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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흘리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자 히 5:7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자

 

히 5:7

 

   지난 수요일부터 사순절(四旬節)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순절이란 말은 헬라어 ‘테살코스테’(tesalkoste)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즉 ‘40일 간의 기념일’이라는 뜻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날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매년 부활절을 뜻 깊게 맞이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모진 박해 속에서도 부활하신 주님을 맞는다는 생각으로 정성을 다해서 부활절을 준비했습니다.

   로마시대에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교회는 절기를 공식화하여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절기로 부활절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이 때 부활절 준비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논의하게 되면서 사순절 문제가 부각되었습니다.

   주후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교회는 사순절을 지키기로 했고, 그 후 구체적인 일정이 확정되어졌습니다. 바로 부활절 전 46일인 수요일부터 부활절 전날까지 주일을 뺀 40일 간을 사순절로 지키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순절의 시작일인 수요일을 회개하며 사순절을 시작한다는 뜻으로 ‘재의 수요일’로 지키게 된 것입니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전 세계교회들은 교파별로 나름대로의 전통 하에서 사순절을 지켜오고 있습니다.

   이 사순절의 핵심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내용은 부활하시기 직전에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참회하면서 정결한 몸과 마음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이 사순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우리 교회도 전 세계 교회와 함께 사순절을 지키고자 합니다. 그렇다고 따로 특별한 프로그램을 마련하지는 않았습니다. 늘 하던 대로 부활절 직전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만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가짐입니다. 우리의 신앙 태도입니다. 다른 때보다도 더욱 예수님을 깊이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깊은 회개를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금년 사순절 기간에 우리가 특별히 묵상하고자 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는 것은 쉽게 이해하기 힘이 듭니다. 예수님은 연약한 인간이 아닌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눈물을 흘리시며 우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는 것은 대체로 자신의 연약함과 무능함을 드러내는 행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고통과 슬픔에 대한 표현의 하나로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예를 들어 갓난아기는 엄마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웁니다. 어린이들은 견디기 힘든 아픔을 호소하기 위해 웁니다. 청춘들은 실연의 고통 때문에 웁니다. 성인들은 실패의 쓰라림 때문에 웁니다. 노인들은 과거를 돌아보며 후회의 눈물을 흘립니다. 또한 이별할 때,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어찌할 수 없는 큰 슬픔 때문에 울기도 합니다. 이 모든 눈물은 어찌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연약한 인간들이 흘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것이 없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시기보다는 울어야 할 이유를 그 놀라운 능력으로 제거하시면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셨습니다. 그것도 여러 차례 심히 우셨습니다.

   도대체 왜 우셨을까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셔야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는 시인 박목월의 ‘어머니의 눈물’이라는 시에서 예수님의 눈물의 이유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힌트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회초리를 들긴 하셨지만

차마 종아리를 때리시진 못하고 노려보시는

당신 눈에 글썽 거리는 눈물

와락 울며 어머니께 용서를 빌면

꼭 껴안으시던 가슴이 으스러지도록

너무나 힘찬 당신의 포옹

바른길 곧게 걸어가리라 울며 뉘우치며 다짐 했지만

또 다시 당신을 울리게 하는

어머니 눈에 채찍보다 두려운 눈물

두 줄기 볼에 아롱지는 흔들리는 불빛

 

   시인 박목월은 이 시에서 어머니의 눈물의 이유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자식을 사랑하기에 그저 바보처럼 울기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신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바보처럼 우셨던 것입니다. 물론 그 놀라운 능력으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길을 여셨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우리를 위해 우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딱한 사정과 문제를 해결해 주시면 되십니다. 그러나 그 문제 해결하시기 전에 우리를 보고 우셨습니다. 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눈물을 조금 더 가까이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신 장면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입니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심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신 첫 번째 이야기는 요 11장에 기록되어있습니다. 35절을 보면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고 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간다는 전갈을 받으셨습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시간을 지체하신 뒤에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예표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려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뜻대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놀라온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시신이 부패하여 냄새가 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무덤 안에 갇혀있는 죽은 나사로를 행해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놀랍게도 수의에 쌓여있는 나사로의 시신이 다시 살아서 걸어 나오는 것입니다.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큰 슬픔에 눈물짓던 유족들과 친지들이 크게 기뻐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렇게 될 줄 아셨습니다. 아니 이렇게 되도록 계획하시고 그렇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우실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울고 있는 유족들에게 울지 말아라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달래시면 되실 일이 아닙니까? 어차피 조금 뒷면 나사로가 살아나는 것을 볼 것이고 그러면 저들이 크게 기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눈물을 흘리셨을까요? 간단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병들 수밖에 없이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에 눈물 흘리신 것입니다.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에 눈물 흘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병든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을 곁에서 지켜보며 울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에 눈물 흘리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위해 눈물을 흘리십니다.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눈물을 흘리십니다. 연약한 육체 때문에 쉽게 병들고, 그리고 마침내는 죽어야 하는 모습을 보시며 눈물을 흘리십니다. 연약한 마음 때문에 쉽게 마음 아파하고, 실망하고, 좌절하는 모습을 보시며 눈물을 흘리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사순절 기간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눈물 흘리시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 눈물이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그 눈물이 우리의 마음을 적시고 우리의 상한 마음을 치유할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심

   예수님께서 눈물 흘리신 두 번째 이야기는 눅 19장에 기록되어있습니다. 41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던 때입니다. 새끼 나귀를 타시고 무리들의 환호 속에 감람산을 넘으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이 한 눈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왜 우셨을까요? 장차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이 저렇게 아름답고 웅장하지만 저들의 죄로 심판의 날이 다가와 성이 참혹하게 파괴될 그 날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셨다는 말은 ‘에클라우센’(Eklausen)이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눈물을 흘리며 우는 정도가 아니라 ‘갑자기 울음을 터트려 소리를 내어 통곡하는 행동’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메시야가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길가에는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입성하신다고 늘어서서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맞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은 통곡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을까요? 후에 제자들은 이 사건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에 기록해 놓았고, 후에 이 자리에 눈물교회를 지어 기념하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대로 약 40년 후 주후 70년에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에 쳐들어왔습니다. 3일 만에 토성을 쌓고 예루살렘을 포위했습니다. 당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모여든 사람을 포함해서 예루살렘 성에 100만 명이 넘는 수많은 사람들이 성안에서 기근과 질병으로 죽어갔습니다. 그리고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차례 예루살렘에 오셔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점점 하나님의 뜻과 어긋난 길로만 나아갔습니다. 이제 며칠 뒤 하나님의 아들마저 십자가에 다는 돌이킬 수 없는 죄까지 저지를 것입니다. 저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점점 더 커가는 것을 보시게 되자 통곡하시지 않을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리석고 우둔한 우리를 보시며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말씀을 들을 귀가 닫혀 있는 우리들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는 눈이 감겨있는 우리들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고집부리며 자기가 원하는 길로만 달려가는 우리들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사순절 기간에 우리의 어리석음 때문에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 눈물이 우리를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그 눈물이 우리를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기도의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심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신 또 다른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예수님께서 기도의 자리에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하나님께 올렸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대표적으로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생각나게 합니다. 마 26:37 이하를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자리에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를 드렸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께서 왜 기도하면서 눈물을 흘리셨을까요? 일차적인 이유는 십자가를 지실 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피하고 싶지만 온 몸으로 겪으셔야 했기에 고민하셨고 슬퍼하셨고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이 또한 이해하기 쉽지 않은 대목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야가 고난과 죽음 때문에 눈물을 흘리신다는 것은 쉽게 이해하기 힘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육체에 계실 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인간의 연약한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연약한 인간이 되셔서 죄 지은 인간을 대신해서 그 모든 고난과 죽음을 겪으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 고난과 죽음의 두려움을 인간을 대신해서 그대로 겪으셔야만 대속의 죽음이 될 수 있기에 연약한 인간처럼 다 겪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께도 두려운 일입니다. 그만큼 죄의 삯의 무게가 무겁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피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 앞에서 눈물을 흘리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보다 깊이 묵상해 보면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신 또 다른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를 위한 눈물입니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연민의 눈물인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원래 죄의 종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가 사망 안에서 우리에게 왕 노릇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치 노예가 사슬에 묶여 끌려가듯이 우리가 죄 사슬에 묶여 어쩔 수 없이 죄짓고 결국은 사망의 길로 끌려 갈 수밖에 없던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면서 이런 우리의 딱한 처지를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눈물을 흘리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사순절 기간에 우리의 죄와 죄의 종 된 안타까운 모습을 보시고 흘리신 예수님의 눈물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 눈물이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실 것입니다. 그 눈물이 우리의 죄를 깨끗케 씻을 것입니다.

 

   크리스찬 가수 가운데 최성수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이 부른 노래 가운데 [동행]이라는 곡이 있습니다. 이 노래 가사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누가 나와 같이 함께  울어줄 사람 있나요

누가 나와 같이 함께  따뜻한 동행이 될까~

   진정한 동행이란 내가 눈물 흘릴 때 함께 울어주는 것이란 말입니다. 나를 위해 울어줄 사람이야 말로 진정한 친구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친구는 내가 슬플 때 내 곁에서 나를 위해 함께 울어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정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나를 위해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계시다는 사실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의 연약함 때문에 오늘도 눈물 흘리고 계십니다. 내가 질병의 고통을 겪고 있을 때, 내가 마음의 상처 때문에 아파하고 있을 때 나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의 어리석음 때문에 오늘도 눈물 흘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세상을 향해 달려 나갈 때 나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의 죄 문제 때문에 오늘도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여전히 죄의 권세 가운데 쩔쩔매며 억눌려있는 나를 보시고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사순절 기간 예수님의 눈물을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