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주일(요19:25-27) 2011.5.8(일)
부모, 하나님의 눈물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부모의 사랑입니다. 부모의 사랑만큼 큰 사랑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가 매일 불러도 감동이 되는 노래가 있습니다. “어머니 은혜”입니다. 1절을 함께 부르겠습니다.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 나는 나는 높은 게 또 하나 있지. 낳으시고 기르시는 어버이 은혜. 푸른 하늘 그 보다도 높은 것 같애”.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어버이 은혜는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습니까?
부모의 사랑은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입니다. 허버트 타르라는 유대인 랍비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부모의 사랑에 세 가지 특징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째 부모의 사랑은 내려가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늘 내려 갑니다. 올라가는 사랑도 있지만 내려 가는 것만 못합니다. 자녀가 아무리 부모를 사랑해도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만 못합니다. 사랑은 내려가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되돌아오지 않는 사랑입니다. 부모의 사랑은 마치 물처럼 흘러갑니다. 물은 흘러가고 다시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어린 시절은 몰라서 되돌려 주지 못합니다. 젊을 때는 알지만 바빠서 되돌려 주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어 되돌려 줄만하면 부모님은 안 계십니다. 일생 받기만 합니다. 되돌려 줄 수 없습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단 한번 뿐인 사랑입니다. 부모의 사랑은 반복되지 않습니다. 돌아가시면 다시는 그런 사랑이 없습니다. 아내가, 남편이, 자식이 그 빈 자리를 채우지만 똑같은 사랑이 아닙니다. 단 한번 불꽃같은 사랑을 주고 받다가 끝납니다. 짧은 만남, 긴 이별입니다. 세상의 어떤 사랑도 부모와 같은 사랑은 없습니다. 그 사랑은 반복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사랑은 위대하고 슬픕니다. 부모의 사랑중에서 가장 슬프고 위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사랑입니다. 이 세상에서 마리아만큼 자식을 위대하게 사랑한 사랑이 있을까요? 예수님에게 마리아는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마리아가 없었다면 당연히 예수님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마리아와 예수님의 사랑을 통해 무엇을 배웁니까? 마리아에게서 어떤 자식 사랑을 배우며 예수님에게서 어떤 부모 사랑을 배웁니까?
마리아는 예수님을 위해 평생 울며 살았습니다.
마리아가 보여준 자녀 사랑의 특징은 우는 사랑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마리아의 일생을 보면 마리아는 평생 우는 인생을 살았슴이 분명합니다. 마리아의 눈물의 첫 번째는 아마도 예수님이 잉태된 순간일 것입니다. 남자를 모르는 마리아에게 어느날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네게서 태어날 이는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참으로 황당한 일이었습니다. 임신이란 당연히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를 통해 일어납니다. 그런데 남자를 가까이 해본 적이 없는 마리아가 임신을 했다니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마리아가 남자 모르게 임신했다면 마리아는 간음한 여인이 되고 율법에 따라 돌에 맞아 죽어야 합니다. 약혼자 요셉에게 파혼당할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한 여자의 앞길이 완전히 막히는 일입니다. 천사가 불쑥 나타나 말하고 사라지니 따질 수도 없었습니다.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 보일 수도 없습니다. 점점 불러 오는 배를 보고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면 별 수 없이 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낳았습니다. 예수님을 낳는 순간부터 마리아는 또다시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려 하기 때문에 피난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2살 미만의 아이는 모조리 죽여라“. 그래서 어린 핏덩이를 안고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애굽으로 길을 떠납니다. 지금은 예루살렘에서 카이로까지 육로로 12시간밖에 안 걸립니다. 저녁차로 출발하면 새벽에 도착합니다. 비행기로는 한 시간 밖에 안 걸립니다. 그 가까운 거리를 두고 나귀타고 걷고 또 걸어서 몇 달을 가야 했습니다. 풀풀거리는 광야를 걸어 애굽으로 가는 마리아 일행이 보입니까? 지금도 카이로에 가면 예수님 피난 교회가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살았지만 그로 인해 수많은 아이들이 죽었습니다. 그때 마리아의 마음이 얼마나 아팟겠습니까?
예수님의 일생중 아마도 어머니 마리아를 편하게 했던 때는 목수로 살았던 30년 사생활이었을 것입니다. 나이 30이 되자 공생애를 시작했는 데 그때부터 마리아는 또 고난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한 곳에 정착하지 않았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지만 예수님은 집도 절도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지으신 자연을 벗삼아 발길 닿는 곳에 눕고 남들이 주는 것을 먹을 뿐이었습니다. 나이는 30이 되었는 데 장가도 가지 않았습니다. 요즘 자녀를 둔 부모 입장에서 보면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설상가상으로 나쁜 소문까지 났습니다. “예수가 미쳤다. 바알세불에 지폈다. 귀신들렸다”. 어머니 입장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얼마나 조마 조마하겠습니까? 마리아는 평범한 여자였습니다. 훗날 교회가 그를 존중하고 높혀서 "마리아는 부활했다. 마리아는 승천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다“. 말했지만 사실 마리아는 우리와 똑같은 존재였습니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마음은 누구나 똑같은 것입니다.
어머니로서 수모를 당한 일도 있었습니다. 한번은 마리아가 예수님 계신 곳을 찾아 갔습니다. 하도 예수님이 집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동생들을 데리고 어머니가 아들을 찾아간 것입니다. 제자중의 하나가 말합니다. “예수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 찾아 왔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이 말합니다. 마12:48-50, “누가 내 모친이며 형제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인간적으로 말할 때 이 말은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한 말이었습니다. 그래도 어머니가 아들이 궁금해서 동생들을 데리고 왔으면 밖에 나가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밖에 나가지 않고 제자들을 가리키며 이들이 내 어머니와 형제라고 말한 것입니다. 참 마리아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고생과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마리아를 생각하며 글을 썻습니다. 제목은 “가난하게 산 무소유의 어머니”입니다.
“마굿간에서 아들을 낳은 여인. 아기를 안고 한밤중에 이집트로 피난간 여인. 아기를 봉헌할 때 축복대신 예리한 칼 같은 고뇌와 고통을 예고받은 여인. 12살에 아들을 잃고 못내 슬퍼했던 여인. 가정을 떠나 진리와 정의, 기쁨과 평화의 구주가 된 아들을 자주 볼 수 없었던 고독과 망각의 여인. 죄수로 끌려가면서 모욕당하고 매맞는 아들을 지켜 보아야 했던 비통의 여인. 십자가상에서 하나님 하나님, 어째서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며 피눈물의 기도를 바쳤던 아들 예수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듣고 눈물을 흘렸던 여인”.
어떻습니까? 마리아뿐입니까? 세상의 어머니들이 눈물로 자식을 키우지 않습니까? 나는 어머니를 한번도 울게 하지 않았다 말할 자녀가 있습니까? 나는 단 한번도 어머니를, 그리고 아버지를 가슴 아프게 하지 않았다 말할 수 있는 자녀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어릴 때는 잘 몰랐습니다. 자라서 부모가 되어 보니 자식의 모든 것이 부모의 걱정거리입니다. 평생 부모는 눈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이 삽니다. 성경에도 우는 어머니들이 많습니다. 아마도 처음 자식 때문에 운 사람은 하와일 것입니다. 하와는 에덴동산을 쫓겨나서도 울었지만 두 아들 때문에도 울었습니다. 두 아들이 있었는 데 한 아들이 다른 아들을 죽였습니다. 아벨은 죽고 가인은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하와는 평생 두 아들 때문에 울면서 살았습니다. 한나는 자식을 낳지 못해 울었습니다. 여자로서 자식을 낳지 못하는 한은 얼마나 큰 한입니까?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도 눈물속에서 살았습니다. 어린 아들 야곱이 아버지 축복받다가 탄로가 나 밤중에 외갓집으로 야반도주합니다. 그때 아들과 헤어지고 어머니는 다시 아들을 만나지 못합니다. 야곱이 20년만에 얍복강을 건너왔을 때 어머니는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라헬은 어린 아들 베나민을 낳다가 죽었습니다. 어쩌면 라헬이 일찍 죽은 것은 다행이었는지 모릅니다. 훗날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가 생사를 알지 못했을 때 어머니가 살아 있었다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모세의 어머니는 핏덩이 모세를 강물에 떠나 보내야 했기 때문에 울었습니다. 삼손의 어머니는 아들의 탈선 때문에 울었습니다. 삼손이 비참하게 죽었을 때까지 어머니가 살아 있었다면 그는 죽은 아들 때문에 얼마나 슬프게 울었겠습니까? 다니엘의 어머니는 아들을 멀리 바벨론에 떠나보내야 했기 때문에 에레미아의 어머니는 아들이 동족들에게 이유없이 맞고 죽는 것을 보아야 했기 때문에 울었을 것입니다.
저는 지난 어버이 날을 맞아 지난 5월 5일, 고향을 미리 다녀왔습니다. 항상 고향가는 발걸음은 가벼운데 떠날 때는 무겁습니다. 그렇게 많이 만나고 이별해도 부모와의 이별은 쉽지 않습니다. 벌써 떠나려고 짐을 싸면 어머니의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그리고 차에 시동을 걸고 떠나면 예외없이 그 눈에 눈물이 고여 있습니다. 차가 멀리 동구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느트나무 밑에서 두 노인이 손을 흔드는 것이 보입니다. 옛날에는 같이 흔들었는 데 요즘은 제가 안합니다. 너무 힘들기 때문입니다. 일부러 안보려고 고개를 돌립니다. 형제들도 집을 벗어나면 한 시간동안 아무 말이 없습니다. 눈물로 배웅하는 부모님의 모습이 어른거리기 때문입니다. 그 눈물이 헤어질 때는 힘들지만 그것이 바로 부모를 찾는 이유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무도 각박한 세상에 나를 위해 울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오직 부모뿐입니다. 각박한 세상을 사는 힘은 부모의 눈물에서 옵니다. 자라면서 저는 인생의 방황과 신앙적 방황의 어두운 터널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때마다 그 터널을 잘 통과한 것은 어머니의 눈물때문이었습니다.
방황하던 어느날, 한번은 밤늦게 돌아와 자는 데 제 얼굴에 비가 뚝뚝 떨어졌습니다. 눈을 살며시 떠보니까 방은 아직도 캄캄한 데 제 얼굴이 빗물이 계속 떨어집니다. 눈을 떠 보니까 어머니가 저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한이 맺혀 기도하는지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는지. 그 눈물이 빗물처럼 제 볼에 뚝뚝 떨어졌습니다. 지금 제가 여기 있는 것은 그 어머니의 눈물 때문입니다. 긴 세월이 지나고 제가 하나님께 돌아왔을 때 찬송가의 한 구절이 가슴에 맺혔습니다. “나 집에 돌아갑니다. 어머니 기도 못잊어. 새 사람 되어 살려고 나 집에 돌아갑니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지금 안 돌아온 자식이 있다면 어머니의 눈물밖에 없습니다. 평생 어머니가 흘린 눈물 때문에 우리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십자가지게 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보여준 또 하나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지게 한 사랑입니다. 마리아에게 정말 가슴 아픈 일이 있었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지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실제 예루살렘에는 예수님이 십자가 진 길이 있고 그 길은 모두 13개 처소로 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네 번째 처소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무거운 십자가지고 골고다로 향하는 예수님, 군병들의 채찍에 맞아 쓰러집니다. 그때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간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머니였습니다. 그때 어머니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마리아가 예수님 만난 그곳에 아르메니아 교회가 있고 그 교회 입구에 이런 조각이 있습니다(그림). 마리아의 얼굴을 자세히 보십시오. 얼마나 슬프고 아픈 표정입니까? 누가 그 슬픔을 대신하겠습니까? 그 어머니를 보신 예수님은 또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어머니와 아들을 이토록 가슴 아프게 묘사한 작품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문제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행진을 막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마리아가 막지 않은 것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십자가지지 않기 위해 처음부터 막았어야 합니다. 처음부터 전도하지 못하게 했어야 하고 처음부터 12제자를 부르거나 가르치지 못하게 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집에 들어오지 않으면 혼냈어야 하고 유대인과 다투고 갈등을 빚어 위험에 일에 처하지 않도록 늘 주의를 주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이 십자가 지는 일을 막기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막는다고 예수님이 십자가 안 질 것도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예수님을 임신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네게서 태어날 이는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이것이 중요합니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인간적 사랑과 자녀를 통하여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계획 사이의 문제입니다. 보통의 부모는 자녀에 대한 인간적 연민으로만 자녀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소수의 부모는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자녀를 맞추며 삽니다. 때로 이 둘이 갈등을 빚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언제나 먼저입니다. 사랑만 가지고 자녀를 대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를 향한 계획이 더 중요합니다. 그는 내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이 목적을 가지고 이 땅에 보낸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헨리 나우엔의 표현에 의하면 자녀는 부모의 손님입니다. 주인은 손님에게 두 가지를 합니다. 우리 집에 머무는 동안 잘해주고 떠날 때는 말없이 보내주는 것입니다. 손님은 내 소유가 아닙니다. 손님의 주인은 따로 있습니다. 험한 세상에서 그와 내가 만난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그가 내 집에 와 30년을 살았다면 하나님이 주신 감사입니다. 나같은 사람에게 그런 분에 넘치는 자녀를 보내주셨는지 부모는 늘 감사해야 합니다. 자녀는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맞춰 살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자녀가 세 가지 축복을 받습니다. 첫째 소속감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것이다. 나는 하나님에게 속하였다” 믿고 선포하게 해야 합니다. 둘째 가치감입니다. “그래서 나는 대단한 존재다” 믿게 해야 합니다. 셋째 자신감입니다. 그래서 “나는 할 수 있다” 외치게 해야 합니다. 소속감에서 가치감이 나오고 가치감에서 자신감이 나옵니다. 자신감만 회복되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마리아는 이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는 내 자식이기 전에 하나님이 보낸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는 내 자식으로 이 땅에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왔다. 내가 할 일은 그를 도와 하나님이 그에게 맡긴 사명을 감당하게 하는 것이다. 그 일과 부모의 사랑이 상충되어도 어쩔 수 없다. 그에 대한 내 감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중요하다“. 이것이 마리아의 믿음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이 마음을 갖습니까? 다만 자식을 위해 우는 것이 아니라 그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노력합니까? 눈물이 자식에 대한 인간적 사랑이라면 하나님의 뜻은 자식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 나라 안중근 의사가 할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고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가 아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장한 아들 중근이 보아라. 이제 너는 조국을 위해 죽을 것이다. 사형을 언도 받으면 항소하지 마라. 네가 벌한 이들에게 용서를 구할 필요도 없고 법에 호소하여 더 길게 살 필요도 없다. 혹시 어미보다 먼저 죽는다고 불효라고 생각하지도 말라. 작은 의에 연연치 말고 큰 뜻으로 조국을 위해 죽어라. 그것이 어미의 소원이다”. 조국을 위해 죽은 안중근의 배후에는 이런 훌륭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만일 안중근이 죽는데 어머니가 울며 불며 항소하고 아들을 살려달라고 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결국 안중근은 어머니의 뜻에 따라 항소하지 않고 놀라울 정도로 의연하게 감옥생활을 하다 순국했습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은 대통령에서 은퇴한 지 올해 30년, 87세입니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고통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갑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어머니때문입니다. 그의 어머니 릴리언은 간호사였습니다. 그는 심지어 아들이 대통령일 때도 간호사로 일했으며 일흔 살 때에는 평화봉사단으로 인도에 자원봉사하러 떠났습니다. 그가 카터에게 말과 행동으로 평생 가르친 것은 남을 위한 헌신과 희생의 삶이었습니다. 카터는 그러한 어머니 때문에 퇴임후가 더 빛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부모 여러분, 자녀를 위해 눈물 흘립니까? 잘 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더 하셔야 합니다.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뜻에 자녀를 맞춰야 합니다. 여러분의 계획에 맞추지 마십시오. 다만 잘 먹이고 공부 잘 시키는 것이 부모의 사명이 아닙니다.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따라 살도록 하는 것이 부모의 사명입니다. 마리아가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야 자녀가 인물이 되고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됩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십자가 지게 했다면
예수님은 마리아를 십자가앞에 나오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일생 효도하고 사셨습니다. 눅2:51절입니다. “예수께서 한 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여기에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하면 “샤하”입니다. 이 말은 “허리를 굽히다, 머리를 숙여 절하다”의 뜻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엎드려 예배할 때 쓰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부모님께 순종하되 마치 사람이 하나님을 예배하듯 경배했다고 말합니다. 인천의 어느 교회에서 벌이는 캠페인이 있습니다. “큰절하기운동”입니다. 큰절은 윗 사람에게 존경을 표시하는 최고의 예의법도입니다.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큰절은 부모님을 높이고 공경하는 최고의 효도입니다. 부모님뿐 아닙니다. 어른에게는 늘 큰 절로 존경을 표시해야 합니다. 아침 저녁으로 부모님께 큰 절하는 자녀는 복을 받습니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큰 절을 가르쳐야 합니다. 교회안에서도 어른들에게 늘 머리를 숙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아무리 부모라도 피조물인 부모에게 하나님께 하듯 큰 절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부모에게 효도해야 할까요? 최근에 작가 조연경씨가 “효도별곡”이라는 짧은 콩트를 읽고 생각한 바가 많았습니다. 서울에서 만두집을 경영하며 사는 젊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이 가게에 할아버지와 할머니 한 분이 찾아왔습니다. 이상한 것은 이들은 매주 수요일이면 어김없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할머니가 먼저 와서 구석자리에 앉아 출입문을 바라보며 할아버지를 기다립니다. 그러면 할아버지가 나타나 만두를 시킵니다. 그런데 둘은 만두를 시키고도 먹지 않고 안타까운 눈빛으로 서로 바라봅니다. 만두집 부부는 그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부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옛날 첫사랑의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수요일, 그날따라 할머니의 안색이 좋지 않았습니다. 자세히 보니 병색이 완연했습니다. 할아버지가 만두 하나를 집어 할머니에게 권했지만 할머니는 힘없이 고개를 저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날따라 할머니는 울고 할아버지는 할머니 눈물을 닦아 주고, 그날 이후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발길이 뚝 끊겼습니다. 다음 수요일도, 그 다음 수요일에도 두 노인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두 달이 지난 어느 수요일 정각 오후 3시에 할아버지가 문을 열고 만두집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오지 않고 할아버지 혼자였습니다. 주인이 물었습니다. “할머니도 곧 오시겠지요?” 그때 할아버지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죽었어”. 만두집 부부는 놀랐지만 더 놀란 것은 할아버지의 사연이었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첫사랑의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부부였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수원에 있는 큰 아들의 집에 살고 할머니는 서울에 있는 둘째 아들의 집에 살았습니다. 나이가 많아 자식들이 모셔야 하는 데 큰 며느리가 말하기를 “왜 다 같은 며느리인데 나만 혼자 둘을 모시느냐? 그럴 수 없다” 해서 두 며느리가 공평하게 한 분씩 모셨습니다. 그래서 서울과 수원으로 생이별을 하게 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매주 수요일 세시만 되면 견우직녀처럼 만두집에서 만나온 것입니다. 이야기를 마치면서 할아버지는 이렇게 끝을 맺었습니다. “이제 나만 죽으면 돼. 천국에서는 같이 살 수 있을거야”. 저는 이 이야기를 읽고 마음이 너무 아파 울었습니다. 우리 부모를 내가 그렇게 모시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었했습니다. 그리고 인생에 있어 가장 슬픈 것은 평생 같이 살다가 한 쪽이 먼저 죽고 한 쪽만 남은 노인들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부모는 그런 분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효도중에서 가장 큰 효도가 있습니다. 부모를 십자가앞에 나오게 한 효도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을 때 마리아가 지켜보았습니다. 세상에 그런 불효는 없습니다. 자식이 먼저 죽는 것이 최고 불효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어떤 효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까? 요19:26,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 땅에 와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가는 자신을 어머니에게 보여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입니다”. 이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어머니, 보십시오. 당신의 아들입니다. 당신이 나를 낳고 길러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하셨으니 이 모든 것이 어머니 은혜입니다. 어머니의 눈물과 기도로 제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내 육신이 죽어 괴로우시겠으나 어머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육신은 죽으나 영은 다시 살아 납니다. 나를 태중에 임신할부터 하나님께 바친 어머니의 믿음 때문에 내가 여기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다 어머니 은혜입니다. 어머니는 저의 육신의 어머니이기 전에 하나님앞에 구원받아야 할 죄인입니다. 모든 사람은 내가 죽어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구원받습니다. 어머니도 그 피로 구원받으십시오. 모든 사람은 내가 부활하여 산 소망으로 새 생명을 얻습니다. 어머니도 그 소망으로 생명을 얻으십시오. 그래야 어머니와 제가 천국에서 만납니다. 어머니의 남은 생은 요한이 돌 볼 것입니다. 잘 사시다 천국에서 만납시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이것이 진짜 효도입니다. 자녀들이 아무리 잘 받들어도 부모님이 늙는 것을 막을 길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보약을 해드려도 죽음을 피할 길은 없습니다. 십자가앞으로 나오게 해야 합니다. 지금보다 천국에서 만나게 해야 합니다. 효도 가운데 최고의 효도는 부모님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천국으로 인도했습니다.
어버이주일(요19:25-27) 2011.5.8(일)
부모, 하나님의 눈물
“어머니 은혜”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 나는 나는 높은 게 또 하나 있지. 낳으시고 기르시는 어버이 은혜. 푸른 하늘 그 보다도 높은 것 같애”.
마리아는 예수님을 위해 평생 울며 살았습니다.
마12:48-50, “누가 내 모친이며 형제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가난하게 산 무소유의 어머니”
“마굿간에서 아들을 낳은 여인. 아기를 안고 한밤중에 이집트로 피난간 여인. 아기를 봉헌할 때 축복대신 예리한 칼 같은 고뇌와 고통을 예고받은 여인. 12살에 아들을 잃고 못내 슬퍼했던 여인. 가정을 떠나 진리와 정의, 기쁨과 평화의 구주가 된 아들을 자주 볼 수 없었던 고독과 망각의 여인. 죄수로 끌려가면서 모욕당하고 매맞는 아들을 지켜 보아야 했던 비통의 여인. 십자가상에서 하나님 하나님, 어째서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며 피눈물의 기도를 바쳤던 아들 예수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듣고 눈물을 흘렸던 여인”.
마리아는 예수님을 십자가지게 했습니다.
4처(그림).
예수님은 마리아를 십자가앞에 나오게 했습니다.
눅2:51, “예수께서 한 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요19:26,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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