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구원의 핵심
롬 10:9-10
우리는 지금 종교다원주의 시대 한 복판에서 기독교 신앙을 지켜가고 있습니다. 다양한 종교가 함께 공존하는 상황 속에서 예수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영국의 선교신학자 레슬리 뉴비긴은 종교다원주의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종교 간의 차이가 진리와 거짓의 문제가 아니라 동일한 진리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 있다고 믿는 신념이다.”
이 말이 담고 있는 뜻은 이렇습니다. 여러 종교가 공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느 종교는 참 진리인데 비해 다른 종교는 거짓 진리라는 식으로 말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양한 종교가 있는 것은 다 같이 진리를 믿지만 믿는 방식이 다를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비기독교인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흔히 듣습니다. “산 정상은 하나이지만 그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는 것처럼 구원에 이르는 길은 다양하게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기독교는 구원에 이르는 길이 오직 예수뿐이라고 주장하는가?”
종교학자 월프레드 스미스는 이것을 보다 학문적인 방식으로 문제 제기를 했습니다. 이렇습니다. “모든 종교의 핵심에는 초월자에 대한 경험이 있다. 나무와 돌에 새겨진 형상이든, 마음에 새긴 형상이든, 혹은 인간 예수와 같은 형상이든, 모두 초월자가 스스로를 인간에게 보여 주기 위해 똑같이 사용하는 수단이다. 그 가운데 어느 하나를 유일한 것으로 주장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소리이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종교다원주의 시대에 우리 기독교에 가해지는 대표적인 공격입니다. 실제로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런 공격을 받을 때 무척 당황스러워합니다.
그런데 과연 이 말이 옳을까요? 한두 가지 문제를 제기해 보겠습니다.
우선 과연 모든 종교가 다 진리를 말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정말 아무 종교나 믿어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일까요? 힌두교처럼 원숭이나 소와 같은 동물을 신으로 받드는 종교를 믿어도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일본의 신사처럼 죽은 사람을 신으로 받드는 종교를 믿어도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교회처럼 산 사람을 하나님 어머니로 섬기는 종교를 믿어도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분명히 그렇지 않습니다. 종교가 말하는 진리라고 다 참 진리는 아닙니다. 절대 진리는 따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를 상대화시켜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과연 우리가 구원 받을 종교를 우리 스스로 택해도 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종교가 마치 백화점에서 물건 고르듯이 자기 마음에 맞는 종교를 찾아가서 자기가 선호하는 신을 택하여 믿어도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자기에게 힘든 것을 강요한다고 그 종교를 버리고, 아무런 부담도 없는 종교를 택해서 믿어도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분명히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은 내가 내 마음에 드는 신을 택해서 믿으므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구원해 줄 하나님이 나를 택해서 믿을 때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은 나를 택해주신 하나님께 내가 헌신할 때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종교다원주의 시대에 비기독교인들이 보편적으로 제기하는 문제는 그럴듯합니다. 그러나 깊이 따져보면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저들과 논쟁을 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성경 말씀을 믿고 성경 말씀을 전할 뿐입니다. 일찍이 성경은 이런 논쟁에 대해 명확한 답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우선 행 4:12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다른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구원의 길은 여럿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길, 절대적인 그 길 ‘예수’ 하나라는 말씀입니다.
또 사 43:1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성경 말씀 속에서 절대 진리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종교다원주의 시대의 상대주의에 휘둘려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이렇게 구원의 길은 오직 한 길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의 길로 예정하셨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믿으면 구원을 받고, 믿고 시인하면 구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Salvation by faith)을 말하는 것입니다. 특히 종교개혁 전통에 서 있는 우리 장로교인들은 “오직 믿음!”(Sola Fide!)을 강조합니다.
그러면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구원 받기 위해 가져야 할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가 나의 구주라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다는 것을 보다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기독교가 말하는 믿음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죄로부터의 구원에 대한 믿음입니다.
마 1:21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요셉에게 전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 속에 하나님께서 유일하신 아들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시는 이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오셔서 하신 결정적인 일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믿는다고 할 때 그 믿음의 핵심 중의 핵심은 예수님께서 나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 나의 주님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신앙생활을 무기력하게 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예수님께서 나를 죄에서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을 잘 모르거나 아니면 잊고 살기 때문입니다. 죄가 무엇인지, 죄의 권세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죄로부터 구원받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실수로 죄를 범했던 분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은 죄를 짓고 경찰에 체포되어 구속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재판을 거쳐서 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난 뒤에 출소했습니다. 다시 사회로 나온 뒤에 바르게 살려고 애썼습니다. 그래도 계속해서 ‘전과자’라는 꼬리표가 따라 다녔습니다.
이분들은 죄를 짓기 전과 죄를 짓고 난 뒤의 삶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말합니다. 무서운 죄의 권세가 죄 짓고 난 이후의 자신의 삶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며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보면 아담과 하와는 죄 짓기 전에 에덴동산에서 평안하고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죄를 짓고 난 뒤에는 그 삶이 다 파괴가 되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살게 되었습니다. 마음속에 무거운 죄의식이 자리 잡고 있어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반복해서 죄를 지으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권세 가운데 짓눌려 사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심으로 우리는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우리가 담대하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 죄와 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록 죄에 져서 넘어질 때도 있지만 회개하면서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구주 예수님 때문에 죄로부터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믿는 것입니다.
둘째, 삶으로부터의 구원에 대한 믿음입니다.
마 28:20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예수님께서 우리가 죄로부터 구원 받은 뒤에도 사탄이 장악하고 있는 이 세상을 살아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 홀로 이 세상을 살아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 곁에 계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인도하시고 지켜주시고 도와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사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뒤 하나님 없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너무도 고달픈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당장 우리가 사는 세상이 천국으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고달픈 삶을 계속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돌봐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이 세상을 우리 혼자서 살아가지 않습니다.
여러해 전에 MBC 방송의 ‘써프라이즈’라는 프로그램에 놀라운 내용이 방영된 일이 있습니다. 로버트 게리슨이라는 백인 노인이 전한 내용을 소개한 것입니다.
6.25 한국전쟁 시에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미 공군이 서울에 폭탄을 대량으로 투하하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북한 인민군도 죽겠지만 서울에 남아있는 시민들도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게 될 것입니다. 군사적인 이유로 그 계획이 실행되어 폭탄을 실은 비행기가 서울 근교로 출격을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하늘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그 공군비행기 조종사가 이 모습을 사진 찍었고 이 사실을 무전으로 본부에 알렸습니다. 그 사진에 찍힌 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은 이 비행사만 본 것이 아니라 뒤에 따라온 비행기의 조종사도 똑같이 보았습니다.
비행사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두려워하던 차에 폭탄투하하지 말고 귀환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폭격을 하지 못하고 되돌아갔습니다.
이 방송은 이 내용을 [하늘의 유령]이라는 제목으로 방영했습니다. 저들이 말하는 대로 이것이 유령이었을까요?
저는 읽어드린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예수님께서 당시 서울에 남아있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지켜주시기 위해 구름 위에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미군이 폭탄을 투하하지 못하도록 막아주셨던 것입니다.
이런 장면은 출애굽기를 읽어보면 보다 세밀하게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이나 되는 세월을 살았습니다. 마실 물도 없고 식량도 조달할 수 없는 곳입니다. 낮에는 뜨거운 태양을 피할 수 없어서 일사병에 걸리고 밤에는 서늘한 사막 바람에 추위에 떨 수밖에 없는 곳입니다. 1년 아니라 한 달 아니 하루도 버티기 힘든 곳에서 40년을 살아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만나를 내려주시고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하시며 함께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믿는다는 것은 오늘 이 광야 같은 인생길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가 살면서 겪는 그 많은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것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셋째,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에 대한 믿음입니다.
요 14:1-3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배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유언처럼 남기신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저들을 떠나시면서 장차 저들이 이 세상을 떠나 천국에서 거할 처소를 마련하기 위해 떠나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죽음은 더 좋은 삶의 시작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음 앞에 담대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죽음의 그 날을 고대하는 사람들까지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이 살면서 겪는 공포 가운데 가장 큰 공포는 바로 죽음에 대한 공포입니다. 죽음의 공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죽음 앞에서 사람들이 겪는 공포는 이런 것들이라고 합니다.
1. 죽은 후에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확실성에 대한 공포
2. 죽는 과정이 매우 고통스러울 것에 대한 공포
3. 죽을 때 혼자일 것에 대한 공포
4. 죽은 후 잊혀질 것에 대한 공포
그렇습니다. 평소에 죽음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은 죽음이 찾아오면 이런 공포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래서 생의 최후가 무척이나 비참합니다. 어떤 사람은 죽지 않으려 몸부림치다 끌려가듯 죽음을 맞이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공포감에 눈을 감지 못한 채 죽기도 합니다.
저는 목사로서 많은 교우들이 죽음 앞에 서 있는 것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때로는 그분들의 최후의 순간을 함께 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분들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죽음을 맞는 이 순간 주님께서 함께 하시니 주님의 손을 꼭 잡으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제 조금 후면 아버지 품에 안기게 될 것이니 믿음으로 나아가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부르실 때 “할렐루야!”를 외치며 따라 나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찬송을 불러드렸습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그리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여 ! 이 영혼을 주님께 부탁드립니다.”
감사하게도 그분들이 평안하게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저는 이런 일들을 체험하면서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가 그리고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해 주십니다. 죽음의 공포로부터도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 안에서 복되게 살다가 주 안에서 평안하게 죽음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해 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를 이 세상을 떠나 저 천국의 예비하신 처소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삶에서 구원하시고, 죽음에서 구원해 주시는 예수님을 더욱 굳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추천 설교 > 박봉수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앙의 핵심을 배우자막 12:28-34 (0) | 2016.12.01 |
---|---|
깨끗한 사람들 레 15:31 (0) | 2016.08.26 |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딤후 1:6-8 (0) | 2016.05.23 |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 행 17:1-9 (0) | 2016.05.23 |
야베스의 기도의 교훈 대상 4:9-10 (0) | 2016.05.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