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9:1-22 2012.7.15.(일) 바울이 받은 은혜
우리가 살면서 자주 잊고 사는 것은 우리가 은혜받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평소에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받고 산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래전에 읽었던 해외기사가 생각납니다. 미국에 한 40대 남자가 평생 갚아도 모자랄 정도의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매일 빚 때문에 쪼들려 근근히 살고 있는 데 어느날 은행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실례지만 누구 누구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만”. “주소를 물어 봐도 되겠습니까?” 주소를 알려 주었더니 은행 직원이 말합니다. “다름아니라 고객께서 왜 통 은행에 나오시지 않는지 궁금해서 전화드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은행에 계좌가 없는데요.” 했더니 “아니, 고객님, 모르셨습니까? 고객님 앞으로 30년전에 한 분이 예치한 돈이 있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깜짝 놀라 은행에 갔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30년 전에 자녀가 없는 먼 친척이 이 사람 이름으로 유산을 얼마 남겼는 데 그 돈에 30년동안 이자가 붙어 지금은 거의 천만 달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졸지에 빚 다 갚고도 부자가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읽고 생각했습니다. “나 한테는 전화가 안 오나?” 혹시 여러분에게 어느날 전화가 온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혹시 졸도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은행
에서 전화가 오지 않더라도 저와 여러분이 이미 엄청난 것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은혜받고 삽니다. 우리가 아는 은혜도 있고 모르는 은혜도 있지만 큰 은혜는 대부분 모릅니다. 우리가 은혜라고 여기지 않는 것중에 너무 큰 은혜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이런 글을 썻습니다. “십대 자녀가 반항을 하면 그것은 내 자녀가 거리에서 있지 않고 내 집에 잘 있다는 것이고, 나에게 지불해야 할 세금이 많다면 나에게 상당한 재산과 괜찮은 직장이 있다는 것이고, 음식 먹고 치워야 할 설거지가 있다면 내가 저녁에 음식을 배불리 먹었다는 것이고, 입던 옷이 몸보다 작다면 내가 정도 이상으로 잘 먹고 살고 있다는 것이고, 세탁하고 다리미질 해야 옷이 산더미가 쌓여 있다면 내가 입을 옷이 아주 많다는 것이고, 하루 종일 일해서 온몸이 피곤하면 내가 아직도 할 일이 있다는 것이고, 내가 읽어야 할 이메일이 많다면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고, 이른 아침 잠 못이루고 새벽종소리에 잠을 깼다면 그것은 내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은혜중에서도 비교할 수 없는 은혜가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은혜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받은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일생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살았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소중한 은혜를 오늘 받습니다. 저는 바울이 받은 그 은혜를 우리 모두도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는 분, 내가 우리가 받은 은혜가 너무 크다는 사실을 깨닫는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바울이 받은 첫 번째 은혜는 하나님의 부름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바울이 다메섹에 있는 예수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갈 때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장면입니다. 1-2절입니다. 행9:1-2,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여기서 다메섹은 지금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213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이 도시는 로마제국 당시 가장 큰 도시중의 하나였습니다. 거기에 유대인도 많아 약 4만 명의 유대인이 살고 30여 개의 회당이 있었다고 합니다. 마침 예루살렘에 핍박이 일어나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다메섹으로 피신을 갔습니다. 사울은 그날 다메섹에 피신한 예수믿는 사람들을 잡아오려고 길을 재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건은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일어났습니다. 3절입니다. 행9: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거리가 200킬로가 넘기 때문에 아마 바울은 한 일주일 이상 걸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메섹에 도착할 즈음에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쏟아졌습니다. 때는 정오였습니다. 정오면 낮 12시, 햇빛이 가장 강하게 비출 때입니다. 그런데 바울에게 비친 빛은 그 빛이 아니었습니다. 행26:13절에 보면 바울은 그 빛을 “해보다 더 밝은 빛”이었다고 말합니다. 하루중 빛이 가장 강할 때가 정오인데 그 빛보다 강했다면 얼마나 강한 빛이었겠습니까? 그 강한 빛 때문에 바울은 그 자리에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더듬거리며 엎드려 있는 데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4절,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이 모기만한 소리로 “주여, 누구시나이까?” 하고 묻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여러분은 이 장면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과학이 발달한 시대에 “하늘에서 빛이 비춰 사람이 쓰러졌다. 눈을 못 떳다. 하늘에서 소리가 났다“.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겠습니까? 그래서 많은 현대인들이 이 부분을 합리적으로 설명해 보려고 애썻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울은 그때 일사병 때문에 쓰러졌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햇빛이 너무 뜨거워 쓰러졌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바울이 지병으로 간질병을 앓고 있었는 데 그날 그가 너무 피곤하여 발작으로 쓰러졌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생리적, 심리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믿음을 마음에 강하게 가지면 신체 변화도 거기 따라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바울이 일사병이나 간질병 때문에 쓰러졌다면 그 후에 그가 변화한 사건은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사람이 일사병에 쓰러졌다고 전도자가 됩니까? 간질병에 쓰러졌다고 모든 과거를 청산하고 새 사람이 됩니까?
생리적, 심리적인 변화도 바울이 예수님을 좋아하고 그를 진심으로 따랐어야 가능한 해석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평소에 예수님을 따랐습니까? 평소에 바울이 어떻게 했습니까? 행8:3절입니다.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여기서 ”잔멸했다“는 말은 맷돼지가 포도밭을 쑥대밭으로 만든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평소에 예수믿는 사람을, 교회를 그렇게 잔인하게 핍박했다는 것입니다. 스테반이 돌에 맞아 죽어갈 때도 당연히 여겼습니다. 1절을 다시 보십시오. ”사울이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바울은 결코 예수님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예수믿는 사람 잡는 것을 종교적 신념으로, 역사적 사명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행26장에 보면 바울은 예수님을 가시채로 뒷발길질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행26:14,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길질 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여기에 나오는 ”가시채“는 이스라엘 농부들이 말 안듣는 소의 발에 채운 족쇄였습니다. 하도 말을 안듣고 발길질을 하면 농부들 소의 뒷 다리에 이 족쇄를 채웁니다. 그러면 소가 뒷발길질 할수록 가시채가 살을 파고 들어 발이 더 아픕니다. 그러면 소가 발길질을 그칩니다. 그런데 사울은 자기 발 아픈 줄도 모르고 계속 예수님과 교회에 대하여 발길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울을 하나님은 다메섹에서 부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나님께 나오셨습니까? 우연히 나왔습니까? 스스로 나오셨습니까? 나도 모르게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나오셨습니까? 어느날 수양회에 참석하고, 어느날 부흥회때 은혜받고 나오셨습니까? 어느날 자신이 지은 죄가 하도 슬퍼 “천부여 의지없이 손들고 나옵니다“ 나오셨습니까? 자기도 모르게 감동적인 무슨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고 나왔습니까? 나이는 먹어가는 데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며 인생을 고민하다 나오셨습니까? 어릴 때 교회다녔는 데 오랫동안 안 나오다가 갑작스런 사고로, 질병으로, 사업 실패로, 자식에게 어려운 일이 생기고, 그래서 어느날 ”아, 하나님께 돌아가야 겠구나“ 그래서 나오셨습니까? 생각지도 않았는 데 어느날 누가 전도해서 나오셨습니까? 이유는 많습니다. 성경은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이유야 어떻든 하나님이 부르신 것입니다.
다만 문제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바울처럼 부르지는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부르시지 않습니다. 오래전 한국교회 교인들을 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것이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 나올 때 마음으로 회심했습니까?” 33%가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어쩌다 하나님께 나온 것이 아니라 마음의 변화를 경험하고 하나님께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또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바울처럼 어떤 초자연적인 체험하고 하나님께 나오셨습니까?” 그랬더니 18%가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종합적으로 보면 5% 정도의 신자가 초자연적인 경험을 통해 하나님께 나옵니다. 아마 우리 중에도 5% 정도는 죽을 뻔 한 병에서 고침받았든지, 사고로 인해 생명을 잃을 뻔 했다가 하나님이 살려주셨든지, 사업이나 자녀나 인생의 모진 고난을 겪다가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로 구원받고 하나님께 나왔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저도 고3때 연탄가스 마시고 생사를 헤맬 때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하나님이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95%는 무엇입니까? 그들도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제가 2천년 교회사에 나타난 인물들을 보면 하나님이 바울처럼 초자연적으로 부른 사람들이 많치 않습니다. 마틴 루터가 그 중 하나입니다. 루터는 25살 때 친구와 함께 집에 다녀오다가 에르푸르트 들판에서 벼락을 맞았습니다. 친구는 그 자리에서 죽고 루터만 살았습니다. 그때 루터가 깜짝 놀라 수도사가 되겠다고 서원했습니다. 그러나 같은 시대의 개혁자 쯔빙글리나 칼빈에게는 전혀 그런 경험이 없습니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잘 자랐고, ㅅ살아가가면서 서서히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그랬어도 위대한 종교개혁자들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바울은 하늘의 음성을 듣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는 그런 초자연적인 경험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가에서 “나를 따르라” 해서 그냥 따랐습니다. 그랬어도 초대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급작스럽게 불렀든 서서히 불렀든, 초자연적으로 불렀든 자연적으로 불렀든, 하나님의 부르심은 같습니다.
다만 두 가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부름은 은혜의 부름이요 둘째는 그 부름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를 때 은혜로 불렀다는 것을 아십니까? 마치 하나님이 예수님을 핍박한 바울을 부른 것처럼,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은혜로 부르신 것을 믿습니까?
작년 안식년에 영국 베드포드라는 곳에 갔습니다(영상). 이 곳은 “나같은 죄인 살리신”을 작사한 죤 뉴톤이 시무하던 교회였습니다. 그는 어릴 때 교회를 잘 나가던 착한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가 재혼하자 빗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술을 즐기고 허랑 방탕했으며, 폭력을 일삼았습니다. 한때는 부하를 200명이나 거느린 강패두목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더 손쉽게 돈벌려고 노예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아프리카에 가서 노예를 사다가 유럽에 팔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고향에 돌아와 어짜다 한번 교회 나갔는 데 그 날 설교가 탕자의 비유였습니다. 아버지를 떠나 밖에 나가 허랑방탕 살던 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 내가 탕자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눈물이 비오듯 쏟아졌습니다. 그때 그가 회개하고 지은 노래가 “나같은 죄인 살리신”입니다. 그가 회개한 후 평생 목회한 강단에 서서 제가 노래를 불렀습니다. 가슴이 무어지고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아, 존 뉴톤이 따로 없구나. 내가 바로 탕자요 방탕자구나”.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은혜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을 핍박하던 바울같은 우리를, 노예장사로 하나님을 멀리 떠난 뉴톤같은 탕자를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하나님의 부름에 감사하고 평생 그 부름에 순종합시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첫 번째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돌보시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바울이 받은 두 번째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의 은혜입니다.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앞을 보지 못한 채 엉금 엉금 기어 다메섹에 도착했습니다. 그렇게 의기양양하던 바울은 이제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믿는 사람을 잡기는커녕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걸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포로잡으려다가 자신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이 그를 돕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의 비밀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다고 할 때 하나님이 아무 것도 안 하십니다. 그러나 못한다고 할 때 하나님은 시작합니다. 우리의 곤경이 곧 하나님의 기회입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도 많습니다. 우리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바울이 눈멀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자 하나님은 드디어 바울을 위해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첫 번째 일이 기도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행9:11,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라”. 여러분, 하나님께 돌아온 바울이 가장 먼저 한 것이 기도였다는 것을 아십니까?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14세기 독일 신비주의자중에 타울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할 때 일어나는 네 가지 일을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면 첫째 인간에게 상처가 됩니다. 죄의 상처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찾아오면 누구나자기 죄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사람은 그 죄 때문에 탄식하게 됩니다. 이것이 상처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의 죄를 용서하고 계속 사랑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포로가 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를 포로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포로되어야 우리가 자유롭습니다. 기차가 레일위에 있을 때 가장 자유로운 것은 우리는 하나님안에 있을 때 가장 가유롭습니다. 결박이 자유입니다. 우리를 포로삼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계속 사랑하면 우리안에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하나님만 생각하고 하나님만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더 사랑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하시는 과정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은혜가 기도입니다. 다시 11절 보십시오. 행9:11,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라”.
놀랍지 않습니까? 바울은 하나님께 돌아오자 마자 기도를 시작합니다. 누구에게 기도를 배웠을까요? 누구에게도 배우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누가 배우지 않았는 데 “엄마”하고 부르는 것과 같이 우리도 다시 태어나면 하나님 아버지를 부릅니다. 기도는 쉽습니다. 영적으로 태어나면 반드시 기도하게 됩니다. 따라서 기도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이 시키시니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게 하시니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실 때 가장 중요한 징표가 기도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고 계시는구나 압니다. 기도는 성령님의 일입니다. 우리안에 성령님이 우리에게 기도하게 합니다. 무엇을 기도할지 모를 때 기도를 가르칩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게 하시고 성령님이 대신 기도합니다.
기도가 시작되자 하나님은 바울에게 영적 도우미를 보냈습니다. 그가 아나니아입니다. 아나니아는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입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아나니아를 바울에게 보내 세 가지를 돕게 하셨습니다. 먼저 바울을 “형제”라 불렀습니다. 17절, 행9: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어떻게 사울이 형제가 될 수 있을까요? 한때는 예수믿는 사람을 잡아가 옥에 가두던 사람 아닙니까? 그러나 이제 사울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그러므로 과거에 무엇을 했던 이제 상관없습니다. 주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안에서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 형제관계를 이루게 함으로 우리를 돌보십니다. 교회는 한 하나님을 섬기는 가족공동체입니다. 세상에서 힘들게 살다가 교회에 와서 한 가족을 발견하고 우리는 영적으로 자랍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우리를 만져주시는 사랑의 현장입니다. 여러분은 교회안에서 한 형제로 살아갑니까? 교회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자라는 신앙의 요람입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을 형제라고 부르면서 한 것은 안수였습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행9: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바울의 눈에 있던 비늘이 벗어져 못 보던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실 때 우리에게 오는 변화중의 하나가 우리의 눈이 다시 뜨는 것입니다. 시력이 다시 뜨는 것이 아니라 비전이 다시 뜨는 것입니다. 예수믿는다는 것은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18절에 “다시보다”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행9: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이 “다시 보게 되다”는 말은 헬라어로 “아나블레포”입니다, 이 말은 접두사 “아나”와 “보다”의 뜻을 가진 “블레포”기 합쳐진 말입니다. 이 말을 직역하면 “위를 바라 본다”라는 말입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을 위해 기도할 때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면서 사울이 위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바울은 너무 아래만 보았습니다. 아래만 보다 보니 유대인의 예수믿는 것을 종교적으로, 인간적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위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눈으로 보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경륜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면 우리의 눈이 하늘을 바라봅니다. 세상적 가치관으로 덮혀있던 비늘이 벗겨집니다.
아나니아를 통해 하나님은 바울을 또 다시 돌보셨습니다. 19절입니다. 행9: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 지니라”.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음식을 먹였습니다. 얼마나 지치고 피곤하겠습니까? 아나니아는 피곤한 사울에게 음식을 먹였고 사울은 음식을 먹고 강건해졌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의 형편을 아십니다. 우리의 육적 형편뿐 아니라 영적 형편도 아십니다. 그래서 양육간의 음식을 먹이십니다. 그래서 강건하게 하십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영적 공급을 받으십니까? 말씀과 성령으로 여러분을 먹이시고 공급하십니까? 하나님이 그 친절한 손으로 안으시고 품으십니까? 하나님의 돌보심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시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바울이 받은 은혜가 또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바울을 세상에 전도자로 보내시는 은혜입니다. 놀랍게도 바울은 회복되자 마자 바로 전도를 시작합니다. 19-20절입니다. 행9:19-20,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형제들과 며칠 있을 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여기서 중요한 말은 “즉시로”입니다. 다같이 “즉시로”. 왜 이 말이 중요합니까?
우리는 보통 전도하면 굉장히 준비를 많이 해야 하는 줄 압니다. 성경도 많이 알고 구원의 확신도 가져야 하고 말도 잘 해야 하고 사람 다루는 기술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전도는 예수님 만나고 변화된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그는 최근에 예수님 만났기 때문에 자신의 믿음을 아직 체계화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훗날 로마서부터 13권의 성경을 썻지만 그때는 아직 아무 성경도 쓰기 전입니다. 아직도 의심이 많고 확신이 없는 부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예수님을 직접 만나본 적도 없고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인 베드로, 요한등 제자들도 만나기 전입니다. 그는 지금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다만 단 한 가지를 압니다. 20절, 행9:20,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그는 그가 모르는 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가 알고 있는 것 한 가지만 말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우리도 이 정도는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초대교회 전도가 너무 쉽고 단순한 것이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어려운 신학토론이 아니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한 막달라 마리아가 어떻게 소리쳤습니까? 요20: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내가 주를 보았다”. 막달라 마리아도 어렵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본대로 말한 것 뿐입니다. “내가 주를 만났다”. 예수님 만난 안드레가 베드로에게 어떻게 전도했습니까? 요1:41, “와보라.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심플합니다. 예수님 만난 사마리아 여자가 어떻게 말했습니까? 요4:29,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우리도 이렇게 할 수 없을까요? 바울이 예수님 만나자 자기도 모르게 튀쳐나왔던 그 전도의 열정이 우리에게도 회복될 수 없을까요? 바울이 그렇게 된 배경이 있습니다. 19절, 행9:19,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형제들과 며칠 있을 새”. 바울의 전도는 먼저 예수님 만난 체험때문이고 다음은 함께 있던 제자들의 도움때문이었습니다. 다메섹에 있던 제자들은 바울이 회심했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찾아가 그에게 예수님에 대하여, 성경에 대하여, 제자도에 대하여 말해 주었을 것입니다. 이들의 도움을 받고 바울은 담대해져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입니다”. 전도했으니 초대교회는 전도하는 교회였습니다. 이미 믿던 신자도 전도하고, 새로 믿은 신자도 전도했습니다.
작년에 예루살렘에 가서 우연히 신들러의 무덤을 보았습니다. 그는 사업가로 독일에서 나찌에 의해 죽어가는 1000명의 유대인을 구해 낸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온 영화가 “쉰들러 리스트” 아닙니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쉰들러는 그가 구한 유대인 1,000명의 리스트를 작성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 그 이름을 기억합니다. 어떻게 다 그 이름을 기억해낼 수 있을까? 비밀이 있습니다. 그가 그들을 구해낼 때 자신이 소중히 여겼던 물건 하나하나를 팔아서 값을 구해냈기 때문입니다. 1,000명을 한꺼번에 구해낸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 사연과 애정을 가지고 구해 냈기 때문에 1000명의 이름을 다 기억한 것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생존자들이 모여 쉰들러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그때 쉰들러가 이렇게 말합니다. “더 살릴 수 있었어... 좀 더 구할 수도 있었는데”. “아니예요. 당신 덕에 천명이 살았잖아아요?” ”아니예요. 내가 돈을 좀 더 벌었더라면 더 구할 수있었는데“ “그 이상을 하셨잖아요?” “아니예요. 내가 이 차를 팔았으면 10명은 구했을 텐데..., 이 금핀으로 한 명 아니 두 명은 구했을텐데. 더 이상 구할 수 있었는데 아, 내가 안 한 거야.” 그렇게 울부짖었던 쉰들러의 정신이 너무 감사하고 고마워서 제가 그의 무덤에 유대인 방식대로 돌 하나를 올려 놓으면서 기도했습니다. “주여, 나에게도 한 생명을 주옵소서. 나에게 쉰들러가 가졌던 그 순수한 영혼에 대한 사랑을 주옵소서”. 그렇습니다. 전도는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은혜입니다. 바울이 즉시 전도했다면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예수는 주님입니다” 전도했다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은혜를 받고 삽니다. 사울아, 사울아, 불러준 은혜, 우리에게 기도하게 하시고 영육간의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고 안아주시고 눈을 열어주시는 돌보심의 은혜, 그리고 즉시 예수님을 증거하게 하는 은혜, 이 은혜를 누리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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