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천 설교/이윤재목사

겔34:7-16 목자의 사명과 행복 2010.5.20(일)

34:7-16 2010.5.20()

목자의 사명과 행복

5월도 한 복판입니다. 5월은 신록의 계절이요 장미의 계절입니다. 오늘 예배 참석한 남성들은 신록의 계절처럼 푸르르고 여성들은 장미처럼 아름답기를 바랍니다. 우리 옆에 여성에게 말합시다. “장미처럼 아름다우십니다”. 남성에게도 말합시다. “신록처럼 푸른 꿈을 이루십시오 ”. 말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 어떤 분이 해서는 안되는 말을 모았습니다. 선행을 베푸는 목사님에게 당신은 살아 있는 부처님입니다.”. 나이가 99세인 할머니에게 할머니, 꼭 백 살까지 사셔야 해요”. 머리가 대머리 아저씨에게 오늘 선생님이 계셔서 자리가 빛났습니다.” 가발을 쓴 아가씨에게 어머나, 머릿결이 왜 이리 아름답지? 꼭 만든 머리 같아요.”. 사실 그 머리가 만든 머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나 들어도 좋은 말이 있습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5월은 사랑의 계절, 감사의 계절, 지난 주 어버이 주일에 이어 오늘 우리가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대신하여 양들을 돕고 섬기는 목자들입니다. 목장교회의 비전을 안고 함께 가는 우리 교회, 짧은 기간동안 목장을 안정시키고 주님의 양들인 성도들을 사랑과 정성으로 섬겨주신 목자들께 우리 모두 감사하고 싶습니다. 우리 다같이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목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

 

성경의 땅인 이스라엘은 목축의 땅입니다. 물론 농사도 짓지만 토질이나 기후는 목축에 더 맞습니다. 이 목축에 종사하는 사람이 목자입니다. 저는 이스라엘에 살면서 목자의 삶을 자주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날씨가 덥기 때문에 목자는 아침 일찍 양을 데리고 밖으로 나갑니다. 목자는 항상 양들 앞에 서고 하루 종일 이곳 저곳을 다니며 양을 먹입니다. 목자는 양들을 한 곳에 두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최근에사 알았습니다. 한 곳에서 풀을 뜯으면 양들이 풀의 뿌리까지 뜯어 먹기 때문에 그 지역이 황폐화됩니다. 그래서 목자는 양들을 데리고 또 떠납니다. 목자는 혼자 있기 때문에 늘 외롭습니다. 무서운 짐승들이 나타날 수 있으니 양을 떠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것이 손으로 만든 작은 피리입니다. 피리는 목자가 외롭기 때문에 부는 악기이면서도 흩어진 양들을 불러 모으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목자가 들고 다니는 기구를 한번 본 적이 있습니다. 가죽 주머니가 있고 그 주머니에 이것 저것 들어 있습니다. 먼저 작은 칼이 있습니다. 밧줄이 있습니다. 자기가 먹을 간단한 식량과 물이 있습니다. 작은 통이 있는 데 무엇인가 하고 보면 그 속에 올리브 기름이 담겨 있습니다. 양에게 벌레가 들어가면 기름을 바릅니다. 거기가 두 개의 막대기를 듭니다. 하나는 길고 다른 하나는 몽땅합니다. 긴 것을 성경은 지팡이라 부르고 몽땅한 것을 막대기라 부릅니다. 그리고 가벼운 천막이 있습니다. 광야에서 자기 위하여 필요합니다.

 

성경의 사람들은 대부분 목자였습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모세도, 다윗도 목자였습니다. 남자만 목자가 아닙니다. 여자도 목자가 많았습니다. 모세의 아내 십보라도 그 아버지와 함께 호렙산에서 양을 쳤습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도, 야곱의 아내 라헬도 목자였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목자를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신약시대가 되어 그 목자가 왔습니다.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 불렀습니다.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양의 큰 목자라 부릅니다. 13:20,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릭스도”. 벧전5:4은 예수님을 목자장이라 부릅니다.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날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초대교회부터 교회는 목회자는 목자로 불렀습니다. pastor, 목사는 곧 pasture, 목장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목회는 양을 돌보는 일이요 목회자는 양을 돌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목회, 목회자, 목사는 목자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일은 안수받은 목사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카톨릭신학과 개신교 신학이 갈립니다. 카톨릭은 베드로의 후예인 사제만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할 때 베드로는 엄밀히 말해서 사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평신도였습니다. 양을 치는 목양의 사명은 목회자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앞에서 양이요 사람앞에서는 목자입니다. 특별히 교회에서 지도자를 세울 때 그 지도자는 다른 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양을 치라고 세운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며 에베소 장로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20: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세운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교회 지도자는 세상 지도자와 다릅니다. 세상 지도자는 권위로 일합니다. 그러나 교회 지도자는 섬김으로 일합니다. 세상 지도자는 세상적 목적을 위해 일합니다. 그러나 교회 지도자는 하나님의 양을 섬기기 위해 일합니다. , 우리는 교회안에서 어떻게 양을 돌보아야 할까요? 목자들은 어떻게 양을 돌보며 신자들은 어떻게 목자를 따라야 할까요? 오늘 말씀은 크게 세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목자는 잃은 양을 찾아야 합니다.

목자의 첫째 사명은 잃은 양을 찾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11-12절을 보실까요? 34:11-12, “주 여호아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목자가 양가운데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 다같이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오늘 말씀의 배경은 구약 에스겔 시대입니다. 에스겔은 주전 6세기, 바벨론 포로 시대에 살았습니다. 70년동안 이스라엘은 바벨론에게 국권을 빼앗기고 가난한 식민지로 살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 백성을 잃어버린 양으로 비유하며 내가 내 양을 찾겠다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이 양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찾습니다. 그 양도 다른 양이 아닙니다. “내 양입니다.

 

성경 눅15장에 보면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100마리를 가진 목자가 있었는 데 어느날 한 마리를 잃었습니다. 그런데 목자는 99마리를 두고 한 마리를 찾아 나섭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치에 안맞는 일입니다. 제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 한 목사님이 한국학생들을 먹인다고 베드윈 목자에게 가서 양을 사온 적이 있습니다. 그때 얼마 주고 샀느냐고 물었더니 숫양 한 마리에 100, 암양은 300불이었답니다. 암양은 새끼를 낳기 때문에 숫양보다 세 배나 비쌉니다. 평균 한 마리에 200불입니다. 그 한 마리를 사서 푸줏간에 맡겨 한국학생과 가족 모두 70명 넘게 먹었습니다. 그런데 한 마리를 찾기 위해 99마리를 두고 갔다? 만일 목자가 없을 때 짐승이 나타나 99마리를 해쳤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놀랍게도 목자는 99마리를 돌볼 사람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떠납니다. 한 마리를 위해 99마리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식입니다. 정말 말도 안되는 사건입니다. 가격으로 따지면 우리 돈 25만원대 2400만원입니다. 정말 계산이 안됩니다. 왜 목자가 이렇게 해야 했을까요? 99마리는 어떻게 되든 한 마리만 찾으면 된다는 것입니까? 그래서 나온 것이 신약 외경인 도마복음입니다. 도마복음에도 잃어버린 양의 이야기가 나오는 데 여기서는 한 마리 양이 100마리중에서 가장 큰 양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자가 그 양을 가장 많이 사랑 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양이 없어진 것을 알았는가? 가장 크고 사랑해서 늘 주목해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된다면 작고 목자가 사랑하지 않는 양이 없어졌으면 목자가 찾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적 메시지가 아닙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광야같은 세상에서 찾으실 때 크기 때문에 찾았습니까? 다른 사람보다 우리가 더 착하고 아름답고 가치있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찾은 것입니까? 9:36절 이하에서도 예수님이 양을 찾으시면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9: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주님이 우리를 찾으신 것은 우리가 목자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치는 우리의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이 찾으시는 가치입니다. 우리의 가치는 타고난 우리의 인간적 가치가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가치입니다. 5:6절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할 때”, 8절에서 우리가 죄인일 때”, 10절에서 심지어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될 때예수님을 보내서 우리를 찾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광야에서 보면 양과 염소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염소는 목자의 도움이 없이도 잘 다닙니다. 광야의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진 짐승의 뼈를 보면 양보다 염소가 월등히 많습니다. 염소가 양보다 훨씬 독립적이고 강하다는 뜻입니다. 염소는 대개 혼자 다니고 양은 항상 떼지어 다닙니다. 저도 처음에는 양은 공동체의식이 있고 염소는 개인 플레이를 많이 해서 그런 줄 알았습니다. 나중에 보니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염소는 강하고 양은 약하기 때문입니다. 강하기 때문에 꼭 목자를 붙어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양은 약하기 때문에 꼭 목자를 따라가야 하고 그나마 혼자 못 다니고 떼지어 다녀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염소가 길을 잃었다고 말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항상 양이 길을 잃습니다. 짐승에게 잡아 먹히는 것도 양입니다. 양에게는 다른 짐승에게 다 있는 공격용, 방어용 무기가 없습니다. 보호색도 없습니다. 다른 동물이 공격에 오면 속수무책입니다. 그저 생존을 위하여 딱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죽으나 사는 목자를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성경이 말합니다.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제 길로 갑니다. 벧전2: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길을 잃습니다. 73:22,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니”. 우매 무지합니다. 목자없이는 못 삽니다. 그래서 찾아야 합니다. 다시 오늘 말씀 11절입니다. 34:11,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하나님이 그렇게 여러분을 찾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그렇게 잃은 양을 찾으십니까? 목자의 최고 사명은 잃은 양을 찾는 것입니다.

 

둘째. 목자는 양에게 꼴을 먹여야 합니다.

잃은 양을 찾은 것이 목자의 첫 번째 사명이라면 두 번째는 꼴을 먹이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13-14절을 보실까요? 34:13-14, “내가 그것들을 만민 가운데에서 끌어내며 여러 백성가운데에서 모아 그 본토로 데리고 가서 이스라엘 산위에와 시냇가에와 그 땅 모든 거주지에서 먹이되 좋은 꼴을 먹이고 그 우리를 이스라엘 높은 산에 두리니 그것들이 그곳에 있는 좋은 우리에 누어 있으며 이스라엘 산에서 살진 꼴을 먹으리라”. 목자이신 하나님이 양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는 두 번째 일은 그 백성을 좋은 꼴로 먹이는 것입니다. 다같이 내가 먹이되 좋은 꼴로 먹이고”.

 

여러분, 다른 것이 다 있을지라도 먹지 않으면 굶어 죽는다는 것을 아십니까? 옛날 어느 집 주인이 멀리 출타했습니다. 돌아와 보니 말이 죽었습니다. 자세히 보니까 양 쪽에 건초가 수북히 쌓였는 데 그 사이에서 죽었습니다. 도대체 왜 죽었을까? 양 옆으로 그렇게 먹을 것이 쌓였는 데 왜 죽었을까? 다시 한번 보니까 양쪽에 있는 건초중 어느 것을 먹을지 몰라 아무 것도 안 먹다 죽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죽은 것이 아니라 먹지 않아서 죽은 것입니다. 저는 어릴 때 시골에 살면서 동물을 많이 키웠습니다. 아버지가 동물 한 가지씩을 아들들에게 맡겼습니다. 돼지 맡은 아들, 소맡은 아들, 개맡은 아들, 닭 맡은 아들, 저는 양을 맡았습니다. 아마 제가 목회자가 될 것을 알고 하나님이 양을 맡긴 것 같습니다. 아침 일찍 학교 갈 때 아예 양을 몰고 갑니다. 그리고 산에 매 놓습니다. 학교 끝나 산으로 가면 벌써 멀리서 저를 알아보면서 음매, 음매하고 웁니다. 저를 기다려준 양이 얼마나 고맙고 사랑스러운지 모릅니다. 훗날 목회하면서 교인들 보면 양 생각이 납니다. 그런데 하루는 비가 억수로 옵니다. “양이 무엇 먹고 사나?” 공부하면서도 걱정이 태산입니다. 학교가 끝나자 얼른 산에 올라갔습니다. 양을 찾았더니 양이 비가 와서 아무 것도 못 먹고 나무 밑에 숨어 있습니다. 못 먹고 굶주린 양이 얼마나 불쌍한지. 양을 몰고 집에 와서 곡식을 조금 먹였지만 그때는 사람도 많이 못 먹을 때입니다. 할 수 없이 저녁에 우리에 맺습니다. 그날 저녁 양이 허기진 소리가 제 귀에 들렸습니다. “쪼르륵 쪼르륵”. 그 소리가 얼마나 크게 들렸는지 어린 가슴이 철썩 철썩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리고 아침만 되기를 기다렸습니다. “오늘은 많이 먹여야지”.

자라서 목회하면서 보니까 그것이 목자의 마음이었습니다. 교인들을 보면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정도 가졌으면 무엇이 더 필요할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가 없으면 다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늘의 양식입니다. 좋은 꼴입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된 후에 언제나 이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 양들에게 살지고 좋은 꼴을 먹일까? 24시간, 365, 그 생각만 합니다. 주일 설교 끝나자 마자 벌써 다음 주일 설교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자들이 먹어야 할 하늘의 양식은 주일날 설교만이 아닙니다. 제가 이스라엘에 살면서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네 가지 물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첫째는 이슬입니다. 광야에는 물이 없지만 아침 일찍 나가 보면 이슬이 대롱대롱 맺혀 있습니다. 그것이 한 해에 약 200밀리리터 가량 됩니다. 비가 없는 나라에서 하나님이 이슬로 먹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새벽에 하나님 만나는 것이 가장 좋은 하늘의 양식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이슬은 아침마다 내리지만 아침에 일어난 사람에게만 생수가 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아침마다 이슬같은 은혜를 받습니까?

두 번째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입니다. 이스라엘의 비는 정확하게 계절따라 내립니다. 주로 10월부터 2월까지 우기에 내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두 번째 방법은 정규적으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10월에는 농사를 시작하게 하는 이른 비가 내리고 3월에는 농사를 마무리 하는 늦은 비가 내립니다. 예외없이 내립니다. 이 정규적인 은혜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주일예배는 매주 정규적으로우리에게 공급되는 하늘의 양식입니다. 주일설교는 그 교회, 그 교인의 영적 상황에 맞춤형으로 제공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설교에 은혜받아야 합니다. 설교만이 아니라 모든 예배순서가 하늘의 만나입니다. 주일을 놓지지 말아야 합니다. 목장예배도 정기적으로 공급되는 하늘의 양식입니다. 우기에 오는 비가 이스라엘 일년 강수량의 90%을 차지합니다. 이 비를 놓치면 이스라엘에서 농사를 못 집니다.

 

셋째는 손수 판 우물입니다. 물을 얻는 또 하나의 방법은 우물입니다. 이스라엘에 가면 판 우물이 많습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우물을 팟습니다. 물이 없는 나라에서 비만 기다려서는 물을 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손수 우물을 파야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하늘의 만나를 위하여, 신령한 생수를 위하여 우물을 팝니까? 성경은 가장 깊고 맑은 생수의 우물입니다. 우리는 남이 판 우물은 좋아하지만 우리는 우물을 안 파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공짜로 얻는 생수는 맛이 없습니다. 땀흘려 일하고 마신 생수가 맛있습니다. 요즘 매주 목요일마다 50여명의 교인들이 예수영성제자훈련을 받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영적인 우물을 파는 것과 같습니다. 내 우물에서 내가 생수를 파야 합니다. 아침마다 읽는 큐티, 저녁하는 하는 성경공부, 매일마다 쓰는 성경, 영혼을 살리는 생수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 스스로 나오는 샘입니다. 이스라엘에는 파지 않았지만 스스로 나오는 샘이 많습니다. 기드온 300명이 먹었던 하솔 샘이 그것입니다. 에루살엠 기드론 골짜기에 가면 기혼샘에서 물이 솟아 납니다. 남쪽에 에인 아브닷에 가도 물이 퐁퐁 솟아납니다. 히브리어도 다릅니다. 스스로 나온 샘을 에인이라고 하고 파서 나온 샘은 브엘이라고 합니다. 우리 인생에는 우리가 파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은혜로 공급하는 샘이 얼마나 많습니까? 좋은 부모를 만났습니다. 내가 많이 수고하지 않았는데 좋은 직장 주시고, 물질 축복주시고, 내가 자식들을 다 돌보지 못했는데 하나님이 키워 주셨습니다. 고난도 당했지만 고난속에서도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스스로 나오는 은혜의 샘입니다.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한 것 별로 없는 데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의 양식은 얼마나 많습니까?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자신의 몸을 우리에게 생명의 만나로 주셨습니다. 목자는 이 생명의 만나를 양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셋째 목자는 양의 영혼을 회복시켜야 합니다.

목자의 세 번째 일은 양을 회복시키는 일입니다. 15-16절입니다. 34:15-16,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을 누어 있게 할지라. 주 여호아의 말씀이니라. 그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 쫓기는 자를 내가 돌아오게 하며 상한 자를 내가 싸매주며 병든 자들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 살진 자와 강한 자는 내가 없애고 정의대로 그것들을 먹이리라”. 양은 밥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상하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고 사고도 만나고 갈등도 겪습니다. 다양한 상황에 있는 양을 회복시키고 살려 내는 것이 목자의 일입니다.

 

제가 이스라엘에 있을 때 한국에서 온 목사님을 모시고 유다광야에 있는 베드윈 촌을 방문했습니다. 천막집에 들어가 조금 앉아 있는데 밖에서 무슨 짐승 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나가보니 아, 이것이 웬일입니까? 양이 작은 웅덩이 빠져 벌렁 누어 있습니다. 털은 많고 뚱뚱하니까 금방 일어나지 못하고 기우뚱거리면서 괴로워 하는 모습이 불쌍하기 보다 우스꽝 스러웠습니다. 그때 목자가 뛰어가더니 네 가지 과정으로 양을 회복시켰습니다(그림). 그림을 그려보았습니다. 첫째 양을 안고 그늘로 데려갔습니다. 둘째 막대기에 자기 옷으로 걸쳐 그늘을 만든 뒤 거기에 뉘였습니다. 셋째 물통에서 물을 꺼내 물을 마시게 했습니다. 넷째 목덜미로부터 전신을 마사지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양이 툴툴 털고 일어났습니다.

 

그때 제가 양에 대해 두 가지를 알았습니다. 언제나 양은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것과 위험에 빠질 때 즉시 구조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양이 웅덩이에 빠지는 것이 가장 위험한 데 웅덩이에 빠지는 세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편안한 곳을 찾아 다닐 때 웅덩이에 빠집니다. 털이 많으면 웅덩이에 빠집니다. 뚱뚱할 때 웅덩이에 빠집니다. 여러분, 어떤 신자가 실족합니까? 평소에 그렇게 신앙생활 잘 하다가 갑자기 교회를 안나옵니다. 웅덩이에 빠진 것입니다. 누구나 그럴 수 있습니다. 그때 깨달아야 합니다. “, 내가 안일주의에 빠졌나?” 힘들게 믿지 않고 싶은 유혹에 빠지면 그때부터 신앙생활이 힘들어 집니다. 눕는 것은 쉬운 데 일어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털이 많으면 잘 넘어집니다. 털은 욕심이요 소유욕입니다. 털이 많으면 아무래도 걸리는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넘어집니다. 뚱뚱하면 넘어집니다. 육신이든 영혼이든 비대한 것은 좋지 않습니다. 가벼워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회복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소생이라고 말합니다. 23: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소생revival, 살려내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려냅니까? 우선 시원한 그늘로 가야 합니다. 시원한 그늘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그늘입니다. 어떤 사람은 문제가 생기면 문제를 해결한 다음에 나오겠다고 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스스로 문제 해결하고 교회 나온 사람을 많이 보지 못했습니다.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와야 해결합니다. 하나님께 나오면 하나님이 해결합니다. 하나님께 나올 때 누군가 도움받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난 괜찮아요”. 그러지 말고 나 아파요. 기도해주세요해야 삽니다. 이곳이 바로 교회요 목장입니다. 특히 목장이 더 치료의 효과가 큽니다. 소그룹이기 때문입니다.

 

교인 여러분은 이해하고 들으세요. 가끔 교인가운데, 목원 가운데 목회자의 말, 목자의 말을 듣지 않고 어긋 어긋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목회자가, 목자가 여러분을 살리기 위해 여러분이 원치 않는 방법을 사용할 때도 있다는 것을 아십시오. 제가 한번은 유다광야를 지나가다 목자가 무엇을 던지는 것을 보았습니다(그림). 보니까 염소인데 염소가 목자의 시야에서 멀리 벗어났습니다. 분명 그 길로 가면 낭떨어지입니다. 그때 목자가 위험을 경고하면서 물맷돌을 던집니다. 대개 그 경우는 염소인 경우가 많습니다. 가끔 목회자를 힘들게 하고 목자를 괴롭히는 염소가 있습니다. 이때 목자가 그들을 위해 던지는 것이 물맷돌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도 교인들이 잘못할 때 주의줄 수 있습니다. 분명히 그 길이 망하는 길인 것을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 것은 엄청난 직무유기입니다. 그럴 때 시험들지 않고 감사하는 법을 훈련하십시오. 자기 염소이기 때문에 물맷돌을 던지는 것입니다. 다시 15-16절을 다시 보십시오. 34:15-16, “내가 상한 자를 내가 싸매주며 병든 자들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 살진 자와 강한 자는 내가 없애고 정의대로 그것들을 먹이리라”. 여러분이 병들 때 교회에서 치료받으십시오. 여러분이 상할 때 목장에서 위로받으십시오. 그러나 살진 자와 강한 자는 되지 마십시오. 남을 목회자와 목자에게 강한 자가 되지 말고 마귀에게 강한 자가 되십시오. 그래야 아름다운 교회, 행복한 목장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립니다. 하워드 헨드릭스이라는 미국의 유명한 교육학자의 말입니다. 신앙은 세 가지가 있어야 건강하게 자랍니다. 첫째 자기를 멘토링해줄 수 있는 멘토가 필요합니다. “나는 다 배웠으니 멘토가 필요없다말하지 마십시오. 교회안에서 자기보다 나이가 많고 경험이 많은 사람을 멘토로 모시는 겸손함이 필요합니다. 담임목사인 제가 감히 말합니다. 신학공부 하기 전에 들은 말이 제게 오래 남아 있습니다. “자기가 다니는 교회의 담임목사를 스승으로 여기지 못하는 자가 배울만한 스승은 더 이상 없다”. 이것이 교인의 자세입니다. 목회자를 잘 섬겨야 좋은 신자가 되고 장로님을 잘 섬겨야 자신도 좋은 장로가 되고 목자를 잘 섬겨야 좋은 목원이 됩니다. 두 번째 필요한 것은 교회안에 우정을 나눌 좋은 영적 친구가 있어야 합니다. 절대 혼자 예수믿지 마십시오. 서로 배우며 자라가야 합니다. 좋은 목원이 되십시오. 그것이 예수님의 사랑을 배우는 가장 좋은 길입니다.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누군가 멘토링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배우기만 해서 되지 않습니다. 가르쳐야 배웁니다. 가끔 교회는 오래 다니는 데 믿음이 안 자라는 분은 봅니다.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배우기는 하는 데 가르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멘토도 필요하지만 멘토링할 사람도 필요합니다. 목자를 잘 따르고 순종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자신이 목자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는 두 종류의 목자가 있습니다. 지금 목자와 다음 목자입니다. 지금 하고 계신 분은 현재 목자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다음 목자입니다. 현재 우리 교회에서 가장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분들을 보십시오 . 99%가 목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배우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가르치고 섬김받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섬기기 때문에 자라는 것입니다. 이 거룩한 목자주일에 여러분의 목자를 존경하고 따르십시오. 그리고 나도 목자가 되기로 다짐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