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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요20:11-18) 2011.4.24(일) 부활, 최후의 승리

부활절(20:11-18) 2011.4.24()

부활, 최후의 승리

할렐루야, 부활의 아침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사건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류의 역사를 B.CA.D로 나눴고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던 인류에게 새 희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두말할 것 없이 인간 최대의 희망은 죽음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 죽음에서 벗어나고 싶은 인간의 간절한 소망이 담긴 곳이 무덤입니다.

 

경주에 가면 고분이 있습니다. 보통은 10미터 내외지만 어떤 것은 지름 83m, 높이 23m나 되는 고분도 있습니다. 중국 산동성에 가면 공자의 묘가 있습니다. 66천평의 광대한 땅에 500칸이나 되는 큰 건물입니다. 만리장성을 만든 진시황의 무덤도 대단합니다. 무덤에 실물크기의 허수아비 병사 8천명과 수백필의 마차, , 그리고 100대 이상의 전차를 같이 매장했습니다. 죽음 이후 자기를 지켜줄 사람들입니다. 이집트에 가면 왕들의 계곡이 있습니다. 거기에 라암세스 2세를 비롯한 수많은 왕들이 거대한 무덤에 누어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이렇게 큰 무덤을 짓고 그 속에 누어 있는 것일까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열망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람만이 죽음이후의 세계에 대해 관심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죽은 사람이 다시 돌아온 경우는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어떤 신학교에서 학생이 교수에게 물었습니다. “교수님, 왜 사람은 죽으면 돌아오지 않는 것입니까?” 교수가 말했습니다. “두 가지 이유때문이라네. 천국 간 사람은 너무 좋아서 돌아올 필요가 없고 지옥에 간 사람은 너무 힘들어 돌아올 수 없다네. 이래 저래 사람은 죽으면 돌아올 수 없네”.

 

그런데 인류 역사상 무덤 문을 열고 처음으로 살아난 분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무덤 속에서 삼일만에 살아났습니다. 부활은 예수님의 무덤을 최종 거주지가 아니라 임시체류소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에게 부활은 이 세상의 마지막 날이요 하늘 나라의 첫날이 되게 했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은 어떻게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났습니까? 그리고 그를 믿는 사람은 죽음앞에 어떻게 사는 것입니까?

역사상 부활을 처음으로 목격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그런데 그는 어느 모로 봐도 희망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그가 일곱 귀신 들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귀신들린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제가 어릴 때는 그런 사람이 많았습니다. 주로 큰 충격을 받았거나 가정이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저희 마을에도 정신이 이상한 여자가 하나 있었는 데 남편이 6.25때 핏덩이 아들을 놓고 참전했다가 죽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남의 집 식모살이를 시작했는 데 아들이 수영하다 죽었습니다. 그때 정신이 돌았습니다. 매일 아들 이름만 부르고 돌아 다닙니다. 귀신들린 사람들은 인생의 상처와 충격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막달라 마리아가 또 창녀였다고 말합니다. 그가 왜 창녀가 되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아마도 그는 아주 가난하고 불행한 가정에서 자랐는지 모릅니다. 그 일로 인해 그가 얼마나 인생을 포기하고 싶어했을지 생각만 해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에게 어느날부터 희망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를 만났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인생의 가장 어려운 시절, 예수님 만남으로 막달라 마리아는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만나 몸도 회복되고 마음도 회복되고 귀신도 나갔습니다. 상한 마음도 회복되고 억눌린 감정도 회복되었습니다. 그리고 삶의 기쁨과 사명도 회복되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에게 또 한번의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그가 사랑했던 예수님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 보이기에는 아무 죄도 없는 데, 그나마도 비참하게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자기를 살려주신 분, 자기 인생을 다시 시작하게 한 분이 돌아가시다니. 그나마 아무 죄없이 돌아가시다니. 마리아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날도 슬픔을 안고 무덤에 나왔습니다.

 

11절 보십시오. 20: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안을 들여다 보니”. 여러분, 마리아가 울고 있는 것이 보입니까? 유대인은 무덤을 돌로 파서 만듭니다. 무덤 문은 커다란 돌로 막아 놓고 시신은 천으로 싸서 그 안에 넣어 둡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분명 엊그제 이 무덤에 예수님을 장사한 것을 보았는 데 예수님의 시신이 없습니다. 무덤 문은 활짝 열려져 있고 그 안에 있어야 할 예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마리아의 슬픔은 걱정이 되었습니다. 누가 예수님 시신을 가져간 것일까? 내가 잘못 왔나? 분명 아닌데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디 있나? 슬프고 놀란 마리아는 그저 눈물만 나왔습니다. 여러분은 이 마리아의 눈물을 보십니까? 사랑했던 예수님이 죽어서 슬픈 눈물, 이 세상에 오로지 예수님 한 분 의지하고 살았는 데 그가 없어져 외롭기 때문에 흘리는 눈물, 그나마 시신조차 누가 가져갔는지 모르는 속상한 눈물, 그 눈물을 보십니까?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눈물속에 삽니다. 노동자들은 노동자대로, 기업가는 기업가대로 고통이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 때문에, 자식은 진로 때문에, 아픈 사람은 불안해서, 실업자는 직업이 없어서, 노동자는 월급이 작아서, 외국인 노동자는 힘들고 외로워서, 북한동포들은 배고파서 울고 고통합니다. 세상에 고통없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8:22절입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탄식이란 비명소리입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노동하면서 부르짖던 소리입니다. 모든 살아있는 사람은 탄식하며 삽니다. 무덤앞에서 울고 있는 마리아가 보입니까? 그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예수님 없이는 못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생명과 부활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조금 더 가까이 가 볼까요?

 

무덤앞에서 울고 있는 마리아는 단지 슬픈 것이 아닙니다. 격한 슬픔입니다. 슬픔은 무엇인가 잃었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입니다. 아이가 엄마를 잃으면 슬픕니다. 강아지가 주인을 잃으면 슬픕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애인을 잃으면 슬픕니다. 슬픔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엄마를 찾고 주인을 찾고 애인을 찾기 전까지는 슬픔이 회복되지 않습니다. 마리아는 또한 두려웠습니다. 두려움은 무엇인가 빼앗길까 해서 생기는 감정입니다. 강도를 만나면 두렵습니다. 큰 병이 걸리면 두렵습니다. 지진을 만나면 두렵습니다. 이번에 일본에 난 해일과 지진을 보면서 두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순식간에 밀려온 해일로 일본이 무력화된 된 것을 보고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성경은 죽음을 지진으로 묘사합니다. 8:8, “죽는 날을 주장할 자가 없나니 지진처럼 흔들림이라”. 지진이 갑자기 찾아와 온 세상이 흔들린 것처럼 인간은 어느날 갑자기 죽음을 맞습니다. 마리아는 어느날 갑자기 예수님을 빼앗겨 두렵습니다.

 

마리아는 또한 외로웠습니다. 같이 있던 사람이 떠나면 외롭습니다. 그 사람이 힘과 용기가 되었던 사람이면 더욱 외롭습니다. 유명한 영화 배우 마릴린 먼로는 서른다섯에 목숨을 끊었습니다. 가정부가 시체를 발견해보니 그는 뽑혀진 전화기를 들고 있었습니다. 누군가와 대화하다가 죽은 것입니다. 한 신학자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마릴린 먼로는 왜 죽었는가?” 답은 외로움이었습니다. 세상에서 명예와 인기는 높아 가는 데 그와 외로움을 달래줄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도의 테레사에게 누가 물었습니다. “마더, 세상에서 가장 큰 병이 무엇입니까?” 테레사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외로움이지요”. 에이즈가 가장 큰 병이 아니고 암이 가장 큰 병이 아니고 외로움이 가장 큰 병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도 가끔 슬픕니까? 무엇인가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가끔 두렵습니까? 무엇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가끔 외롭습니까? 누구와 대화가 단절되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이것 때문에만 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눈물에는 더 큰 것이 있습니다. 패배의식입니다. 마리아는 실패가 많았던 사람입니다. 그의 일생은 실패의 연속인 일생이었습니다. 그는 귀신들린 여자였습니다. 정신이 병들고 영혼이 망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창녀였습니다. 몸이 망가지고 가정도 깨어진 사람입니다. 성경에 그의 부모와 형제, 자녀 이야기가 한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아마도 가까운 사람들도 그를 버렸는지 모릅니다. 그에게는 친구도 없고 모아 놓은 돈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속에는 나는 안돼, 나는 틀렸어”. 패배의식으로 가득 찼습니다. 만약에 그의 인생을 포기한다 해도 그를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는 살 이유보다 죽을 이유가 더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패배의식은 허무의식을 동반합니다. “나는 틀렸어. 나는 안돼하다 보면 에이, 죽어버리지. 하는 생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패배의식은 허무주의의 어머니입니다. 패배의식을 가지면 허무의식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 세상의 모든 철학이나 종교는 허무주의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불교, 사찰에 앉아 명상하는 것은 좋아 보이지만 그 뿌리는 허무적 사상입니다. 불교는 "열반"을 말하는 데 열반불이 꺼진다"는 뜻입니다. 깜빡 깜빡 타던 불이 한순간에 ""하고 꺼집니다. 그러면 인생도 어느 순간에 어디론가 사라지고 맙니다. 왜 사라지는가? 어디로 사라 지는가? 누구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묻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뿐입니다. 인생은 공수거, 공수래, 빈 손으로 와서 빈 손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기는 것이 몇 개의 사리입니다. 철학도 허무주의의 기초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성경시대 이 그리스 철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사람에는 신성의 불꽃이 있다. 사람은 그 불꽃이 타고 있는 동안에만 존재한다. 그러다가 그 불꽃이 사라지면 그가 왔던 신에게로 돌아간다. 사람이 죽으면 신의 불꽃속에 흡수된다”. 이것이 소위 흡수론입니다. 사람이 가진 불꽃은 무엇인지? 그것은 어디서 왔는지? 누구도 말해주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죽으면 끝난다. 죽으면 모두 사라진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지성인들 가운데 자살로 인생을 마친 사람이 많습니다. “이방인을 쓴 철학자 까뮈,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헤밍웨이, "설국"의 야스나리, 모두 자살로 인생을 마쳤습니다. 헤밍웨이는 죽어가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전류의 흐름이 그치고 필라멘트가 끊어진 전구처럼 고독하다." 헤밍웨이는 훌륭한 문학가였으나 훌륭한 인생을 살지는 못했습니다. 불행한 죽음으로 끝났기 때문입니다.

 

다시 11절을 보십시오. 20: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안을 들여다 보니”. 여러분은 마리아를 보십니까? 이 마리아가 누구입니까? 인류입니다. 저와 여러분입니다. 모든 인류가 무덤밖에서 슬피 울고 있습니다. 삶과 죽음 사이에 건너지 못할 강을 앞에 두고 슬피 울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인류에게 희망은 없는 것입니까?

 

다음 순간 그에게 희망의 빛이 비춰졌습니다. 예수님이 나타난 것입니다. 16절입니다. 20: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말로 랍오니 하니(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나타나 말했습니다. “마리아야”, 인류의 소망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타나기 까지 마리아의 눈물을 그치게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 마리아야불러 주기 전에는 절대 마리아는 변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 가장 먼저 마리아야하고 이름을 불렀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은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삼으라가 아니었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도 아니었습니다. “마리아야”.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신 것입니다. 우주를 지으시고 역사를 섭리하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지극히 작은 한 사람에게 다가와 마리아야하고 부르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어거스틴이 말한대로 하나님은 온 인류를 사랑하시듯 한 사람을 사랑하시고 한 사람을 사랑하시듯 온 인류를 사랑하시려고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독일의 사업가 쉰들러가 2차대전때 나찌의 손에서 유대인을 구해내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 유대인을을 구합니다. 그 수가 1,000명이 넘습니다. 그런데 쉰들러는 그 천 명의 이름을 다 기억합니다. 어떻게 그 이름을 기억할까요? 그들을 구해낼 때 자신이 소중히 여겼던 물건 하나 하나를 팔았기 때문입니다. 사람 하나 하나가 자신이 가진 소중한 물건과 바꿔졌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천 명은 한 명으로 부터 시작합니다. 한 명이 한 명 두명 모여 천 명이 된 것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공장을 떠나기 전 유대인들은 탈무드에 있는 말씀을 새긴 반지를 그에게 선물합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한 생명을 건지는 것은 우주를 건지는 것이다”. 이때 쉰들러는 반지를 받고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 더 살릴 수 있었는데, 좀 더 구할 수 있었는데. , 내가 돈을 좀 더 벌었더라면, 이 차를 팔았다면, 이 금핀을 팔았다면 한 명 아니 두명은 더 구했을 텐데, , 내가 더 할 수 있었는데. 결국 내가 안 한 거야.” 쉰들러는 오열했습니다. 천명을 구하고도 한 명 더 구하지 못했다고 오열하는 쉰들러, 그 장면을 보면서 저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 십자가에 죽이고 희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여전히 , 내가 더 구할 수 있었는 데, 한 사람 더 구할 수 있었는데". 하고 탄식하시고 계실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인도 캘커타에서 수 만명의 가난하고 병든 자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그렇게 많은 사람을 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하려고 한 것은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한번에 한 사람씩이란 시에서 이렇게 썻습니다. “난 결코 대중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는다. 난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뿐이다. 난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껴안을 수 있다.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껴안을 수 있다. 단지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씩만. 따라서 당신도 시작하고 나도 시작하는 것이다. 난 한 사람을 붙잡는다. 만일 내가 그 사람을 붙잡지 않았다면 난 42천 명을 붙잡지 못했을 것이다. 당신에게도 마찬가지다. 단지 시작하는 것이다. 한 번에 한 사람씩”.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번에 한 사람씩 구원합니다. 5장에서 하나님은 에녹 한 사람을 살려 하늘로 올라가게 했습니다. 왕하2장에서 하나님은 엘리야 한 사람을 살려 승천하게 했습니다. 엘리사는 사르밧 과부의 아들 한 사람을 살렸고 선지자의 생도의 아들 한 사람을 살렸습니다. 이삭 한 사람에게 모리아산에서 살아났고 요나 한 사람이 물고기 뱃속에서 살아났습니다. 사람 살리는 일은 예수님을 통해 계속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아인성 과부의 독자 한 사람을 살리고 야이로의 딸 한 사람을 살리고 죽은 나사로 한 사람을 살렸습니다. 베드로는 도르가 한 사람을 바울은 2층난간에서 떨어진 유두고한 사람을 살렸습니다.

 

지난 두 주간의 사순절에 우리 교회에 주신 축복은 한 사람을 살리신 축복입니다.지난 410, 우리 교회 송미집사가 원인을 모를 열병으로 의식 불명 상태가 되어 중환자실에 실려 갔습니다. 졸지에 식물인간이 된 송집사, 의사들도 정확한 원인을 모르는 상황에서 송집사는 빠른 속도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 사람의 생명이 얼마나 덧없는지. 갑작스런 열병으로 호흡이 곤란해지고 혈압이 떨어지고 신장, 간의 활동이 멈추고 그래서 신장투석과 인공호흡으로 간신히 생명을 연장하는 다급한 상황에 빠졌습니다. 그야말로 사순절에 찾아온 죽음의 공포였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울며 매달리는 가족들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기도하고 여러분도 새벽마다 기도했습니다. “주여, 송미 집사를 살려 주옵소서”. 대부분이 송집사의 얼굴을 모르지만 고난중에 있는 딸을 살려달라고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정확히 기도를 시작한 일주일 후 송집사가 깨어났습니다. 전화를 받고 가 보았더니 신장투석기, 인공호흡기 떼어버리고 정상적으로 회복되어 앉아 있었습니다. 사람도 알아보고 말고 하고 장기에 손상도 없었습니다.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무덤밖에서 울고 있는 송집사의 이름을 불러 주신 것입니다. “송미야”. 주님의 음성이 송집사의 귀에 들린 순간 그는 살아 났습니다. 부활은 2천년 전에 막달라 마리아에게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무덤밖에 울며 기도하는 자는 누구나 구원합니다. 마리아가 살아 났다면 송집사도 살아납니다. 송집사가 살아 났다면 우리도 살아납니다.

 

한 사람을 살리시는 하나님, 이번 사순절에 우리에게 주신 또 하나의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 나오는 6, 김수현 어린이를 돕게 된 은혜입니다. 한번은 심방을 갔더니 어린 아이가 하나가 몸이 안 좋습니다. 자세히 보니까 다운증후군인데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말도 잘 못하고 심장까지 안좋아 수술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나이들어 결혼해서 늦게 얻은 귀한 딸인데 너무 가슴아픈 상황이 일어난 것입니다. 더구나 아버지도 몸이 안 좋아 장애인 판정을 받고 일하기도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이번 사순절 성 금요일에 전 교인이 헌금하기로 하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교인들이 너무 많이 동참했습니다. 한 사람이 많은 헌금을 하는 것보다 많은 사람이 십시일반으로 참여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유치부부터 중고등학생, 청년, 장년, 전 교인이 참여했습니다. 정말 정성으로 드린 헌금입니다. 한 사람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 교우들이 기쁘게 한 것입니다. 이 작은 헌금을 통해 수현이가 반드시 살아나 앞으로 하나님의 훌륭한 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마리아야”. 모든 능력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아픔과 눈물을 알고 계신 부활의 주님이 우리앞에 다가와 우리 이름을 부를 때 우리는 죽었다 살고 아팠다 치료되고 넘어졌다 일어 납니다. 예수님이 나사로야부를 때 나사로는 죽음에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도마야하고 부르실 때 도마는 불신앙에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사울아하고 부르실 때 사울은 핍박자에서 순교자로 회복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김익두야하고 부를 때 김익두는 깡패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조용기야부를 때 조용기는 펫병환자에서 세계 최대 목회자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마리아의 이름을 부른 다음 두 가지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7절입니다. 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어떤 의미입니까? 예수님이 사람들과 다른 어떤 특별한 모습으로 계심을 의미합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찾아와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는 마리아와 다른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계셨습니다. 마리아는 땅에 살고 예수님은 하늘에 삽니다. 하늘이 고향인 예수님은 이제 하늘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부활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존재가 되고 하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그동안 세상에 살면서 사람들과 함께 사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부활했습니다. 부활은 예수님이 본래 하나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본래 왔던 곳은 하늘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다만 장생불사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다만 오래 사는 것이 부활이 아닙니다. 하늘의 것으로 살아야 부활입니다. 이 세상에서 개과천선하여 달라진 삶을 살려고 애쓰는 것이 부활이 아닙니다. 이것은 톨스토이가 말하는 부활입니다. 부활은 이 땅에 내다 잘해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하늘을 힘입어야 합니다. 하늘이 주는 능력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다 때가 되면 하늘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부활의 사람에게는 허무주의가 없습니다. 허무주의는 죽어서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 갖는 불신앙적 사상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늘이 있습니다. 갈 곳이 있고 다스릴 분이 계십니다. 우리를 다스리는 하늘이 있고 돌아갈 하늘이 있습니다. 그래서 허무주의는 우리와 상관없습니다.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패배주의와도 상관없습니다. 하늘이 우리를 돕기 때문에 나는 안돼, 나는 틀렸어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느니라“. 부활은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사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사람에게 빼놓을 수 없는 삶의 자세가 있습니다. 18절입니다. 20: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여러분, 이것이 역사상 최초의 전도요 최초의 간증이며 최초의 설교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무덤 밖에 슬피울던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내가 주를 만났다”. 영광스러운 삶의 변화입니다. 부활이 하늘의 사람이 되는 것이라면 부활의 사람은 하늘을 선포하고 사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은 후에 모두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영광스러운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수제자 베드로는 로마에서 전도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마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전도하다가 기도하며 죽었습니다. 빌립은 소아시아에서 전도하다가 십자가지고 죽었습니다. 바돌로매는 갈라디아에서 전도하다가 몸의 가죽을 벗기우고 순교했습니다. 도마는 인도에 가서 전도하다가 에데사에서 나는 하나님을 예배합니다하며 순교했습니다. 마태는 에티오피아에 까지 가서 전도하다가 창에 찔려 순교했습니다. 맛디아는 예루살렘에서 전도하다가 돌팔매질을 맞고 쓰러진 후 목베임을 당했습니다. 바울과 함께 동행했던 누가는 그리스에 가 전도하다가 감람나무에 매달려 죽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서 전도하다가 무릎을 꿇고 목베임을 당했습니다. 사도 요한만 백 살까지 살아 끝까지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며 하나님 나라 갔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 있으며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우리는 지금 무덤밖에서 슬피 울고 있지만 곧 부활의 주님과 함께 살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이름을 아시는 주,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주, 우리는 주님과 함께 하늘에 삽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하늘의 다스림을 받고 하늘의 은혜로 삽니다. 슬픔, 두려움, 외로움, 운명주의, 허무주의, 패배주의가 우리안에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우리는 현주소는 전도자로 사는 것이고 우리의 미래는 영광스러운 순교자가 되는 것입니다. “마리아야”. 오늘도 우리의 이름을 부르는 부활의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일어나십시오. 깨어 나십시오. 전진하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의 최후 승리가 여러분과 함께 하기 바랍니다.

 

 

 

 

 

 

 

 

 

 

 

 

 

 

 

 

 

 

 

 

 

 

 

부활절(20:11-18) 2011.4.24()

부활, 최후의 승리

20: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안을 들여다 보니”.

8: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8:8, “죽는 날을 주장할 자가 없나니 지진처럼 흔들림이라”.

20: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안을 들여다 보니”.

 

* 테레사, “한번에 한 사람씩

난 결코 대중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는다. 난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뿐이다. 난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껴안을 수 있다.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껴안을 수 있다. 단지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씩만. 따라서 당신도 시작하고 나도 시작하는 것이다. 난 한 사람을 붙잡는다. 만일 내가 그 사람을 붙잡지 않았다면 난 42천 명을 붙잡지 못했을 것이다. 당신에게도 마찬가지다. 단지 시작하는 것이다. 한 번에 한 사람씩.

 

* 송미 집사 사진

 

* 김수현 사진

 

20: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말로 랍오니 하니(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느니라“.

20: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