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핵심을 배우자
막 12:28-34
찰스 존스라는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5년 후의 나를 알고 싶다면 두 가지만 살피면 된다. '지금 교제하고 있는 사람'과 '지금 읽고 있는 책'이다.” 이 말의 뜻은 지금 누군가에게 무엇을 배우고 또 어떤 책에서 무엇인가를 배우는 것이 5년 후의 나를 이루어 가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의 배움이 보다 나은 내일의 나를 만들어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내가 누구와 교제하면서 무엇을 배우는가가 나의 신앙생활이 보다 성숙해져 가는데 정말 중요합니다. 그리고 오늘 내가 어떤 책을 읽으며 무엇을 배우는가가 나의 신앙생활이 보다 성숙해져 가는데 또한 중요합니다.
예로부터 배우는 일을 게을리 하는 사람을 ‘야만족’이라고 불렀습니다. 배우는 일을 게을리 하면 개인도 성숙해지지 않고 그 삶도 발전이 없습니다. 늘 짐승처럼 그 모양 그대로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을 야만족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오늘도 영적인 야만족이 있습니다. 오래 신앙생활하면서도 신앙인격이 성숙해지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에 발전이 없습니다. 배우려고 하지 않아서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월은 흐르는데 달라지는 것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영적 야만족이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공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 ‘배우고 때맞추어 익힌다면 이 또한 기쁘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 사람이 배우는 즐거움을 알고 익혀서 성숙해져 가고 발전해 가는 것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 참 좋은 신앙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삶 속에서 순종하여 익혀가는 기쁨을 누리며 사는 사람이 참 훌륭한 신앙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서기관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당시 유대인들과 예수님 사이에는 험악한 논쟁이 오가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과 헤롯당이 예수님을 눈에 가시처럼 생각하고 꼬투리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있었습니다. 사두개인들도 예수님이 못마땅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함정이 있는 질문으로 공격해 왔습니다. 유대인이라면 누구도 예수님께 호의를 가지고 배우려고 나설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배우려고 예수님 앞으로 나왔습니다. 가슴에 담아두었던 질문을 토해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유대인들과는 다르게 이 사람을 대하셨습니다. 호의로 대하셨습니다. 정성껏 그 질문에 답하셨습니다. 이 사람이 그 말씀을 귀담아 들었습니다. 성실하게 배웠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칭찬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배우는 일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딤후 3:14에서 바울이 권면하고 있는 것처럼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려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믿음이 자라고 이를 보시는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핵심
이 서기관이 예수님께 배우기 위해 물었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모든 계명 중에 으뜸이 무엇이냐는 질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계명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은 것입니다. 도대체 왜 이런 질문을 한 것일까요?
사실 유대인들은 계명을 지키는 일에 존재의 이유를 찾다시피 해 온 사람들입니다. 특히 모세 5경에 나오는 계명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지키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계명의 가지 수가 너무나도 많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전승에 따라 모세 5경에 나오는 계명을 613가지를 지켜왔습니다. 창세기에 3가지, 출애굽기에 111가지, 레위기에 247가지, 민수기에 52가지, 그리고 신명기에 200가지 그래서 합이 613가지입니다. 그리고 이 613가지를 두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하나는 ‘하라!’는 적극적인 명령이 248가지이고, ‘하지 말라!’는 소극적인 금령이 365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이 적극적인 명령 248가지는 사람의 몸의 지체의 숫자이고, 소극적인 금령 365가지는 1년의 날수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많은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느라고 너무도 힘이 들었습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이 모든 계명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지키지 못해서 힘이 들었습니다. 이에 비해 일반 유대인들은 먹고 사느라 바쁜 가운데 깜빡 계명을 잊고서 지키지 못해서 힘이 들었습니다. 이것이 저들에게는 정말 무거운 짐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그 많은 계명 조항을 하나라도 어기면 안 되기 때문에 그 모든 조항을 문자 그대로 지키는 일에만 몰두하다보니 도대체 왜 이 계명을 지켜야 하는지를 잊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많은 계명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놓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서기관이 율법의 전문가로서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학자들은 뾰족한 답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그저 모든 계명을 있는 그대로 다 지켜야 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서기관의 고민을 정확하게 꿰뚫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속 시원한 답을 주셨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이 모든 계명은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많은 계명의 핵심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613개나 되는 그 많은 계명의 핵심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분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미국에 유학 간 딸이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서 멸치가 먹고 싶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시장에 가서 좋은 멸치를 사다가 멸치 대가리하고 똥을 발라내고 잘 포장해서 소포로 부쳤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딸에게서 전화가 왔답니다. “엄마! 왜 멸치 대가리하고 똥만 보냈어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멸치를 잘 다듬어서는 멸치 몸통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대가리하고 똥만 보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멸치 몸통은 버리고 대가리와 똥만 붙잡고 살 때가 있습니다. 중요한 핵심 가치는 버리고 덜 중요한 주변 가치만 붙잡고 살 때가 있습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뒤로 하고 단기적 목적에 사로잡혀 살 때가 있습니다.
신랑신부가 결혼을 하려고 할 때 유명한 호텔에서 결혼식을 치르느냐 소박한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치르느냐는 핵심이 아닙니다. 신혼여행을 외국 유명관광지로 가느냐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곳으로 가느냐 역시 핵심이 아닙니다. 결혼반지를 다이아몬드로 하느냐 금반지로 하느냐 또한 핵심이 아닙니다. 핵심은 두 사람이 사랑하는 것이고 두 사람이 진심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결혼을 준비하는 신랑신부들과 양가 사람들은 핵심은 뒷전이고 주변의 일들에만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러다가 다투기도 하고 그러다가 파혼을 하는 일들도 없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 핵심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 반드시 지켜가야 하는 것 이런 것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예수님께서 이 서기관에게 첫 번째 핵심을 말씀하시면서 신 6:4 이하의 소위 ‘쉐마’의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하신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라면 누구라도 다 암송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유독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 강조하시려 했던 것이 바로 ‘다하고’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해서 사랑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목숨을 다해서 사랑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뜻을 다해서 사랑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힘을 다하여 사랑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저마다 나름대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누구라도 자기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자부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계명을 지키다 보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형식적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목숨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뜻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힘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다하지 못하고 살기 쉽습니다. 이것저것 신경 쓰고 여기저기 분주하다가 정작 하나님께 쏟는 마음이 부족하기가 쉽습니다. 또 그렇게 살다보니 그래도 되는 줄 알고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부족해도 부족한 줄 모르고 더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벌써 여러 해 된 것 같습니다. TV 드라마의 한 대사가 유행어가 되었던 일이 있습니다. ‘씨크릿 가든’이란 드라마에서 주인공 현빈이 한 대사입니다. “그것이 최선입니까?” 이것이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유행어로 쓰이면서 사람들 사이에서도 농담 반 진담으로 널리 쓰인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최선입니까? 확실합니까?“
그래서 우리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데 그것이 최선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그것이 최선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그것이 최선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헌금하고 있는데 그것이 최선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봉사하고 있는데 그것이 최선입니까?’
독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알려진 미국 전직 대통령 지미 카터의 자서전 제목이 이채롭습니다. ‘왜 최선을 다하지 못했는가?’(Why not the best?)
이분이 이런 제목을 붙이게 된 일화가 있습니다.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임관을 받기 전에 해군 제독인 릭오버와 면담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제독이 갓 임관한 해군장교인 카터에게 여러 가지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쩔쩔매면서 답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이 제독이 해군사관학교 시절에 대해 물었습니다. 어떻게 훈련을 받았는지, 성적은 어땠는지, 사관생도로서의 생활은 어땠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자네가 최선을 다한 결과인가?“라고 물었습니다. 카터가 머뭇거리며 글쎄요 최선을 다했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자 이분이 무섭게 쏘아보면서 다그쳤습니다. “왜 최선을 다하지 못했는가?”(Why not the best?)’ 카터는 더 이상 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잠자리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답니다. ‘내 인생 끝나는 날 내가 주님 앞에 설텐데 그 때 이 제독이 한 말처럼 주님이 내게 묻지 않으실까? “너는 최선을 다했느냐?” 만일 그 때 머뭇거리면 주님께서 “왜 최선을 다하지 못했느냐?”고 책망하시지 않을까?’
그래서 카터는 그 후로 이 말을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살았다고 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신앙생활의 핵심 가운데 하나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최선을 다해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네 자신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
예수님께서 이 서기관에게 이번에는 두 번째 핵심을 말씀하시면서 레19:18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 말씀 또한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다 암송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말씀에서 유독 강조하고 계신 부분이 “네 자신과 같이”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되 사랑하는 정도를 자기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정도까지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유일하신 아들을 보내주셨습니다. 그 아들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게까지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웃은 다릅니다. 사랑하기가 힘이 듭니다. 대체로 이웃은 자기 살기 바빠서 우리에게 무관심합니다. 심할 경우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힘이 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웃을 사랑하라 하시니 어쩔 수 없이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더라도 하나님께 책망 받지 않을 정도로 사랑하려고 합니다. 사랑하더라도 의무적으로 사랑할 뿐입니다.
실제로 성경을 보면 이런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온 일이 있습니다. 마 19장을 보면 부자 청년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는 물었습니다. 자기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겠는지를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이 청년이 다짜고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이 청년은 이런 말씀을 어려서부터 듣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자기 나름대로 이 말씀을 지켜온다고 지켜왔습니다. 그래서 감히 자기가 이 모든 것을 다 지켜왔는데 아직도 뭐 부족한 것이 있느냐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뜻밖의 주문을 하셨습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이 청년이 그렇게 할 수가 없어서 근심하면서 예수님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소극적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명하시니까 어쩔 수 없어서 사랑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이웃을 사랑하고 산다고 자위하기 위해서 사랑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청년도 그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수준에서 이웃을 사랑하며 삽니다.
다른 하나는 적극적 사랑입니다. 이웃의 필요를 채우려는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합니다. 이웃의 아픔을 보듬는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시간을 냅니다. 자기 지갑도 엽니다. 헌신합니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우리의 신앙생활의 핵심 가운데 다른 하나로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되 적극적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야 할 일도 많고 해서는 안 될 일도 많습니다. 우리가 나름대로 그것을 지키고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면서 우리가 정말 힘써야 할 신앙생활의 핵심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마음속에 깊이 새기며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지켜가야 합니다.
그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되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웃을 사랑하되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이것을 잘 배우고 잘 지켜 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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