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하는 사람들
약 2:14-26
오래 전 읽었던 필립 스미스라는 사람이 쓴 [교육철학]이란 책에 나오는 내용이 생각납니다. 이 분은 철학자를 두 종류로 구분했습니다. 하나는 ‘철학을 아는 사람’(knowing Philosophy)과 다른 하나는 ‘철학하는 사람’(doing Philosophy)입니다.
우선 철학을 아는 사람이란 철학을 열심히 공부하여 철학에 대해 박식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때로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철학적 지식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책으로 펴내기도 합니다. 대체로 철학교수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철학하는 사람이란 일상생활 속에서 자기가 알고 있는 철학적 지식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인생의 문제에 대해 철학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얻어진 답을 묵묵히 실천해 갑니다.
이분은 철학을 아는 사람과 철학하는 사람의 구체적인 예를 고대 그리스 시대를 들어서 설명했습니다. 당시에 철학자들이 많았습니다. 저들을 ‘소피스트’(sophist)라고 불렀습니다. 저들은 열심히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수준 높은 철학적 토론을 즐겼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자기들이 터득한 철학적 지식을 가르쳤습니다.
당시 이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소크라테스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에게 철학적 지식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대신 산파술이라는 방법으로 제자들이 철학적으로 생각하게 훈련했습니다. 따로 강의 시간이 없었습니다. 함께 생활하면서 질문을 던졌습니다. 생활 속에서 철학하는 길을 열었습니다.
이분은 당시 소피스트들을 철학을 아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이에 비해 소크라테스는 철학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철학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철학을 아는 사람들은 많은데 철학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이 든다는 것입니다. 대학에 철학을 아는 사람들이 넘쳐나는데 그리고 서점에는 철학에 대한 책들이 넘쳐나는데, 정작 철학하는 사람들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현대 철학의 문제는 분리에 있습니다.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 사이의 분리입니다. 철학에 대해 많이 알지만 철학을 실천하며 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학을 아는 사람은 많은데 철학하는 사람은 적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교육학자 가운데 토마스 그룸(Thomas Groome)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비슷한 관점에서 신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having Faith)과 다른 하나는 ‘신앙하는 사람’(doing Faith)입니다.
우선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예수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을 말합니다. 나름대로 성경을 읽고 공부하여 예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성훈련을 통해 예수와의 관계에 대한 남다른 체험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신앙지식과 영적체험을 가르치고 전합니다.
다음으로 신앙하는 사람은 예수와 함께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살아가면서 겪는 문제들을 예수님께 묻습니다. 이 상황 속에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깊이 생각하고 답을 찾습니다. 그리고 그 답을 실천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삶으로 예수님을 드러냅니다.
이분은 오늘 기독교의 문제를 신앙을 가진 사람은 많은데 신앙하는 사람이 적다는 데서 찾습니다. 신앙을 가지게 되면 신앙과 삶이 분리되고 믿음과 행함이 분리되는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신앙하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힘주어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일찍이 야고보 사도가 이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본문 14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당시 교회 안에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행함이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않으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신앙을 가지고 있지만 신앙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
야고보 사도는 본문에서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는 사람들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17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다면 그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본문에서 행함의 구체적인 예를 들고 있습니다. 15절 이하를 보면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당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는데 그야말로 말로만 걱정하고 잘될 것이라고 위로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구체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어떤 행동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을 가지고만 있는 사람들은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구체적인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실제적인 믿음의 열매를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이것을 죽은 믿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신앙하는 사람들은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구체적인 행동을 합니다. 그래서 실제적인 믿음의 열매를 풍성하게 만들어 냅니다. 이것이 산 믿음인 것입니다.
어느 교회 앞에서 구멍가게를 하는 분이 있습니다. 한 번은 그 교회에 새로운 목사님이 부임했습니다. 얼마 안 돼서 이 분이 가게에 드나드는 손님들에게 입이 닳도록 그 목사님 칭찬을 하는 것입니다. 특히 그 목사님이 설교를 참 잘한다고 칭찬을 하는 것입니다.
한 손님이 물었습니다. “아니 목사님이 어떻게 설교를 하기에 그렇게 칭찬을 합니까? 지난주에는 무슨 내용으로 설교를 하셨습니까?” 이 분이 뜻밖의 답을 하는 것입니다. “나는 주일에도 가게를 열어야 돼서 교회출석을 하지 못합니다.” 손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교회에 가서 설교도 들어보지 않고 어떻게 그 목사님이 설교를 잘하는지 아십니까?” 이 분이 이렇게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이 부임한 뒤에 교인들이 외상값을 잘 갚아요....”
그렇습니다. 신앙은 열매로 나타나야 합니다. 주변 사람들이 그 열매를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신앙이야 말로 살아있는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말로 신앙을 말하지만 열매가 없다면 그 신앙은 죽은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 그 믿음은 귀신의 것과 같습니다.
19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사람들이 주님을 믿는다고 입으로 고백하는 내용은 귀신들도 그렇게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막 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방지역 거라사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시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를 건너 거라사 지방 해안에 도착하셨습니다. 막 배에서 내리실 때 귀신들린 사람이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절하며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아직 아무도 예수님의 정체를 모를 때입니다. 그 누구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일이 없는 때입니다. 나중에 1-2년이 지난 뒤에 베드로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처음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너무 기뻐하셨고 이 고백의 믿음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슨 말일까요? 귀신들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영적인 지식을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저들은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믿음의 역사를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못합니다. 그 믿음으로 기도하지 못합니다. 그 믿음으로 봉사하지 못합니다. 그 믿음으로 헌금하지 못합니다. 그 믿음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지 못합니다. 그 믿음으로 전도하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만 있다면 그 믿음은 귀신의 믿음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귀신의 믿음과 다르려면 구체적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신앙하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신앙하는 사람들
그러면 신앙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신앙의 열매가 행동으로 나타나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이 역동적으로 역사를 나타내는 사람들입니다.
본문을 보면 구체적으로 두 사람의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아브라함의 예
21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야고보 사도가 창 2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친 사건을 해석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같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친 사건에 대해 야고보 사도의 해석과 바울 사도의 해석이 다른 것처럼 보인다는 점입니다. 롬 4장을 보면 바울은 이 사건을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그의 믿음 때문이었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야고보 사도는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행함 때문이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같은 내용에 대해 표현이 다른 것뿐입니다.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난 믿음을 말하는 것이고, 야고보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행함은 단순한 행함이 아니라 믿음의 행함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 사람 다 행함으로 나타난 믿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신앙하는 사람의 대표적인 예로 아브라함을 보게 됩니다. 특히 아브라함은 신앙을 행동으로 나타낼 때 넘어서기 힘든 장벽을 뛰어넘고 있습니다. 바로 내어놓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낳은 아들을 내어놓았습니다. 자기 생명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고 있던 아들 이삭을 내어놓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앙하는 사람의 길로 가지 못하고 신앙을 가진 사람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내어놓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요 6장을 보면 오병이어의 이적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이 식사 때가 지나 모두들 시장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물으셨습니다. 그 때 안드레가 한 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어놓은 것을 가지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가지시고 놀라운 이적을 베푸셨습니다. 오천 명이 먹고도 열 두 바구니나 채울 정도로 남았습니다.
이 이적이 가능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한 아이의 ‘내어놓음’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 가운데도 자기의 먹거리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내어놓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과감하게 자기의 먹거리를 내어놓았습니다. 이 작은 내어놓음이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들 그들이 신앙하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생각은 할 수 있고 마음은 먹을 수 있지만 행동으로 내어놓지 못합니다. 그러나 신앙하는 사람들은 내어놓을 수 있습니다. 이 내어놓음을 통해 주님께서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둘째, 라합의 예
25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야고보 사도는 라합이라는 여인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서 행함이 있는 믿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수 2장에 나오는 사건을 염두에 두고 한 말합니다. 모세의 뒤를 이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건너편에 있는 가나안 땅의 큰 성인 여리고를 정탐하기로 하고 정탐꾼 두 사람을 보냈습니다.
이 사람들이 여리고의 기생 라합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라합은 정탐꾼들의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을 믿게 됩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이 성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차 가나안 땅 전체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여리고의 왕이 정탐꾼이 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라합에게 사람을 보냈습니다. 이 때 라합은 정탐꾼을 숨겨주었습니다. 그리고 탈 없이 도피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수 6장을 보면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이 이 여리고성을 점령했을 때 약속대로 라합과 그 가족들을 살려주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라합이 마 1장의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주목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라합이 정탐꾼의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단지 지적인 동의나 감정적인 결심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인 라합 ‘돌아섬’입니다. 라합은 하나님을 믿은 뒤에 자기 민족으로부터 돌아섰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의 역사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자기 나라로부터 돌아섰습니다. 어찌보면 이것은 반역입니다. 매국적 행동입니다. 결단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선 것입니다.
오래 전에 읽었던 기독교 고전 가운데 하나인 본회퍼의 [나를 따르라]는 책의 한 대목이 생각이 납니다. “따라오라는 예수의 부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결합을 뜻하며 동시에 모든 법칙과의 단절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단호한 돌아섬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응답한 사람들은 모두가 다 즉각적이고 단호한 돌아섬으로 응답했습니다.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마 4:20)
그렇습니다. 신앙한다는 것은 단호하게 돌아서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왔던 과거로부터 단호하게 돌아서는 것을 말합니다. 세속적인 과거의 습관으로부터 단호하게 돌아서는 것을 말합니다. 비록 그것이 그동안의 인간관계들을 끊는 고통이 있을지라도 단호하게 돌아서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과 신앙한다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아멘으로 응답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머리로 동의하고 가슴으로 결심하고 맙니다. 안타깝게도 행동하지 못합니다. 이런 신앙은 죽은 것입니다. 이런 신앙은 결국 마귀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이에 비해서 신앙한다는 것은 믿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믿는 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처럼 내어놓는 삶을 삽니다. 라합처럼 돌아서는 삶을 삽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믿음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풍성한 열매가 맺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을 갖는 자리에 머물지 말고 신앙하는 자리로 나아가십시오. 행동하는 믿음으로 열매를 맺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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