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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눅22:31-34 * 베드로의 실패와 회복엔 이유가 있다. ➀

눅22:31-34   베드로의 실패와 회복엔 이유가 있다.➀

 

세계적인 부자 가운데 록펠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석유사업을 해서 거부가 된 사람입니다. 그는 구약성경 창세기를 읽으며 생각했습니다. 노아가 방주의 방수를 위해 역청을 사용하였으며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도 역청을 사용하였다면 중동지방에는 많은 석유가 묻혀 있을 거다. 역청이란 석유를 정제해 내고 난 뒤에 남게 되는 찌꺼기인 아스팔트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역청이 있다는 것은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는 성경을 믿고 중동에 석유시추를 시작했고 대성공을 거두어 세계최대의 석유재벌이 되었습니다. 그의 나이 43세에 미국의 최대 부자가 되었고 53세에 세계 최대 갑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2년 후 55세에 불치병으로 1년 이상 살지 못한다는 사형 선고를 받게 됩니다. 최후 검진을 위해 휠체어를 타고 가면서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겼습니다. 조금 후 시끄러운 소리에 정신을 차리게 되었는데 입원비 문제로 다투는 소리였습니다. 병원 측은 병원비가 없어 입원이 안 된다고 하고 환자 어머니는 입원 시켜 달라고 울면서 사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록펠러는 곧 비서를 시켜 병원비를 지불하고 누가 지불 했는지 모르게 했습니다. 얼마 후 소녀가 회복이 되자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록펠러는 얼마나 기뻤던지 나중에는 자서전에서 그 순간을 이렇게 표현 했습니다.

"저는 살면서 이렇게 행복한 삶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 때 그는 나눔의 삶을 작정합니다. 그와 동시에 신기하게 그의 병도 회복되어졌습니다. 그 뒤 그는 98세까지 살며 많은 기부와 선한 일에 힘썼습니다. 나중에 그는 회고합니다. “인생 전반기 55년은 쫓기며 살았지만 후반기 43년은 행복하게 살았다.”

 

 

이 록펠러라는 사람에게 중년에 그런 아픔과 실패가 없었더라면 이 세상에서 그런 역할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아픔과 실패는 황금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때로 실패가 축복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느 장로님의 이야기입니다. 큰 사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장로이면서도 하나님과 별로 친밀하지 못했습니다. 직분도 잘 감당하지 못하면서 주일날이면 예배가 끝나기가 무섭게 일터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각종 동창회다, 무슨 단체다 하는 곳에 열심히 돈을 내면서 쫓아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부터 회사가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백방으로 뛰어다녀 보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 회사는 부도가 나서 문을 닫았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사람도, 거래처도, 친구도 다 떨어져 나갔습니다. 결국 이 사람은 혼자만 남았습니다. 그때 장로님이 배신감과 좌절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이 장로님이 빈손으로 기도원에 들어가 금식기도를 하면서 큰 은혜를 받고 크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이런 것입니다. “나는 고난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크게 깨달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세상과 사람들과 멀어지니까 하나님과 가까워진다는 사실입니다.”

참 비싼 돈(수업료) 내고 배운 것입니다. 이 장로님에게 이런 위기가 없었으면 그의 신앙은 계속해서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 불행이, 실패가, 좌절이, 큰 질병이 말할 수 없는 은혜를 줄 때가 있습니다.

 

 

베드로의 실패엔 이유가 있다.

 

 

베드로의 실패도 후에 큰 교훈이 됩니다. 여러분, 누구나 실패에는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던 어부 베드로에게 어느 날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이 날은 밤새도록 고기잡이를 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기분 좋지 않는 날이었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주님 찾아오셔서 그의 배를 빌려 강단 삼아 해변의 무리에게 말씀을 전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5:4) 주님 말씀에 베드로가 순종할 때 그물이 찢어질 만큼 물고기가 두 배 가득하게 잡힌 기적을 베드로는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 날의 고백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5:5) 그 고백을 들으신 주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초청하십니다. 이 초청 앞에 베드로는 쉽지 않은 결단이었지만 시원하게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는 3년의 시간 속에서 예수님으로부터 많은 말씀을 배웠고 기적을 보고 체험도 했습니다. 때로는 믿음이 없다고 책망도 듣기도 하고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다.”라는 심한 꾸중도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3년 동안 뒤돌아서지 않고 주님을 잘 따라다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마지막 만찬 자리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나서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26:33) 이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34) 그러자 베드로는 더 힘주어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35) 호언장담한지 몇 시간 후에 그는 예수님을 철저히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저주하며 맹세까지 하며 부인했습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예수님을 잘못 믿었을까요? 어영부영 믿어서 주님을 부인했을까요? 그는 거짓 없이 주님을 열심히 믿고 따랐습니다. 정말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던 사람입니다. 주님을 향한 열정이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위대한 신앙고백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파도치던 물 위를 걸었던 사람입니다. 우리들보다 더 많은 기적을 보고 체험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고 믿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3년 동안 함께하며 배웠던 사람입니다. 그는 대단한 열심 있는 제자였습니다. 절대로 미지근하게 믿거나 어영부영 하지 않았던 예수님의 수제자였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왜 예수님을 부인했을까요? 그의 실패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1. 베드로는 자기 자신을 몰랐습니다.

 

 

그는 자기가 사람 낚는 어부의 사명이 있는 줄, 예수님의 제자인 줄은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도 알았습니다. 문제는 자신이 얼마나 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고, 주님을 위해 헌신했고,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였지만, 자기의 확신과 고백과 상관없이 자기가 무기력하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앞에서 엄청난 장담을 하다 실패를 맛보게 된 것입니다. 막14장 29절입니다.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 현대어 성경 번역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비록 다른 사람들이 다 주님을 버린다 할지라도 저는 절대로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요한은 주님을 버릴지라도, 야고보가 주님을 버릴지라도, 안드레는 주님을 버릴지라도 그러나 나는 결단코 절대로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비교의식 속에서 나온 호언장담입니다.

여러분, 비교의식이 강하면 열등감 아니면 우월감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열등감이나 우월감 이것은 둘 다 깊은 병입니다. 자기 자신을 항상 열등하게 생각하는 것도 큰 병이고 반대로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큰 병입니다. 베드로는 우월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가장 먼저 주님을 버리고 부인했습니다.

베드로의 이런 모습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내 시간을 드리며, 물질을 드리며, 심지어 나의 생명도 드린다고 찬양하고 고백하지만 내 삶의 현장에서 그렇게 살지 못한 우리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천하를 얻은 것처럼 몸을 불사르면 주님께 헌신할 때, 평생을 그렇게 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영적 침체에 빠져 힘없는 자신을 보고, 마음뿐 행동으로 옮길 능력이 없는 자신을 보면서 우리는 내 안의 베드로를 보곤 합니다. 나만 잘하고 의롭고 거룩한 것처럼, 평생을 그렇게 살 것처럼 남을 판단하고 쉽게 장담하였지만 신앙의 골짜기에 내려가 보니 내 입으로 판단한 그들처럼 내가 그렇게 살고 있고 내가 장담했던 말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현실은 정 반대에 서 있는 자신을 보면서 우리도 베드로처럼 되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한국의 CEO 55인의 선택 좋은 인재 나쁜 인재”란 책에서 구본걸 LG 패션 사장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나치게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는 자는 실패한다.”고 했습니다. 자신감은 좋은 것이지만, 자기 자신을 모르는 지나친 자신감은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실패했습니다. 참으로 믿지 못할 것이 인간이요 곧 자신입니다.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여러분, 자신의 무능함을 깨닫고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임을 알고 겸손히 은혜를 구하고 은혜로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실패 이유는 기도하는 일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깨어서 기도하는 일에 실패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도 광야에서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으셨으며, 공적인 사역을 진행하실 때도 틈만 나면 기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시고도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고 십자가 위에서 고통 중에도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은 항상 깨어서 기도함으로 모든 사역을 감당하셨고 아버지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며 십자가의 수난을 감당해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마4:11)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눅22:43)

그러나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깨어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깊은 슬픔과 피곤하다는 이유로 기도하지 않고 잠을 잤습니다.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고 재차 당부를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깨어 기도하는 일에 실패하였고 결국 주님을 부인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실패는 기도의 실패였습니다. 예수님이 죽는다는 말씀으로 인해 깊은 슬픔과 육체의 피곤함 때문에 기도하지 못했고 결국 시험에 들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런 때일수록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더욱 깨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하지 않으면 지금 내가 만난 고난을 이겨낼 방도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해야 시련과 시험을 이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가 있는 줄 믿습니다.

 

내 안에 주를 향한 원함이 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시면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내 안에 주를 위한 고백이 있지만 하나님이 은혜 베풀지 않으시면 행할 능력이 나에게는 없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이 사실을 인정하고 우리 연약함을 자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자기 마음은 예수님을 부인할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장담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부인했습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은 내 힘과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와 도우심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겸손히 구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뜻을 정하고 힘내어 깨어 기도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미지근한 신앙생활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원래 적극적이고 열정이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는 미지근하고 소극적인 신앙생활로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왜입니까? 생명의 위협 때문에,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적극적이고 뜨거웠던 신앙생활이 소극적으로 미지근하게 변하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빨리 그 이유를 찾아 고쳐야 합니다. 베드로의 실패의 이유는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좇아"(눅22:54)가는데 있습니다. 베드로는 처음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는 무슨 일에든지 앞장섰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달라진 것입니다. 적극적인 자세에서 소극적인 자세로 변한 것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열심이 식어진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 주님을 만나면 주님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나면 첫사랑이 식어지면서 주님과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주님을 안 따라가는 것은 아니지만 교회에서 일하는 것이 귀찮기도 하고 이런 저런 이유와 변명으로 주님과의 간격이 조금씩 벌어지고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너무 가까이 따라가면 손해를 본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항상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려 합니다. 언제 주님이 우리에게 간격을 두고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주님과의 간격이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세상과 가까워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애굽 왕 바로가 모세에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되 애굽으로부터 너무 멀리 가지 말라는 협상안을 내 놓았습니다. 모세는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많은 성도들은 그 협상안을 받아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도 모세처럼 과감히 거절해야 합니다. 그래야 실패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제는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고 하나님을 최대한 가까이 하는 뜨거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4.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눅22:61,62절에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잡히시기 전에 베드로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막14:30)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이라는 시간과 “세 번 부인할 것”이라는 횟수까지도 정확하게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 때에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막14:31)라고 말하며 주님의 말씀을 귀 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기에 결국에는 주님을 부인하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세 번째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그 순간에 주님의 눈빛과 마주치며 주님이 그에게 하신 경고의 말씀이 생각이 났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로인해 넘어졌습니다. 우리는 들은 말씀을 모두 기억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나와 관련이 있는 말씀만큼은 반드시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누구보다도 사랑하던 위대한 주님의 수제자였지만, 주님이 잡히시던 그 밤에는 주님을 세 번 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며 실패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왜 그는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실패자가 된 것입니까? 언제 우리도 베드로처럼 실패합니까?

자신이 얼마나 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지 못할 때, 기도하지 않을 때, 미지근하고 소극적인 신앙생활로 주님과 간격을 두고 멀찍이 따라갈 때,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지 않고 무시할 때에 실패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신앙의 승리를 위해 우리 연약함을 인정하고 주님의 은혜를 날마다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깨어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함으로 하나님께 최대한 가까이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간격을 두지 마시고 주신 말씀 부여잡고 이기는 성도들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목포하늘비전교회
글쓴이 : †^머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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