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5:25-32 2012.1.22(일)
나의 사랑, 나의 가족
민족 고유의 명절 설날입니다. 올 해에도 수 백, 수천만의 사람들이 고향과 부모를 찾아 길을 떠났습니다. 왜 그렇게 길이 복잡한 데 고향을 찾을까요? 가족 때문입니다. 가족의 정 때문입니다.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지 우리가 살아가면서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것이 가족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사람을 소개할 때 개인적으로 소개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가족과 함께 소개합니다. 가령 “요한”을 봅시다.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아버지와 형의 이름이 같이 소개됩니다. 가족의 이름이 안 들어가면 이름이 같아 헷갈립니다. 예수님의 제자중에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도 있었지만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도 있습니다. 구약 시대로 돌아가 볼까요?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을 봅시다. 그냥 “사울”이 아닙니다. ”기스의 아들 사울“입니다. 아버지의 이름 뿐 아니라 고향도 나옵니다. ”기브아 출신, 기스의 아들 사울“. 다윗을 볼까요? 정식 이름이 ”베들레헴 출신, 이새의 아들 다윗“입니다. 성서의 문화는 가족문화입니다. 어떤 사람도 혼자 태어난 사람도 없고 어떤 사람도 혼자 살아가는 사람도 없습니다. 어디에선가 태어났고 누구의 아들, 누구의 형제로 살아갑니다.
가족이 얼마나 중요한지 어떤 가족이 인생을 비관하여 아파트에서 같이 투신했답니다. 모두 6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 사람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왜 그런가 하고 알아 보았더니 아버지는 “기러기” 아빠였답니다. 그래서 기러기처럼 날았답니다. 엄마는 “새엄마”였답니다. 엄마도 새처럼 날았답니다. 큰 딸도 다치지 않았답니다. “날라리”였기 때문입니다. 큰 아들도 다치지 않았답니다. “제비족”이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아들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비행청소년”이었기 때문입니다. 막내 딸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덜 떨어진” 애였기 때문이랍니다. 이런 가정은 정말 불행합니다.
하나님이 운명처럼 맺어준 가정, 우리는 어떻게 가족을 사랑하며 함께 살 수 있을까요? 오늘 이야기는 그 유명한 “탕자의 비유”입니다. 한 이스라엘 가정에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둘째 아들이 어느 날 아버지의 재산을 빼앗아 밖으로 나갑니다. 그리고 허랑방탕하다가 다시 돌아옵니다. 그런데 형은 그를 맞아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버지가 둘을 다 용서하고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내용입니다. 이 비유의 주제는 분명합니다. 가족의 회복입니다. 가족은 어떤 일이 있어도 떨어져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를 통하여 우리는 어떻게 가족간의 좋은 관계를 이룰 수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이 만나게 한 가족간에 사랑을 나누며 살 수 있을까요? 세 가지 각도에서 살피면 좋겠습니다. 첫째 부모의 입장에서, 둘째 자녀의 입장 에서, 그리고 셋째 형제의 입장에서입니다.
먼저 부모의 입장에서 봅시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탕자의 가정을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결론은 이렇습니다. “최선을 다했으나 자녀의 탈선을 막지 못한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누구나 어떤 부모도 자녀에 대해서 장담할 수 없습니다. 좋은 부모밑에서 나쁜 자식이 나올 수 있고 나쁜 부모밑에서도 좋은 자식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남의 자식 이야기할 틈이 없습니다. 그렇게 믿었던 내 자식이 잘못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자녀의 문제가 부모에게서 나온 것은 아니지만 모든 부모의 문제는 반드시 자식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자식의 문제는 곧 부모의 문제입니다.
이런 눈으로 탕자의 가정을 볼 때 무엇보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이 가정에 어머니가 없다는 것입니다. 탕자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버지와 두 아들간의 이야기입니다. 왜 탕자에게는 어머니가 없을까? 실제로 어머니가 없었을 가능성도 있고 비유의 초점을 하나님을 상징하는 아버지에게 집중하고 싶어서 어머니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뺏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탕자의 불행은 어머니의 부재로부터 시작됩니다. 어떻습니까? 만일 탕자에게 어머니가 있어서 날마다 그를 위해 기도하고 사랑했다면 그가 탕자가 되었을까요? 탕자가 사춘기가 되어 혹시 아버지에게 대들고 가출하려고 했어도 어머니가 그에게 다가가 “아들아, 왜 그러니?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하고 다독거렸다면 그가 집을 나갔을까요?
오늘 성경을 읽어보면 탕자의 아버지는 아주 좋은 아버지로 나타납니다. 재산을 달라고 했을 때 말없이 주고 그 재산을 다 탕진하고 돌아왔는 데도 달려가 목을 안고 울었습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정에 어딘가 모르게 2% 부족한 것이 있는 것은 어머니가 없기 때문입니다. 혹시 아버지가 어머니를 싫어해 어머니와 강제로 이혼하고 어머니를 밖으로 내 쫓았을까요? 최악의 시나리오지만 그럴 수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남자가 여자를 싫어하면 이혼증서만 주면 끝났기 때문입니다. 요즘 눈으로 매우 불공평한 처사였지만 그것이 2천년 전 일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나마 그 이전 시대에는 이혼증서도 없이 여자를 내쫓았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렇지 않고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다고만 해도 어린 아들은 엄청난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부모 여러분, 가정의 모든 문제는 부모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을 겸손히 인정합니까? 내가 개인적으로 자식에게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부부가 먼저 좋은 부부가 되는 것이 최상의 자녀교육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부부간의 관계는 나쁜 데 자녀만 사랑하면 그 사랑이 모든 자녀의 문제를 치유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십니까? 통계청 보고에 의하면 “2010 인구조사”에서 혼자 사는 1인가구가 눈에 띄게 늘고 있습니다. 2010년말 현재 403만 9000가구입니다. 이것은 한국인 가정 네 가정당 한 가정이 혼자 산다는 것입니다. 이 통계는 몇 년 전 정부가 2030년이 되면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한 그 통계를 몇 년만에 달성한 통계입니다.
정말 우리 시대에 기억할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창1:18절입니다. “여호아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여기 “혼자 산다”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혼자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혼자 사는 것도 두 가지입니다. 영어로 live alone 하면 글자 그대로 혼자 사는 것입니다. 독신주의로 살거나 이혼, 별거로 혼자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live lonely하면 함께 살기는 하는 데 각각 따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에서 말한 “독처”, “혼자 사는 것”은 몸이 혼자 살든지 마음이 혼자 살든지 두 경우를 다 포함합니다. 이 두 가지를 다 하나님이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가 더 큰 문제가 됩니까?
지난 3월, 함께 살면서도 6년을 넘게 메모지를 통해서만 대화를 나눠온 노부부에게 대법원이 이혼을 확정했습니다. 두 부부는 평소 성격탓으로 많이 다투고 살다가 6년전부터 아예 이야기를 안하고 메모로만 소통했답니다. 남편이 아침에 집을 나가기 전에 아내에게 이런 메모를 남깁니다. “두부는 비싸니 찌개식으로 하지 말고 생태는 동태로 하고, 삼치는 꽁치로 구입할 것”, “내 정장 바지가 거실에 있는 데 그 이유를 말하라고 어제 말했는데 어찌 지금까지 묵묵부답인지? 내일까지 그 이유를 말할 것”, 여러분, 이러니 어떻게 살겠습니까? 결국 부인이 집을 뛰쳐나갔다가 열쇠수리공을 대동하고 몰래 집에 들어와 서류를 챙겨 이혼하고 말았습니다. 이 부부는 live lonely한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좋은 자녀교육은 좋은 부부관계라는 것을 인정합니까? 자녀들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부부가 잘사는 것, 그것이 자녀교육의 비결입니다.
자, 조금 더 아버지께 다가가 봅시다. 앞에서 말한대로 이 아버지는 나무랄 것이 없는 아버지입니다. 오죽하면 이 아버지가 완전하신 하나님을 상징하겠습니까?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이 아버지에게도 문제가 많습니다. 보통 가정에서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역할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자녀를 보호하고 공급하는 일, 둘째는 자녀의 삶을 지지하고 격려하는 일. 셋째는 자녀의 가치의 중심을 잡아주는 것, 이 아버지는 아들을 보호하고 공급하는 데는 흠잡을 것이 없는 아버지였습니다. 아들을 격려하고 지지하는 것도 잘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과연 아버지는 아들에게 진정한 가치의 중심에 있었을까? 아버지는 가정에서 어른이기 때문에 중심이 아니라 삶의 분명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중심이 흔들리면 아무 것도 안됩니다. 아버지는 자녀에게 판단의 중심, 결정의 중심, 옳고 그름의 중심, 가치의 중심, 그 중심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아버지들이 읽으면 좋을 책이 있습니다. 스캇 펙이라는 기독교 정신과 의사가 쓴『아직도 가야 할 길(The Road Less Traveled)』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건강한 자녀를 만들기 위해서 크리스쳔 부모가 가져야 할 네 가지 교육의 원리를 말합니다. 첫째. “미래의 만족을 위하여 오늘을 희생하는 법을 가르치라”. 오늘 좋은 것이 영원히 좋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미국 속담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오늘 놀면 내일 지불하고 오늘 지불하면 내일 논다”. “play today, pay tommorrow, pay today play tommorrow". 여러분은 자녀에게 내일을 위해 오늘 비싼 대가를 지불하도록 가르칩니까? 둘째는 ”주어진 상황을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이도록 훈련하라“. 이것이 참 중요한 교육입니다. 평생 남의 탓만 하다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못사는 것은 부모때문이고, 내가 출세하지 못한 것은 아내때문이고, 교회가 부흥되지 못한 것은 목회자때문이고, 나라가 이 꼴인 것은 대통령 때문이다”. 이 사람은 안되는 원인을 끊임없이 밖에서 찾습니다. 자기는 그 책임에서 제외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가르쳐야 합니다. “모든 잘못은 내 책임이고 모든 잘된 것은 남의 덕이다“ 그래야 자신도 행복하고 역사도 발전합니다. 세 번째는 ”언제나 진실을 말하고 현실에 충실하도록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최후 승리는 진실에 있습니다. 잠시 몇 사람을 속일 수 있고 모든 사람을 잠시 속일 수 있으나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습니다. 진실을 가르치고 현실에 충실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넷째는 ”영적으로 성장해야 모든 것이 성장한다는 것을 가르치라“입니다. 자녀에게 영적인 삶을 가르치지 않고 세상적인 성공만 가르치는 부모는 자녀를 하나님없는 무신론자로 만듭니다. 언제나 역사에 뛰어난 인물은 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눈으로 탕자의 아버지를 보면 가정에서 아들에게 충분한 교육을 시켰다고 볼수 없습니다. 재산을 달라고 말할 때 내일의 더 큰 행복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는 법을 가르쳤어야 했습니다. 아들이 느끼는 모든 책임은 부모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나온다는 것을 가르쳤어야 합니다. 그래서 책임적 인간이 되도록 했어야 합니다. 결정적으로 아버지는 아들에게 영적인 삶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평소에 기도하고 성경읽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삶을 가르쳤으면 어려움 당했을 때 스스로 해결했을텐데 아버지는 그것을 가르치지 않아 아들잃고 재산잃고 사회적 위신까지 잃었습니다. 부모 여러분, 자녀에게 효도하라고만 가르치지 말고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자녀 교육의 가장 좋은 교과서는 부모자신입니다.
자녀의 입장에서 봅니다.
자녀입장에는 부모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자녀가 부모를 불순종하거나 불효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아버지는 인간적으로 볼 때 완전한 아버지는 아닙니다. 어머니가 없는 가정은 탕자의 탈선에 상당한 빌미를 제공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녀의 입장에서 부모를 거역해서는 안됩니다. 그 이유는 자녀는 부모에게서 너무 많은 것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자, 탕자의 경우를 봅시다. 그는 집 나가기 전에 전적으로 부모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부모가 낳고 기르고 먹이고 입혔습니다. 아무 것도 자기 것이 없었습니다. 그가 달라고 요청한 재산도 쉽게 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재산은 조상적부터 물려 받은 하나님의 기업이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기업은 부모가 죽기 전에는 물려줄 수 없었습니다. 설령 형식적으로 물려준다 해도 부모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여전히 부모에게 처분권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혹 자녀에게 물려줄 재산이 있다면 미리 물려주지 말기를 바랍니다.
주전 2세기에 쓰여진 유대인 문헌 시락서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너는 아들이나 아내나 형제나 친구에게 네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무에게도 재산을 물려주지 말라. 너의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그것을 붙잡고 있으라.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네가 자식들을 의지하는 것보다 자식들이 너를 의지하게 하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탈무드에도 그런 말이 나옵니다. “아무리 하나님께 울부짖어도 응답받지 못하는 세 가지 기도가 있다. 첫째 증인 없이 돈을 빌려 주는 사람의 기도, 둘째 자신의 재산을 이방인에게 넘겨준 사람의 기도, 그리고 셋째 살아서 재산을 자식들에게 물려준 사람의 기도”. 얼마나 많은 가정이 유산문제로 시끄럽습니까? 재산이 있어도 물려주지 말고 스스로 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재산을 다 나눠 주었습니다. 당시 사회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을 행한 것입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만큼 이 아버지는 자식들을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부모에게서 너무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어릴 때 안고 업고 얼러 주시고 자라선 문기대어 기다리는 마음“. 아버지는 아들에게 재산을 나눠주었습니다. 그리고 긴 이별의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얼마나 아버지는 아들을 기다렸겠습니까? 그 뿐이 아닙니다. 아들이 돌아올 때 아버지가 먼저 알아보고 달려가 입을 맞추었다고 합니다. 어떤 학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부모를 거역하고 집을 나간 자식들을 징계하는 법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케쏴쏴 의식“이라고 합니다. ”케쏴쏴 의식“은 집나간 자식이 돌아오면 동네사람들이 붙잡아 사람들 앞에 세우고 불에 탄 곡식으로 가득 채운 통을 가져와 그 통을 깨뜨립니다. 그러면 곡식들이 사방으로 흩어집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거역한 아들을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이 흩어진 곡식들처럼 너는 조상의 기업으로부터 영원히 끊어질 것이다” 일종의 저주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아버지를 아들을 보자 마자 달려갔는가? 동네 사람들이 보기 전에 먼저 달려간 것입니다. 동네사람들이 잡아다가 “케쏴쏴 의식”을 하기 전에 얼른 집으로 데려간 것입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모든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우리 아들이 죽을 죄를 지었지만 나를 봐서 한번만 용서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 음식을 먹고 한번 봐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아들을 보고 두 번이나 이렇게 말합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다”. 왜 두 번인가? 한번은 이 아들이 집나갈 때 죽었고 또 한번은 돌아올 때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아버지의 사랑이 오늘 말씀 12절이 나타납니다. 눅15:12, “아버지가 두 아들들에게 각각 살림을 나눠주었더니”. 이 “살림”이란 말이 재미있습니다. 헬라어로 이 말은 “비오스”입니다. 이 말은 “생명”이란 말입니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나눠준 것은 다름 것이 아니라 “생명”이었습니다. 그는 아들에게 생명같은 재산을 주었고 생명을 다해 기다렸고 마지막에 아들을 자기 온 몸으로 막아 죽음에서 건져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생명을 준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여러분의 부모에게서 생명을 받았다고 생각합니까? 육신의 생명을 받을 뿐 아니라 생명같이 먹이고 생명을 다해 사랑하고 생명을 다해 기도하고 지금도 우리가 어려우면 자신의 생명을 돌보지 않고 걱정하시고 염려한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래서 혹시 아직도 부모를 용서하지 못한 분이 있다면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가 부모를 용서하고 사랑해야 할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나를 위해서 용서해야 합니다. 혹시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았다고 합시다. 내가 부모를 용서하면 내 상처가 치유되지만 용서하지 못하면 내 상처가 그대로 있습니다. 나를 위해 부모를 용서해야 합니다. 둘째는 부모를 용서해야 제대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모를 용서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그러면 기도도 못합니다.
부모를 용서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도 나와 같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릴 때는 부모님이 세상에서 가장 큰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자라면서 보니까 부모도 나처럼 실수합니다. 처음에는 실망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사랑스럽습니다. “아, 우리 부모도 사람이구나”. 그래서 친구가 됩니다. 아버지가 아버지로 엄한 아버지로 안 보이고 가까운 친구로 보일 때 내가 성숙한 것입니다. 아버지가 실수해도 그 실수 때문에 내가 상처받지 않고 웃어 넘길 때 내가 성숙한 것입니다. 어머니가 치매에 걸렸어도 부끄럽지 않고 예쁘고 귀여울 때 내가 성장한 것입니다. 부모도 인간입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환경의 영향, 그 부모의 영향을 받고 자라났습니다. 어떤 부모도 그냥 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술먹고 인생을 망치게 된데는 말 못할 상처가 있었습니다. 자식이 컷으면 그 상처가 무엇인지도 알아야 합니디. 우리 어머니가 잔소리가 많고 시시콜콜 자녀에게 싫은 소리를 한다면 그럴만만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효자는 술먹은 아버지를 업고 오는 아들입니다. 치매걸린 어머니와 한 이불에 자는 딸입니다. 완전한 부모는 교과서에는 있지만 현실에서는 없습니다. 완전한 부모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드는 것입니다. 이번에 설날에 내려가 아버지를 한번 업어 주세요. 이번 설날 내려가 어머니와 한 이불에서 자보세요. 부모는 평생 갚아도 갚아도 갚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마지막으로 형제의 입장에서 봅시다.
좋은 가정은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만이 아닙니다. 형제관계가 있습니다. 탕자에게는 형이 하나 있는데 그 형과의 관계가 좋지 않습니다. 만일 형과 좋은 관계에 있었다면 동생이 집 나간다고 했을 때 말렸어야 합니다. 혹시 고집을 부리고 집을 나갔다 면 찾으러 가야 합니다. 아버지가 가슴 아파하고 있으면 형은 동생을 찾아서 아버지께 데리고 와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형이 동생을 찾으러 나갔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더 큰 문제는 동생이 돌아왔을 때 잔치하는 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았을 때는 화가 나서 들어가지도 않고 밖에 서 있었습니다. 이때 아버지가 나왔습니다. 눅15:28절을 보십시오.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잔뜩 찌뿌리고 화를 내는 아들을 아버지가 오히려 달랩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피를 나눈 동생이 그렇게 고생하고 돌아왔으면 형으로서 불쌍한 마음이 들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못한 데는 이유가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부모가 형제를 서로 비교하면서 키웠을 가능성입니다. “형은 모범생인데 너는 뭐하는 놈이냐?” 부모가 자녀를 비교하면서 키우면 반드시 형제간의 우애는 좋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에서와 야곱이 그 경우입니다. 창25:28,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야곱의 아버지 이삭은 에서를 좋아하고 어머니 리브라가 야곱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둘은 평생 원수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탕자의 경우는 그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탕자가 재산달라고 했을 때 달라고 하지도 않은 큰 아들에게까지 준 것을 보면 아버지는 둘 다 다 사랑한 것 같습니다. 문제는 큰 아들에게 있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아버지 재산에 있었습니다. 그는 동생이 밖에 나가 고생한 것보다 동생이 아버지 재산을 탕진한 것이 더 아까왔습니다. 그래서 동생은 동생이라고 부르지도 않습니다. 마치 남처럼 “이 아들은, 당신의 아들은”하고 부릅니다.
형이 열심히 일하고 아버지를 잘 섬긴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왜 열심히 일하고 왜 잘 섬겼는가가 문제입니다. 29절을 보십시오 눅15: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새끼 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여기서 “섬겼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둘류오”입니다. 이 말은 섬기되 종으로 섬겼다는 뜻입니다. 아버지는 일시키는 주인이고 자기는 뼈빠지게 일하는 종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자기 친구보다 못한 존재로 여깁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플 때 누가 우리 곁에 있습니까? 누가 밤새워 슬피 웁니까? 부모외에는 형제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내가 잘 나갈 때만 가까이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같이 가는 사람은 형제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합니다. 잠17:17,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까지 위하여 났느니라.” 형제끼리 서로 사랑하겠습니까? 가끔 이 말씀을 읽으며 내가 큰 아들이 아닌가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고 믿음도 있는 데 우리는 우리가 사랑해야 할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아버지에게 잘 하듯 하나님께는 잘하는 데 우리는 우리가 돌보아야 가족, 부모 형제들은 잘 돌보지 못하고 있지 않을까?
가정은 우리의 축복이요 행복입니다. 또한 우리의 운명이요 생명입니다. 몇 년 전KBS에서 만든 가정 특집이 있었습니다. <KBS 스페셜>입니다. 여기서 미국 하바드대학, 예일대학등 미국 아이비대학을 취재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바드대학 2만명 학생중 유대인이 7천명이었습니다. 30%가 넘습니다. 예일대학은 25%가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물었습니다. 또 노벨상을 조사했습니다. 유대인으로 노벨상 받은 사람이 2009년까지 179명입니다. 유대인 인구는 전 세계 인구의 0.2%밖에 안되는 천3백만밖에 안되는 데 노벨상은 약 40%입니다. 인구 13억의 중국은 노벨상 6명, 인구 15억의 이슬람권은 모두 다해서 노벨상 9명, 그런데 인구 1300만의 유대인은 179명, 약 40%, 왜 이런 일이 있는가? 그래서 하바드 학생들과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유대인이 본래 머리가 좋아서 그렇습니까?“ 공통적인 대답이 셋 나왔습니다. 첫째 우리는 다른 민족보다 더 머리가 좋지 않습니다. 둘째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가정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부모와 이야기하고 계속 토론하면서 지혜를 키웠기 때문입니다. 셋째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우리의 문화와 신앙적 가치 때문입니다. 그 가치는 하나님 중심의 가치요 그 문화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문화입니다. 우리 민족도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까? 여러분의 자녀도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까? 가정과 신앙, 두 가지가 우리의 희망입니다. 이번 설은 이 두 가지를 하나로 만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가정마다 우선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자녀를 키우고 자녀는 부모를 사랑하고 형제는 형제를 사랑하고, 그 은혜로운 축복이 영원히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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