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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이윤재목사

행9:23-31 2012.7.22.(일) 바나바가 필요합니다

9:23-31 2012.7.22.() 바나바가 필요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사이의 갈등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도 마음에 안든 사람이 있습니까? 어느 시골 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렸습니다. 그날 강사가 용서를 주제로 설교하고 있었는 데 설교하다가 갑자기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미운 사람들 다 용서했습니까?” 했더니 한 노인이 손을 번쩍 들더니 말합니다. “, 다 용서했습니다. 한 사람은 빼고는”. “아니 왜 한 사람은 용서못했습니까?” 했더니 할아버지가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작년에 죽어 뿌렀어“. 할아버지는 다 용서했는 데 한 사람은 죽어서 용서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용서에도 때가 있습니다.

 

제가 지난 화요일, 교우들과 함께 여수 엑스포를 다녀왔습니다. 다음 날 아침 애양원을 가기 전에 오동도를 들렀는 데 거기에 동백나무와 함께 칡나무가 많았습니다. 칡나무는 나무를 칭칭 감고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거기에 등나무도 있었습니다. 칡나무와 등나무가 서로 얽혀 나무를 감고 있었는 데 어느 것이 칡나무인지 어느 것이 등나무인지 모르겠습니다. 옆에 있는 집사님이 말합니다. “목사님, 우리 말에 갈등이란 말이 있잖아요? ”은 칡나무고 은 등나무거든요. 이 두 나무는 서로 도는 방향이 달라 둘이 꼬이면 풀기가 어렵습니다. 칡나무가 오른 쪽으로 감으면 등나무는 왼쪽으로 감습니다. 그 둘이 얽히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을 일러서 갈등이라고 합니다”. 그때 제가 갈등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갈등으로 가득차 있지 않습니까? 성경 창8:22절에 좋은 말씀이 나옵니다. 노아 홍수가 끝나고 배가 땅에 정착한 후 하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는 낮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밤도 있습니다. 더위와 여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추위와 겨울도 있습니다. 계절도 그렇고 인생도 그렇고 인간관계도 그렇습니다. 그때 어떻게 하겠습니까? 위로가 필요합니다. 화해가 필요합니다. 누군가 중간 역할이 필요합니다. 오늘 말씀에 그 사람이 나타납니다. 이름이 바나바입니다. 바나바가 누구입니까? 이미 행4장에 나와 있습니다. 4: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 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구부로는 지금의 지중해에 있는 키푸로스 섬입니다. 이곳에 유대인으로 태어난 요셉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본명은 요셉인데 별명이 더 중요합니다. “바나바”,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도 별명이 있습니까?

 

1급 비밀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제가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먼저 얻은 별명은 화장각시였습니다. 초등학교 1-2학년때부터 그렇게 불린 것 같습니다. 저는 큰 아들로 태어났는 데 어머니가 아침마다 저를 씻기고 얼굴에 분을 발라 손을 잡고 학교로 데려갔습니다. 남자로서는 좋지 않은 별명인데 부모의 사랑을 기억하게 하기 때문에 기억에 남는 별명입니다. 별명속에 그 사람의 됨됨이와 환경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요셉의 별명은 바나바”, “위로의 아들이었습니다. 얼마나 남을 잘 위로했으면 위로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붙었겠습니까? 우리는 이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바나나처럼 갈등속에 사는 사람을 위로하고 화평을 이루겠습니까?

 

먼저 공감이 필요합니다.

화평을 위하여 필요한 첫 번째가 공감입니다. 오늘 말씀은 바울이 어떻게 예루살렘사도들과 교제를 시작하여 함께 하나님의 일을 시작했는가를 말하도 있습니다. 지난 주에 우리가 본대로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초자연적인 부름이었습니다. 정오의 빛보다 더 강한 빛이 하늘로부터 내려 쪼였습니다. 순간 바울은 엎드려 졌고 눈은 감기고 말았습니다. 엉금 엉금 기어 다메섹으로 갔더니 아나니아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정성을 다해 바울을 돌보았습니다. 기도해서 눈을 뜨게 하고 음식을 먹여 강건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바울은 회복되어 즉시로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라고 소리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쉽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꽃은 1년만에 피고 열매는 3년은 지나야 합니다. 소나무는 6, 참나무는 60년이 지나야 재목으로 쓸 수 있습니다. 한번 기도했다고 세례받았다고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사용하기 위하여 더 많은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1:15-17,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가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라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라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아라비아가 어디일까요? 아마 바울이 있었던 다메섹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리아의 사막이었을 것입니다. 사막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황량한 들판입니다.

 

왜 하나님은 바울을 아라비아 사막으로 데리고 간 것일까요? 바울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모세도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까지 40년을 광야에서 보냈습니다. 다윗도 십대 때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사울에게 쫓겨 광야를 전전하는 바람에 중년이 되어서야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엘리야도 이세벨 때문에 광야에 내쫓겼습니다. 광야는 사람들에게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학교입니다. 하나님은 이 학교에서 사람들을 네 가지로 훈련시킵니다. 첫째 기다림의 훈련입니다. 둘째 낮아짐의 훈련입니다. 셋째 하나님만 의지하는 훈련입니다. 넷째 불편함을 참아내는 훈련입니다. 이 훈련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들은 정금같이 훈련됩니다. 여러분에게도 인생 광야가 있습니까? 꼭 중동의 광야로 가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이미 광야입니다.

 

이번에 우리 교회에 온 앤디, 영국 목사후보생, 영국에서 교회를 개척하려고 준비하는 가운데 한국교회를 배우기 위해 우리 교회에 왔습니다. 성품도 좋고 참 착한 사람인데 잠깐 그의 간증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앤디는 다섯 살 때 어머니가 자살했답니다. 한참 어머니의 사랑을 받아야 할 소년 앤디는 어머니의 슬픈 영상을 가슴에 품고 16살까지 고아원에서 자랐습니다. 언뜻 볼 때 티가 없어 보이는 앤디에게 그런 아픔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고 고아원에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16살 때 부르지 않았다면 그는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요?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가 16살 때 예수님 만난 것이 그의 일생을 변화시켰습니다. 밝고 착한 성품이지만 우리는 그가 겪은 인생 광야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어머니없이 혼자 자랐던 어린 시절, 왜 하나님은 우리 어머니를 비참하게 데려가고 나만 홀로 남았느냐고 하나님께 따져 묻는 사춘기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앤디를 다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어디 앤디뿐이겠습니까? 우리가 볼 때 저 사람은 성격이 괴팍해. 못 됐어. 저 사람하고 이야기하지마할 때 우리는 그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알고 보면 다 불쌍한 사람입니다. 알고보면 다 이해가 가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공감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는 공감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의 겉모습만 보지 않고 바울의 속마음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바울을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26절입니다. 9: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 하여 그가 제자됨을 믿지 아니하니”. 왜 사람들은 바울을 두려워 했을까요? 바울의 과거 행적 때문입니다. 바울이 과거에 예수믿는 사람을 많이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뇌리에는 악명높은 바울의 이미미가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바울의 겉으로 나타난 모습과 그 속 마음의 차이를 보았습니다. 그렇게 과거에 사람들을 핍박하고 괴롭혔지만 바울도 나름대로 인생고를 겪은 사람입니다.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을 고생했습니다. 옛날에는 그리스도들이 그를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유대인들이 그를 싫어합니다. 그리스도들도 의심의 눈초리를 그에게 놓치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무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누군가 도와야 했습니다. 그래서 바나바가 나섰습니다. 그가 품고 사랑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이것이 공감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모두 어딘가 아픈 데가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언젠가 몸이 피곤해서 집사람에게 어깨를 주무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몸에 손이 닿는 순간 자지르지게 아팠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근육이 뭉쳐 있습니다. 이것을 압통점이라고 부릅니다. 대기만 하면 아픈 데입니다. 사람마다 아픈 곳이 있습니다. 근육만 아픈 것이 아니라 마음이 아픕니다. 건드리기만 해도 하고 소리를 지르는 부분이 있습니다. 형편이 안돼서 공부를 못한 분들은 학교이야기만 나오면 하고 소리가 납니다.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은 부모 이야기만 해도 하고 아파옵니다. 과거에 잘 살았으나 지금은 어려운 분들은 과거 이야기만 하면 눈물이 나옵니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아픈 소리를 냅니다. 살아 있기 때문에 아프고 아프기 때문에 살아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산다는 것은 서로의 아픈 데를 만져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감입니다. 중세시대 한 랍비에게 제자가 찾아 왔습니다. “선생님, 계십니까? 선생님, 제가 선생님께 온 것은 선생님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서 찾아 왔습니다”. 랍비가 말했습니다. “고맙네. 자네는 내가 가장 아픈 데가 어딘지 아나?” 제자가 미쳐 대답을 못하고 있을 때 랍비가 말했습니다. “자네는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내가 어디가 아픈지도 모르고 있군. 어떻게 내 아픈 데도 모르고 나를 사랑할 수 있는가?” 제자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아픈 데를 모르면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아픈 데를 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감입니다. 화평을 위해 먼저 공감이 필요합니다.

 

경청이 필요합니다.

화평을 필요한 또 하나는 경청입니다. 바나바는 바울을 공감했습니다. 바울의 외로움, 바울의 고통, 바울의 아픔을 이해했습니다. 그 결과 바울을 예루살렘에 데리고 가서 사도들에게 소개했습니다. 27절입니다. 9: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했는지를 전하니라”. 질문은 이것입니다. 바나바는 어떻게 바울에 대하여 그렇게 잘 알게 되었을까요? 어떻게 바나바는 바울의 과거와 현재를 잘 알고 있는 것입니까? 잘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룻밤을 지내며 바울의 말을 잘 들었기 때문입니다.

 

경청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언젠가 병원에 갔는 데 의사가 자신의 가정일을 저에게 자세히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아는 의사였고 또 제가 목회자기 때문에 저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긴 했어도 누가 환자이고 누가 의사인지 몰랐습니다. 제가 그의 긴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했습니다. “, 환자가 의사의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가 환자의 말을 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저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나는 사람의 말을 잘 듣는 편인가? 말을 많이 하는 편인가? 말을 많이 하는 편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듣는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우선 말을 들을 때 그 사람에게 집중할 필요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말을 들을 때는 그 사람 쪽으로 몸을 숙이고 눈도 그에게 맞추며 집중했습니다. 사실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내용이 뻔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제가 남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세 가지 실수를 자주 합니다. 첫째 설득하려고 가는 것입니다. 듣다 보면 답답합니다. 그러면 재빨리 이야기를 중단시키고 내 생각을 말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내 경험을 길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한꺼번에 해답을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말을 들으면 벌써 해답이 나옵니다. 성경 몇 장 몇 절 하고 답이 나옵니다. 다 들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말을 끊고 해답을 줍니다. 그러면 반드시 대화는 실패합니다.

 

한번은 어떤 청년이 와서 두 시간이나 이야기하고 갔습니다. 저는 한 마디도 안하고 그저 듣기만 했는 데 청년이 2시간이나 이야기하고 일어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잘 듣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무엇을 들었습니까? 저는 한 마디로 안했습니다. 청년은 자기가 다 말해놓고 잘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이 맞습니다. 말을 하면 해답이 없습니다. 그러나 말을 들어주면 해답이 생깁니다. 이상합니다. 누군가 내 말을 들어주면 내가 말하는 사이에 해답이 나옵니다. 해답은 상대방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말하는 말속에 있습니다. 이것이 경청의 능력입니다. 성경이 말합니다. 18:13,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 인디언 속담에도 이런 말이 있습니다. “속삭이는 소리를 들어라. 그러면 고함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 여러분은 서로의 말을 잘 들어줍니까? 교회 지도자가 할 일이 이것입니다. 교인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입니다. 장로님을 그래서 세웠습니다. 교인 말 들어주라고 세웠습니다. 여기 저기 다니며 말을 많이 들어주세요. 목자를 세운 것은 목원들의 말을 잘 들어주라고 세웠습니다. 목회자를 세운 것은 교인들의 말을 잘 들어주라고 세웠습니다. 그런가 하면 교인들은 목회자의 말을 잘 들어야 합니다. 목원들은 목자의 말을 잘 들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장로님들의 말을 잘 들어야 합니다. 서로 잘 들어야 합니다.

 

사실 기도도 잘 듣는 것입니다. 한번은 데레사 수녀가 기도했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듣기만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수녀님은 기도를 어떻게 하세요?” “듣지요”. 그때 하나님은 무엇 하십니까? “하나님도 듣지요”. 기도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말을 듣는 것입니다. 8:34이 중요합니다.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문 곁에서 기다리며 그의 음성을 듣는 것, 그것이 기도입니다. 시편은 잘 듣기 위해서 잠잠하라고 74번이나 말하고 있습니다. 130:5,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제가 목회하면서 사람과 사람간의 갈등을 많이 봅니다. 경험을 통해 갈등을 해소하는 몇 가지 원리를 발견했습니다. 먼저 갈등이 일어나면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려고 노력하라. 갈등은 사건의 차이가 아니라 관점의 차이입니다. 틀린 것이 그른 것은 아닙니다. 내 입장과 상대방의 입장이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관점만 바꾸면 문제는 해결됩니다. 역지사지입니다. 이것만 잘해도 모든 갈등의 70%는 해결됩니다. 두 번째는 갈등이 있을 때는 지혜로운 타협점을 찾으라. 대개 갈등은 양쪽 다 일리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쪽이 100% 잘하고, 다른 한쪽이 100% 잘못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서로 지혜로운 타협점을 찾아야 합니다. 이 경우 이야기를 피해서는 안됩니다. 갈등이 있다 대화를 포기하면 타협점은 안 생깁니다. 그래서 셋째가 중요합니다. 갈등이 계속될 때, 도망치기보다는 부딪혀서 해결해 나가라. 제가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갈등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갈등 자체는 별 것이 아닌데 마귀가 그것을 역이용한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갈등을 조장하고 장기전으로 가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게 하고 대화를 거절하게 하고 결국 파탄으로 가야 합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어떤 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 일했습니다. 경험도 없고 지식도 없었습니다. 그때 교회학교를 맡아 일했는 데 교회학교 부장님이 사사거건 제가 하는 일에 간섭하고 반대합니다. 그래서 관계가 많이 불편해졌습니다. 그 분 입장에서는 제가 경험이 없고 뭘 몰라서 그런다고 했겠지만 제 입장에서는 속상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야기하기도 싫고 가능하면 안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나쁜 것은 교회학교가 부흥되지 않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학교 담당 목회자와 담당 부장이 사이가 안좋은 데 교회학교가 부흥되겠습니까? 어느날 아침에 기도하는 데 그런 생각이 퍼득 들었습니다. “, 마귀의 역사구나. 마귀가 노리는 것은 우리 두 사람의 갈등을 통해서 교회학교를 죽이는 것이구나”. 그 생각이 나자 정신이 바짝 났습니다. 그때부터 생각을 바꿨습니다. 부장님을 만나면 눈 딱 감고 인사하고 더 친절히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가까이 있으면 손 잡아주고 멀리서 보면 일부러 뛰어가서 인사했습니다. 그랬더니 사이가 좋아졌습니다. 그리고 교회학교도 부흥했습니다. 갈등이 올 때 도망치지 말고 부딪혀야 할 이유는 영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마귀를 헬라어로 다아 불러스라 합니다. “디아, ”사이, ”불러스“, ”갈라놓는 자자입니다. 마귀는 사이를 갈라놓는 자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사이를 갈라놓으면마귀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되게 하고 마귀는 분열시킵니다. 그리고 분열의 최종적인 목적은 교회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갈등이 생기면 사람을 보지 말고 갈등 너머 마귀를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엡4:26-27절이 맞습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갈등 해결의 네 번째 원리가 있습니다. 만일 당장 해결될 수 없다면, 미워하지 말고 해결될 때까지 기도하기로 작정하라. 혹시 금방 해결이 안돼도 감정이 상해서는 안됩니다. 오로지 기도에 전념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중요한 것은 경청입니다. 경영의 대가 피터 그래커가 말했습니다. “모든 문제의 60% 는 잘못된 커뮤니케이션 때문에 생겨난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누구 하고나 잘 지낸다는 뜻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다는 것은 갈등은 슬기롭게 해결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의 말을 잘 경청한다는 것입니다. 화평을 위하여 경청이 필요합니다.

 

화해가 필요합니다.

화평을 위해 필요한 세 번째가 화해입니다. 화해는 두 사람 사이에 평화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바울을 마음으로 이해하고 공감한 바나바, 바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준 바나바, 그는 이제 바울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비롯한 제자들이 교회를 이끌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누구입니까? 3년간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제자들입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제자들은 3년간 예수님을 직접 뵙고 말씀도 듣고 기적도 보고 십자가와 부활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교회 모인 사람들은 다 믿음의 형제와 자매지만 교회에는 질서가 있습니다. 먼저 믿은 사람과 늦게 믿은 사람, 목회자, 장로같이 하나님이 세운 리더쉽과 교인, 목자, 교사같은 하나님의 사역자가 있습니다. 나 혼자만 잘 믿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좋은 관계를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28절을 보십시오. 9:28,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얼마나 보기 좋습니까? 교회의 뿌리인 제자들과 갖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바울이 함께 힘을 합쳐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이 둘 사의의 중재를 바나바가 한 것입니다.

 

여러분, 화해가 무엇입니까? 둘 사이를 연결하는 사람입니다. 적대적인 두 당사자 사이를 사랑으로 연결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도 예수님을 통해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연결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그 화해의 역할을 부탁했습니다. 고후5:18,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그 화목하게 하는 직책이 목회자입니다. 그 화목하게 하는 일을 위해 장로를 세우고 권사, 안수집사를 세웠습니다. 교회 모든 직책은 명예직도 아니고 권위직도 아닙니다. 권위를 내세우려면 세상밖으로 나가십시오. 교회 모든 직책은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있습니다. “화해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나와 하나님을 화목하게 하셨듯이 이제는 나를 통해 세상과 하나님을 화목하게 하려고 하나님이 나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화목의 방법은 하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하나님과 화목시키시려고 한 방법은 딱 한 가지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남을 살리는 것, 그것이 예수님이 이룬 화목입니다.

 

6.25때 평안도의 한 교회가 폭격을 맞아 폐허가 되었습니다. 교회를 건축해야 하는 데 가난한 시절, 헌금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한 신문이 광고가 났는 데 제목이 안구를 팝니다입니다. 안과의사가 광고를 보고 광고의 주인을 만났습니다. 뜻밖에 젊은 아가씨였습니다. ”왜 눈을 팔려고 하십니까?“ 했더니 젊은 아가씨가 말합니다. ”우리 교회가 폭격을 맞아 다시 지어야 하는 데 돈은 없고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어 내 눈이라고 팔려고 광고했습니다“. 안과의사가 감동을 받고 헌금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교인들이 감동을 받아 너도 나도 헌금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눈을 팔아 교회를 살린 사람, 그가 화해자입니다.

 

50년전 미국의 젊은 목사 5명이 남미 원주민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에콰도르 정글에 들어갔습니다. 뜻밖에 그들은 원주민에게 붙잡혀 목숨을 잃었습니다. 50년 후 한 젊은 선교사가 같은 선교지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50년전에 죽은 아버지의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원주민에게 죽을 때 그의 나이 5살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죽인 원주민에게 들어가 자기 아버지를 죽인 추장을 아버지로 삼고 그 부족을 전도했습니다. 몇 년 후 수 백명이 예수믿고 2명의 목사가 나왔습니다. ”화해입니다. 자기를 죽여 남을 살리는 것, 그것이 화해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위해 눈을 팔지 않고 남미의 정글에 선교사로 가지 않아도 화해자입니다. 우리가 선 자리가 어디든 우리는 적대적 당사자와 갈등의 현장에서 평화의 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서 평화를 만들어 냅니까? 평화를 깹니까? ”바나바“, ”위로의 아들“, 우리가 위로를 받고 살았듯이 우리도 위로자가 되어야 합니다. 바나바가 바울을 공감하고 경청하고 그를 위한 화해의 사람이 된 것처럼 우리도 바나바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31, 오늘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와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교회가 든든히 서 갑니다. 수가 많아 집니다. 세상이 평안해집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더 많아 집니다. 이 모든 축복은 내가 바나바가 될 때 일어납니다. 그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