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3:11-20 2012.3.4(일)
믿음의 치유
일년중 가장 아름다운 계절, 3월입니다. 3월은 March, 행진하는 달, 긴 겨울을 뒤로 하고 앞으로 행진하는 달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행진을 시작하기 전에 이렇게 한번 물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인생의 행진을 막는 질병이나 상처가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 우리 인생에 질병과 상처가 없을 수 없을까요?
그래서 한 총각이 적령기가 되어 결혼상담소에 들렀답니다. 상당소장에게 물었습니다. ”어느 아가씨과 결혼해야 행복하겠습니까?“ 그랬더니 소장이 말했습니다. ”누구와 결혼하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대신 이런 사람과는 결혼하지 말라고 말하겠습니다. 먼저 미인과는 결혼하지 마십시오. 미인은 반드시 얼굴값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못생긴 여자와도 결혼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바람을 피울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돈많은 여자를 좋아한다면 조심해야 합니다. 평생 그 여자에게 쥐어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가난한 여자와도 결혼하지 마십시오. 평생 뼈빠지게 일만 하다 판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누구와 결혼해야 합니까? 완전한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 완전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아십니까? 또한 이 세상에 아프지 않고 상처없는 사람도 없다는 것을 아십니까?
지난 주부터 우리는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사람을 보고 있습니다. 그는 날 때부터 앉은뱅이였습니다. 그가 어느날 사람들에게 실려 성전에 왔습니다. 그때 마침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왔다가 그를 만났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6절, 행3:6,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7절-8절, 행3:7-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그랬더니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11절입니다. 행3:11, “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왜 사람들이 몰려왔습니까? 기적 때문입니다. 그때까지 앉아서 간신히 기어다니던 사람이 멀쩡히 일어나 뛰어다닙니다. 앉은뱅이가 성전에 앉아 있는 것을 하루 이틀 본 것이 아닙니다. 날 때부터 앉은뱅였으니 아마 수 십년은 더 거기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일어났습니다. 일어났을 뿐 아니라 걸어다니고 걸어다닐 뿐 아니라 뛰어다닙니다. 뛰어다닐 뿐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얼마나 사람들이 놀랐겠습니까?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다니”.
더 놀라운 것은 그것을 행한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 예루살렘 사람들은 이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한때 예수란 사람을 따라다니다가 그가 죽자 한 동안 조용했습니다. 그런데 요 며칠전부터 다시 떠들고 다니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떠들어 봐야 별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부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부는 율법에서 부정한 것을 만지기 때문에 정죄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매일 성전에서 율법을 배우고 율법대로 사는 예루살렘 사람과 다릅니다. 그런데 그 어부들이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가까이 와서 베드로와 요한을 다시 쳐다보았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이렇게 베드로와 요한에게 몰려온 이유가 무엇일까요? 기적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기적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기적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기적을 기다립니다. 사람들이 기적을 바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마도 그 배후에 무병장수를 바라는 본능적 욕망때문일 것입니다. 무병장수는 모든 인간의 공통된 소망입니다. 중국 서안에 있는 진시황릉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가 진나라를 통일한 뒤 죽지 않으려고 삼신산에 불노초를 캐러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사람 200만을 동원하여 엄청난 능을 만들고 수천, 수만의 허수아비 병사들을 만들어 자기를 지키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랬어도 나이 50에 불노초 한 뿌리 먹어보지도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렇게 죽을지 모르고 엄청난 규모의 능을 만든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본성안에는 누구도 무병장수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병과 상처를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그냥 포기하고 살아야 합니까? 아니면 진시황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래 살면 되겠습니까? 병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우리 질병과 상처를 어떻게 치료하십니까?
사람은 누구나 아픕니다.
우리가 먼저 알 것은 사람은 누구나 아프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주인공 앉은뱅이를 보십시오. 이 사람의 겉으로 나타난 병명은 앉은뱅이입니다. 우리는 앉은뱅이가 안 돼 봐서 이 사람의 고통을 잘 모릅니다. 제가 한번 허리 때문에 꼼짝 못해 보다가 이 앉은뱅이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토요일 오후였습니다. 몇 시간 동안 앉아서 설교를 준비하고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뚝” 하더니 허리를 펼 수가 없습니다. 책상모서리를 붙잡고 간신히 일어났지만 걸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내일이 주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병원도 문을 닫았고 어떻게 합니까? 꼼짝없이 누어서 하나님의 기적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앉은뱅이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 몸이 어디가 아프다는 것은 분명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 몸이 아플 때 더 고통스러운 것은 다른 것도 아프다는 것입니다. 자, 한번 보십시오. 앉은뱅이는 몸이 아픕니다. 태어날 때부터 수십년간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러니 마음은 기쁘겠습니까? 늘 동냥을 얻어 입에 풀칠하고 사니 무슨 기쁨이 있겠습니까? 몸이 아프면 감정도 아프고 마음도 아픈 것입니다. 한때 행복전도사라고 불리웠던 한 여자분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힘든 인생에 승리하면서 뛰어난 입담으로 어느날 인기스타가 되었습니다. 그는 늘 입만 열면 행복과 희망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자살했습니다. 왜 그랬나 하고 보니까 몸의 병때문이었습니다. 2년전부터 몸의 여기 저기가 아파 본인의 말대로 700가지 통증에 시달렸답니다. 그래서 자살이 죄인줄 뻔히 알면서 죽고 말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몸이 아프니까 마음도 아프고 마음이 아프니까 영혼도 아픈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다섯 종류의 병이 함께 갑니다. 육체적인 병, 정서적인 병, 관계적인 병, 영적인 병, 그리고 사회적인 병입니다. 자, 보세요. 이 앉은뱅이는 타고날 때부터 질병을 안고 태어났습니다. 육신적인 질병입니다. 그렇게 오래 살다보니 마음이 외롭고 슬펐습니다. 늘 소외감, 열등감을 안고 삽니다. 정신적인 병입니다. 하도 오래 그렇게 살다 보니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부모가 죽자 돌보아 줄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씩 하나씩 사람들이 떨어져 나갑니다. 관계적 병입니다. 그러다 보니 점점 이런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도 나를 버렸나?”. “내가 무슨 죄가 많아서 이렇게 불구자로 태어났지? 하나님이 나에게 왜 벌을 내리셨나?”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도 멀어집니다. 영혼의 병입니다. 사람들도 싫어하고 몸도 아프면 누가 직장을 줍니까? 그래서 물질적으로도 힘들어 집니다. 모든 병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깨지면 사람과의 관계도 깨지고 물질적으로 병들면 몸도 병듭니다. 그렇다면 아프지 않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누가 나는 100% 건강하다 할 사람이 있습니까? 모두가 아픕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치료합니다
성경의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 최고의 진리는 하나님은 치료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치료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치료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믿음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믿음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첫 번째는 “이 시대에는 더 이상 기적이 없다”고 하는 믿음입니다. “기적은 현대같이 과학 문명이 발달한 시대에는 더 이상 없다. 기적은 원시시대의 산물이다. 설령 기적이 있어도 나는 믿지 않겠고 바라지도 않겠다”. 이런 믿음입니다. 성경에 없는 믿음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은 우리 불행에 관심이 없으며 있어도 우리 병을 고쳐주지 않는다”는 믿음입니다. 이 또한 성경에 없는 믿음입니다. 세 번째가 가장 나쁜 믿음인 데 그것은 “병은 하나님이 주신 고난의 십자가다. 잘 참고 견뎌야 한다” 하는 믿음입니다. 언뜻 보면 괜찮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성경에 없습니다. 십자가는 엄밀히 말해서 예수님만 질 수 있는 것이지 우리가 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내 죄 때문에 짓는 것이 아니라 남의 죄 때문에 짓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 질 자격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만 진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만 십자가 질 자격이 있고 예수님만 십자가에서 승리합니다. 만일 병이 우리에게 그렇게 좋은 것이어서 병을 통해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선한 뜻이라면 예수님도 병들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생 한번도 병들지 않았습니다.
눅10:9에서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내어보내시면서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했습니다. 만일 병이 받을만한 고난이라면 “병을 고치라”고 말씀하지 않았을 것이다. 병은 분명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병과 고난은 다릅니다. 병은 치료해야 하고 고난은 이겨내야 합니다. 병은 핍박이 아닙니다. 핍박은 참아내야 하지만 병은 고쳐야 합니다. 예수님은 한번도 그를 찾아온 많은 병자에게 “병은 하나님이 주신 고난이니 잘 참아라”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막1:32절 이하입니다. 막1:32-34,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네가 그 문앞에 모였더라.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예수님은 한번도 그에게 온 병자를 박대한 적이 없습니다. 어떤 병은 고쳐주고 어떤 병은 돌려보낸 적도 없습니다. 어떤 병은 죄로 인한 병이니 회개하고 어떤 병은 부주의로 생긴 병이니 조심하라 구분하지도 않았습니다. 다같이 “모든 병자”, 병의 원인은 다양하지만 예수님은 모든 병을 다 고치셨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병들어 제사장에게 올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제사장은 그 병에 손대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병은 하나님이 주신 심판의 병이라며 고치기를 거절했습니다. 나병같은 병입니다. 병을 고쳐도 물로 씻으라고 했지 손을 대고 안수하지 않았습니다. 구약과 관련하여 예수님의 치유는 몇 가지가 달랐습니다. 우선 예수님은 모든 병을 다 고쳤습니다. 육적인 병, 영적인 병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다음 예수님은 직접 손을 대고 안수하셨습니다. 나병에 손을 대면 병균이 옮을 수도 있었지만 예수님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때로는 침을 뱉어 고쳐주기도 했습니다. 막8장에서 맹인을 치료할 때는 두 번이나 안수해서 고쳤습니다. 가끔 병을 고칠 때 죄를 언급하신 적은 있지만 죄 때문에 안고쳐주신 적은 없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4복음서가 총 3779절인데 그 중 727절이 치유와 관련됩니다. 예수님이 병자를 고친 기록이 사복음서에 무려 1/5이나 됩니다. 4복음서에는 모두 41개의 치유의 사건이 나오는 데 그 치중 33개가 몸을 치료하고 8개가 정신과 영혼을 치유합니다. 얼마나 예수님이 많이 병든 자를 치료하셨는지 어떤 성서학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을 보면 둘 중의 하나다. 지금 병자를 치료하고 있거나 아니면 병자를 치유하러 가거나 치료하시고 오시는 중이다”. 그 정도로 예수님은 병을 많이 치료하셨습니다.
예수님과 관련하여 우리는 세 가지로 예수님의 치료를 믿어야 합니다. 먼저 예수님은 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몸을 소중히 여깁니다. 둘째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몸으로 지은 모든 죄를 위하여 몸으로 죽으셨습니다. 그 결과 십자가는 우리 죄를 사할 뿐 아니라 우리 병을 고쳤습니다. 사53:5,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도다”. 십자가는 우리 죄를 사하여 평화를 주시고, 우리 몸을 고쳐서 나음을 얻게 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성령님이 우리 몸안에 계십니다. 우리 몸은 우리가 가끔 기도하듯이 썩어질 육신도 아니고 벌레같은 존재도 아닙니다. 하나님이신 성령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래서 소중합니다. 몸으로 오신 예수님, 몸으로 죽으신 십자가, 몸안에 계신 성령님, 그래서 우리 몸은 소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하고 고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 몸의 치료를 위하여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엇으로 우리 병을 고칩니까? 믿음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치료받습니다
자, 오늘의 말씀으로 돌아오십시오. 베드로와 요한이 그를 고쳤습니다. 사람들이 몰려 왔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12절입니다. 행3: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예나 지금이나 어떤 사람이 기적을 행하면 사람들은 그를 주목합니다. 평소에 베드로와 요한을 별로 대단하게 보지 않다가 기적을 일으켜 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것이 자신의 능력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잘 알았습니다. 베드로나 요한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존재였습니다. 둘 다 무식한 어부 출신이었고 성격도 불완전해 베드로는 충동적이고, 요한은 우레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쉽게 넘어지고 잘 변하고 언제나 약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 그들에게 무슨 능력이 있겠습니까?
그러면 능력은 어디서 옵니까? 베드로는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예수님께로 향합니다. 12절 이하의 설교입니다.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생명의 주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 그런데 빌라도가 놓아주기로 결정한 것을 너희가 소리질러서 죽였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15절 중간입니다. 행3:15,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의 증인이로다”. 베드로의 설교는 언제나 예수님 중심입니다. 2장에서도 그랬고 3장에서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성령받은 뒤 달라진 현상입니다. 2장에서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베드로는 이상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영입니다. 요15:26, 성령님이 오시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십니다. 성령은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합니다. 예수님은 다만 십자가에서 죽기만 하고 만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15절, 행3:15,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여기 나오는 “살렸다”는 말은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뜻입니다. 헬라어로는 “에게이렌”입니다. 이 같은 말이 베드로가 앉은뱅이에게 “일어나라”할 때도 쓰였습니다.
우리 병이 치료되는 원리는 무엇입니까? “에게이렌”, 예수님을 죽음에서 살려내신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병에서 일으키신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 말이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는 같은 말입니다. “에게이렌”, “일어나라”는 곧 “살아나라”입니다. 병에서 일어나는 것은 죽음에서 살아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켜 세운 것이 모든 치유의 성경적 원리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한 것은 역사적으로 한번 일어난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한번의 사건이 매일 우리의 삶속에서 재현되도록 합니다. 그것이 치유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믿으면 치유는 자동적으로 일어납니다. 십자가는 부활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부활없는 십자가없듯이 치유없는 병도 없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우리에게 병의 치료가 일어납니까? 16절이 중요합니다. 행3:16, “그 이름을 믿음으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주목하십시오. 오늘 여러분은 이 말씀을 듣기 위해 왔습니다. 이 말씀에 집중하면 오늘 누구도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 중요한 치유의 원리가 나옵니다. 이 말씀을 다시 한번 읽습니다. 행3:16, “그 이름을 믿음으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이 말씀에는 두 가지 치유의 요소가 나타납니다. 첫째 예수님 이름. 둘째 우리의 믿음. 이것이 치유의 두 요소입니다. 그런데 순서가 있습니다. 다시 한번 이 말씀을 봅니다. 행3:16, “그 이름을 믿음으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느니라”. 먼저 나온 것은 “예수님 이름”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예수로 인한 믿음”입니다.
왜 이 순서가 중요할까요? 먼저 지난 주에 말씀드린 대로 모든 능력은 예수님 이름에서 온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행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예수님 이름으로 구원받습니다. 행3:6,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예수님 이름으로 일어납니다. 행4:10,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예수님 이름으로 건강해 집니다. 행4:10,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 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표적과 기사가 나타납니다. 이 순서를 기억하십시오. 먼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예수님의 이름 다음에 나옵니다. 우리의 병은 당연히 믿음이 있어야 치료받습니다. 그러나 믿음보다 먼저 있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 이름”입니다. 우리가 치유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항상 걸리는 것이 이것입니다. “아, 네게 믿음이 없구나. 그래서 안되는구나“ 하고 포기합니다. 믿음이 없다는 것을 안 것은 다행한 일이지만 그보다 먼저 있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초대 문화부 장관 이어령 교수가 몇 년전 세례 받고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그가 그렇게 한 된 이유중의 하나가 그의 딸 때문입니다. 이번에 그의 딸 이민아 변호사가 책을 냈습니다. “땅에서 하늘처럼”이라는 책입니다(영상). 이 책에서 이 변호사는 어떻게 그 많은 인생고와 질병을 이겨냈는가를 간증합니다. 이민아 변호사는 이어령교수의 큰 딸로 태어나 결혼하고 미국으로 갑니다. 거기서 공부해서 미국 변호사 자격도 땄지만 엄청난 인생의 시련도 겪습니다. 먼저 두 아들을 낳았는 데 큰 아들은 갑자기 죽고 둘째 아들은 자폐아로 태어납니다. 부부관계도 원만치 못해 결국 이혼하고 자신은 암에 걸립니다. 그 칠흙같은 날 그가 버텨낸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었습니다.
그가 늘 염려했던 것은 “나에게는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그렇게 쉽게 생깁니까? 그래서 아들의 자페증도 자신의 암도 처음에는 포기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가 중요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병을 고침받는 믿음은 예수님꼐 나아가는 조건부가 아니라 은혜로 주어짐을 깨달은 것입니다. 믿음이 없다고 하나님이 치료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내 조건이지만 그것보다 먼저 있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마8장에서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와 말합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그때 예수님이 말합니다. 마8: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우리 몸의 치료는 내가 원하기 전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나병환자는 아무 믿음이 없이 예수님께 나갔지만 믿음이 없다고 퇴짜맞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였습니다. 치료가 내가 원하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도 보십시오. 그에게 믿음이 있었습니까? 그가 예수를 알기나 했습니까? 베드로가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라 할 때 과연 믿음으로 일어났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치료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었어도 예수님앞에 나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원리를 알고 이민아변호사는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믿음없는 채로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의 처분만 바라고 나아갔습니다. 결국 10년만에 그의 아들 자폐증을 깨끗이 고쳤습니다. 그 자신의 암도 사라졌습니다. 7개월동안 안보이던 눈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몸이 약하지만 하나님의 치유를 그는 믿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믿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하나님께 나아갔고 하나님께 나가는 과정에서 선물로, 열매로 믿음을 받았습니다. 다시 16절을 보십시오. 행3:16, “그 이름을 믿음으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예수 이름이 낫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낫게 합니다. 없는 믿음 때문에 탄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일단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마17:20,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주님이 요구하신 믿음은 산같은 믿음이 아닙니다. 겨자씨같은 믿음입니다. 우리가 겨자씨만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이 산을 옮깁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과정에서, 치료받은 과정에서 하나님이 축복으로 주는 선물입니다.
오늘 여러 가지 질병으로 고민하고 하나님께 나온 성도들 계십니까? 치료는 내가 원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나님은 우리 믿음이 작다는 것을 아십니다. 산같이 큰 믿음을 만들어 올 때까지 하나님이 치료하지 않는다면 어떤 병이 치료받겠습니까? 실제 예수님께 나아왔던 간질병 아버지, 바디메오, 실로암 장님, 38년된 병자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고침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입니다. 믿음이 생겨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다 보면 믿음 생깁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치료하십니다. 교회는 치료의 현장입니다. 예배는 우리의 영과 육을 가장 많이 치료하는 영적 현장입니다. 찬양도 치료의 능력이 있습니다. 성찬도 우리를 치료합니다. 목장모임도 우리를 치료합니다. 기도도 우리를 치료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치료합니다. 이 시간 그 치료의 능력을 체험하십시오 먼저 믿음없는 자신을 내어 놓으십시오. 그리고 예수님만 의지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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