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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왕하6:8-17 * 두려워 말라.

왕하6:8-17 두려워 말라.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대 서반아 왕 가운데 페르디난도 5세라고 하는 왕이 있었는데 이 왕이 어떤 사람에게 "왕께서는 '마드리갈'이라고 하는 곳에 가지 마세요. 그 '마드리갈'에서 왕은 장차 죽을 것입니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왕은 무서워서 '마드리갈'에 자기의 좋은 궁전을 지어 놓고도 21년 동안 거기를 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번은 서반아 지방을 여행하다가 어떤 조그만 촌락에서 하룻밤 자면서 그만 병이 났습니다. 왕은 이 지방이 어떤 지방이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이 "이 곳은 '마드갈레'입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마드리갈'과 비슷했습니다. 사실은 '마드리갈'은 아니고 비슷한 이름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왕은 "아이고 나는 죽겠구나!"하더니 며칠 안 되어서 죽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병이 왕을 죽인 것이 아닙니다. 공포심이 죽인 것입니다. 공포심이 사람의 마음을 엄습하게 되면 신경이 쇠약해지고, 혈압은 높아지고, 위액 분비가 잘 안되어서 소화도 안 되고, 심장이 뛰고, 당뇨병이 생기기 쉽습니다. 이렇게 되어서 실상은 세균에 의한 병보다도 공포심이 원인이 되어서 병나는 이가 더 많고, 죽는 사람도 더 많다고 합니다. 이렇게 공포심, 두려움이 우리 인간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큼을 알 수 있습니다.


인도의 설화에도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마술사가 쥐 한 마리를 관찰하다가 쥐가 고양이를 보며 떨며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고 불쌍해서 쥐를 고양이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고양이로 변신한 쥐가 또 다시 개를 보고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다시 개로 변신시켜주었습니다. 그런데 개로 변신한 쥐가 이제는 호랑이를 보고 두려워합니다. 또 불쌍히 여긴 마술사가 이번에는 호랑이로 변신시켜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호랑이로 변한 쥐가 사냥꾼의 총을 무서워합니다. 사냥꾼을 두려워하는 호랑이로 변한 쥐를 보고 포기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어떻게 해주든지 너의 두려움이 끝나지 않으므로 너는 어쩔 수 없는 쥐다. 그러니 다시 쥐로 되돌아가라.

두려움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악순환입니다. 한 심리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움이 비활동을 낳고 비활동이 경험부족으로 이끈다. 경험의 부족은 무지를 조장하고 무지는 두려움을 낳는다.” 무슨 말입니까? 두렵기 때문에 활동하지 않고 활동하지 않으니까 경험이 부족하고 경험이 부족하니까 무지를 조장하고 결국 그 무지는 또 다시 두려움을 낳는다는 겁니다. 이걸 할까, 저걸 할까, 끊임없이 두려워하다 보면 아무것도 못하고 허송세월 할 수 있습니다. 걱정은 또 다시 걱정을 낳고 염려는 또 다른 염려를 낳고 두려움 역시 아무것도 못하게 하고 두려움만 계속 만들 뿐입니다.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에게 핑계의식(excuse mentality)현상이 나타납니다. 핑계나 변명이전에 이미 그 사람을 두려움이 지배하고 있는 겁니다. 성경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365번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분들은 1년 365일 매일 믿음으로 살면서 두려움을 이기라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저는 우리 찬양식구들이 1년 365일 믿음으로 두려움을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약시대에 엘리사라는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당시 강대국이었던 시리아가 중무장한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을 침공했습니다. 엘리사의 제자가 아침에 눈을 떠 밖으로 나가보니까 중무장한 대군이 이스라엘을 완전히 포위한 겁니다. 깜짝 놀라 헐레벌떡 뛰어와 엘리사 선지자에게 보고합니다. 선생님, 선생님! 큰 일 났습니다. 어떻게 해요, 우리는 완전히 시리아 군대에게 포위당했습니다. 안절부절 합니다. 그러나 엘리사 선지자는 너무 태연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왜 일까요? 오늘 우리도 뜻밖의 상황이나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부딪힐 때, 엘리사처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1. 환경과 사람을 의식하지 않아야 합니다.(16절)

시리아가 중무장한 대군을 거느리고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포위망을 점점 좁혀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엘리사의 반응은 너무 초연합니다. 16절 보세요.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의 편에 있는 사람보다 우리의 편에 있는 사람이 더 많다.”(16절) 여기서 우리는 엘리사의 계산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엘리사는 현실 상황의 불리함이나 사람의 숫자에 초연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숫자 계산법으로 해석하고 대응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날마다 숫자 놀이에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다. 신문과 텔레비전은 아침마다 코스닥지수가 어떻고 나스닥지수가 어떻고 사람들의 마음을 압박합니다.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 수학의 아버지 피타고라스는 ‘미래의 사람들은 숫자의 노예가 될 것이다.’라고 경고했는데 그대로 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숫자에 노예가 되었는지 한 번 들어보세요. 몇 평 아파트에 사십니까? 몇CC 자동차입니까? 연간 매출액이 얼마입니까? 통장 잔액이 얼마입니까? 아이들의 성적은 몇 점인가? 다 숫자입니다. 체중은 몇 킬로그램인가? 허리 사이즈는 몇 인치인가? 나이는 몇인가? 등 숫자 때문에 우리가 위축된 경우가 참 많습니다. 숫자에 민감하여 계산적이다보니 걱정이 앞섭니다. 불필요한 염려를 하게 됩니다. 안전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믿음 없는 사람일수록 자꾸 숫자를 계산합니다. 빌립이란 제자를 보세요. 200데나리온을 가지고도 못한다고 위축되고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작은 것을 가지고도 계산하지 않으니까 얼마나 담대합니까? 조그만 도시락 하나를 내어놓으면서도 그걸 가지고 주님 보고 해 보라 합니다. 환경이나 사람의 숫자를 너무 의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산수는 인간의 산수나 계산 방법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믿음으로 사는 적은 수를 좋아하십니다. 다윗은 돌멩이 다섯 개로 골리앗을 이깁니다. 기드온은 300명의 군사를 가지고도 13만 5천명의 미디안의 군사를 이겼습니다. 안드레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5개로 5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창조하는 일에 어시스트합니다. 이탈리아 바이올린 연주자 파가니니는 콘서트 중에 바이올린 줄이 현이 하나 하나 끊어지고 한 줄 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 한 줄을 가지고도 청중을 감동시키는 연주를 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내 건강의 지수가 몇 개 끊어졌습니까? 그거 가지고 위축되지 마시고 남아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장군은 13척의 배를 가지고도 세계 해전사에 남는 신기원을 이루었던 겁니다. 예수님은 12명의 제자로 세계 선교와 하나님 나라를 이루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백세에도 자식을 낳고 모세는 80세에도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는 새 출발을 시작한 겁니다. KFC의 창업자, 치킨 왕 커넬센더슨은 65세에 닭튀김 가게를 시작합니다. 괴테는 80세에 가서야 파우스트라는 작품을 완성하게 됩니다. 절대 나이를 가지고 말하지 마세요. 늦은 나이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인간의 숫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던 원동력이 뭡니까? 골리앗이 크다고 하는 말은 딱 두 번밖에 하지 않습니다. 그건 골리앗이 얼마나 큰 인물인가를 우리에게 상기시켜주기 위한 겁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위대하신 분인가?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놀라운가는 9번이나 거듭 강조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초점이 달라지시기를 바랍니다. 환경에 초점을 맞추고 인간에 초점을 맞추면 위축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은 다 거장 골리앗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다윗의 눈만은 하나님께로 초점을 고정시키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살 수 있습니까? 환경에 초점을 맞추지 마세요. 사람의 수에 맞추지 마세요. 하나님 그 분에게 맞출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말고는 그 어떤 존재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늘 아침 나를 위축시키고 있는 모든 환경적인 두려움에서 해방되고 자유 함을 누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 편에 설수록 두렵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으시면서 깨달으셨는지 모르지만 엘리사 선지자를 언급할 때 마다 꼭 따라 붙는 수식어가 있습니다. 뭡니까?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 얼마나 멋집니까? 여러분의 이름 앞에 하나님의 사람 누구라는 이 수식어가 꼭 따라다닐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 엘리사에게 이런 닉네임이 붙었을까요? 엘리사가 살고 있던 당시는 정치적으로는 기본이 무너지고 좌표를 상실한 시대입니다. 그래서 내가 어느 편에 서면 내게 유리할까? 어떤 라인에 설 것인가? 기웃거리고 영적으로는 하나님보다 우상숭배를 해야 더 유리할 것 같아 모두가 다 우상숭배에 빠졌던 시대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엘리사 선지자는 철저하게 하나님 편에만 서 있는 사람입니다. 누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누가 어떤 라인을 선택했다고 해도, 엘리사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편에만 서 있는 사람은 결코 두렵지 않습니다. 겁날게 없고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엘리사의 스승이었던 엘리야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바알 우상을 섬기고 아세라 우상을 섬기는 선지자 850명과 갈멜산에서 대결할 때도 엘리야가 철저하게 하나님 편에만 서 있었기에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영적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겁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노예 해방 문제로 남북 전쟁을 할 때, 전쟁이 치열하게 진행되다가 서서히 링컨이 이끄는 노예를 해방해 주겠다는 북군이 수세에 몰리게 됩니다. 참모진들이 다 모여서 긴급회의를 하면서 링컨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각하 아무래도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되어주시도록 기도해야 할 것 같습니다.” 라고 하자 링컨이 유명한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달라 기도하기보다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설 수 있도록 기도하자.” 이게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누구 편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 편이냐가 중요한 겁니다. 이게 숭고한 신앙입니다.


2차 대전 노르웨이는 중립을 선언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중립 국가는 공격을 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독일의 히틀러가 전쟁 막바지에 이성을 잃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노르웨이까지도 공격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때마침 어느 목사님께서 좀 멀리 살고 계신 성도님의 심방을 갔다가 저녁 때 돌아와야 하는데 갑자기 독일 공군이 무차별 공습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그 성도의 집에서 식구들과 함께 뜬 눈으로 날 밤을 세웠습니다. 밤새도록 여기저기서 폭격을 가하니까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침이 되어 공습이 끝났는데 그 집에 초등하교 2학년 쯤 되는 딸아이가 있는데 이 얘는 그 날 밤 아주 푹 자고 기지개를 펴고 2층에서 내려오는 겁니다. 목사님이 궁금하여 묻습니다. “얘야 너는 독일군의 공습이 밤새도록 포탄이 떨어지는데 무섭지도 않더냐?” 이 아이가 대답하기를 “하나님께서 안 주무시고 지켜주신다고 했잖아요. 하나님이 안 주무시면 되었지 나까지 안 잘 필요가 있나요?” 


다윗은 시118:6에서 이렇게 힘찬 선언을 합니다. “주님은 내 편이시므로 나는 두렵지 않다. 사람이 나에게 무슨 해를 끼칠 수 있으랴?”(시118:6) 여러분 이 역동적인 믿음을 가지고 사회 현장에 나가서 담대하게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처신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리더십의 선구자요 권위자인 잔 멕스웰은 우리가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아주 실제적 방법을 네 가지로 소개합니다.

①하나님께서 우리의 문제를 보고 계신다는 확신을 가지라

하나님은 지금도 내 상황, 내 처지, 내 형편을 보고 계심을 확신하는 이아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②두려움을 대처할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구하라.

기도하면 용기와 이길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③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해주실 것을 바라라 어떤 경우에는 기적으로 풀어야 한다.

지금은 그 어떤 때보다 기적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엘리사를 시리아 군대가 완전히 포위했지만, 하나님이 기적을 행해주시니까 한 순간에 그들이 혼비백산하여 도망합니다. 저는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를 억압하고 있고 우리를 얽어 메고 우리를 짓누르고 있고 우리를 못살게 하고 우리를 핍박하는 모든 주변의 세력들을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해결해 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④성령 충만함을 계속 받아야 한다. 성령님은 두려움이 영이 아니라 평안의 영이시다.

성령님은 두려움의 영이나 불안의 영이 아닙니다. 우리로 하여금 걱정하게 하지 않습니다. 염려하지 않게 하십니다. 오히려 두려움의 영을 몰아내시고 우리 가슴에 평안을 주십니다. 평정을 주시고 초연함을 주십니다. 그리고 용기를 주십니다. 성령님은 두려움에 맞설 수 있는 용기를 주십니다. 모든 좋지 못한 환경이나 불리한 상황에 위축되지 않게 하십니다. 하나님 편에 설 수 있는 용기도 주십니다. 오늘 이 아침 나를 가로막고 있고 나를 얽어 메고 있고 나를 성장하지 못하게 하고 나를 발전하지 못하게 하는 두려움의 영에서 해방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맙시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굳세게 하시며, 우리를 도와주시며, 그의 의로우신 오른손으로 우리를 붙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환경과 사람을 의식하지 마세요. 하나님을 바라보고 숫자의 억압에서 자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편에 서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평안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목포하늘비전교회
글쓴이 : †^머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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