딤후1:15-18 유쾌케 하는 성도가 되라.(2)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날씨가 차가워진 후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는 말로 국가가 위난에 처했을 때 비로소 충신열사를 알아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로마 감옥에 제 2차 투옥되어 사형 날짜를 기다리고 있는 바울에게 ‘오네시보로’는 어려울 때 끝까지 함께한 사람, 진정한 친구, 충신이었습니다.
주전 4세기 경, 그리스에 피시아스라는 젊은이가 교수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효자였던 그는 집에 돌아가서 연로하신 부모님께 마지막 인사를 하게 해달라고 왕에게 간청했습니다. 왕은 쉽게 허락할 수 없었습니다. 피시아스에게 허락하면 모든 죄수들에게도 허락해야 하고, 만약에 피시아스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돌아올 죄수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국법과 질서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왕은 피시아스를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이 죽을 줄 알면서 과연 돌아올 것인가? 본인이 돌아오고 싶어도 부모님이 반대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왕이 고심하고 있을 때 피시아스의 친구 다몬이 보증을 서겠다면서 나섰습니다. 피시아스가 돌아오지 않으면 제가 대신 죽겠다고 했습니다.
“제 목숨을 걸고 부탁드리오니 부디 허락해 주옵소서.” 왕은 어쩔 수 없이 허락했습니다. 다몬은 기쁜 마음으로 피시아스를 대신해 감옥에 갇혔습니다. 드디어 교수형을 집행하는 날이 밝았습니다. 그러나 피시아스는 돌아오지 않았고 사람들은 바보 같이 죽게 된 다몬을 비웃었습니다. 정오가 가까워지자, 다몬이 교수대로 끌려나왔습니다. 그의 목에 밧줄이 걸리자 다몬의 식구들이 울부짖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우정을 저버린 피시아사를 욕하며 저주를 퍼 부었습니다. 그러자 목에 밧줄을 건 다몬이 눈을 부릅뜨고 화를 냈습니다. “나의 친구 피시아스를 욕하지 마라. 당신들이 네 친구를 어찌 안단 말인가?” 집행관은 고개를 돌려 왕을 바라보았습니다. 왕은 주먹을 쥐었다가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향했습니다. 집행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 때, 멀리서 누군가가 말을 재촉하여 달려오며 고함을 쳤습니다. 피시아스였습니다. 그는 숨을 헐떡거리며 다가와 말했습니다.
“제가 돌아왔습니다. 이제 다몬을 풀어주십시오. 사형수는 접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고 작별을 고했습니다. “다몬, 나의 소중한 친구여, 저 세상에 가서도 자네를 잊지 않겠네. 피시아스, 자네가 먼저 가는 것뿐일세, 다음 세상에서 다시 만나도 우리는 틀림없이 친구가 될 것이야.” 두 사람의 우정을 비웃었던 사람들 사이에서 탄식이 흘러나왔습니다. 다몬과 피시아스는 영원한 작별을 눈앞에 두고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담담하게 서로를 위로 할 뿐이었습니다. 이들을 지켜보던 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피시아스의 죄를 사면하노라.” 왕은 나직하게 혼잣말로 말했습니다. “내 모든 것을 다 주더라도 이런 친구를 한번 사귈 수 있다면.”
오네시보로가 사도바울에겐 진정한 친구였습니다. 진정 고마워서, 끝까지 목숨 걸고 함께하며 자신을 유쾌케 한 '오네시보로'를 사도 바울은 칭찬하며 하나님께 복을 빌고 있습니다. 오늘은 오네시보로가 목회자 바울을 어떻게 유쾌하게 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어려울 때 찾아가 돕습니다. (17절)
바울은 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 때, 로마 지하 감옥에 갇힌 겁니다. 기독교인들을 찾아내 배신을 강요하고 죽이기도 했습니다. 바울도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이 갇힌 옥에 찾아간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신변 안전을 위해서 바울 곁을 다 떠난 겁니다. 그런데도 오네시보로는 용감하게 바울을 찾아 갑니다. 특별히 17절 보면 부지런히 찾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외롭고 고독하고 쓸쓸해 할 때마다 오네시보로는 찾아가서 그의 영성을, 그의 마음을 그의 기분을 리프레시 해주었습니다. 한두 번 인사치례로 찾아간 것이 아닙니다. 꾸준히 찾아가 외로움을 달래 줍니다. 그렇습니다. 초상집에는 불청객이라도 좋은 손님이 되는 겁니다. 초상집에는 불청객이라도 찾아오면 좋은 겁니다. 또한 그는 사도 바울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16절 보세요.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여” 그는 복음 때문에 갇힌 사도 바울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군자의 덕 중의 하나가 수오지심(羞惡之心)입니다. “군자는 악을 부끄러워 할 줄 아는 마음, 부끄러운 것을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을 마땅히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무엇이 부끄럽고 무엇이 부끄럽지 않는 것인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6)
그리고 복음을 전하다 옥에 갇힌 것, 그로 인해 고난을 받은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딤후1:7, 11-12)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라고 말씀합니다. 현대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복음을 이방인들에게도 선포하시고 가르치시려고 나를 사도로 택하셨습니다. 내가 여기 감옥에 갇혀서 고난을 당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고난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믿고 의지하는 그분이 어떤 분이지를 잘 알고 있으며, 또 그분이 내가 바친 모든 것을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안전하게 지켜 주실 것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네시보로는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갇힌 바울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진정 부끄러운 것은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힌 것이 아닙니다. 감옥에 갇힐까봐 전하지 않는 것, 성경책을 숨겨 교회 나오는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부끄러운 것은 주의 일을 하다가 힘이 들어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일을 하지 않는 것 그리고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입니다.
부끄러운 것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조용히 머리 숙여 일용한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기도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지 못하고 그냥 먹는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부끄러운 것은 주님 앞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일날 이 핑계, 저 핑계대면서 주일을 범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엡 5:11-12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우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은밀히 행하는 죄악들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죄를 자랑하는 자는 참으로 어리석은 자입니다.
죄를 짓는 것도 부끄럽지만 더 부끄러운 것은 인정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십자가를 부끄러워하면 안 됩니다. 예수 십자가가 나를 살렸습니다. 복음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믿는 나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을 사람들 앞에서 시인하시고 전하십시오.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주이십니다. 그 분은 나 같은 자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 분입니다. 한 목사님이 주님이 자기를 얼마나 소중하게, 자랑스럽게 여기시는지를 깨닫고 지은 시입니다.
나는 주님의 것이외다.
김정준 목사
나는 주님의 것이외다.
내가 주님의 것이 되고자 원하기 전에
주님은 나를 주님의 것이라 말씀했나이다.
내 부모 형제에게서 선함이 없고
내 자신에게서 아무 의로움이 없지만
그저 주님은 나를 주님 것이라 말씀하나이다.
내 과거나 현재도 죄 뿐이요
또 내 미래도 거룩한 보증을 할 수 없건만
그저 주님은 나를 주님 것이라 말씀하나이다.
주님이 이것을 주님의 소유물로 하셨어도
천지나 역사에 털끝만한 변함이 없겠지만
주님은 그저 주님 것이라 말씀하나이다.
이것을 주님의 소유로 하시오면
주님이 이것 위해 마음 쓰시기 괴로우실 텐데
그래도 주님의 것이라 하시나이다.
주님은 나를 주의 것이라 하시지만
이것은 또 몇 번이나 주님을 반역할지 모르겠는데
그래도 주님은 주의 것이라 말씀하나이다.
이것이 주님 것 됨으로
주님의 곳간이 부해질 것 아니건만
그래도 주님은 "너는 내 것이라"하나이다.
내게는 배암같은 간사함이 있고
표범같은 악독함이 있사온데도
주님은 그래도 "너는 내 것이라" 하나이다.
내 교만이 바벨처럼 높고
내 비루함이 수풀처럼 우거졌건만
그래도 주님은 "너는 내 것이라" 하나이다.
음부도 내 흑암에 비길 바 못되고
우주도 오히려 내 죄악보다도 적건만
그래도 주님은 "너는 내 것이라" 말씀하나이다.
주님, 이것이 주님의 소유의 하나이오니
쓰셔도 당신 뜻, 또 버려도 당신의 뜻이외다.
다만 당신의 뜻만이 이루어지사이다.
주님은 나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정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존중하고 귀히 여기십니다. 그런 주님을 우리는 부끄러워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네시보로는 사도 바울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어려울 때 찾아가서 용기를 심어줍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매우 어려울 때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으로 오네시보로를 평합니다. 우리 모두 이런 사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2) 멀리까지 찾아가 돕습니다.
오네시보로는 에베소 사람입니다. 그런데 로마까지 자주 찾아갔습니다. 여러분 에베소에서 로마가 어느 정도 거리인지 아십니까? 1200킬로입니다. 3천리 길이에요. 지인이 청송 교도소에 수감되었다고 해보세요. 찾아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현재처럼 잘 발달된 교통수단을 이용해 찾아가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네시보로는 3천리길을 찾아갑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약7-8년 정도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는 에베소에서도 바울을 열심히 도왔습니다. 이제는 로마까지 와서 바울을 도우며 리프레시 해주고 있습니다.
조관일 씨의『비서처럼 하라』는 책이 있습니다. 삼성 그룹의 사장단을 조사해 보면 많은 사장이 있는데, 사장의 49%가 비서실 출신입니다. 비서로 있던 분들이 크게 됐습니다. 그런데 비서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① 멀티플레이어입니다. 비서는 한 가지 일만 해서는 안됩니다. 이 일도 하고, 저 일도 하고, 사장이 원하는 대로 닥치는 대로 모든 일을 다 해 낼 수 있어야 됩니다.
② 곁에 두고 싶은 사람입니다. 비서는 충성된 사람입니다. 재능보다 충성된 사람, 믿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③ 보스가 성공할 수 있도록 힘쓰는 사람입니다. 전부 자기가 성공하겠다고 날뛰는데, 아닙니다. 보스를 성공하게 하는 이것이 비서의 역할입니다.
④ 아주 부지런한 성격이라야 하고,
⑤ 균형 잡힌 시야가 있어야 됩니다. 비서는 보스만 아는 게 아닙니다. 보스의 친구를 알아야 되고, 가족을 알아야 되고, 주변 사람들을 다 알아서 좋은 균형관계를 유지해야 됩니다.
⑥ 비서는 비서화법이 있습니다. 수다를 떨어도 안 되고, 설득력이 있어야 합니다.
⑦ 매너가 좋아야 합니다. 겸손하고 친절한 매너가 있어야 됩니다.
⑧ 정보통이어야 합니다. 주변에 있는 많은 이야기를 다 들어서 잘 소화해서 보스에게 그 정보를 정리해서 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⑨ 어떤 일에도 웃음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화를 내도 웃으면서...
⑩ 그리고 추천하고 싶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내게만 좋은 사람도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까지 '이 사람은 좋은 사람입니다.' 할 수 있는 그런 사람, 이게 비서입니다.
오네시보로는 자기가 성공한 사람이 아닙니다. 바울을 위해서 산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저가 나의 마음을 시원하게 했다. 내게 아주 유쾌한 사람이다.” 그는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도 로마교회 성도들에게도 유쾌한 신자가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 찬양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오네시보로 같이 유쾌한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가장 멀리까지 찾아오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저 하늘의 영광스런 보좌에서 가장 먼 땅 동쪽의 한 귀퉁이 한국 땅 여기까지 나를 찾아오신 분이십니다. 그 예수님은 날마다 성령으로 우리를 refresh 해 주십니다. 내 속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 생기의 영으로 오늘도 나를 리프레시 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늘 새 용기를 주시듯이 우리도 서로에게 유쾌한 신자로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성경은 이와 같이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유쾌하게 만들어 주는 유쾌한 성도가 되면 너무 멋진 두 가지 축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첫째, 가문이 복을 받습니다.(16)
나 한 사람의 헌신으로도 우리 집안 전체가 복을 받습니다. 오늘 16절 보면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주께서 오네시보로 집에 그 집안에 그 가문에 그 혈통에 복을 주옵소서! 개인의 복에서 집 안의 복으로 확대됩니다. 한 사람이 가문 전체를 행복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바울 서신을 보시면 바울 서신은 언제나 교리를 다루고 뒷부분은 생활 이야기를 다루다가 마지막 부분에 사람이야기가 나옵니다. 마지막 부분에 가면 이러 이러한 사람은 내 목회에 걸림돌이었고... 속을 썩였던 사람들이었고, 이러 이러한 사람은 나와 생사 고락을 같이 했던 훌륭한 사람들이니 복이 있고 여러분들도 이런 사람들을 존경하라 하고 사람 소개는 맨 마지막에 합니다. 그런데 딤후 1장에서는 지금까지의 논리적인 흐름에서 벗어나서 오네시보로를 1장 초반부에 축복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이 서둘러서 축복하시는 은총이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긍휼의 복을 받습니다.(16, 18절)
바울은 오네시보로의 고귀한 헌신에 대해서 최고의 축복 긍휼을 두 번이나 하나님께 구합니다. 16절은 내세에, 18절은 “원컨대 주께서 저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선 악간에 모든 심판을 받는 그 날에 주의 긍휼을 받게 기도합니다. 그 날에 모두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완벽하고 떳떳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 날 그 자리에 유일하게 필요한 축복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완벽해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부족하지만 내가 다른 사람에게 용기를 주고 위로해 주고 격려하고 세워주고 그를 리프레시해주다 보니까 주님이 나를 긍휼로 덮어 주어 받게 됩니다. 오네시보로가 바울을 위로한 만큼 그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습니다. 외로운 자를 긍휼이 여긴 만큼 긍휼이 여김을 받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5: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성공하는 게 아니라 남을 성공하게 하고 똑똑한 사람보다는 충성된 사람, 그리고 겸손한 사람이 되어서 만나고 싶은 사람, 곁에 두고 싶은 사람, 추천하고 싶은 사람, 그리스도를 섬기듯이 이웃을 섬기고, 그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냄새가 나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있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사람, 많은 사람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유쾌하게 하는 그런 기분 좋은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서로에게 용기를 심어주고 든든한 협력자가 되어 유쾌한 신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가문과 혈통이 복을 받고 금세와 내세에 주님의 긍휼의 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나의 등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1
나의 인생 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앉고 싶을 때 나를 밀어주시네
2
평안히 길을 갈땐 보이지 않아도
지치고 곤하여 넘어질 때면 다가와 손내미시네
3
때때로 뒤돌아보면 여전히 계신주
잔잔한 미소로 바라보시며 나를 재촉하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00야! 일어나라)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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