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1:12-14 2012.1.15(일)
오로지 기도에 힘쓰니라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 하나님은 교회적으로 개인적으로 우리에게 많은 비전을 주셨습니다. 비전은 이루고 싶은 꿈입니다. 비전은 앞으로 일어날 미래를 미리 보는 것입니다. 추운 겨울, 한 학교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얼음이 녹으면 어떻게 되죠?” 많은 어린이가 소리쳤습니다. “물이 돼요”. 한 어린이가 뒤에서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선생님, 얼음이 녹으면 봄이 와요”. 모두가 뒤를 바라보았습니다. 모든 어린이가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된다고 생각했는 데 그 어린이만 얼음이 녹으면 봄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비전은 추운 겨울에 새 봄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봄을 봄에 보는 것을 현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봄을 겨울에 보는 것을 “비전”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비전의 책입니다. 특히 사도행전이 그렇습니다. 사도행전은 비전의 책입니다. 행1:8절이 사도행전의 주제입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의 사람들은 지금 예루살렘에 있습니다. 그때는 아직 예수믿는 것을 인정받지 못한 때였기 때문에 문을 닫고 쉬쉬하며 모일 때입니다. 그런데 그때 이미 그들은 유다, 사마리아, 땅끝을 보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조차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데 땅끝까지 보았습니다. 지금 있는 현실을 본 것이 아니라 앞으로 될 미래를 미리 보았습니다. 그리고 1장에서 본 것을 28장에서 실현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비전의 책입니다.
여러분에게도 비전이 있습니까? 지금은 비록 힘들고 어려워도 올해가 끝나기 전 나는 반드시 비전을 이루겠다. 그 비전이 있습니까? 연말까지 이루지 못하면 평생에 걸쳐 이룰 비전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도 올해 하나님의 비전을 받았습니다. 함께 모여 행복한 목장교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선교하는 교회, 예수님 닮는 제자삼는 교회, 그런데 개인이나 교회나 비전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능력입니다. 다시 1:8절을 보실까요?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비전이 아무리 좋아도 능력이 있어야 이루어집니다. 사도행전의 비전은 땅끝까지 증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비전이 먼저가 아니라 능력이 먼저입니다. 능력이 임하면 스스로 증인이 됩니다. 자세히 보십시오. “증인이 되라”가 아니라 “증인이 되리라”입니다. 증인이 되라는 것은 내 의지로 내가 노력해서 되는 것입니다. “증인이 되리라”는 것은 어떤 조건을 갖추면 나도 모르게 자동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능력입니다. 능력만 임하면 나도 모르게 됩니다. 그것이 비전입니다.
능력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오랫동안 능력을 위해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기도에는 보통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먼저 필요를 위한 기도입니다. 우리의 의식주, 생계를 위한 기도입니다.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을 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무 하나님께 많은 것을 구하면 안된다. 그것은 기복적인 기도다“.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약한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구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처럼 교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게는 아무 것도 모자라는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내가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큰 교만입니까? 우리는 필요한 것을 구해야 합니다.
또 하나의 기도는 예수님 닮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우리의 필요를 구합니다. 그러나 기도가 필요를 구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기도가 수단이라면 하나님으로부터 뭔가를 얻어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아가는 수단입니다. 필요한 것을 구해도 우리가 더 사랑할 것은 우리의 필요가 아니라 그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입니다. 기도에서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좋은 관계입니다. 그래서 묵상기도가 필요합니다. 묵상기도를 통해 우리가 받는 은혜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은혜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이 기도를 사모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또 한 가지 기도가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능력을 위한 기도”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힘이 없으면 못합니다. 바람은 밖에서 불지만 힘은 안에서 나옵니다. 바람이 불면 비행기가 뜨지만 안에서 힘이 공급되지 않으면 곧 주저앉고 맙니다. 사도행전은 성도의 삶에 얼마나 많은 능력이 필요한가를 보여 줍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임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가 설교한 것은 능력이 없으면 못합니다. 그 설교를 듣고 사람들이 회개했습니다. 회개도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할 마음과 은혜가 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능력입니다. 회개한 사람들이 모며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안에서 자기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 주었습니다. 구제, 긍휼, 사랑도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것을 버리는 능력, 욕심으로부터 자유케 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3장부터 전도가 시작됩니다. 행3:6,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베드로와 요한은 “내게 있는 것으로” 앉은뱅이를 고쳤습니다. “내게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능력이 있어야 전도합니다.
4장부터 핍박이 시작됩니다. 이로 인해 사도들이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행5:41절입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를 떠나니라”. 어떻게 감옥에서 매맞고 고통받는 데 기뻐할 수 있습니까?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행7장에서 스테반이 순교하고 11장에서 안디옥 교회가 세워지고 13장에서 바나바와 바울이 최초의 선교사로 파송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28장에서 드디어 로마에서 바울이 도착하여 복음을 증거합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힘이 있었습니다. 능력입니다.
저는 그동안 예수님 닮는 것이 신앙생활의 최종목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한 가지 놓치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안에 있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힘없는 분, 나약한 분이 아닙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분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을 다 그 앞에 무릎꿇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분이고 죽음에서 능력으로 부활하셔서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자입니다. 그래서 어느날 이렇게 다짐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처럼 살기 위해, 예수님처럼 일하기 위해 능력을 구하리라”. 다같이 “능력을 주옵소서. 예수님처럼 살기 위해, 예수님처럼 일하기 위해 능력을 주옵소서”. 그러면 그 능력은 어떻게 옵니까? 오늘 말씀이 그 비밀을 밝혀 줍니다.
함께 모였습니다
오늘 말씀으로 오십시오 .능력을 위해 사도행전 교회가 첫 번째로 한 것은 함께 모이는 것이었습니다. 행1:12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감람원은 예루살렘 동쪽에 있는 감람산입니다. 왜 제자들은 이 산으로부터 왔을까요? 예수님이 이 산에서 승천하셨기 때문입니다. 눅24:50-51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배다니앞에 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누가복음의 저자와 사도행전의 저자는 같은 누가입니다. 누가복음 마지막 장에서 예수님은 베다니 근처 감람산에서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장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을 남기고 승천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작별한 후 예루살렘으로 온 것입니다.
자, 어떤 사람들이 모였습니까? 13절 중간입니다. 행1:13,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가롯 유다를 뺀 12제자가 다 모였습니다. 다만 순서만 다릅니다. 4복음서에는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로 형제는 형제끼리 묶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 순서입니다. 아마 리더쉽의 순서로 기록한 것 같습니다. 사도외에 여자들이 모였습니다. 14절,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여인들의 명단은 눅24:10절에 나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다른 여자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아우들도 모였습니다. 예수님의 아우들은 마13:55절에 보면 넷입니다.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이들은 본래 예수님을 잘알지 못했던 믿음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자 같이 모였습니다. 그래서 모인 사람이 모두 120명가량 되었습니다.
수가 120명인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120명은 12x10입니다. 이스라엘의 기본 수는 12입니다. 12지파, 12제자, 그래서 120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기본수입니다. 유대인의 구전에 따르면 예수님 시대 자체 공회를 가진 도시가 설립되기 위해서는 120명의 남자가 있어야 했습니다. 이 120명이 얼마나 다양합니까? 제자들, 여인들, 형제들, 남자, 여자, 노인, 젊은이, 사회적 신분도 각각 달랐습니다. 여자와 남자가 함께 모였습니다. 나이 차이도 많았습니다. 출신지역도 달랐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예루살렘, 갈릴리뿐 아니라 바대, 메대, 엘람, 메소포타미아, 갑바도기야, 본도, 아시아, 구레네, 그레데, 너무 너무 먼데서 왔습니다. 사회적 신분도 달랐습니다. 요안나같은 여자는 남편이 헤롯왕실의 관리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제자중 하나인 셀롯인 시몬은 열심당이었습니다. 열심당은 극우파 테러리스트, 반 헤롯당입니다. 정치적으로 적끼리 모였습니다. 그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행1:14,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니라”. 다양할 뿐 아니라 마음도 같이 했습니다. “마음을 같이 했다”는 말은 “호모뒤마돈”, 호모=같은, 뒤마돈=마음입니다. 같이만 모인 것이 아니라 마음도 하나였습니다. 저마다 선 자리는 달랐지만 생각은 하나였습니다. 예수님에게 집중한 것입니다. 판교개발이 되면서 우리 교회가 아주 다양해졌습니다. 옛날에는 호남, 서울출신이 많았습니다. 지금은 모든 지역이 거의 비슷합니다. 서울, 호남, 영남, 충청도, 경기도, 심방해 보면 말씨가 각각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만 바라보면 하나됩니다.
여러분,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능력이 필요합니까? 예수님을 닮기 위하여, 예수님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하여 능력이 필요합니까? 우선 모여야 합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히10:24-25입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언제나 부흥하는 공동체는 모이기를 힘씁니다. 사무엘 시대, 모든 백성이 미스바에 모였습니다. 느헤미아 시대 모든 백성이 수문앞 광장에 모였습니다. 느8:2-3, “칠월 일일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남자, 여자, 무릇 알아 들을 만한 회중 앞에 이르러 수문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오정까지 남자, 여자 무릇 알아들을 만한 자의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남자, 여자, 알아들을 만한 모든 자는 모든 백성이 모였습니다.
1907년 한국교회 대부흥 운동도 모여서 일어났습니다. 1907년 1월, 영하 20도의 흑한속에 사람들이 각자 먹을 것을 가지고 100리, 300리에서부터 걸어서 평양 장대현교회에 모였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1970년대 빌리 그래함 대회도 모였습니다. 여의도에 100만이 모였습니다. 모일 때 교회성장, 선교의 부흥이 일어납니다. 사도행전 교회는 모이는 교회였습니다. 행5:42,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성전에 모여 예배하고 목장에 모여 사랑을 나눴습니다. 모여야 힘이 납니다. 모여야 능력이 임합니다.
여러분은 한 해동안 잘 모이겠습니까? 사모하는 마음으로 잘 모이겠습니까? 어느 수도원에서 수도자들이 생각했습니다. “왜 우리 수도원은 영적으로 충만하지 못할까?” 젊은 수도사들이 원장에게 찾아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수도원이 부흥할 수 있습니까?” 했습니다. 원장은 말없이 나무 하나를 가져오더니 불을 붙였습니다. 나무는 한참 타다가 꺼졌습니다. 이번에는 나뭇가지를 한 단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불을 지폈습니다. 나무에 불이 붙었습니다. 그리고 불이 꺼질만 하면 또 나무를 넣고 꺼질만 하면 또 나무를 넣고, 그러는 사이에 불이 크게 타 올랐습니다. 하늘 높이 타오르는 불빛을 보다가 원장은 말없이 자기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젊은 수도자들은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그러다 누군가 깨달았습니다. “아, 그렇구나. 우리가 열심히 모이지 않아 불이 타지 않았구나”. 그때부터 수도자들이 모여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모이자 부흥의 불이 타올랐습니다. 한 해동안 놀라운 부흥을 꿈꿉니까? 모여야 합니다. 예배로 모이고 목장으로 모여야 합니다. 장작더미가 쌓여 큰 불이 나는 것처럼 모여야 큰 불이 납니다. 불이 붙으면 능력이 임하고 능력이 임하면 비전이 이루어집니다.
약속을 믿고 기도했습니다.
능력을 위해 사도행전 교회가 한 두 번째 일이 있었습니다. 약속을 믿고 기도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사람들은 모였습니다. 120명이 모였습니다. 그들이 모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약속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이렇게 약속했습니다. 눅24:49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저는 은행에 갈 일이 별로 없습니다만, 가끔 은행에 가면 “아, 기도가 이런 것이구나” 하고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은행에 돈을 예금합니다. 그리고 필요할 때 찾습니다. 어떤 분이 은행에 5천만원을 예금했습니다. 새 학기가 되어 아들 등록금 때문에 은행에 갔습니다. 은행 창구로 가서 청구서를 씁니다. 직원이 이름을 묻습니다. 그리고 “얼마요?”하고 묻습니다. 그때 쭈삣 쭈빗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은행이 어렵겠지만 돈좀 주시겠습니까?” 이렇게 모기만한 목소리로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500만원이요” 당당하게 말합니다. 맡겨놓은 돈이 있기 때문입니다. 은행직원 입장에서는 이 사람이 목소리가 작거나 인상이 안 좋다고 돈을 안줘서는 안됩니다. 그가 할 일은 이 사람의 돈이 은행에 있는가와 그 사람이 본인인가만 확인하면 됩니다.
여러분, 기도할 때 당당합니까? 성경은 이것을 “담대함”이라고 표현합니다. 엡3:12절입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앞에 담대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안에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실 은혜가 약속되었기 때문입니다. 히4: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로 인해 이미 우리에게 줄 은혜가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6:7절이 중요합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이 말씀은 가끔 오해가 될 때가 있습니다. 기도할 때 많은 말을 하지 말라는 오해입니다. 그런데 기도할 때 어떻게 말을 안할 수 있습니까? 기도를 잘해 보려고 하면 말이 좀 길어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중언부언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중언부언”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중언부언하지 말라“라는 말은 길게 기도하지 말라거나 같은 말을 반복하지 말라거나 소리내서 기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말이 기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말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도에는 말이 필요하지만 말을 많이 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는 것이 기도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보다 하나님의 약속이 더 중요합니다.
이번 주에 제가 서점에 가서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작은 책을 보았습니다. 제목이 “하나님의 약속 900”입니다. 이 책은 하나님이 성경에서 우리에게 약속한 약속 900가지를 주제별로 정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믿음 생활에 대해 약속하셨습니다. 승리생활에 대해서도 약속했습니다. 구원과 천국과 영생과 상급에 대해서도 약속했습니다. 개인적 생활의 필요에 대해서도 약속했습니다. 가정생활, 물질생활, 자녀교육에 대해서도 약속했습니다. 영혼구원, 교회, 전도에 대해서도 약속했습니다. 무엇보다 기도응답에 대해서 약속했습니다. 그것이 이 책에서만 900가지입니다. 저는 정말 우리 교인 모두가 이 책을 가슴에 품고 다녔으면 좋겠습니다. 이 작고 예쁜 책에 하나님의 주옥같은 약속이 900가지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사도행전 교회는 자신의 의를 믿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도했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까? 여러분의 몸이 아플 때 출15:26절, “나는 너희를 지료하는 여호와임이라”라는 약속을 믿습니까? 그래도 아파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시103:3절,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이 약속을 믿습니까? 인생의 어려운 시기를 맞아 힘들고 지쳤을 때 연약한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사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약속을 믿습니까?
인생의 두려움이 엄습할 때 사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약속을 믿습니까? 물질과 재정으로 어려울 때 시34:9-10,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약속을 믿습니까? 자녀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사54:13, “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니 네 자녀에게는 큰 평안이 있을 것이며”. 약속의 말씀을 믿습니까? 간절한 기도로 하나의 응답을 기다릴 때 시6:9,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약속을 믿습니까? 기도는 내 언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약속을 믿는 것이 내 유창한 기도보다 낫습니다. 어떤 기도도 믿고 기도하면 응답됩니다. 시편 21:2 “그의 마음의 소원을 들어 주셨으며 그의 입술의 요구를 거절하지 아니하셨나이다”. 아멘. 마21: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아멘. 요일5:14,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약속을 믿고 기도합시다. 그것이 능력의 비결입니다.
성령안에 모든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이 여기 있습니다. 능력의 원천이 성령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함께 모이고 약속을 믿고 기도하는 것은 능력을 받는 방법이고 능력의 원천이 따로 있습니다. 모든 능력의 원천은 성령님입니다. 눅24:49을 보겠습니까? “볼지어다. 내가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나님 아버지가 능력을 약속했습니다. 예수님이 또 다시 능력을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오신 분이 누구입니까?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은 약속의 실체요 능력의 원천입니다. 사도행전 사람들은 성령을 받기 위해 기대하고 기다리고 기도했습니다. 49절 다시 볼까요? 성령님이 누구입니까? “위로부터 임하는 능력”입니다. 능력은 능력인 데 아래서 생기는 능력이 아니라 위로부터 임하는 능력입니다. 세상의 모든 능력은 아래에서 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성령님만 위에서 임합니다. 그 능력이 사람에게 입혀집니다. 옷의 비유입니다. 옷처럼 위에서 덮어 씌워집니다.
이를 위해 사도행전 교회는 기도했습니다.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행2:14절 뒷 부분입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니라”. 여기서 “힘쓴다”는 말은 체육선수가 운동장에서 골인 지점을 향해 사력을 다해 달리는 것입니다. 우리 말로 “끈질기게” “악착같이” 달려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님이 모든 능력의 원천이라고 믿습니까? 사도행전의 기적은 성령의 능력이 임하자 일어난 것을 믿습니까? 말 못하던 베드로가 한번 설교하자 3천명이 회개했습니다. 무슨 능력입니까? 사람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능력입니다. 날 때부터 걷지 못하던 앉은뱅이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 한 마디에 벌떡 일어났습니다. 무슨 능력입니까? 사람을 고치시는 성령의 능력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의 소유를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갖다 놓았습니다. 무슨 능력입니까? 자기를 이기게 하시는 성령의 능력입니다. 마술사 시몬이 사도들의 발앞에 납작 엎드렸습니다. 무슨 능력입니까? 마귀를 이기는 성령의 능력입니다. 바울이 안디옥교회의 파송을 받아 소아시아, 그리스, 로마, 간데 마다 교회를 세웠습니다. 무슨 능력입니까? 위대한 명령, 선교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입니다. 여러분에게도 그 능력이 필요할까요? 개인적 비전, 가정의 꿈, 사업의 성공, 영육간의 건강을 위해서도 그 능력이 필요할까요? 제2기 목회, 한신교회 부흥과 도약을 위해서 그 능력이 필요할까요? 총선, 대선을 앞둔 이 나라, 남북화해가 필요한 이 시점에서 민족을 위해서라도 그 능력이 필요할까요? 필요합니다. 우리가 올해 마음을 다해 모이고 약속을 붙들고 오로지 기도에 힘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누가 이 기도의 용사가 되겠습니까? 누가 교회와 영혼과 나라를 위해 중보기도하겠습니까?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내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한 해동안 오로지 기도에 힘쓰는 사도행전의 용사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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