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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고전 15:20-22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고전 15:20-22

 

   부활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부활의 산소망을 주신 날입니다. 먼저 우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고 이를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이 부활신앙이 우리에게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능력으로 오늘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사망권세를 물리치고, 장차 우리가 부활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부활신앙고백 중심에 사도신경이 있습니다. 사도신경에서 부활신앙에 대한 고백이 바로 이것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사망의 권세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비가역적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 번 죽음에 사로잡히면 되돌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신화나 전설에 죽음은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보면 이승과 저승 사이에 ‘에레보스’(Erebus)라는 암흑의 세계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에레보스에는 다섯 개의 강이 흐르고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 강이 슬픔의 강이라는 아케론(Acheron)이고, 두 번째 강이 탄식의 강이라는 코키투스(Cocytus)이고, 세 번째 강이 불의 강이라는 플레게톤(Phlegethon)이고, 네 번째 강이 증오의 강이라는 스틱스(Styx)이고 마지막 다섯 번째 강이 망각의 강이라는 레테(Lethe)입니다.

   이렇게 죽음 이후의 세계를 강 너머의 공간으로 묘사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되돌아올 수 없는 곳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죽음의 힘이 강력해서 그 누구도 감히 맞설 수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은 자란 이렇게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사람을 말합니다. 도저히 맞설 수 없는 사망의 권세 하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사망의 권세는 죽은 자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닙니다. 아직 죽지 않은 사람들,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도 이미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현대 실존주의 철학을 대표하는 분입니다. 이분은 [존재와 시간]이라는 책에서 인간을 ‘죽음을 향한 존재’(Sein zum Tode)라고 규정했습니다. 인간의 실존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죽음을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분은 인간이 죽음을 향한 존재이지만 그 죽음이 저 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장차 맞게 될 죽음이 오늘 현존 안에 깊이 개입해 들어와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불안이라는 것입니다. 언제 죽음이 엄습해 올지 불안하고, 그동안 쌓아놓은 것이 다 물거품이 될까 불안하고, 죽음 뒤에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불안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인간들은 이 불안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를 궁리하면서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 때 인간이 이 불안을 극복하려고 몸부림치며 하는 일이 바로 염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한 마디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다 염려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바로 장차 맞게 될 죽음이 오늘 안에 영향을 미친 결과라는 것입니다.

   하이데거는 장차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오늘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이미 죽음에 깊은 영향을 받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인간이 존재하면서 죽음의 영향으로 불안해하며 염려하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정신분석학의 장을 열었던 대학자 프로이드는 인간 안에 두 가지 본능이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하나는 삶의 본능으로서 ‘에로스’(Eros)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의 본능으로서 ‘타나토스(Thanatos)라는 것입니다.

   삶의 본능인 에로스는 생명을 유지 발전시키고, 자신과 타인을 관계를 유지 발전시키고, 자신과 타인을 사랑하며 종족의 번창을 가져온다고 합니다. 이에 비해 죽음의 본능은 생물체가 무생물로 환원하려는 본능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 자신을 사멸하고 살아있는 동안 자신을 파괴하며, 타인이나 환경을 파괴시키려고 서로 싸우며 공격하는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프로이드 역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은 오늘을 살아가는 동안 그 정신 깊은 곳에 본능적으로 죽음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죽음의 본능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이데거나 프로이드가 분석한 죽음의 영향을 사망권세라고 규정한 바가 있습니다. 사망권세가 죽음 그 이후에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태어나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계속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망권세가 오늘 우리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는 것을 영적으로 풀이했습니다. 고전 15:55-56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사망이 오늘 우리를 찾아와서 계속 독침을 쏜다는 것입니다. 그 독침이 바로 죄라는 것입니다. 사망이 계속 우리에게 죄를 짓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점점 하나님과 거리를 멀리 하게 만들고, 결국은 죄 때문에 정말 생명을 잃고 완전히 사망에게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벌은 참 무섭습니다. 몇 해 전에 중국 산시성의 3개 도시에 말벌 떼가 나타나서 주민들을 공격했답니다. 이 때 41명이 죽고 1,70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의 재난 수준입니다.

  말벌이 위험한 것은 꿀벌은 한 번 침을 쏘고 죽지만 여러 번 계속 침을 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벌의 독은 독성 자체보다도 강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에 침에 쏘이면 ‘과민충격’이 일어나면서 온몸이 붓고 기도가 막혀서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사망은 이 말벌처럼 지금도 우리 곁에 찾아와 우리에게 독침을 날리고 있는 것입니다. 죄 짓게 만들고, 하나님과 관계를 깨뜨려 영적 사망에 이르게 만들고, 결국은 전적인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은 무섭습니다. 장차 우리의 생의 끝자락에서 우리를 돌아올 수 없는 깊은 수렁으로 몰아넣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뿐이 아닙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죽음은 어느새 우리 곁에 찾아와 우리에게 무서운 영향을 미칩니다.

   때로는 우리의 정신 깊은 곳에 영향을 미쳐서 우리를 파괴적으로 만듭니다. 미워하게 하고 공격하게 하고 심지어 자살하게 만듭니다. 또 때로는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영향을 미쳐서 늘 불안하게 만듭니다. 염려 근심하게 만듭니다. 또 때로는 우리의 영혼에 깊은 영향을 미쳐서 죄짓게 만들고 죄의 종노릇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 힘으로는 이 사망권세를 뿌리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일본 천황 히로히토는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주범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당시 그는 일본인에게는 신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를 ‘가미사마’(神)로 참배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명을 따라 가미가제 특공대는 목숨을 버렸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일본이 항복한 뒤 항복문서에 조인하기 위해 당시 연합군 대표인 맥아더 장군과 함께 앉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맥아더 장군이 천황 히로히토에게 물었습니다. “귀하는 가미사마라는데 인간인 나와 어떻게 조약을 맺을 수 있겠소.” 그러자 천황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코로 숨 쉬는 인간일 뿐 가미사마는 아닙니다.”

  사실 신으로 자처하며 자신을 숭배하게 했던 그도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사망권세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연약한 자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에 그 누구도 사망권세를 자기의 힘으로 물리칠 수 없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 동안 꼼짝없이 애굽의 바로에게 종살이했던 것처럼 스스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안타까운 현주소입니다.

 

부활의 능력

   그런데 고전 15:1 이하를 보면 이 사망권세를 물리치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사망 권세를 물리치시고 죽은 자의 땅에서 산 자의 땅으로 돌아오신 것입니다. 도저히 건널 수 없다는 죽음의 강을 건너신 것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뵈었고, 또 이 사실을 전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식을 복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의 부활이 복음일까요?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다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부활의 능력을 주시기 위해 부활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망권세에서 건져내주시기 위해 부활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 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나무에 첫 열매가 열리고 이후 많은 열매가 뒤따라 열리듯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나면 믿는 자들이 그 뒤를 따라 부활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담 때문에 그 후손들이 사망권세 하에 살다 결국 죽어갔지만 이제 부활하신 그리스도 때문에 믿는 자들이 사망권세를 물리치고 생명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부활의 아침에 우리는 주님께서 나를 위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고백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부활의 능력을 덧입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부활의 능력을 덧입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첫째로 영적 부활을 체험하게 됩니다.

   엡 2:1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또 엡 2:5절에는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예수 믿을 때 부활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영적 부활입니다. 과거 우리의 영혼이 사망권세에 사로잡혀서 죄짓고, 하나님과 원수 된 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부활하신 예수를 믿을 때 우리의 영혼이 부활의 능력을 덧입고 죄를 털어낼 수 있고, 하나님 앞으로 달려 나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눅 15:24을 보면 주목할 만한 표현이 나옵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아버지가 그 품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아들을 보며 한 말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부활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일까요? 하나님 품을 떠난 사람들은 그 영혼이 죽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 속에서 악인들의 꾀를 따르고 죄인들의 길에 서 있는 자들은 살아있으나 산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를 믿을 때 우리가 부활의 능력을 덧입게 됩니다. 그래서 악인들의 꾀를 뿌리치고 하나님 앞으로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죄인들의 길에서 돌아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영혼이 다시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부활의 아침에 여러분의 영혼이 다시 부활을 체험하는 복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둘째, 삶의 부활을 체험하게 됩니다.

   고전 15:57 이하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가 되라”

   우리가 예수 부활을 믿게 되면 부활의 능력을 덧입고 승리자의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도망자가 아니요, 포기자도 아니요, 더더욱 패배자가 아닌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부터 우리 사회에 회자되는 유행어 가운데 ‘루저’(loser)라는 말이 있습니다. 구지 번역하면 ‘패배자’ 또는 ‘못난이’라는 뜻입니다. 외모가 신통치 않은 사람들, 스펙이 형편없는 사람들, 부모가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들, 취업에 번번이 실패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최근에 많이 사용하는 유행어 가운데 ‘디스한다’(diss)는 말이 있습니다. 상대방을 깎아내리고 놀리고 비난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위너들이 루저들을 디스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심각한 것은 자기 스스로 루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디스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사망권세가 각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위너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활의 능력을 주셔서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막 9:23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가르쳐주셨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이 부활의 아침에 여러분의 삶이 다시 부활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위너의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장차 진정한 부활을 믿게 됩니다.

   고전 15:51 이하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비밀이 있다는 것입니다. 장차 죽은 자들이 예수님처럼 부활하는 그 날이 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죽더라도 예수님처럼 부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새롭게 펼치실 새 하늘과 새 땅에 예수님의 뒤를 이어 부활한 사람들이 주님과 함께 영원토록 복을 누리게 될 그 날이 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비밀은 우리에게 놀라운 소망을 줍니다. 결코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줍니다. 더 이상 죽음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죽음 앞에서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죽음 이후 저 천국에서 부활한 몸으로 영원복락을 누릴 수 있는 희망을 갖게 해 줍니다.

   더 감사한 것은 우리 앞서 세상 떠난 사랑하는 우리 믿음의 식구들, 우리 가족들, 보고 싶은 사람들 이분들을 다시 만날 수 있는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분들이 예수님 뒤를 따라 부활하고 우리도 부활한 뒤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부활의 아침에 우리의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 부활의 아침에 다시 고백하겠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이 믿음의 고백 위에 부활의 능력이 임하게 되기 바랍니다. 이 부활의 능력으로 영혼의 부활과 삶의 부활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장차 부활의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