때 베드로도, 또한 다른 제자들도 모두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돌이키시고, 제자들을 보시면서, 단호하게 베드로를 책망하셨습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막8:34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말하자면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믿음의 본질을 밝히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본질을 세 가지 요소로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둘째,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물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습니다. 마7:14 말씀처럼, 그 문은 좁고 그 길은 협착합니다. 또한 벧전4:18 말씀과 같이,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을 정도입니다. 그러니 참된 믿음을 가지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반드시 본질적이고도 참된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만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믿음의 이유를 우리에게 밝히셨습니다.

한 마디로 고난이 끝이 아니라, 그 뒤에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끝이 아니라, 그 다음에 면류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그 뒤를 따라서 영생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고난 그 너머에 장래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경고와 약속입니다(35절).


막8: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우리말 성경에는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헬라어 원어성경을 보면, 오늘 본문은 “왜냐하면”이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바로 앞 절에서 하신 말씀의 이유를 여기서 밝히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앞 절에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그런 후에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앞 절에서 하신 말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역설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이와 같이 생각합니다. “구원하고자 하면 구원할 것이요, 잃고자 하면 잃으리라.” 그런데 예수님은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과 예수님의 말씀은 서로 다릅니다. 그래서 언뜻 들으면, 예수님의 말씀이 쉽게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잘 음미해 보면,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을 역설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먹고 싶은 대로 먹고 자고 싶은 대로 잔다고 해서, 우리 몸이 건강해 집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건강을 해칩니다. 도리어 운동을 하면서 우리 몸을 괴롭혀야지, 우리 몸은 건강을 유지 할 수 있습니다.

몸을 피곤하게 만들어야, 몸은 피곤해지지 않습니다. 몸을 피곤하게 만들지 않으면, 몸은 피곤해 집니다. 진리에 반하는 듯하지만, 잘 음미해 보면 진리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역설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제 예수님은 역설적인 말씀으로 진리를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의 역설적인 말씀은 경고와 약속으로 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이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이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먼저 예수님의 경고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여기서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는 자는 누구이겠습니까? 대답은 자명합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자를 가리킵니다.

딤후3:2 말씀처럼, 그는 자기를 사랑하는 자입니다. 그는 이 땅에서 자기 목숨을 지키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그는 자기를 부인하기도 싫어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싶어하지도 않으며, 예수님이 걸어가신 고난의 길을 따르기도 원치 않습니다.

자연히 그는 넓은 문으로 들어가며, 넓은 길을 걸어갑니다. 당연히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멸망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이와 같이 경고하십니다. “잃을 것이요.” 그는 구원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영생을 잃고 말 것입니다.

곧이어 예수님의 약속이 나옵니다.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여기서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누구이겠습니까? 대답은 역시 자명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입니다.

자연히 그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며, 좁은 길을 걸어갑니다. 당연히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생명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이와 같이 약속하십니다. “구원하리라.” 그는 구원을 받기 때문에, 영생을 얻으며 영생을 누릴 것입니다.

행4:12 말씀처럼, 예수님 이외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은 전연 없습니다. 또한 딤전2:5 말씀처럼,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는 오직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뿐이십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는 단 두 종류의 문밖에 없습니다. 좁은 문과 넓은 문입니다. 요10:9 말씀처럼,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좁은 문이십니다. 예수님 이외에는 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문일 뿐입니다.

또한 이 세상에는 단 두 종류의 길만 있을 뿐입니다. 좁은 길과 넓은 길입니다. 요14:6 말씀처럼,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좁은 길이십니다. 예수님 이외에는 다 지옥으로 인도하는 넓은 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경고와 약속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두 가지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하도록 요구하십니다. 넓은 문과 넓은 길이냐, 아니면 좁은 문과 좁은 길이야? 자기 목숨이냐, 아니면 예수님과 복음이냐? 현재의 안일이냐, 아니면 장래의 영광이냐?

예수님의 경고를 명심합시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넓은 문과 넓은 길의 종국은 멸망입니다. 예수님의 약속을 바라봅시다.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좁은 문과 좁은 길의 목적지는 영생입니다.

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까? 예수님의 경고대로,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약속대로, 누구든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촉구입니다(36~37절).


예수님은 무리와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믿음의 본질을 밝히셨습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은 경고와 약속의 말씀으로, 그들에게 믿음의 이유를 밝히셨습니다. 곧이어 예수님은 두 개의 질문으로, 그들 모두가 참 믿음을 갖도록 촉구하십니다.

오늘 본문 36절과 37절은 둘 다 수사적 질문입니다. 수사적 질문이라 함은 당연한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일부러 질문 형태로 만든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누구라도 쉽게 그리고 바르게 대답할 수 있는 것들을 물어보십니다. 예수님의 첫째 질문입니다.


막8: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물론 이 세상에서 온 천하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이 온 천하를 모두 다 얻었다고 한번 가정을 해봅니다. 그러니까 이 때 예수님은 일종의 과장법을 사용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세상의 모든 땅과 모든 건물과 모든 보석과 모든 지식과 모든 권력과 모든 명예를 다 얻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자기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물어보십니다. “무엇이 유익하리요?” 대답은 명백합니다. “전혀 유익하지 않나이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죽은 사람은 더 이상 아무 것도 소유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죽은 후에는 영원토록 지옥에서 고통을 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비록 온 천하를 얻었다 하더라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그에게는 전혀 유익이 없습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가 그 좋은 예입니다. 그는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은 듯이, 그의 곳간을 더 크게 새로 지었습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만족해서 평안히 쉬면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이와 같이 말씀하십니다.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라.” 다시 말해서 “오늘 밤에 네가 죽으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그가 자기의 곳간을 크게 새로 짓고, 거기에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둔 들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그의 영혼이 지옥에 떨어진다면, 그는 그 때부터 영원토록 끊임없는 고통을 당해야 합니다. 그러니 그는 참으로 불행한 자이며, 어리석은 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렇듯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전혀 유익함이 없습니다.

사람의 목숨은 영원합니다. 그러나 요일2:17 말씀과 같이, 이 세상은 지나갑니다. 벧후3:10 말씀과 같이, 하늘은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은 뜨거운 불에 풀어질 것입니다. 사람의 목숨은 영원하기 때문에, 영원하지 못한 온 천하보다 더 귀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올바른 선택을 촉구하십니다. 온 천하보다 목숨이 더 소중합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질문이 계속 됩니다.


막8:37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예수님의 두 번째 질문에 누구든지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없나이다.” 사람의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두 번째 질문을 통하여, 사람의 목숨이 온 천하보다 더 귀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신 것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어리석은 부자를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예컨대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도로 찾으실 때, 그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내어놓겠다는 말을 한다고 가정해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과연 죽음을 면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죽어야만 합니다. 그의 목숨과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설사 그가 온 천하를 얻었다 하더라도, 그가 가진 온 천하와도 그의 목숨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목숨은 온 천하보다 더 귀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부자 청년도 역시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마19:21에서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많은 재물 때문에, 근심하면서 예수님을 떠나가 버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많은 재물을 자기의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목숨을 자신의 재물과 바꾸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이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떠했습니까? 이 때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위의 것을 생각하지 않고, 땅의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고난을 통해 영광에 나아가려 하지 않고, 고난 없는 영광만을 바랐습니다.

그러니 이 때 그들도 역시 어리석었습니다. 행여 우리도 사업 때문에 바쁘고, 출장 다니느라고 바빠서, 주일성수를 제대로 못하지는 않습니까? 사람을 만나느라고 바빠서, 하나님을 뵈옵는 일에 등한하지는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도 실상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우리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하고, 언제나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참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심판입니다(38절).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믿음의 이유를 밝히십니다. 먼저 예수님은 역설적인 말씀으로 경고도 하시며 약속도 하셨습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은 두 개의 수사적 질문으로 믿음을 촉구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참 믿음을 가지지 않으면, 그 결과는 예수님의 심판입니다.


막8: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예수님은 그 시대를 가리켜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라고 부르셨습니다. 음란하고 죄 많은 여인이 그의 남편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처럼, 그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바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지적하신 바와 같이, 그들의 구제도, 그들의 기도도, 또한 그들의 금식도 전부 외식이었습니다. 그들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듯했지만,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했습니다. 

그 시대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는 유대교를 신봉했습니다. 그러나 유대교는 외식과 형식에 사로잡힌 거짓 종교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교를 철저하게 배격하셨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전파하신 복음을 따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오셔서 그를 대신하여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버린 바 되시고, 죽임을 당하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온 천하보다 더 귀한 것이 사람의 목숨입니다.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목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만이 온 천하보다 더 귀한 우리의 목숨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우리를 대신해서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버린 바 되시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그 후 사흘 만에 다시 사셨습니다. 그러니 어찌 우리가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대속의 은혜를 깊이 생각합시다. 그리하면 우리는 저절로 예수님을 더욱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울러 우리는 저절로 예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순종하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며 예수님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베푸신 대속의 은혜를 무시하고, 예수님과 그의 말씀을 부끄러워하면 어떻게 됩니까?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또한 예수님의 말씀과 달리 자기를 부인함도, 자기 십자가를 짐도, 예수님을 따름도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미 예수님이 경고하신 대로, 그러한 사람은 자기 목숨을 영영 잃고 말 것입니다. 그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심판뿐입니다. 38절 하반부 말씀입니다.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초림의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버린 바 되시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흘 만에 다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며, 우리의 거처를 예비하십니다.

때가 되면 예수님은 다시 오십니다. 물론 재림의 예수님은 초림의 예수님과는 다른 모습으로 오십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오십니다. 요5:22 말씀대로,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심판을 다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는,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오십니다. 마13:39 말씀과 같이, 거룩한 천사들은 추수꾼입니다. 마13:30 말씀처럼, 추수꾼은 가라지들을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습니다. 말하자면 천사들은 추수꾼이 되어, 예수님의 심판을 수행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오십니다. 초림의 예수님은 세상의 구주로 오셨지만, 재림의 예수님은 세상의 심판주로 오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다시 오셔서, 그와 그의 말씀을 부끄러워하는 자를 어떻게 심판하십니까? 

오늘 본문 마지막에 있는 말씀처럼, 예수님도 그를 부끄러워하십니다. 예수님은 도무지 그를 알지 못하니, 예수님에게서 떠나가라고 그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 결과 그는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겨, 거기서 영벌을 당하며 영원토록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사랑하며,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히2:11 말씀처럼, 예수님은 그를 형제라고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는 예수님과 더불어 영생을 누릴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무리와 제자들은 불안한 생각과 기대하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임을 당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게다가 그들도 예수님이 가신 길을 걸어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그들은 불안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고난 너머에 영광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그들은 기대도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불안한 생각도 또한 기대하는 생각도 다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위로하시며, 그들에게 소망을 주시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바로 다음에서, 예수님은 장차 그가 다시 오실 때 나타내실 하나님의 영광을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른바 변화 산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형되신 일입니다. 잠시 예수님은 그가 입으신 육체를 벗으시고, 하나님의 본체로서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이 나타내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다음 주일에도 꼭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늘 깊이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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