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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후12장1-10 * 약함의 은혜

고후12장1-10  약함의 은혜

 

산부인과 의사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어릴 때부터 아주 부유한 집에서 성장했고, 또 신앙이 좋은 가정에서 성장을 했기 때문에 세상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넉넉함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또한 얼마나 예뻤는지 젊을 적에는 저 처녀가 어느 남자와 결혼을 하느냐? 하는 것이 그 동네의 관심사가 될 정도였습니다. 피아노와 오르간 연주솜씨 또한 아주 뛰어나서 교회반주를 30년 동안 하신 분입니다. 거기에다 찬양은 또 얼마나 잘 부르는지, 차를 타고 가면서 3시간 정도를 찬양과 노래를 해도 지치지 않을 만큼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고 기뻐합니다. 거기다가 남편도 의사입니다. 그 권사님은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연히 교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그 권사님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생겨났습니다. 아들이 둘이 있었는데 이 아들들이 몹시 방황을 합니다. 권사님은 부모의 뒤를 이어서 두 아들이 다 의사가 되기를 바랐지만 그 아들은 부모의 뜻을 거역합니다. 그리고 방향을 잡지 못하고 방황을 하는 것입니다. 이 권사님이 아무리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해도 이 자식들만큼은 권사님의 뜻대로 되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 자신의 건강이었습니다. 아직 60이 되지 않은 나이에 류마치스 관절염으로 인해 밤마다 잠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앉기는 앉아도 혼자서 일어서지도 못합니다. 남들이 부축을 해주어야 겨우 일어났습니다. 이 권사님은 젊었을 때 얼마나 교만했는지, 웬만한 사람은 사람 취급조차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젊었을 때에는 교회에서도 어떤 의견이 나오면 매사 부정적인 말을 하면서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들들을 통해서 깨우치시고, 또 그 권사님의 건강을 통해서 깨우치셨습니다. 자신이 아무리 하나님 앞에 기도해도 응답해 주시지 않는 그 기도제목을 통해서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아들들과 자신의 병을 통해서 모난 성격이 다듬어 지게 되었습니다. 교만한 태도가 고개를 숙이는 겸손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자신이 우습게보았던 사람들의 도움이 없이는 앉았다가 일어나지도 못하는 자신의 처량한 모습을 깨닫게 됨으로 자신의 연약함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그저 자신이 좋아서 불렀던 찬양이 이제는 가사 한절 한절이 마치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표현해 주는 것 같아 찬양을 드리면서도 남다른 은혜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느 해, 교회 수련회에 참석하신 이분은 자신의 뜻대로 기도해도 들어주지 않는 하나님의 뜻은 자신의 교만을 깨우치려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계획하심이라는 것을 깊이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어나 걸으라”는 찬양을 드리면서 눈물을 흘리게 되었습니다.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평안히 길을 갈 땐 보이지 않아도 지치고 곤하여 넘어질 때면 다가와 손 내미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류마치스 때문에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자신의 몸을 생각하며 그 병을 통해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을 영적으로 깊이 깨달았습니다.

 

깨닫는다는 것이 얼마나 값진 은혜인가를 알게 해주는 간증입니다. 사실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은혜 아닌 것이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깨닫기 전까지는 은혜가 은혜로 인정되어지지 않고 고백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역사상 예수님의 제자 중 가장 위대한 제자인 바울도 자신을 괴롭히는 육체의 가시에 대해 깨닫게 되자 기뻐하고 감사하며 자랑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깨달음이 은혜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도바울에게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육체의 가시를 안질 아니면 간질로 봅니다. 그는 질병으로 인해 너무 괴롭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작정하고 거두어 달라고 세 번 간절히 구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왔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9) 육체의 가시가 제거된 응답이 아니었습니다. 병이 고침 받은 응답이 아닙니다. 그대로 남아 있어 죽을 때까지 계속 그를 괴롭힐 것이라는 응답이지만 그는 크게 기뻐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응답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었고 그 뜻을 충분히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알고 보니 자기를 괴롭힌 가시는 의미가 있는, 사명이 있는 가시였습니다. 깨닫지 못할 때에는 고통만 주는 가시였는데 깨닫고 보니 고통을 주는 육체의 가시가 은혜이고 자신의 약함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1. 교만을 막아주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교만해질 소지를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가문이 좋습니다. 8일 만에 할례를 받은 자로서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의 사람이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당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가말리엘 제자이며 율법에 흠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그는 훌륭한 가문과 철학과 문학과 뜨거운 신앙을 가진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에도 하나님의 계시를 많이 받았습니다. 얼마든지 자랑하고 자고해질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자만하지 않게 하려고, 교만을 막아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하기 위해 육체의 가시를 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선한 뜻을 알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농부가 농사를 지을 때 햇볕만으로는 농사가 되지 않습니다. 비바람이 있어야 뿌리를 깊이 내리듯 찌르는 가시 또한 우리 인생에게 필요로 합니다. 자랑과 교만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가시는 저주가 아니라 은혜와 축복인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약점이나 아픔 하나 정도 가지고 산다는 것도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이 나를 겸손하게 만들어 준다면 약점 하나 가지고 이 세상 살만하다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교만이 얼마나 나쁘고 무서운 것입니까? 교만이 있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머물지 않습니다. 떠나고 대신 그 자리를 패망과 심판이 채우게 되는 것입니다. 사단도, 아담과 하와도 모두 교만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의 후손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하나님 앞에서 바벨탑을 쌓으려 합니다. 교만이라는 무서운 죄의 성향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도바울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래서 교만을 막아주기 위해 겸손하게 살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육체의 가시라는 안전장치를 그의 육체에 두신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고 나니 고통을 주는 육체의 가시가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상황은 그대로입니다. 질병도, 통증도 그대로입니다. 오직 달라진 것은 깨달음을 통해 상태와 상황에 대한 생각과 해석의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삶 속에서 귀한 깨달음이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2. 나로 기도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 ‘가시’입니다. 나의 힘으로도 능으로도 안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찾게 되고 도움을 구하게 됩니다. 나로 기도하게 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는 것이 ‘가시’입니다. 사도 바울도 가시 때문에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가시는 우리를 항상 기도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약5:13)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1:9)

 

존 번연(John Bunyan)은 “시험과 고난은 우리로 하나님을 찾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마틴 루터는 “시련이 없고 모든 것이 순조로울 때가 가장 위험한 시련이다. 왜냐하면 그때 인간은 하나님을 망각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시련 없을 때가 가장 무서운 시련입니다. 왜냐하면, 시련이 있을 때에는 늘 하나님을 찾고 깨어지는데 시련이 없으면, 배부르면 하나님을 잊어버릴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기도 안하는 사람에게 기도를 시키는 유일한 길은 ‘고통의 가시’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괴롭습니다. 그것이 마음의 괴로움이든 육체의 괴로움이든 생활의 괴로움이든 괴로움을 당하면 기도 안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고통스러운데 기도 안 할 사람 이 있겠습니까? 강퍅한 사람, 고집을 부리는 사람은 잠시 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성도라면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고통이 다가오면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싸인 인줄 아시고 즉시 무릎 꿇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그리스도의 능력을 머물게 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12장 9절에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은혜는 병들었다가도 나은 것, 실패했다가도 성공하는 것, 내가 원하는 바가 성취되는 것, 주로 이런 은혜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은혜의 사람 사도바울이 말하는 은혜는 고린도전서15장 10절에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주님을 위해 많이 수고한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그리고 역설적이지만 차원 높은, 성숙한 은혜를 깨닫고 본문을 통해 말하고 있습니다.

약함이 강함이고 약함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고통을 주는 가시까지도 은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육체의 가시를 은혜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9) 너에게 허락한 육체의 가시가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는 비로소 깨닫고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한 발자국 더 나아가 강하고 좋은 것들은 자신의 자랑거리가 될 수 없고 약한 것들이 자신의 자랑거리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좋고 강한 것을 자랑합니다. 유익이 없습니다. 약한 것을 자랑하는 것이 유익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강하고 좋은 것들 분명 주님께 받은 은혜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 이런 받은 은혜와 능력이 계속 내게 머물게 하는 은혜가 큰 은혜입니다. 은혜가 계속 은혜 되게 하는 은혜, 계속 머물게 하는 큰 은혜는 강함에 있지 않고 자신의 약함에 있다는 사실을 사도바울은 깨달고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9,10)

 

베토벤의 위대한 교향곡들은 그가 귀머거리가 된 이후에 완성이 되었습니다. 제2의 성경이라고 불리 우는 ‘철로 역정’을 지은 존 번연, 그는 눈썹에 곰팡이가 필 정도로 음침한 감옥 속에서 그 약함 가운데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최초의 독일어 성경, 독일어 번역 성경은 1517년에 마틴 루터가 공민권(참정권)을 박탈당한 채 원수의 눈을 피해서 연약함 가운데 발트부르크성에서 번역해 낸 작품입니다. 일생 동안 7000편 이상의 주옥같은 찬송시를 썼던 화니 제인 크로스비, 그는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약한 가운데 위대한 찬송시를 만들어 내었던 것입니다. 기독교가 자랑하는 불후의 명작 ‘기독교강요’ 그것은 바로 움직이는 병원이라는 별명을 가진 존 칼빈이 연약함 가운데서 기록해 낸 위대한 작품입니다. 모두 약함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우리 약함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부여받은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정신과 전문의인 에릭 린드맨(Erick Lindman)박사는 고난당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그 결과 고난당한 사람들의 85%는 자신의 고난이 결국 축복이 되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첫째, 고난 때문에 나쁜 습관을 고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담배 자꾸 피는 사람 아무리 피지 말라고 해도 피는데 암이 걸리면 끊어 버립니다. 고난을 통해서 나쁜 습관을 버리는 것입니다. 둘째, 고난으로 가정과 신앙, 사랑을 회복했다는 것입니다. 고난당하기 전에 가정을 등한이 하고 허랑방탕하던 사람이 고난당하고 매를 맞으니까 정신이 번쩍 들어서 회개하고 가정으로 돌아오고 정신을 차린다는 것입니다. 셋째,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 인생이 새로워졌고 원망과 불평을 하던 삶이 감사하는 삶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고난스러우니까 고난을 피하기 위해서 회개하고 자복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고 노력해서 행복을 발견하고 감사를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는 우리의 약함을 고통으로만 보고 생각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약함은 하나님의 강하게 하심이 역사하는 통로입니다. 약함은 하나님의 능력이 머무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한 육체의 가시는 나에게 있는 힘들 중 필요 없는 힘을 빼어 나로 겸손하게 만들고 나를 기도로 초대하여 나로 기도하게 만들며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계속 머물게 해 주는 것입니다. 이제는 달면 기뻐하고 감사하고 쓰며 뱉고 불평하는 미숙한 성도가 아닌 가시도 약함도 부족함도 감사하며 자랑하는 성숙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도에게는 죄악만 뺀 나머지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목포하늘비전교회
글쓴이 : †^머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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