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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 구원의 여정 그 첫 번째 롬 5:1

칭의, 구원의 여정 그 첫 번째

 

롬 5:1

 

   구원은 간단해 보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는 말씀에서 보듯이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매우 복잡합니다.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는 말씀에서 보듯이 구원은 매우 길고 복잡한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성경을 깊이 연구하여 구원의 여정을 설명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의 길로 들어선 뒤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우리가 걸어가는 경로를 설명합니다. 우리 장로교에서는 크게 세 가지의 여정을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칭의(Justification)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여김을 받는 단계입니다. 대체로 이 과정을 거친 사람들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자신은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둘째는 성화(Sanctification)입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께 의롭다 여김을 받은 사람들이 의롭게 살기 위해 힘쓰는 단계입니다. 특히 이 땅을 살아가면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단계입니다. 이 과정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구원을 이루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는 영화(Glorification)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저 하나님 나라에 올라가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단계입니다. 이 과정에 이르러야 비로소 구원이 완성이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난 후 저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는 그 날까지 구원의 여정을 걷게 됩니다.

   우리 구원의 여정을 비행기 여행에 비유해보면 이렇습니다. 칭의는 비행기가 막 활주로를 이륙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성화는 비행기가 목적지를 향해 날아가는 과정을 말합니다. 나아가 영화는 비행기가 목적지에 무사히 착륙한 이후의 과정을 말합니다.

   오늘은 그 중에 첫 번째 여정인 칭의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칭의란 무엇인가?

   ‘칭의’(稱義)란 말은 오늘 본문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라는 말을 신학적인 개념으로 표현해 놓은 것입니다. 즉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것을 ‘일컬을’ 칭(稱)과 ‘옳을’ 의(義)를 써서 칭의라고 한 것입니다.

   사실 이 말은 법정 용어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재판관이 ‘당신은 무죄입니다.’라고 선언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영원한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는 죄가 없다, 너는 의롭다”라고 선언해 주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최근 한 유력 정치인이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고법에서 집행유예와 추징금을 선고받은 상태였습니다. 이대로라면 이번 총선에 출마할 수 없습니다. 언론으로부터 뭇매를 맞을 뿐 아니라 부패한 정치인으로 정계를 은퇴해야 할 처지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이분이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이번 선거에 다시 출마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불명예를 벗게 되었습니다. 이분이 한 말 가운데 인상적인 대목이 있습니다. “이제 편히 발 뻗고 잘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분에 대한 언론 기사를 읽으면서 이 사건이야 말로 이 칭의를 잘 설명해 주는 예화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사실 이분은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나기 전까지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앞날이 어떻게 될지 불안합니다. 세간의 따가운 시선도 괴롭습니다. 그야말로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중 대법원 확정 판결로 무죄가 선언되었습니다. 상황이 180도 달라졌습니다. 그 무거운 마음의 짐을 훌훌 털어낼 수가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새로운 소망도 생겼습니다. 그야말로 살맛이 나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습니다. 예수 믿기 전 우리는 무엇인가 설명할 수 없는 무거운 영혼의 짐에 눌려 살아왔습니다. 늘 불안합니다.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특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 앞날에 대한 불안 때문에 힘든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난 뒤에 달라졌습니다. 이 정치인이 대법원 판사로부터 무죄 판결을 받은 것처럼 우리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무죄 판결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더 이상 죄인이 아니고 의롭다고 선언해 주신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를 짓눌러오던 영적인 짐을 훌훌 털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새로운 소망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칭의를 받게 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본문을 보면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가 믿음 때문에 의롭다하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이것을 ‘이신칭의’(以信稱義)라고 개념화했습니다. ‘써’ 以와 ‘믿을’ 信 그리고 稱義라는 말로 ‘믿음으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다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것뿐인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이고, 세상 모든 종교나 세상 신념들과 구별되는 우리 기독교의 독특한 신념입니다.

   창 15:6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람이 나이 75세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가나안 땅으로 이민을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80이 넘도록 아직 자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더 늙기 전에 그동안 충성스럽게 자기를 섬겨왔던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세우고자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약속을 확인하셨습니다. 엘리에셀이 상속자가 아니라 아브람이 낳을 아들이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뭇 별을 가리키시면서 네 자손이 이와 같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 아브람이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아멘으로 그 말씀을 받고 순종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보시고 아브람을 의롭다고 칭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칭의는 다름 아닌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아브람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유일하신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시고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브람처럼 이 약속을 믿으면, 아브람처럼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 이신칭의 신앙은 교회 역사를 뒤바꾸어놓았습니다. 로마 천주교가 면죄부를 팔아 돈으로 칭의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분연히 일어나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오직 성경 말씀대로 오직 믿음으로만 칭의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개신교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도 천주교는 여전히 믿음에다 인간의 공로가 포함되어야 칭의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다른 여러 종교들도 다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아닙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칭의를 받게 되는 것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우리가 이 이신칭의 신앙을 더욱 철저하게 지켜가야 하겠습니다.

 

칭의를 받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우리가 예수를 믿고 칭의를 받으면 우리에게는 구체적으로 다음 두 가지가 일어납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화해이고, 다른 하나는 의로운 삶입니다.

 

첫째, 하나님과의 화해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여겨주십니다. 이것은 단지 우리가 의롭다고 선언하신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우리와의 관계를 새롭게 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의 화해라고 설명했습니다.

   실존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에게는 세 가지 고민이 있다고 설파했습니다. 하나는 물질에 대한 고민이고, 둘째는 사람에 대한 고민이고, 그리고 셋째는 자신에 대한 고민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먼저 먹고사는 문제가 시급하니까 이 물질 문제에 몰두하면서 고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돈을 벌고 여유가 생기면 이 고민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러면 다른 고민이 찾아옵니다. 사람에게 인정받고 사람에게 사랑받는 문제에 대한 고민입니다. 이 고민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고민 때문에 불행을 경험합니다. 그렇지만 일부분의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인정도 받고 사랑하고 또 사랑 받으며 이 고민을 벗어나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제 또 다른 고민이 찾아옵니다. 바로 자신에 대한 고민입니다. 이 고민은 정말 깊은 고민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나는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어디로 갈 것인지?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는 인생 본질의 문제 때문에 고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 고민은 인간 스스로 아무리 노력해도 찾아낼 수 없습니다. 수도자들이 평생 도를 닦아도, 수십 년 면벽 기도를 하고 매년 동안거를 해도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 문제는 피조물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1987년 삼성그룹의 창업주 이병철 회장은 세상을 떠날 즈음에 영적인 질문 때문에 깊은 고민을 했다고 합니다. 먼저 당시 영락교회 박조준 목사님께 사람을 보내어 도움을 청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죽기 전 한 신부님에게 네 쪽짜리 질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이분의 질문 내용의 핵심이 이것입니다. “죽음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인간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이분은 나름대로 성공적인 인생을 사셨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 물질의 고민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자식들과 직원들과 사회로부터도 인정을 받았기에 사람의 고민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면서 이분은 자기도 모를 고민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더 두려운 것은 고민의 해결책을 찾기 이전에 이 고민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고민만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과 신부님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전해 온 답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그 깊은 고민을 가슴에 담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고민의 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화해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용납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하고,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동안 우리 안에 우리를 힘들게 했던 자신에 대한 고민이 다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과의 화해를 가능하게 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칭의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 여겨주실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둘째, 의로운 삶

   칭의란 우리가 하나님께 의롭다 여김을 받게 된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 안에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 있는 아무런 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의롭다고 여김을 받게 되는 것일까요?

   롬 3:22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덧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이 말씀을 주석하면서 이 하나님의 의를 “우리 밖에서 오는 의”, “그리스도의 낯선 의”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루터는 우리가 칭의를 받게 된 것은 우리 자신의 행위에 의한 칭의를 포기하고, 믿음을 통한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장로교의 창시자인 요한 깔뱅은 이 문제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라는 신학적인 풀이를 했습니다. 오직 의로운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신데, 우리가 그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오 안에 있을 때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칭의를 받고 나면 달라집니다. 우리의 심령이 그동안 입고 있던 우리의 죄의 옷을 벗고 새롭게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죄만 짓던 우리가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의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의 신학의 기초를 놓은 어거스틴은 독특한 신학적인 용어로 우리 인간의 본질을 설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posse peccare’ 즉 ‘죄를 지을 수도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며 살면서 죄를 지을 수도 있는 상태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범죄한 이후에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non posse non peccare’ 즉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타락’이라고 말합니다. 이제 죄 중에 살면서 생각하는 것, 행하는 것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칭의를 받게 되면 그 존재가 또 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pesse non peccare’ 즉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칭의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덧입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의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알고 신앙생활해야 합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잘 알고 신앙생활해야 합니다. 덮어놓고 복만 빌며 신앙생활해서는 안 됩니다. 그저 은혜만 받겠다고 신앙생활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나의 주로 영접하게 되면 우리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칭의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해를 누리며 우리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게 됩니다. 죽음의 두려움도, 죄의 무거운 억눌림도 다 털어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덧입게 됩니다. 늘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죄만 짓고 살았던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