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6:4 - 아비들아! - 김남준 목사(열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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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
"아비들아"
유대인들의 교육은 그 어머니의 영향이 지대합니다. 그래서 아이의 아버지가 이방인이어도 어머니가 유대인이면 그 아이는 유대인으로 받아줍니다. 후천적인 교육이 선천적인 핏줄보다 훨씬 더 무섭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아버지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가정에 있어서 그 가정을 세워가고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올바르게 교육하는 궁극적인 책임을 아버지가 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오늘날은 자녀들이 아버지의 얼굴을 마주 대하기도 힘든 사회입니다. 그러나 비록 아버지들이 실업자처럼 매일 가정에 앉아서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을 수는 없는 형편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역시 한 가정을 바르게 세워야할 책임을 가장에게 물으십니다.
부모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본다고 해서 아이들이 올바로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교육이라고 하는 것은 내면의 세계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흘러나와 자녀들의 마음속에 흘러 들어가게 될 때 진정한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서는 가장들에게, 남편에게 맡겨주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바쁘다는 핑계로 가장의 책무를 외면하는 남편들, 아비들에게 일침을 주고있습니다. 아버지가 독실한 신앙인이 되는 것이 정상적인 가정으로 돌아가는 첩경입니다.
오늘날은 아내에 의해서 억지로 끌려나오는 신앙 생활이 대부분 남성들의 신앙을 대변하는 그림이 되고 있습니다. 어떤 가정에서는 부인이 남편보다 신앙적으로 우월하기 때문에 아예 남편의 자리를 점유해버리는 사태도 일어납니다. 이런 것들은 잘못된 것입니다.
부인이 더 신앙에 열심이 있다고 할지라도 끊임없이 남편으로 하여금 가장의 주권을 행사하게 하고, 남편에게 남편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어서 그 남편이 가정의 모든 제도들을 바르게 세우고 원리들을 바르게 세우고 자녀들을 바르게 교육하여야 할 영적인 책임과 부담을 지고 있다는 것을 수시로 깨우쳐 줌으로써 남편이 그 일들을 해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지혜로운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너희 자녀를"
성경은 '아비들'을 불러내면서 '너희 자녀를' 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자녀가 아니라 너희 자녀라고 말하는 것은 부모들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아이들 중에서 특히, 자기의 몸에서 태어난 아이를 향해서 특별한 의무를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자식된 자들이 모든 이 세상의 노인들이 아니라 자기의 부모를 향하여 특별한 의무를 지고 있듯이, 또한 부모도 자기 몸에서 태어난 자식들을 향해서 매우 특별한 의무를 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이를 높은 지위에 올려놓지 못하거나 훌륭한 대학에 못 보낸 것은 책임이 적습니다. 그러나 좋은 신앙의 사람으로 만들어 놓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부모가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이 끊어질듯 끊어질듯 하면서도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면면히 이어진 것은 탁월한 가정교육의 덕택이었습니다. 부모를 통해서 아이들의 마음속에 철저히 신앙이 들어가도록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사십 세가 되어 세상에서 배울 만큼 배웠고, 최고 학부를 나왔고 말과 행사가 다 능하여서 어디서든지 지도자의 행세를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는데 민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도 즐겁게 여겼습니다. 누가 그런 가치관을 집어넣어 주었습니까? 어머니였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정말 감화를 잘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그 부모를 통해서 부모로부터 자녀들에게 신앙이 물려지도록 이 법칙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어떨 때 가장 그 신앙이 깊이 심겨지는가 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왜곡되고 잘못된 것들이 어린 시절 심겨지면 삐뚤어진 상이 되어서 영원히 그 인생의 시야를 좌우합니다. 그런 것들을 바르게 잘 가르치라고 부모의 신앙을 보고 어린아이에게 유아세례를 주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자식이 완전히 믿음에서 파산하고 나면 그 부모의 인생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든지 성공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 아비들에게 자녀를 향한 특별한 의무감들을 끊임없이 고취 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주일학교를 보면서 늘 느끼는 것이 부모가 그 아이의 학교생활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것의 반만 신앙생활에 관심을 갖는다면 그 영혼이 정말 놀랍게 변할 것이란 사실입니다.
자녀들의 인생은 부모 인생과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자녀들이 장성해 결혼할 때까지 그 인생은 부모와 결탁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베냐민을 요셉 있는 애굽으로 올려보낼 때 유다가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와 이 아이는 생명이 결탁되었나이다"라고 합니다. 부모와 자식은 생명이 결탁된 것입니다.
자식이 신앙을 버리고 신앙을 떠나서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서 인생을 망치게 되면 자기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던지 하나님 앞에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겁니다. 자식만 바르게 잘 키워서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어 놓아도 그 사람의 인생은 성공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이 없이 하나님 앞에 실패한 삶을 살았던 그 사람 밑에서 신앙적으로 올바르게 자란 아들이 나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식이 올바르게 자라면 부모로서는 일단 신앙에 있어서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철저하게 그 아이를 위한 심각한 의무를 부모에게 부여했을 뿐만 아니라 절대적인 권리도 주셨습니다. 율법을 보면 부모에게 대항하고 부모를 치는 자는 죽여버리도록 명령했습니다. 율법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우리 부모님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에 대해서 물려받은 그 권한과 권세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권세와 권한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충분히 보이시기 위해 이런 중한 징계를 내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부모가 자녀를 권세있게 다스리고 치리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우선 자녀들을 장악해야 합니다. 잘 가르치던 못 가르치던 그것은 나중 문제고 우선은 자식을 부모가 손에 넣을 수 있어야 합니다.
고매한 신앙의 인격이 없어도 일단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커다란 범죄인가 하는 것을 철저히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그 다음에 교육이 됩니다. 요즘 가장 커다란 위기는 부모가 자녀들에 대해서 모든 권위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벗어났으면 지금부터라도 손안에 넣어야 합니다. 완력으로 손안에 넣던지 아니면 감화를 시키든지 어떻게 해서든지 손안에 넣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부모의 손아래서 복종하는 아이로 만들어야 합니다.
"노엽게 하지 말라"
그러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소극적인 명령 하나와 적극적인 명령 하나입니다. 그 소극적인 명령은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칫 오해하면 아이들에게 무조건 잘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의미는 전혀 아닙니다. 아이들을 때리지 말아라 아니면 징계하지 말아라 야단치지 말아라 그렇게 말하지 아니하고 노엽게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어떤 때 아이들이 부모에 대해서 노여운 마음을 갖게 됩니까?
우선 첫째는 징계가 올바르지 못할 때입니다. 징계가 올바르지 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징계를 가하는 것, 혹은 잘못한 것이 적은데 큰 징계를 가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징계의 정도가 자기 잘못한 것을 이미 초과했다고 생각되어 속에서 반감이 생기는 겁니다.
그러니까 징벌을 줄 때는 벌을 줄 것인가 용서할 것인가를 속히 결정을 해서 용서하려면 심각하게 충고한 다음에 확 용서해버리고 징계를 하려면 심각하게 한 다음에 그 잘못한 것에 비례하는 만큼 징계를 해야 합니다. 잘못한 것보다 과하게 혼날 때 그때 자녀들 속에서는 조금 잘못해서 미안한 의식까지도 다 사라집니다. 매가 사람을 방종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 자녀들이 부모를 향해서 노여워하게 되는 경우는 부모 자신은 그렇게 안하면서 나에게 그것을 강요할 때입니다. 문제는 부모 자신의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겁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이가 아무리 어려도 속에서 다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당장은 매가 두려워 아무말 없이 따를지라도, 유치원만 다녀도 벌써 속으로 다 옳다, 옳지 않다는 도덕적인 판단을 합니다. 더군다나 그 아이가 중학교 정도 올라가고 나면 몽둥이와 용돈은 그의 기계적인 복종은 받아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부모를 닮아야되겠다는 것은 받아낼 수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은 부모가 자식에게 너무 오랫동안 고통을 주는 경우입니다. 그러니까 부모의 잘못된 성품이나 생활 관습이나 습관이나 혹은 잘못된 사상이 자식들에게 너무나 많은 고통을 지속적으로 줄 때 자녀의 마음에 노여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부모가 하나님 앞에 책망 받아야 할 영역입니다. 자기 자식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부모들은 자식에게 그렇게 하고도 그것을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자식에게 그것은 잊어버려지지가 않고 오래도록 남아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주위에서 정말 이상적인 가정을 찾기는 너무나 힘든 일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가정이 회복되지 않는 한 우리 자녀들의 영혼도 진정한 회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 아비들을 향한 권고는 단순히 사랑의 명령이 아닙니다. 죽어가는 우리 자녀들의 영혼을 애끓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하나님의 절절한 마음인 것입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부모들이 소극적인 명령을 이행하지 않아서 자녀가 이같이 노여워하는 마음을 같게 되면, 적극적인 명령 역시 이행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본문은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라는 적극적인 명령을 아비들에게 주고 있습니다.
오직 교양과 교훈으로 양육하되, 그 교훈은 주의 교훈이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자녀들에게 올바른 신본주의적인 기독교 사상이 들어가도록 만들어 주는 것도 부모의 심각한 의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잘 먹이고 잘 키워서 아이가 성인이 되는 것만이 부모가 할 일이 아니라 그 아이가 올바른 사상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잘못된 사상을 섭취하지 않도록 바르게 양육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한 주의 교양과 훈계를 굳이 구분한다면, 주의 교양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내면적인 성숙에 관한 것이고, 훈계라고 하는 것은 객관적으로 드러난 신앙의 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의 교양으로 양육한다는 이야기는 무엇이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삶이고 하나님의 자녀된 몸가짐인가 하는 것들을 실제적인 삶 속에서 가르쳐주는 것이고, 이 훈계는 객관적인 기독교의 진리를 사람의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게끔 깊이 새겨주는 겁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이 세상 최고의 신학교는 어머니 무릎이다"라고 했습니다.
교양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삶의 덕 그리고 내면적인 그리스도인의 자질 등입니다. 그런 것들을 계속해서 삶 속에서 함양시켜주는 임무를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주셨습니다. 어린아이가 자라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쯤 되면, 그가 무엇을 믿고 어떤 신분의 사람이며, 또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을 위해서 어떠한 의무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들이 아이들에게 철저하게 교육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부모들이 자기의 자녀들을 어떻게 교육시키든지 거기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을 양육하는 방식과 철학으로 자녀들을 교육시켜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소한 우리가 사라지고, 그 아이가 우리의 입장에서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우리보다 나은 신앙을 소유하도록 돕는 것이 우리가 자녀를 교육하는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방법으로,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그 가정 속에서 다시 또 그런 자녀들이 출생하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더욱 견고해져 갈 것을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맺음말
무너진 교회 뒤편에는 반드시 무너진 가정의 신앙교육이 있습니다. 아이들의 신앙교육을 교회에만 맡겨서는 안됩니다. 이번 주부터 교회에서 뭘 배우고 왔으면 "무엇을 배우고 왔느냐고 물어보십시오.
그래서 그 아이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하나하나 늘어가는 것을 부모는 영어단어 하나 더 배워 가는 것보다 훨씬 더 기쁘게 생각함을 아이들에게 인식시켜 주십시오. 부모의 주된 관심사가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아이들의 마음속에 새겨질 때에 아이들도 그 신앙을 위해서 열심을 내게 됩니다.
세상이 뭐라고 하든지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합니다. 올바르게 아름답게 자녀를 교육하는 것이 돈을 벌고 이 세상에서 사는 것보다도 더 심각한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 양육의 사명이 우리 관심의 주제가 되어서 그 아이를 하나님 앞에 올바른 사람으로 키워가는 데에 마음과 정성과 기도와 눈물을 쏟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를 예수 믿게 만들어 주신 것은 우리에게 이 심각하고도 거룩한 사명을 부과하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그 심각한 의무를 충만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으로 감당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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