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주일(요13:1-15) 2011.5.15(일)
스승, 인생의 멘토
오늘은 스승의 주일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면서 여러분의 인생에 영향을 준 선생님은 누구입니까? 사람을 만든 세 가지가 있습니다. 부모와 스승과 책입니다. 이들은 모두 우리의 스승들입니다. 부모는 육신의 스승입니다. 선생님은 정신의 스승입니다. 책은 영혼의 스승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이 스승들의 은혜로 된 생입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때 선생님이 저에게 “햇님 달님” 연극의 주인공이 되게 했습니다. 선생님 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때 처음으로 사람들앞에 서는 두려움과 설레임을 알았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때는 음악을 좋아하는 선생님을 만나 노래를 많이 배웠습니다. 매일 방과후 다른 남자와 함께 선생님의 풍금에 맞춰 “오 대니 보이, 올드 블랙죠”같은 노래를 불렀습니다. 지금도 그 노래를 들으면 선생님 생각이 납니다. 어떤 때는 갑자기 생각이 나 “T.V는 사랑을 싣고”에 나가 볼까도 생각했습니다. 중학교때는 객지에서 자취하는 데 어느날 심한 감기에 걸려 학교를 못 갔습니다. 저녁에 선생님이 친구들과 함께 과자를 한 아름안고 방문해 제 이마에 손을 올렸습니다. 그 따뜻한 체온이 지금까지도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그 뒤에도 저는 많은 스승들을 만났습니다. 사춘기때 방황하는 저와 밤새도록 토론하고 대화의 상대가 되어 주신 시골 교회 전도사님, 대학교때 믿음이 없던 저를 끝까지 따라 다니며 창세기, 요한복음 일대일 공부를 같이 한 선교회 선배, 목자, 그 뒤 목회자가 되어 교회 일을 잘 모를 때마다 멘토가 되고 상담자가 되어 주신 선배 목사님들, 그리고 목회의 고비 고비마다 함께 고민하고 기도했던 친구, 동역자들, 이들이 제가 인생에서 만난 소중한 스승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이들을 요즘 말로 “멘토”라 부릅니다. “멘토”는 옛날 그리스 시대의 사람 이름입니다. 그리스의 “오딧세이” 신화에 나오는 오딧세이 왕에게는 텔레마코스란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트로이 전쟁이 나자 아버지는 아들을 두고 전쟁에 나가야 했습니다. 그 당시 전쟁은 살아 돌아올지 말지를 모를 때였기 때문에 아버지는 아들을 잘 가르쳐 훌륭한 왕이 되게 할 스승이 필요했습니다. 그때 생각난 사람이 그의 친구 멘토였습니다. 오딧세이는 그 아들을 친구 멘토에게 맡기고 전쟁에 나갔고 멘토는 그를 아버지처럼 가르쳤는 데 단순한 지식에서부터 시작하여 인생의 원리, 사람 사는 법, 나아가서 왕의 자질, 능력을 키우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결국 훌륭한 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멘토는 단순한 스승이 아니라 친구를 대신한 아버지요, 인생의 길을 인도한 안내자요, 삶으로 보여주는 모범자요, 인격과 성품을 기르는 상담자, 조언자, 지도자, 코치입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정신적 스승, 영적 후견인을 “멘토”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역사를 보면 훌륭한 사람의 배후에는 반드시 훌륭한 멘토가 있습니다. 플라톤에게는 소크라테스가 있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에게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있었습니다. 눈멀고 귀먹고 말못했던 헬렌 켈러에게는 설리반이라는 훌륭한 멘토가 있었습니다. “나의 스승 설리반”(사진)은 헬렌 켈러가 말년에 그의 스승 설리반에게 바치는 감사의 책입니다. 눈물이 없이는 읽을 수 없습니다. 세상사람들에게만 멘토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도 많은 멘토가 나옵니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모세의 멘토였습니다. 그의 지혜로운 조언으로 모세는 광야 시대 백성들을 잘 이끌 수 있었습니다. 그런가 가면 모세는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을 멘토했습니다. 둘은 다 성공했습니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후계자가 되어 가나안을 정복했고 갈렙은 모세의 마음으로 자신을 정복했습니다. 사무엘도 두 사람을 멘토했습니다. 사울과 다윗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실패했고 다윗은 성공했습니다. 똑같이 가르쳤지만 받는 사람에 따라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합니다.
신약에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12제자를 훈련하신 전형적인 멘토였습니다. 바울은 바나바로부터 멘토를 받았습니다. 바나바의 사랑과 격려를 받은 바울은 그의 일생에 예수님의 제자를 삼는 훌륭한 영적 멘토가 되었습니다. 디모데, 그가 대표적인 바울의 제자입니다. 디도, 빌레몬, 오네시모,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루디아, 다 바울이 키운 사람들입니다. 성경의 역사는 곧 스승과 제자의 역사입니다. 누구를 스승으로 만나 어떤 제자가 되느냐가 성공을 판가름합니다. 오늘 여러분은 정말 좋은 스승 만나기를 원합니까? 그리고 여러분 자신이 좋은 스승되기를 바랍니까? 이를 위해 먼저 알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최고 스승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스승은 예수님입니다. 성경에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부를 때 “선생님”이란 말을 많이 씁니다. 마22: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막9:17,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눅20:39,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님 잘 말씀하셨나이다”. 막10:20,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요8: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눅17: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마8: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이 외에도 많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부른 것은 요즘처럼 인사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선생”은 히브리어로 “랍비”입니다. “랍비”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부르는 최고의 칭호입니다. “랍”은 “크다, 위대하다”는 뜻입니다. 말 끝에 붙은 “이”는 1인칭 소유격, “나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랍비”는 “나의 큰 자, 나의 위대한 자”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랍비를 존경합니다. 얼마나 랍비를 존경하는가 하면 “랍비가 지나가면 그림자도 밟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한 마을에 랍비가 오면 모든 남자는 동구밖에서, 모든 여자는 집안에서 기다렸습니다. “남자로 태어나서 랍비가 되기 위해, 여자로 태어나서 랍비의 부인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나 해도 좋다”라는 격언도 있습니다. 이렇게 배우기를 중요하게 여기다 보니 가르치는 선생님, 랍비들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선생님, 랍비”라고 부른 것은 이 이유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과연 훌륭한 선생이었습니다. 그는 우선 탁월하게 가르쳤습니다. 그가 가르치면 귀에 쏙쏙 들어왔고 무엇보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교훈을 듣고 놀랬습니다. 마7:29, “이는 그 가르치는 것이 권세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서기관은 성경교사입니다. 서기관들은 지식으로 가르쳤고 예수님은 지혜로 가르쳤습니다. 서기관들은 권위로 가르쳤고 예수님은 권세로 가르쳤습니다. 권위와 권세는 다릅니다. 권위는 땅에서 나오고 권세는 하늘에서 나옵니다. 권위는 학위에서 나오고 권세는 기도에서 나옵니다. 권위는 인간의 제도에서 나오고 권세는 하나님의 능력에서 나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삶으로 보여주신 선생님이었습니다. 내일이면 십자가 지시는 날, 예수님은 다락방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시작합니다. 발은 사람의 몸 중에서 가장 더러운 부분입니다. 날씨가 덥고 비가 없는 나라에서 사람들은 밖에만 나가면 발에 먼지가 끼었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오면 하인들이 물떠 놓고 주인의 발을 씻겼습니다. 돌아온 탕자에게 아버지가 한 첫 번째는 아들의 발을 씻기고 신발을 갈아 신기는 것이었습니다. 발이 얼마나 더러운지 이사야 6장에서 천사도 날개로 발을 가리우고 있습니다. 그 더러운 발을 지금 예수님이 씻기고 있습니다. 그나마 무릎꿇고 씻기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면서 또 무엇도 씻기셨을까요? 그들의 실수입니다. 그들의 부끄러움입니다. 연약함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죄까지 씻겼습니다. 예수님은 성질이 급해 실수가 많은 베드로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조금 후에 자기를 팔 가롯 유다의 발까지 씻기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했습니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않으면 너와 내가 상관이 없느니라”.
서기관은 가르치기 위해 제자를 불렀지만 예수님은 씻기기 위해 제자를 불렀습니다. 서기관은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 제자들을 불렀지만 예수님은 죄를 씻기기 위해 제자들을 불렀습니다. 교육은 씻기는 것입니다. 실수많고 허물많은 사람들을 불러 씻기는 것입니다. 실수 없고 깨끗한 사람은 교육할 필요도 없습니다. “선생님, 나 실수가 많아요”. “괜찮아. 사람은 다 실수가 많아. 선생님은 너만할 때 더 실수했어”. “선생님, 난 못해요”. “괜찮아. 넌 할 수 있어. 네게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자신감이 없는 것 뿐이야. 네 안에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이 있어. 나는 알아. 너는 잘 될거야”. 누가 실수가 없는 사람을 못 가르치겠습니까? 실수가 없는 사람만 가르치면 무엇이 교육이겠습니까? 아이큐 300의 영재만 모아 가르치면 더 나빠질 것도 더 좋아질 것도 없는 데 무엇 때문에 가르치겠습니까?
스승의 날을 맞을 때마다 생각나는 선생님이 있습니다. 저를 고등학교 3년간 가르친 이영수 선생님입니다. 어느날 선생님이 출석을 부르는 데 “이윤재 선생”하고 크게 불렀습니다. 친구하고 “와”하고 저를 쳐다 보았습니다. 저는 선생님이 저를 놀리시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한글학자로 독립운동하다 옥사한 일제시대의 이윤재 선생을 빗대어 저를 부른 것입니다. 그때부터 선생님은 저를 “이윤재 선생”이라고 불렀습니다. 복도에서 저를 보면 “이윤재 선생 오시나?” 가끔 학교에 늦게 오면 “선생이 늦게 오시면 되나?” 제가 뭐 한 가지 잘 못한 것이 있으면 “선생이 그러면 되나?”. 그러다가 제가 사춘기의 방황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신앙적 질문을 포함하고 있어서 저에게 더 힘든 방황이었습니다. 그때마다 선생님이 불러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윤재야, 너는 잘할 수 있어. 괜히 이윤재 선생이 아니야. 너는 잘 될 거야. 내가 알아”. 그때 저는 선생님이 저를 위로 하기 위해 값싼 말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뒤 25년이 지났습니다. 저는 우여곡절을 지나 목회자가 되었고 선생님은 대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저를 부른 전주 교회로 목회하러 왔는 데 부임예배를 마치자 교회 장로님이 저에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누군가 목사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누가 나를 기다릴까 하고 갔는 데 아, 이것이 웬일입니까? 거기에는 25년간 한번도 만나지 못했던 이영수 선생님이 서 계셨습니다. 세월이 지나 머리는 희어지고 허리는 약간 굽었지만 여전히 변치 않은 미소로 거기 계셨습니다. 우리는 서로 껴안았습니다. 한동안 우리는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선생님과 제 눈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습니다. 그때 선생님이 장로님에게 말했습니다. ”장로님, 제가 맞다고 했잖아요. 그 이윤재가 바로 제가 가르친 이윤재라고“. 그리고 저에게 조용히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아주 옛날 말씀했잖아요. 목사님은 잘 될거라고“. 그 뒤 이영수 선생님은 제가 섬기는 교회의 신자가 되었습니다. 한때 스승이요 제자였던 우리는 목사와 신자로 다시 만났습니다. 매년 스승의 날에는 저희 부부가 빠짐없이 찾아가 세배를 올렸습니다.
돌이켜 보면 선생님의 한 마디가 저의 거룩한 자화상에 불을 붙였습니다. ”이윤재 선생“. 지금도 저는 가끔 민족을 위해 자신을 제물로 바쳤던 애국자 이윤재 선생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자화상을 갖게 한 것은 선생님이었습니다. 그 분에게 배운 수학은 지금 다 잊어 버렸지만 그 분이 저에게 한 말은 지금도 기억합니다. “윤재야, 너는 잘할 수 있어. 너는 잘 될 거야. 내가 알아”. 그리고 25년 후 “내가 말했잖아요. 목사님은 잘 될 것이라고”. 이것이 교육입니다. 교육은 속에 없는 것을 집어 넣어주는 것이 아니라 속에 있는 것을 밖으로 끄집어 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교육입니다. 예수님은 교육을 말로, 몸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가르쳤습니다. 십자가는 인류 역사상 최고의 교육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죽여 남을 살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최고의 스승입니다. 평생 그 분을 닮아가시기 바랍니다.
배우려는 마음을 가지면 모두가 스승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최고 스승이지만 한 가지 더 알아야 합니다. 배우려는 마음을 가지면 모두가 다 스승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선생님이 많아도 배우려고 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배움은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자세의 문제입니다. 성경에 “어리석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주로 시편, 잠언에 많이 나옵니다. 공부를 많이 안 한 사람을 가르치는 말이 아니라 배우기를 싫어하여 마음이 굳어진 사람을 말합니다. 잠26:11,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계속하느니라”. 여기서 “미련한 자”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도무지 배우려고 하지 않아 개가 토한 것을 먹는 것처럼 예나 지금이 변함없이 살아 갑니다. 시1:1, “복있는 자는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여기서 "오만한 자“가 어리석은 자입니다. 도무지 배우려고 하지 않아 남의 말에 귀를 막고 앉아 있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열린 마음으로 배우기를 원합니까? 여러분이 배우기를 원하면 여러분이 만나는 모든 사람, 환경, 자연이 여러분의 스승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목회자는 아마도 신자가 배울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스승일 것입니다. 목회자의 일이 많지만 그 일을 한 마디로 말하면 가르치는 일입니다. 엡4:11절이 중요합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바울은 교회안에 있는 은사와 직분을 말하면서 모든 사람이 같은 직분을 받은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또 모든 직분이 우열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목사와 교사”를 말합니다. 그런데 재미있습니다. 지금까지 바울이 컴마를 썻습니다. 사도 컴마, 선지자 컴마, 복음 전하는 자 컴마, 그런데 목사 다음에 컴마가 없이 교사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목사와 교사는 서로 다른 기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목사와 교사는 같이 간다는 것입니다. 목사의 가장 본질적인 기능은 교사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목사는 가르치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가르치고 성경을 가르치고 사는 법을 가르칩니다. 그래서 성도 여러분은 목회자에게 배우셔야 합니다. 목회자의 말을 단순한 설교로 듣지 말고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그래서 많이 “아멘”해야 합니다. 목회자의 말을 자의적으로 선택해서는 안됩니다. 내게 은혜가 되는 것은 “아멘”, 그렇지 않은 것은 “노멘” 해서는 안됩니다. 딤후3:16절에 나오는 것 같이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는 말씀”이 다 필요합니다. 우리는 교훈의 말씀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책망은 싫어합니다. 책망을 치는 설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쳤다고 느꼈다면 확실히 내가 받을 말씀입니다. 그래서 감사해야 합니다. 루터는 천둥과 벼락소리를 듣고 수도원으로 들어갔고 베드로는 닭우는 소리를 듣고 회개했습니다. 목회자의 소리를 마음을 열고 들으면 하나님의 음성이 됩니다. 그 모든 말씀에 아멘해야 목회자는 신자의 스승이 되고 신자는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강단으로만 말씀을 들어서는 스승이 아닙니다.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에 대하여 목회자의 조언과 상담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혹 스승이 나무래더라도 감사로 받아야 합니다. 과외선생은 나무라면 떠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나무란다고 떠나지 않습니다. 목회자는 영적 아비입니다. 목회자를 영적 아비로 여겨야 내 믿음이 자랍니다. 특히 장로, 권사, 안수집사등 평신도 지도자는 본 교회 담임목사를 스승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 지도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를 어지럽게 하고 서로 불행해집니다. 목회자는 영적 스승입니다.
그러면 목회자는 누구를 스승으로 모십니까? 교인입니다. 교인들이 목회자를 스승으로 여길 때 목회자는 교인을 스승으로 여깁니다. 교인들이 목회자의 말씀을 듣고 그를 통해 배울 때 목회자는 교인의 삶을 보고 그것을 통해 배웁니다. 모든 교인은 목회자의 스승입니다. 새벽마다 무릎꿇고 기도하는 성도는 목회자가 가장 존경하는 스승입니다. 말없이 봉사하는 성도는 목회자는 늘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목회자보다 교인들이 더 큰 스승입니다. 목회자는 주로 말로 하지만 교인들은 삶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녀는 누구입니까? 부모의 스승입니다. 자녀는 문제아도 웬수 덩어리도 아닙니다. 잘하면 잘한대로 스승이요 못하면 못한대로 스승입니다. 한 유대인 랍비가 멀리 출장을 갔습니다. 몇 달 지나 돌아오는 날, 두 아들이 갑자기 죽었습니다. 남편이 오자 아내가 말했습니다. “여보, 왕이 우리에게 보물 두 개를 맡겼다가 때가 되어 돌려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어요?” “어떻게 하기는 어떻게 해? 돌려 줘야지”. 아내는 남편을 죽은 아들들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오늘 아침 왕이 두 보물을 가져갔습니다”. 죽은 아들들을 보고 랍비가 통곡했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들은 내 자녀였습니다. 후에는 친구가 되었고 마지막엔 스승이 되었습니다. 왕이신 하나님이 내 스승들을 데려가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자녀만한 스승이 없습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위로와 축복의 스승이요 때로 경고와 회개의 스승입니다. 자녀를 스승으로 여기는 부모는 자녀를 존중하고 아름답게 키울 수 있습니다. 어린 자녀가 스승이라면 세상 사람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스승이겠습니까?
어떻습니까? 우리가 만나는 모든 자연도 우리의 스승입니까? 계절은 어쩌면 그렇게 변함없이 오고 가는지. 계절은 우리의 변함없는 스승입니다. 저희 고향 냇가에는 매년 봄에 연어가 올라왔습니다. 요즘은 콘크리트 둑때문에 옷 올라옵니다. 한번은 둑을 지나가는 데 연어들이 올라오려고 둑밑에서 팔딱 팔딱 뜁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아, 연어는 스승이구나”. 존재의 근원으로 돌아가려는 창조의 위대함을 깨닫게 하는 스승, 그것이 연어입니다. 여러분, 꼭 사서 보실 책이 있습니다. 영국의 복음주의 신학자 존 스타트가 쓴 책입니다(책 그림). 죤 스타트는 하늘에 나는 작은 새들을 통해 하나님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새, 우리들의 선생님”이라고 붙였습니다. 죤 스타트는 놀랍게도 평범한 새들을 통해 하나님을 배웠습니다. 먼저 까마귀는 믿음을 가르쳐준 선생입니다. 까마귀를 통해 새 한 마리를 먹이고 입히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하기 때문입니다. 황새는 회개를 가르쳐 주는 선생입니다. 이스라엘에는 매년 50만의 황새가 약13,000킬로미터를 날아 아프리카까지 갔다 다시 돌아옵니다. 반드시 돌아오는 황새를 통해 하나님께 돌아오는 회개를 배웁니다. 그런가 하면 참새는 하나님앞에 있는 나의 가치와 자존감을, 독수리는 하늘을 나는 영적 자유를, 종달새는 하나님안에서 노래하는 기쁨의 삶을 배우게 합니다. 그래서 모든 새는 스승입니다. 어떻습니까? 새 한 마리가 스승이라면 이 세상에는, 이 자연에는 얼마나 많은 스승이 있습니까? “엄숙한 침묵속에서 뭇 별이 제 길 따르며 지구를 싸고 돌때에 들리는 소리 없어도 내 마음 귀가 열리면 그 말씀 밝히 들리네 우리를 지어 내신 이 대 주제 성부 하나님”. 마음의 귀를 들리는 스승의 음성, 그것이 자연입니다. 자연이 스승이면 역사는 얼마나 우리에게 스승입니까? 자연은 하나님이 입으신 옷이요 역사는 하나님이 사시는 집이며 사람은 거기 함께 사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누구나 마음을 열고 배우면 자연을 통해, 역사를 통해, 사람을 통해 하나님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시기 바랍니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도 스승이 되어야 합니다.
제자들의 발을 다 씻기신 예수님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13: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 예수님이 가르친 스승의 가장 마지막은 우리도 스승이 되는 것입니다. 다같이 “너희도”. “너희도 스승이 되어라”. 우리가 세상에서 배울 수 있는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듣고 배웁니다. 둘째는 보고 배웁니다. 셋째는 가르치면서 배웁니다. 어떤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이겠습니까? 뒤로 갈수록 좋은 방법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가르치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스승을 찾기만 해서는 좋은 제자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스승이 되어야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가끔 이런 젊은이가 있습니다. “요즘 어른들에게 정말 배울 사람이 없다“. 이런 교인도 있습니다. ”요즘 교회 사람들에게서 배울 것이 없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면 됩니다. ”정말 배울 것이 없습니까? 이제부터는 당신이 가르치십시오“. ”교회에서 정말 배울 사람이 없습니까? 이제부터는 당신이 스승이 되십시오“. 가르치지 않고 배우기만 하면 배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예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어느 해변가에 수천 마리의 불가사리가 파도에 밀려 백사장에서 뜨거운 햇빛에 죽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부지런히 뛰어다니며 불가사리를 바다로 던집니다. 사람이 지나가다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불가사리를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사람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아니 저렇게 많은 불가사리 어느 세월에 다 살립니까? 그리고 몇 마리를 살렸다고 달라지는 것이 있습니까?” 그때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예, 있습니다. 제가 집어 던진 불가사리는 살지 않습니까? 당신도 그 시간에 집어 던지면 던진만큼 불가사리가 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 사람도 감동받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같얼마후 모든 불가사리가 살았습니다. 세상을 폄론만 해서는 세상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나 한 사람이 세상을 다 바꾸지 못해도 내가 한 것만큼은 바꿔집니다. 교회를 한번에 다 바꾸지 못해도 내가 한 만큼은 바꿔질 수 있지 않습니까? 나도 예수님처럼 교회안에서 스승이 됩시다. 누군가가 나 때문에 회복되고 살아나고 다시 출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수님 스승을 닮고 나도 스승이 됩시다. 주여, 나로 하여금 예수님 닮은 작은 스승되게 하옵소서. "너희도 이렇게 해라“. 우리의 가정에서 자녀의 스승이 되고, 우리의 직장에서 다른 직원의 스승이 되고 이 나라에 대하여 예수님 닮은 스승들 되게 하옵소서.
스승의 주일(요13:1-15) 2011.5.15(일)
스승, 인생의 멘토
헬렌 켈러, “나의 스승 설리반”(책사진)
예수님이 우리의 최고 스승입니다
마22: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막9:17,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눅20:39,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님 잘 말씀하셨나이다”.
막10:20,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요8: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눅17: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마8: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마7:29, “이는 그 가르치는 것이 권세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배우려는 마음을 가지면 모두가 스승입니다
잠26:11,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계속하느니라”.
시1:1, “복있는 자는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엡4: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죤 스타트, “새, 우리들의 선생님”(책사진)
우리도 스승이 되어야 합니다.
요13: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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