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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믿음의 본질을 밝히신 예수님! (막 8:34)

믿음의 본질을 밝히신 예수님! (막 8:34)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을 불러 세우신 지 대략 이 년 반 정도가 되었을 때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데리시고 갈릴리 최북단에 있는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곳에서 그들에게 물어보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를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보다 앞서 보내심을 받은 선지자로 여겼습니다. 더군다나 그 당시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바알세불, 곧 사탄이 지폈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할 때 베드로가 모든 제자들을 대표해서, 예수님의 질문에 분명하게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마태복음에는 이보다 좀더 자세한 표현이 나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권능들을 보았습니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와 같은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며, 예수님은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로서 이 땅에서 하셔야 할 본질적인 사역이 무엇인지를 드러내 놓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로서 하셔야 할 사역을 네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많은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둘째,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는 것입니다. 셋째,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넷째, 사흘 만에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영광만을 생각했지,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버린 바 되고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도 본시는 유대교에 뿌리를 박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들을 대표해서,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했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돌이키시고, 그의 제자들을 보시며, 이와 같이 베드로를 꾸짖으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예수님은 사탄이 베드로의 배후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막고자 하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단번에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베드로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사람은 고난 없는 영광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하신 일은 고난을 통해서 영광에 이르는 것이며, 십자가를 통해서 면류관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책망하신 후에, 오늘 본문에서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밝히셨습니다. 예수님이 밝히신 믿음의 본질은 세 가지 요소였습니다. 첫째,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둘째,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 “예수님을 따른다.” “그리스도인이 된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 무슨 뜻입니까?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믿음의 본질을 분명하게 깨닫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믿음의 본질을 세 가지 요소로 나누어서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막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은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때 예수님 주변에는 제자들뿐만 아니라 무리도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 무리도 제자들과 함께 부르시고, 무리와 제자들 모두를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와 같이 시작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무리 가운데 있는 사람도 얼마든지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먼저 믿음의 본질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도 믿음의 본질을 재확인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야 그들이 예수님을 바르게 따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리와 제자들을 다함께 불러서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의 첫째 요소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나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바로 이와 같은 태도에서 믿음은 출발합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자기를 의롭게 여겼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믿음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해주실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을 생각해봅니다. 본시 그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전, 그는 자기를 의롭게 여겼습니다. 빌3:4 말씀과 같이, 그는 자기의 육체를 신뢰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대단한 사람이며, 자기에게는 자랑할 거리가 많은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예수님을 따르게 되자, 자기를 부인할 줄 알았습니다. 빌3:7 말씀처럼, 그는 이전에 자랑하던 것들을 다 해로 여겼습니다. 차변에 있던 것들이 순식간에 대변으로 옮겨졌습니다. 또한 빌3:8 말씀처럼, 그는 육체적 자랑거리들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이제 롬7:18 말씀처럼, 그는 자기 속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 알았습니다. 또한 딤전1:15 말씀과 같이, 그는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임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고전15:10 말씀과 같이, 그는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은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는 데서 시작됩니다. 자기를 부인할 때, 비로소 믿음이 생길 수가 있습니다. 사실 자기를 부인하면 부인할 수록, 믿음은 더욱 더 깊어지고 더욱 더 커지기 마련입니다.

또한 믿음의 본질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지, 자기 만족이나 자기 충족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으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믿으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자기를 위하여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은 믿음의 본질이 아닙니다.

도리어 믿음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을 미련 없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믿음의 본질입니다. 

막10:28 말씀처럼, 이미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그들이 온전하게 자기를 부인하지는 못했습니다. 이 때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온전하게 자기를 부인하셨습니다. 벧전2:23 말씀처럼, 예수님은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예수님을 본받아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와는 완전히 결별을 고해야 합니다. 롬14:8 말씀과 같이, 이제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갈2:20 말씀처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빌1:20 말씀과 같이, 이제는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셔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부인하며, 예수님을 따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꾸만 또 다시 우리 자신이 되살아나곤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부단 없이 기도해야만 할 것입니다. 


둘째로,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막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믿음의 첫째 요소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해야만, 예수님을 믿고 따를 수가 있습니다. 믿음의 둘째 요소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 무리와 제자들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이 감당하셔야 할 사역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고난을 받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실 것입니다. 그리고서 예수님은 죽임을 당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서 죽임을 당하실 것이라고는 밝히 말씀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뜻을 분명하게 이해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만 하더라도, 대략 삼만 명 정도의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죄수들은 자기가 매달릴 십자가를 지고서 형장까지 걸어가야 했습니다. 따라서 그 당시로서는 죄수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광경은 흔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는 죄수를 처형하는 형틀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죽음을 향하여 나아간다는 뜻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형장까지 걸어가는 것은 수치스럽고도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것도 눅9:23 말씀과 같이,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전15:31에서 바울은 자기가 날마다 죽는다고 했습니다. 실로 그는 매일 죽음과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오늘날 우리는 신앙 때문에 핍박을 받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이는 분명 하나님의 크신 은혜요 축복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 십자가를 져야하는 희생이 있었습니다. 유대교에서 출교를 당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는 곳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컨대 북한이 그러합니다. 무슬림 사회도 그러합니다. 그러한 곳에서는 신앙 때문에 당하는 핍박이 큽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목숨까지도 내놓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라도,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롬8:18 말씀과 같이,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장래의 영광이 너무나도 귀하고 값지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두 가지 비유를 통해서 이 사실을 가르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기뻐하면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습니다. 그 보화는 자기의 소유 전체보다 더 값지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어떤 상인이 좋은 진주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얼른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 그 진주를 샀습니다. 그 진주는 자기의 소유 전체보다 더 귀하고 더 값지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너무도 귀하기 때문에, 우리는 각자의 십자가를 기꺼이 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아도,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우리는 목숨까지라도 아낌없이 바칠 수 있습니다. 

찬송가 94장의 가사를 깊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명예와 바꿀 수 없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이전에 즐기던 세상일도 주 사랑하는 맘 뺏지 못해. 유혹과 핍박이 몰려와도 주 섬기는 내 맘 변치 않아.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

예수님보다도 더 귀한 것은 없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위하여 이 세상 부귀도, 이 세상 명예도, 이 세상 행복도, 이 세상 즐거움도, 이 세상 자랑도 다 버립니다. 그리고서 우리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행14:22 말씀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그래서 행20:24 말씀과 같이, 사도 바울은 자기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했습니다. 바울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기쁨으로 예수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마10:38에서 예수님은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자기 십자가를 져야만 합니다. 믿음의 본질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막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믿음의 본질은 세 가지 요소로 되어있습니다. 첫째,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둘째,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뒤를 계속해서 끝까지 따라가는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설명해봅니다. 여행을 떠나려면, 먼저 작별인사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여행에 필요한 것을 들고 갑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목적지를 향해 계속 나아갑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나를 따를 것이니라.” 현재 명령형입니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다가, 중도에서 멈추거나 뒤돌아서면 안 됩니다.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리하면 길 되신 예수님이 우리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십니다.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은 앞서 가십니다. 앞서 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베드로처럼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막으려 들면 안 됩니다. 그러다가는 예수님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호통을 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시면서, 고난을 통해 영광에 이르는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면서, 고난을 통해 영광에 이르는 길을 걸어갑시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면서, 고난 없는 영광만을 바라보지 맙시다. 

마가복음 10장에 있는 내용입니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에게 영생을 얻는 길을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자기 의에 사로잡힌 것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그의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와서 예수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부자 청년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난을 통하여 영광에 이르는 길을 걷고자 아니했습니다. 그는 고난 없는 영광만을 바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그저 근심하면서 예수님을 떠나가 버렸습니다.

바울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던 바울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 때 바울은 자기가 가는 길이 잘못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그는 예수님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행22:10 말씀을 보면, 그 때 그는 예수님에게 이와 같이 물었습니다.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무슨 뜻입니까? “주님, 이제부터는 내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하오니 내가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는지 말씀하여 주옵소서. 내가 주의 말씀에 순종하겠나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따르려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요8:31 말씀과 같이, 예수님의 말씀에 거하는 자 곧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가 예수님의 참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산상수훈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마7:21 말씀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자입니다.

또한 요일2:6 말씀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대로 행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봅니다. 예수님의 손으로 섬깁니다. 예수님의 입으로 말합니다. 자연히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예수님을 닮기 마련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닮아서, 예수님의 거룩이 우리의 거룩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긍휼이 우리의 긍휼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예수님의 겸손과 온유가 우리의 겸손이며 우리의 온유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저절로 예수님의 형상이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향기가 되며, 예수님의 편지가 되며, 예수님의 대사가 되어, 예수님의 충성스러운 증인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참 제자의 모습이며, 이것이 바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둘째,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렇듯 믿음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눅13:23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눅13:24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많은 사람들이 구원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를 못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를 부인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가 용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으세요. 그러면 병도 고치고, 마음도 평안해지고, 사업도 잘 됩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만사가 형통합니다.” 이것은 믿음의 본질이 아닙니다. 도리어 믿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을 믿기가 그렇게 어려워서야, 어디 안 믿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으려고 들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복음을 변질시키며, 다른 복음을 전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바르게만 전하면 됩니다. 그 나머지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맡겨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우리 속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우리 힘으로 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령님이 역사하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행7:55 말씀을 보면, 스데반이 성령 충만했습니다. 그리할 때 그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습니다. 그는 현재의 고난 너머에 있는 장래의 영광을 밝히 바라보면서,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기꺼이 자기 목숨을 바칠 수 있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읍시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바르고도 본질적인 믿음, 곧 변질되거나 거짓이 없는 믿음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해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름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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