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 구원의 여정 그 두 번째
엡 4:13-16
우리 주변에서 쉽게 발견되는 이단 가운데 ‘구원파’가 있습니다. 세월호 문제로 세간에도 널리 알려진 유병언과 그 추종자들이 대표적인 구원파 이단의 한 계파입니다. 그리고 기쁜소식선교회의 박옥수와 그 추종자들도 구원파 이단의 또 다른 계파입니다.
이 이단을 구원파라고 부르는 것은 저들이 주장하는 구원 자체가 명백한 이단이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사람들이 죄가 사함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죄 사함을 깨달은 바로 그때 구원을 완전하게 받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저들은 구원을 받았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받았다고 하면 또 언제 받았느냐고 묻습니다. 이 때 구원 받은 시점을 말하지 못하면 구원 받지 않은 것이라고 공격합니다.
정말 더 큰 문제는 한 번 구원 받았으면 어떤 죄를 지어도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 받은 후에는 모든 죄가 다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다시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들은 구원 받은 후에 죄를 지어놓고도 그것을 죄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유병언처럼 그렇게 못된 짓을 많이 하고도 죄의식도 없고 회개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그 말로가 비참하게 끝이 납니다.
결국 구원파의 문제는 구원을 일회적 사건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로 인해 자기의 죄가 사함 받았다는 깨달음을 가지게 되는 것을 구원받은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한 번 구원 받았다고 확신하면 구원은 이미 끝이 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엡 2:8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분명히 구원을 과거의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고 죄사함을 받으면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만 보면 구원파의 주장이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빌 2:12를 보면 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분명히 구원을 현재 진행의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 믿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구원파의 주장은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까요? 한 마디로 말해서 구원을 여정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번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구원을 비행기 여행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선 우리가 예수 믿고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고 여김을 받은 것 즉 칭의는 마치 목적지로 가는 비행기를 탄 것과 같습니다. 이 칭의로 구원은 시작된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칭의를 받은 뒤 하나님의 백성답게 거룩한 삶을 갈아 가는 것 즉 성화는 마치 비행기가 이륙하여 목적지까지 먼 거리를 비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성화로 구원이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음 잘 지킨 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저 천국에 가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 복락을 누리는 것 즉 영화는 마치 비행기가 목적지에 착륙해서 비행을 마친 것과 같습니다. 이 영화로 구원은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긴 여정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분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면서부터 구원은 시작되어,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믿음을 지키며 구원은 이루어져 가고, 마침내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주님 품에 안길 때 구원은 완성되는 것입니다.
성화란 무엇인가?
오늘은 두 번째 여정인 성화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성화란 글자 그대로 ‘거룩할 성’(聖)과 ‘될 화’(化) 즉 거룩하게 되어 가는 것을 말합니다. 영어로는 ‘sanctification’이라는 말을 씁니다.
여기서 ‘거룩’이라는 말은 신약성경의 ‘하기오쉬네’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은 ‘구별되다’(set a part)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화 즉 거룩하게 되어간다는 것은 구별되어 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후
점점 세상과 구별되어가는 것 그것이 바로 성화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 말씀에서 ‘온전한 사람’이란 14절에 나오는 ‘어린아이’와 대조되는 성숙한 성인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란
그리스도로 충만한 영적으로 성숙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 말씀에서 바울은 성화를 어린아이가 자라서 성인이 되듯이 자라가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화를 자라는 과정을 통해 점점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채워지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성화란 마치 어린아이가 자라서 성인이 되어가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 믿고 난 뒤 점점 세상과 구별되어가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 성화의 과정에는 두 가지 영적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소극적 성화의 과정입니다.
14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함이라” 한 마디로 세상의 유혹과 시험에 흔들리지 않게 되는 과정을 말합니다.
사실 우리가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는 세상의 유혹과 시험에 쉽게 흔들립니다. 여전히 술 마시고 담배를 핍니다. 향락과 세상 즐거움에 끌립니다. 그러다 점점 믿음이 자라면 이런 것들에게 점점 끌리지 않게 됩니다. 이런 것보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더 즐겁고 좋아집니다. 그러다 믿음이 더 자라면 이런 세상의 유혹과 시험이 불편합니다. 아예 상종을 하지 않게 됩니다. 점점 성화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화의 소극적 측면입니다.
미국의 윌로우크릭 교회가 개최하는 ‘리더십서밋’(Leadership Summit)은 1995년부터 시작되어 20년이 넘게 이어오는 세계적인 기독교 리더십훈련 과정입니다. 몇 해 전에 이 훈련 과정에서 인도자인 빌 하이벨스 목사님이 주목할 만한 말로 참석자들을 도전했습니다. 바로 ‘거룩한 불만족’(holy discontent)이라는 말입니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 이 세상의 풍조에 거룩한 불만족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도전을 한 바가 있습니다. 세상의 음란한 풍조를 보면서 거룩한 불만족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정의롭지 못한 풍조를 보면서 거룩한 불만족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참석자들에게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성경에 이런 거룩한 불만족을 느낀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그 중에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히 11:24 이하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바로 모세이야기입니다. 모세는 애굽에서의 왕족의 생활에서 거룩한 불만족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의롭지 못한 재물과 죄악의 즐거움으로 가득한 생활 속에서 거룩한 불만족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단하고 그것들과 결별하고 고생스럽더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는 자리로 나아왔다는 것입니다. 힘들지만 주를 위해 고난 받는 자리로 나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화는 점점 세상 한 복판에서의 삶에 대해 거룩한 불만족을 느껴가는 과정입니다. 세상의 유혹과 시험, 세상의 불의와 부정, 세상의 안일과 무의미에서 거룩한 불만족을 느끼게 되고, 점점 그것들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믿음이 자라면서 점점 세상이 불편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대해 거룩한 불만족을 느껴가게 돼야 합니다. 그래서 점점 세상과 구별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적극적인 성화입니다.
본문 15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한 마디로 거룩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조금씩 그리스도를 닮아가서 어느새 그리스도처럼 살아가게 되는 그 과정을 말합니다. 이것이 성화의 적극적인 측면입니다.
고전 11:1을 보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바울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되려고 힘쓰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삶의 목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꼽으라면 그것은 바로 자기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심리학 이론 가운데 ‘상호각인효과’(mutual imprinting effect)라는 것이 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동물학자이자 비교행동학자인 곤라트 로렌츠라는 분이 오리를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 밝혀진 효과입니다. 오리는 알에서 부화한 뒤 제일 먼저 만나는 대상을 엄마로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 따라다니며 닮고 배운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이든 청소기든 관계없이 엄마로 알고 따라 배운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도 이 상호각인효과가 나타납니다. 며느리가 못된 시어머니가 있는 집에 시집을 왔습니다. 오랜 세월 호된 시집살이하며 마음속으로 다짐합니다. ‘나는 후일에 저런 시어머니가 되지 않아야겠다.’ 그런데 막상 시어머니가 된 후 자신을 살펴보니 자기도 그렇게 욕하던 시어머니처럼 되어버린 것을 발견하고는 놀라게 됩니다. 그래서 “욕하면서 배운다.”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화란 우리가 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삶을 살면서 상호각인효과처럼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을 말합니다. 우리가 늘 예수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점점 예수의 마음을 닮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늘 예수의 행동을 생각하면서 점점 예수의 행동을 닮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늘 예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점점 예수의 말씀을 닮아가야 합니다.
성화는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그러면 성화는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요?
우선 성령의 역사로
벧전 1:2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화의 주체는 성령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살후 2:13에도 같은 취지의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분명하게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화는 결코 우리 스스로 이룰 수 있는 과정이 아닙니다. 성화는 전적으로 성령의 주도적 역사의 산물인 것입니다.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혔다는 기독교 고전이 [그리스도를 본 받아]라는 책입니다. 네덜란드의 수도자 토마스 아켐퍼스가 일찍이 15세기에 쓴 책입니다. 이 책은 성화 과정을 안내해 주는 교과서와 같은 책입니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 가운데 하나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흉내 낸다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그리스도의 영을 따라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그리스도의 영을 따라 사는 것은 바로 그분과 나누는 쉼이 없는 대화에 있다.”
그렇습니다. 성화는 내가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몸부림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겉 사람이 그리스도를 흉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속사람이 온전히 변화되지 않으면 결국 머지않아 본색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화는 속사람의 변화로부터 우러나와야 합니다. 이 속사람의 변화는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우리의 속사람을 새롭게 빚어주실 때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이라는 말씀을 믿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나를 거룩하게 하실 수 있도록 성령을 초청하고 그분께 우리를 맡겨야 합니다. 마치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려고 할 때 의사에게 환자는 자신의 몸을 내어 맡겨야 하는 것처럼 우리 몸을 성령께 내어 맡길 때 성령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 말씀과 기도로
딤전 4:5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우리가 거룩해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도록 하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충만히 역사하실 환경을 만들어 드리는 것입니다.
엡 5:18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우리가 술 취하고 방탕한 삶을 살게 되면 우리 안에서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받아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해도 우리가 술을 즐기고 세상 향락을 즐기면 성령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을 멈추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엡 4:29-30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우리가 입에 더러운 말을 하게 되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근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짓말을 일삼고 악한 말을 떠벌리고 살아간다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근심하면서 충만하게 역사하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 심령의 환경을 성령께서 역사하시기 좋지 않은 상태로 만들어버리면 성령께서 충만하게 역사하실 수가 없습니다.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우리는 결코 성화의 과정을 제대로 밟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말씀과 기도입니다. 우리가 말씀생활에 더욱 힘을 쏟고, 기도생활에 더욱 정진하게 될 때 성령께서 충만하게 역사하실 영적 환경이 조성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환경을 만들어드릴 때 성령께서는 충만하게 역사하셔서 우리를 더욱 거룩한 자리로 나아가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늘 성경을 읽고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경청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안에서 성령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빚어주십니다. 우리는 늘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안에서 성령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빚어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 구원의 여정을 따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여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하심을 받았다면, 이제 성화의 여정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성화의 여정이란 우리가 더욱 거룩한 자리로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점점 이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을 하나씩 벗어버리고 조금씩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사역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께 우리 자신을 맡기고 더욱 말씀생활과 기도생활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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