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 구원에 이르는 관문
고후 7:10
한 나라나 한 도시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할 곳이 있습니다. 바로 ‘관문’(關門)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신라시대부터 관문을 설치하여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했습니다. 지금도 전국 곳곳에 옛 관문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시대가 바뀌었지만 오늘도 관문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곳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인천공항을 들 수 있습니다.
이 관문에서는 우선 사람을 조사합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그 사람이 들어올 자격을 갖춘 사람인지 면밀하게 조사합니다. 다음으로 그 사람의 짐을 조사합니다. 짐 안에 마약류나 나라가 금하는 물품이 있지는 않는지, 무기가 있지는 않는지 면밀하게 조사합니다.
어쨌든 누구든지 어느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이 관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이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영적인 세계에도 관문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 4:17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천국이 가까이 오고 있으니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천국이 가까이 오고 있으니, 회개하여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회개가 천국에 들어가는 관문이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여기서 회개를 구원에 이르는 회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회개가 구원의 관문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회개는 구원에 이르는 관문이고, 천국에 이르는 관문입니다. 회개하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고, 회개하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회개란 무엇인가?
그러면 회개란 무엇일까요? 먼저 회개가 아니면서 회개라고 오해할 수 있는 것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반성 또는 뉘우침입니다. 마 27장을 보면 가룟 유다가 자살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은 30을 받고 자기가 3년간 모셔왔던 주님을 팔아넘겼습니다. 그런데 재판과정을 지켜보니까 사태가 자기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흘러갑니다. 유다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하고 총독에게 넘기는 것입니다.
유다는 그제서야 자기가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받은 돈을 도로 유다 종교지도자들에게 가져다주며 말했습니다.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뉘우친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는 양심의 가책을 견디지 못하고 목을 매어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반성 또는 뉘우침만으로는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회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죄의 고백입니다. 천주교에서는 ‘고해성사’를 합니다. 이 고해성사는 천주교가 오랜 세월 지켜온 일종에 전통이기도 합니다. 초대교회 시절 교부들은 이 회개라는 말을 라틴어 ‘파에니텐시아’ (paenitentia)라는 말로 번역해서 사용했습니다. 이 말은 ‘신의 은총으로 용서받는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시절 죄의 용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한 말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하나님을 대신한 교부들 앞에 와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교부들은 저들을 위해 기도해 주고, 죄 지은 것을 상쇄하기 위해 어떤 영적 훈련의 과제를 줍니다. 그리고 이것을 잘 이행했을 때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전통이 오늘까지 천주교에 이어져오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죄를 범한 교인들이 단지 신부나 사제에게 와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용서를 받았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 용서를 위해 신부나 사제가 명하는 영적 훈련의 과정을 완수했다고 죄 문제가 해결됐다고 믿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물론 이런 종교의식은 회개하는 일에 도움이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자체가 회개는 아닙니다. 자칫 이 고해성사가 참된 회개로 나아가는 길을 호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참된 회개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성경 원어로 회개라는 말은 ‘메타노이아’(metanoia)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변화’를 뜻하는 ‘메타’(meta)라는 말과 마음의 생각을 뜻하는 ‘노이아’(noia)가 합해진 말입니다. 그러니까 메타노이아라는 말은 마음의 생각이 변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속사람이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조셉 얼라인이라는 분이 쓴 [돌이켜 회개하라]는 책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당신이 ‘진짜 회개’로 ‘진짜 구원’을 받았다면 당신은 매사에 기쁘고 감사가 넘치며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일이 가장 행복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당신의 상태는 어떠한가? 감사보다 불평이, 기쁨보다 근심이, 사랑보다 미움이 더 많지 않은가? 성경을 읽는 것보다 다른 것들을 더 즐기고 있지 않은가? 기도하는 것보다 사람과 이야기하는 데서 더 위로를 받고 있지 않은가? 당신이 그런 상태라면, 당신이 받았다고 굳게 믿고 있는 ‘구원’을 다시 한 번 냉정하게 살펴보고 스스로 확증해보라!
당신의 마음을 깊이 살펴라. 하나님께서 당신을 철저히 다루실 때까지 쉬지 말라.
교회 다니고 세례만 받으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 교회 봉사 잘하고 직분자면 다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말씀은 듣고 알아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 회개했다고는 하지만 삶에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없는 사람! 당신은 아직 돌이키지 않았다!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하라!
그렇습니다. 회개는 내 마음 속에서 나를 짓누르는 죄의식을 털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내 앞에 닥친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속사람이 변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변하고, 내 마음이 변하고, 내 삶이 변하는 것입니다.
신학에서는 회개를 두 가지로 구분해서 설명합니다. 하나는 ‘칭의를 위한 회개’이고, 다른 하나는 ‘성화를 위한 회개’입니다. 여기서 칭의는 처음 예수를 믿고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함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다음으로 성화는 칭의 과정을 거친 뒤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예수를 닮아가며 성숙해져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 두 가지 과정 모두에서 회개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선 칭의를 위한 회개를 살펴보겠습니다. 행 2:38을 보면 베드로가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 받은 뒤에 아직 예수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그리고 행 3:19을 보면 베드로가 또 아직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도하며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그러니까 불신자들이 예수 믿고 구원 받는 과정에서 반드시 회개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하나님 믿지 않고 살았던 죄, 하나님 없이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서 살았던 죄를 회개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원죄’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칭의를 위한 회개는 원죄를 회개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칭의를 위한 회개를 통해서 구원의 관문에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은 성화를 위한 회개입니다. 일단 회개하고 구원의 관문에 들어선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회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롬 7:19-20을 보면 바울은 자신이 사도이면서도 예수 믿으며 겪어 온 연약한 삶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 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비록 우리가 구원의 관문에 들어서긴 했지만 연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 죄를 저지르며 삽니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자범죄’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성화를 위한 회개는 이 자범죄를 회개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성화를 위한 회개를 통해서 더욱 성숙해 지며 마지막까지 구원을 이루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는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우리가 회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회개는 우리 자신이 새롭게 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인격 즉 우리의 지(知), 정(情), 의(意)가 새롭게 변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선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회개는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데서 시작됩니다. 눅 5:8을 보면 주목할 만한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베드로가 고기잡이를 하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아직 잘 모르지만 직감적으로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자 눈이 열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지금까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이토록 뼈저리게 느껴보지 못했습니다. 자기는 법 없이도 살 사람처럼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죄인이라면 저 감옥에 수감되어있는 사람들 이야기로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 서니 갑자기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는 내가 지은 죄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깨달을 때 본격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요 16:8을 보면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면 우리 안에 성령이 임하시게 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임하시게 되면 우선 우리가 저지른 죄를 지적해 주십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것이 죄인 줄 모르고 살았던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우리 안에서 그것이 죄라고 지적하시고 책망하십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내가 지은 죄가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시 51:3에서 시인이 고백했던 것처럼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회개는 내 생각이 바뀌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도대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죄를 범하고 있는지 깨닫고 인정해야 합니다.
다음 감정이 바뀌어야 합니다.
회개는 마음의 통회로 절정에 이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르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죄 때문에 하는 근심을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저지른 죄를 깨닫게 되자 마음 속에 깊은 근심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깊이 했던 가장 대표적인 사람으로 다윗을 들 수 있습니다. 시 6편을 보면 다윗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1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난 뒤에 정말 큰 영적 두려움을 느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6-7을 보면 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다윗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저지른 죄를 낱낱이 깨닫고 난 뒤에 눈물로 통회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저지른 죄로 인한 근심 때문에 눈이 다 쇠할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회개는 내 감정이 바뀌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깊은 두려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저지른 구체적인 죄가 생각나서 하나님 앞에 근심하며 눈물로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행동이 바뀌어야 합니다.
회개는 행동의 실천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눅 19장을 보면 삭개오 이야기가 나옵니다. 원래 삭개오는 세리장으로 당시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고 살았습니다. 세금을 착복했고, 가난한 사람들을 힘들게 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가 달라졌습니다. 19:8을 보면 자발적으로 예수님께 이렇게 약속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바로 잡겠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새로운 사람으로 새롭게 살아가겠다는 것입니다.
몇 해 전에 개봉된 영화 [밀양]은 여러 가지로 우리 기독교 신앙을 돌아보게 합니다. 특히 우리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회개를 꼬집고 있습니다.
아이를 유괴해서 살해한 범인이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예수를 믿게 됩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합니다. 아이의 엄마가 범인을 찾아 면회를 왔습니다. 범인과 대화하면서 범인이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내심 용서해 줄 생각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범인이 예수 믿은 뒤에 달라진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아이 엄마가 왜 내 아이를 죽였느냐고 울부짖으며 따졌습니다. 이 때 범인이 놀라운 말을 합니다. “나는 예수 믿고 죄를 회개했기 때문에 용서 받았다. 나는 마음이 홀가분하다!” 그 말을 들은 아이엄마는 더 큰 충격을 받아 기절해 버리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회개는 내가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통회하며 회개 기도를 드렸다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일단락이 져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세상과의 관계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는 아직 해결할 문제가 남았습니다. 내가 죄를 저질러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혔다면 그들에게 배상하고 그들의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세상 법을 어겼다면 세상 법에 따라 죄 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죄를 반복해서 저지르지 않도록 우리 삶이 변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회개는 구원에 이르는 관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오며 저질러 온 그 모든 죄들에 대해 회개해야 구원의 길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믿으면서 연약하여 때로는 알고 또 때로는 모르고 저질러 온 죄들을 지속적으로 회개해야 구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데 회개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죄를 지적해 주실 때 우리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 그리고 우리가 저지른 죄에 대해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통회하는 마음을 주실 때 내가 저지른 죄 때문에 근심하게 되고 눈물로 참회할 수 있게 됩니다. 나아가 성령께서 용기를 주실 때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추천 설교 > 박봉수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험 당할 즈음에 고전 10:12-13 (0) | 2016.12.01 |
---|---|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자 히 5:7 (0) | 2016.12.01 |
여호와의 도호 14:9 (0) | 2016.12.01 |
신앙의 핵심을 배우자막 12:28-34 (0) | 2016.12.01 |
깨끗한 사람들 레 15:31 (0) | 2016.08.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