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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후1: 3-11 * 하나님의 위로 (1)

고후1: 3-11 하나님의 위로 (1)


나무는 가을이 되면 '떨켜'라는 세포를 작동시켜 잎사귀들을 강제로 떨어뜨려냅니다. 이유인즉 잎으로 가는 물길을 봉해 수분증발을 막아 최소한의 에너지로 겨울을 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나무는 몸 안에 얼음세포라고 불리는 '얼음물'을 품고 외로이 겨울잠을 잡니다. 그런데 이 차가운 얼음물이 다른 세포가 얼어 죽지 않도록 단열, 보온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봄이 오면 나무는 그 얼음세포를 녹여 온몸에 수분을 전해 줍니다. 수분을 받은 나무의 온 몸은 파릇파릇 생기가 돋아나고 가지가지마다 새잎이 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사노라면 누구에게나 '떨켜와 얼음의 시간'이 찾아옵니다. 어느 날 우리에게 겨울이 찾아온다면 나무를 지으신 하나님의 지혜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일찍이 지혜자 솔로몬은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하며 인생길에서 곤고함을 피해갈 수 없음을 이야기했습니다. 야고보 역시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 하였고 시편기자는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라”했습니다. 이처럼 인생길에 고난은 마치 길동무와 같습니다. 함께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피할 수 없는 고난으로 인해 깊은 절망과 좌절 속에 힘든 시간을 보낼 때 누군가가 던져준 격려와 위로의 말 한마디는 그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성경도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4:18) 말씀하십니다.


좋은 생각에 실린 이수종씨의 글입니다.

10여 년 전, 어머니가 자궁암 판정을 받았을 때 우리 가족은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절망감으로 하루하루를 우울하게 지냈다. 그나마 수술을 하게 되면 생존율 70-80%, 완치율은 60% 정도 된다는 병원 측의 설명에 희망을 걸었다. 그때 우리 집은 형편이 넉넉지 않아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 어렵게 수술비를 해결했고 천만다행으로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나 정말 감사했다. 드디어 어머니가 퇴원하시던 날, 어머니를 방으로 모셔다 드리고 마루에 나와 앉았다. 그런데 마루 한구석에 낯선 정부미 한 포대가 놓여 있었다. 그렇지만 이것이 왜 여기 있는지,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노릇이라 손도 대지 않은 채 그냥 그 자리에 두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을까, 친척들이 병문안을 오셨다. 고모들이랑 큰어머니는 걱정스런 얼굴로 어머니의 안부를 묻고 격려해 주셨는데, 나는 이런저런 경과를 말씀 드리다 누군가 마루에 갖다 놓은 의문의 쌀에 대한 말씀도 드렸다. 그런데 그 얘기를 들으신 큰어머니 얼굴이 빨개지며 당신이 갖다 놓았다고 하셨다. 순간 우린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삽시간에 집안은 울음바다로 변해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큰댁은 자식도 없이 두 분만 외롭게 사시는 데다 형편이 어려워 생활보호대상자로 지정되어 쌀도 배급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원 받은 귀한 쌀을 아낌없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었다. 큰어머니는 어머니 손을 잡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보게. 내가 가진 것이 너무 없다 보니 자네에게 줄 것이라곤 이것밖에 없어. 정말 미안하네. 맛없는 쌀이지만 양이라도 넉넉히 해서 많이 먹게나."


여러분! 환자가 가족이라면 돈 봉투라도 정성껏 준비해서 주면서 “돈 걱정이라도 하지 말고 치료받으라고. 힘껏 돕고 힘써 기도하겠다고” 하면 얼마나 위로와 힘이 되겠습니까?

 

현대를 사는 사람들의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무너뜨리는 무서운 적은 우울증, 심장 질환, 그리고 교통사고입니다. 머지않아 우울증을 포함한 정신 질환이 전체 질병의 15% 이상이 될 것이라고 전망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어떤 연구 보고서에 의하면 자살하는 사람들 가운데 80%가 우울증 환자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과 같은 각종 정신 질환에 시달리고 있으며 어째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자살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을까요? 여러 가지 대답이 있을 수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참된 위로를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참된 위로자를 만나지 못하기 때문에 심한 고통을 받고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위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 참된 위로를 받음으로 이 문제는 해결될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 땅에 위로자로 오셨습니다. 모든 슬픔의 근원이 되는 세상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돌아가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심판의 공포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믿는 자들의 마음속에 성령께서 오시어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언제나 위로 해 주십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아주 멋진 권면을 합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3절) 사도바울은 위로라는 단어를 참 좋아했고 즐겨 사용했습니다. 위로라는 단어는 연약한 사람에게 해당되는 소극적인 단어가 아닙니다. ‘옆에서 힘을 실어준다.’, ‘기운을 북돋아 준다.’, ‘힘이 되어 준다.’ 아주 능동적이고 ynamic[dainǽmik]다이내믹한 단어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이 위로라는 단어를 자그마치 18번이나 거듭거듭 반복하여 사용합니다. 1장 서론에서 무려 힘이 되어 주신 하나님, 힘을 실어주신 하나님, 힘을 불어넣어 주신 하나님, 기운을 소생시켜 주신 하나님, 위로라는 말을 10번이나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왜입니까? 자기 자신이 험난한 선교현장에서 지치지 않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 바로 하나님의 위로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넘치도록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있었기에 그는 수많은 고난을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8절부터 10절까지를 보면 바울은 선교사역 중에 너무 너무 힘든 일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8절을 보시면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8절) 바울은 살 소망이 끊어진 상태까지 되었습니다. 삶의 의욕을 완전히 상실한 단계까지 이르렀습니다. 9절을 보세요.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9절) 이제 죽는 줄 알았다는 말입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것처럼 처절한 탈진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10절 보시면 큰 사망이란 단어를 씁니다. 그만큼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런데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원동력은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힙 입었기 때문입니다. 위로자 하나님이 계시고 그분의 위로하심이 있었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위로자 하나님께서 우리와도 항상 함께하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삼상30장에 보시면 다윗도 아주 어려운 상황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기 전 블레셋에 몸을 은거하고 있을 때입니다. 블레셋 왕을 도와 전쟁에 출전하려다가 블레셋 왕의 측근들의 반대로 되돌아오게 됩니다. 그 틈에 아말렉 군사들이 다윗이 살던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가족들을 다 사로잡아 가버렸습니다. 백성들은 다윗을 원망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듭니다. 그 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삼상30:6 “백성들이 각기 자녀들을 위하여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군급하였으나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삼상30:6) 다윗은 이런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힘입고 용기를 얻어 아말렉을 추격하여 모두 회복하게 됩니다. 이 사건을 경험했던 다윗은 이런 찬송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시18:1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룰 사랑하나이다.”(시18:1) 하나님이 우리의 힘입니다. 희망입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힘입어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어려운 역경을 겪은 사람을 뽑으라면 주저 없이 을 말할 겁니다. 모든 재산을 하루아침에 잃고 한 명의 자녀가 아닌 모든 자녀 10명을 다 잃었습니다. 자신의 건강까지 잃었습니다. 이런 욥에게 사람의 위로는 별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의 세 친구들은 욥을 위로합니다. 사람으로서, 친구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위로입니다. 귀를 열고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그들은 욥을 찾아가 함께 하였습니다.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그에게 이 모든 재앙이 임하였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처소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의 욥을 조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상약하고 오더니"(욥2:11).

욥의 친구들은 욥의 어려운 형편을 듣고 침묵하거나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친구가 괴로워하는 고난의 현장까지 달려왔습니다. 위로의 첫 걸음은 먼저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하는 것입니다.


조셉 베일리라는 사람이 쓴 ‘세 명의 아들을 무덤에 묻고 나서’라는 책에 이런 글이 실려 있습니다.

"난 슬픔에 잠겨 앉아 있었다. 그때 누군가 내 곁에 와서 신의 섭리에 대해, 그리고 왜 이런 불행한 일이 일어났으며 무덤 너머에 어떤 희망이 있는가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계속해서 많은 얘기를 했다. 내가 느끼기에도 진실이라고 여겨지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난 그가 그만 가주기를 바랄 뿐 아무런 감동을 받을 수 없었다. 마침내 그는 자리를 떴다. 그때 또 다른 사람이 와서 내 곁에 앉았다. 그는 그냥 한 시간이 넘도록 아무 말 없이 내 곁에 앉아 있었다. 내가 무언가를 말하면 귀 기울여 들어 주고, 간단히 대답하고, 조용히 내 손을 잡아 준 다음에 내 곁을 떠났다. 난 그에게서 큰 감동과 위안을 받았다. 난 그가 떠나는 것이 싫었다." 그렇습니다. 힘들 때 누군가가 찾아옴이 위로요, 곁에 있어 주고, 함께 있음이 큰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마1:23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이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실 것인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 고달픈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힘겹게 살아가야 하는 인생들, 그들 곁에 하나님께서 찾아 오셔서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인 것입니다.


2. 그들은 욥과 함께 느꼈습니다.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욥2:12).

사람이 고난을 당하면 그 마음이 충격을 받습니다. 마음이 짓눌려 무겁고, 슬퍼 힘이 들고, 아프고 고통스럽습니다. 마치 우리 몸이 충격을 받으면 멍이 들거나, 피가 나고 상처가 생기는 것처럼 마음도 상처투성이가 되는 것입니다. 이 때 누군가 그 마음을 알아주고 함께 느껴주면 위로가 됩니다. 그래서함께 슬퍼하고 함께 울어줄 필요가 있습니다. 이로써 그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져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어머니 손에 이끌려 며느리가 병원을 찾았습니다. 시어머니는 마치 자기가 환자인 것처럼 며느리 증상에 대해 의사에게 길게 설명을 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병원에서 이런 저런 검사를 다 받아봤는데 아무 이상이 없답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그런지 모르겠답니다. 그러면서 며느리가 워낙 예민해서 그런 것 같다고 며느리 탓을 합니다. 의사 선생님이 환자와 단둘이서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잠깐 나가 계시라고 시어머니를 내보냈습니다. 그리고 말을 꺼냈습니다. “시집살이가 힘드시죠? 저런 시어머니와 사시느라 숨이 막히시겠어요!” 그 말을 듣자 며느리는 눈시울을 적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얼굴이 밝아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감의 힘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공감적 이해” (empathic understanding)라고 부릅니다. 마음이 힘들고 지치고 상처로 아파하는 사람들을 공감해 주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위로인 것입니다.


3. 그들은 함께 침묵했습니다.


"칠일 칠야를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곤고함이 심함을 보는 고로 그에게 한 말도 하는 자가 없었더라"(욥2:13)

이 참담한 고난을 당하는 친구를 보고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욥의 친구들은 욥의 곁에서 침묵했습니다. 침묵은 좋은 위로의 방법입니다. 침묵은 서투른 변론이나 값싼 위로의 말보다 훨씬 능력 있는 위로의 방편입니다. 그들은 함께 있고 함께 느꼈고, 함께 침묵했습니다. 그 침묵은 정직한 침묵이고 위대한 침묵입니다.


심장마비로 쓰러져 의식불명인 형을 지키는 동생이 있었습니다. 하루에도 여러 명의 방문객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위로할 수 있는 적절한 말, 완벽한 성서 귀절, 희망을 주는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형의 친구 한 사람이 찾아왔는데 그는 침대 옆에 오랫동안 서 있었습니다. 긴 침묵이 이어졌고, 돌아서서 동생과 악수를 했습니다. 필요한 것보다 조금 더 손을 잡았고, 힘을 주었으며, 눈물이 고인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습니다. 형이 죽고 여러 해가 흘러도 동생이 기억하는 방문객은 조용히, 진심으로, 꾸밈없이 위로하던 그 사람뿐이었습니다.

너무 큰 고난을 당하면 사람의 어떤 말도 위로가 안 됩니다. 그 때엔 침묵하십시오. 정직한 침묵을 하십시오. 위대한 침묵을 하십시오. 그리고 함께 있어 주십시오. 내 아픔처럼 같이 우십시오. 그것이 차라리 힘 있는 위로라는 것을 우리는 이 세친구의 모습을 통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1. 멀고험한 이세상길 소망없는 나그네길        방황하고 헤매이며 정처없이 살아왔네

   의지할 것 없는 이몸 위로받고 살고파서      세상 유혹 따라가다 모든 것을 다 잃었네

2. 무거운 짐 등에지고 쉴곳 없어 애처로운 몸   쓰러지고 넘어져도 위로할 자 내겐 없었네

   세상에서 버림받고 귀한 세월 방탕하다       아버지를 만났을 때 죄인임을 깨달았네

3. 눈물로써 회개하고 아버지의 품에 안기어     죄악으로 더럽힌 몸 십자가에 못박았네

   구원함을 얻은 기쁨 세상에서 제일이라       영광의 길 허락하신 내주 예수 찬양하네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지쳐 있는 나에게 위로의 영으로 찾아오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상한 마음을 위로해 주십니다. 내 멍든 가슴을 위로해 주십니다. 힘을 잃고 탈진 상태에 있는 나의 내면을 어루만져 주시고 오늘 이 자리에서도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어 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곁에서 힘이 되어 주신 하나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신 하나님, 내 인생의 견고한 요새가 되어 주시고 오늘도 변함없이 저와 여러분에게 힘이 되시는 사랑의 위로자이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오늘 우리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출처 : 목포하늘비전교회
글쓴이 : †^머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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