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3:1-5, 히11:24-27 2012.7.8.(일)
모세를 키우는 교육
부모의 가장 큰 소원이 무엇입니까? 자녀가 잘되는 것입니다. 자녀가 잘되기 위해서는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어느 가정에서 엄마가 아들을 꾸짖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공부는 안하고 늘 놀기만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말했습니다. “넌 누구를 닮아서 그렇게 공부를 못하니? 제발 공부 좀 해라.” 그러자 아들이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엄마는 에디슨도 몰라요? 에디슨은 공부는 못했지만 훌륭한 발명가 만 됐지 않아요?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잖아요.” 그러자 엄마가 열받아서 크게 소리쳤습니다. “뭐라고? 에디슨이 어쩧다고? 에디슨은 이 놈아, 영어라도 잘했잖아.”. 에디슨이 미국 사람이기 때문에 당연히 영어는 잘했지 않겠습니까? 부모는 자녀가 잘되기 바래서 “공부하라, 놀지 말아, 컴퓨터 그만 해라” 하겠지만 그렇게 한다고 자녀가 반드시 잘되는 것이 아닌 것을 우리는 압니다. 어떻게 해야 좋은 자녀가 될까요? 현재까지 나온 결론은 공부를 잘하면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있지만 그렇다고 그가 반드시 훌륭한 인물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좋은 대학에 가는 것과 훌륭한 인물이 되는 것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녀에게 무엇을 바랄까요? 좋은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지식교육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인격교육이 필요하고 영적 교육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못됐는 데 지식만 많으면 공산주의를 만들어 낸 칼 마르크스 같은 사람이 됩니다. 공부는 잘하는 데 인성이 잘못 되어 있으면 버지니아공대 조승희같은 사람이 됩니다. 2007년, 미국 버니지아 공대에서 무차별 총기난사로 32명이 죽인 사람, 조승희, 조승희는 공부는 잘했지만 누구하고 사귀지 못하는 정신적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공부잘하는 것 중요하지만 건강한 정신과 인성, 성품,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길러질까요? 한 가지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의 인성교육과 교회의 영적 교육과 학교의 지식교육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런 이상적인 사람이 성경에 있을까요? 있습니다. 많지만 그 중 한 사람이 모세입니다. 모세는 신구약을 막론하고 성경에 나오는 가장 뛰어난 인물중 하나입니다. 구약을 대표하는 인물이 모세와 다윗, 신약을 대표하는 인물이 베드로와 바울, 적어도 그는 성경 4대 인물중 하나입니다. 모세는 그 중에서도 가장 좋은 교육의 모델입니다. 왕궁에서 배운 지식교육, 가정에서 배운 신앙교육, 인생에서 배운 고난의 교육까지 그를 인물로 만든 많은 요소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와 우리 자녀가 어떻게 모세같은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특히 교회학교 교육을 통해 우리는 어떤 다음 세대를 길러 낼까 함께 은혜받으시기 바랍니다.
나는 아름다운 아이다
먼저 모세를 만든 첫 번째 교육이 오늘 23절에 나타납니다. 히11: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달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 하지 아니하였으며”. 모세가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첫 번째는 아름다운 자화상때문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 태어났습니다. 그 당시 바로는 이스라엘 남자가 태어나면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모세가 태어나자 모세의 부모도 이 명령을 준행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부모가 모세를 보자 차마 죽일 수 없었습니다. 자식이니까 불쌍했기 떄문만이 아닙니다.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습니다. 23절 다시 보십시오.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부모의 눈에 모세를 “아름다운 아이”였던 것입니다.
“아름답다”는 것이 무엇일까? 얼굴이 예쁘다는 뜻입니까? 그런 뜻도 있을 것입니다. 출2:2절에 보면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들 석달을 숨겼더니.” 여기서 모세는 “준수한 아이”로 나타납니다. “준수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토브”, 이 말은 good, “좋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좋을 때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우면서 “토브 메오드” 합니다. very good, “매우 좋다”는 말입니다. “준수했다”는 말은 부모가 볼 때 모세가 너무 너무 좋은 아이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얼굴만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으로 이 아이가 큰 인물이 될 것 같은 믿음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의 명령이 무서워 그를 강물에 던질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너무 기대가 큰 아이라 차마 그럴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행7:20에 보면 “아름답다”, “준수하다”는 본래 뜻이 니타납니다. 스테반이 모세에 대하여 한 설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행7:20, ”그때에 모세가 태어났는 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모세가 아름다웠는 데 그냥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웠습니다“. 이것이 ”아름답다“는 성경적 의미입니다. 다만 얼굴이 아름다웠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모세는 결코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히브리민족의 아들, 그는 갈대상자에 실려 살지 죽을지 모르는 먼 길을 떠나야 할 운명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그는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아무런 미래도 꿈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그는 아름다웠습니다. 행7:20, ”그때에 모세가 태어났는 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웠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를 아름답게 보십니까? 여러분 자신을 아름답데 보십니까? 어릴 때 부모가 자녀를 아름답게 봐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릴 때 부모가 본 내 모습이 나의 본래 모습입니다. 어릴 때 부모가 나를 끔찍이 사랑했으면 나는 나를 사랑할만한 존재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어릴 때 부모가 나에게 지나치게 무관심했으면 나는 나를 무시해도 좋을 존재로 살아갑니다. 어릴 때 부모가 본 내 모습이 내 진짜 모습입니다. 문제는 누구의 눈으로 나를 보느냐가 문제입니다. 내가 나를 보는 눈을 자화상이라고 합니다. 남이 나를 보는 눈을 평판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는 눈을 신앙적 자화상이라고 합니다. 부모가 할 일은 자녀에게 부지런히 신앙적 자화상을 심어 주는 일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신앙적 자화상만 확실히 심어주면 자녀는 평생 그 자화상을 가지고 살아 갑니다. 어릴 때 제가 자라면서 부모에게 감사한 것이 있습니다. 자라면서 저는 많은 실수도 했고 실패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부모님이 한 말이 있습니다. “괜찮아. 너는 잘 될거야. 내가 본 것이 있어”. 부모님은 늘 저를 격려했습니다. 실패하고 잘못해도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를 하나님의 눈으로 봅니까? 늘 “너는 괜찮아. 잘 될거야” 말해 줍니까?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쓴 서울대 김난도 교수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녀가 어릴 때 할 일은 딱 두 가지랍니다. “나는 누구인가?”를 깨닫는 것과 “나는 무엇을 잘할 수 있는가?” 이 두 가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를 되기 위해 부모가 할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너는 아름다운 아이야”라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지금 무엇을 해야 되나?”를 결정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지금 발견하지 못해도 좋습니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발견하기 전에 내가 잘할 수 있는 사람임을 알게 해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작년에 영국에 가서 감리교의 창설자 요한 웨슬리 생가에 들렀습니다. 웨슬리가 훌륭한 인물이 된 것은 그 부모의 격려였습니다. 그 어머니 수잔나는 자녀들을 위해 일주일에 한번씩 일대일 홈스쿨링을 할 뿐 아니라 잠자기 전에 꼭 세 마디를 자녀들에게 들려 주었답니다. “God loves you”.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신다”. “You can do everything”. “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You are worthy in the world“. ”너는 세상에서 가치있는 존재다“. 이 세 마디가 웨슬리를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위대한 사람들은 위대한 일을 하기 전에 위대한 자화상을 가졌습니다. 얼마전에 돌아간 강영우 박사, 암으로 돌아가면서 그런 말을 했습니다. “암보다 더 큰 병은 자기 포기의 병이다. 부정적인 생각으로 자기를 포기하는 것이 가장 나쁜 병이다”. 그리고 그는 “감사합니다“ 하고 하늘 나라 갔습니다. 39살의 나이에 소아마비 바이러스로 하반신 마비가 온 프랑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평소에 좋아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너에게 다리가 있거든 다리로 달려라. 만일 다리가 없거든 꿈으로 달려라“. 신앙적 자화상이 운명을 바꿉니다. 환경을 바꾸기 전에 자화상을 바꿔야 합니다. 이스라엘에 미디안군대가 쳐들어 왔습니다. 하나님이 타작하던 기드온에게 찾아가 그를 군대로 무장하기 전에 믿음으로 무장시켰습니다. ”큰 용사 기드온아, 여호아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나님은 미디안 군대를 물리치기 전에 기드온의 부정적 자화상부터 물리치셨습니다. 무서워 숨는 기드온을 ”큰 용사“라고 불러주었습니다. 자화상이 바뀌자 기드온은 미디안을 대파했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이스라엘의 목동 다윗을 불러 말했습니다. ”너는 내 마음에 합한 자다.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나님은 얍복강에서 야곱을 불러 이름을 바꿔주었습니다. ”네 이름은 더 이상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예수님을 베드로를 불러 사람을 낚기 전에 이름부터 바꿔주셨습니다. ”네 이름은 시몬이 아니라 게바라 하리라“. 시몬은 작은 조약돌이요 게바는 큰 바위입니다. 신앙적 자화상을 가지십시오.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전에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나를 볼 때는 늘 부족하고 사람들이 볼 때 대단하지 않지만 하나님이 볼 때 아름다운 존재입니다. 여러분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합시다. ”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름다운 사람이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딸이다“. 여러분 자녀에게 이렇게 말해 줍시다. ”누구 누구야, 너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아이야“. 그 믿음이 우리를 바꿉니다.
나쁜 것을 거절하고 좋은 것을 선택하라
우리가 좋은 신앙적 자화상으로 출발했으면 모세처럼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 24절 이하입니다. 히11:24-26,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자화상을 고쳤으면 다음 무엇을 해야 합니까? 모세처럼 두 가지를 하면 됩니다. 24절, “거절하고”, 25절, “더 좋아하고”. 거절할 것은 거절하고 더 좋아할 것을 더 좋아해야 합니다.
먼저 24절을 다시 보십시오. 히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받기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 먼저 거절해야 할 것이 있어야 합니다. 모세는 무엇을 거절했습니까? 애굽의 공주의 아들을 거절했습니다. 여러분, 모세가 공주의 아들을 거절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아십니까? 당시 애굽은 세계 최강국이었습니다. 지금의 미국, 중국, 러시아를 합쳐놓은 것보다 더 컷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그 나라 왕자였습니다. 잘하면 애굽의 왕도 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 자리를 거절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왜 거절했겠습니까? 자화상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자화상이 달라지면 사는 이유와 목적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보자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님이 없을 때는 무조건 성공만 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안에서 내가 누군가 깨닫자 하나님안에서 내가 할 일이 생각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거절합니까? 여러분의 자녀는 무엇을 거절하도록 가르칩니까? 25절에 “죄악의 낙”이란 말이 나옵니다. 성경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인가 거절한 사람들입니다.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 기도하기 위하여 술과 포도주를 거절했습니다. 느헤미아는 무너진 조국을 생각하면서 왕의 음식을 거절했습니다. 요셉은 순결하게 살기 위해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거절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울을 죽이고 싶은 감정의 유혹을 거절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성전과 왕궁을 거절했습니다. 미국의 벤쟈민 프랭크린은 하나님앞에 올바로 살기 위해 매일 몇 가지를 거절했습니다. 과음, 과식, 자신과 타인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말, 낭비, 오늘의 시간을 헛되어 쓰는 것, 게으름, 분노, 몸을 함부로 여기는 것, 그 결과 그는 훗날 미국의 유명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 거절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무엇인가 채우십니다. 거절할 뿐 아니라 선택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히11:25-26,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는 쾌락을 거절할 뿐 아니라 고난을 선택했습니다. 신앙은 거절이며 또한 선택입니다. 신앙은 버릴 것은 버리고 택할 것은 취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금방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읽은 출3장은 모세가 왕궁에서 나와 호렙산에서 거한지 40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모세가 왕궁을 떠난지 40년이 지났습니다. 저는 이집트에서 홍해를 건너 광야를 거쳐 이스라엘 까지 적어도 20번 더 지나갔습니다. 그 중에 한 두 번은 찝차를 타고 허리가 휘도록 광야를 달렸습니다. 그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 하나님은 모세를 이 광야학교에 입학시켜 40년을 훈련시키셨구나”.
그때 모세가 광야에서 배운 네 가지 필수과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기다림이라는 과목입니다. 모세는 무려 40년을 광야에서 기다렸습니다. 그것도 양 몇 마리를 이끌고 아무도 없는 호렙산 기슭에서 40년을 기다렸습니다. 40년은 적은 세월이 아닙니다. 긴 기다림, 그것이 모세가 통과한 첫 번째 과목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때를 기다립니까? 두 번째 과목은 무명이라는 과목입니다. 모세는 한때 잘나가던 이집트 왕자였습니다. 지금의 애굽왕은 그의 의형제입니다. 그런데 그 화려한 왕궁을 떠나 지금은 황량한 광야에 삽니다. 그리고 모두 그를 잊었습니다. 사람이 가장 비참한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잊혀진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기전에 무명의 그림자에 두셨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훈련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겸손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세 번째 훈련이 외로움의 훈련입니다. 광야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람도 즐거움도 재미도 친구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즐거워 하기 전에 우리는 종종 외로움의 골짜기를 통과해야 합니다. 마지막이 불편의 훈련입니다. 모세는 40년간 왕궁에서 호의호식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광야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좋은 음식도 잠자리도, 시종도 시녀도, 부릴 군대도 없습니다. 너무 불편합니다. 그래서 가난이 몸에 배고 겸손이 성품이 되고 하나님이 위대하게 보일 때까지 하나님은 모세를 불편함의 학교에 두셨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쓰시기 위해 여러분을 종종 광야 학교에 입학시킨다는 것을 아십니까?
여러분의 자녀는 어떻습니까? 너무 편하게 두는 것 아닙니까? 고생시키기에 너무 아까워서 모든 것을 부모가 다 해줍니까? 내일의 꿈보다 현재의 즐거움에 빠져 살게 하지 않습니까? 모세를 통해 세 가지 영적 진리를 배웁니다. 하나는 불편이 불행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편은 불행이 아닙니다. 가난은 불편합니다. 그러나 불행은 아닙니다. 오히려 부자중에 불행한 사람이 더 많습니다. 자녀들에게 불편을 가르쳐야 합니다. 둘째 작은 믿음이 겸손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작은 것을 구하면서 자신이 겸손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큰 것을 구하면 하나님께 미안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을 하나님으로 인정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작은 믿음이 겸손이 아닙니다. 세 번째는 게으름이 만족은 아닙니다. 우리는 교회안에서 “만족하라”, “자족하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그런데 가끔 이 말은 운명주의의 다른 말처럼 들릴 때가 있습니다. 너무 욕심내지 말고 적당히 사는 것이 만족이라고 배웁니다. 그렇다면 아무 것도 안 하고 사는 것이 가장 만족스러운 삶일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만족은 아무 것도 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 않고 주어진 결과를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자족이 아닙니다.
모세처럼 되기 위해 우리가 결심할 것이 있습니다. 불편하게 살아야 합니다. 불편속에서 행복해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가져야 행복한 것이 아니라 못가져도 행복할 수 있슴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큰 분이기 때문에 크게 기도하고 크게 요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땀흘려 일해야 합니다. 그래야 모세처럼 됩니다. 모세처럼 죄를 거절합시다. 값싼 행복주의를 거절합시다. 손쉽게 성공하는 법을 거절합시다. 일확천금을 얻는 법을 거절합시다. 죄악의 낙을 거절합시다. 그 대신 고난을 선택합시다. 돌아가는 정도를 선택합시다. 불편속에서 만족을 배우는 법을 선택합시다. 대가를 지불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도를 선택합시다. 아멘. 하나가 더 있습니다.
가슴에 하나님의 불이 붙어야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던 마지막이 여기 있습니다. 호렙산에서 40년 기간이 차가던 어느날 모세가 광야를 지나다 어느날 이상한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나무가 불에 타는 광경을 본 것입니다. 조금 더 가까이 가서 보았더니 “스네”라고 부르는 가시나무였습니다(그림). 키는 보통 2-3미터 정도이고 줄기는 잘고 구부러져서 건축자재나 심지어 화목으로도 쓸 수 없는 나무, 그나마 나무에 숭얼 숭얼 가시가 박혀 있었습니다. 모세가 놀라 가까이 가 보았더니 갑자기 그 나무 가운데서 우뢰와 같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출3:5, “모세야, 모세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나무에 불이 불었는 데 타지는 않고 그 나무에서 하나님의 소리가 나다니 어떻게 된 것입니까? 출3:2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호아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중요한 것은 “여호아의 사자”입니다. 여호아의 사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지금 모세를 불러 신을 벗으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라”고 지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언제나 좋은 교육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교육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좋은 교육은 교육의 현대화가 아니라 교육의 본질화입니다. 좋은 교육은 좋은 교재, 최신식 컴퓨터화, 탁월한 교육행정, 심오한 교육철학이 아닙니다. 좋은 교육은 언제나 성경으로 돌아가는 교육입니다. 성경으로 돌아가 어떻게 하게 합니까? 하나님을 만나게 합니다. 그 가슴에 하나님의 불이 붙게 합니다. 교사는 불끄는 사람이 아니라 불 붙이는 사람입니다.
부산 서부교회는 주일학교만 2만명 모인답니다. 어른 수보다 교회학교 수가 훨씬 많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에 불타는 교사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 교회는 다른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주 목사님 설교를 교재화해서 가르칩니다. 교육 커리큐럼이 좋고 교육 프로그램이 좋은 것도 아닙니다. 딱 하나가 좋습니다. 교사들이 좋습니다. 교사들이 열심입니다. 교사들이 교재 준비하는 시간보다 기도하는 시간이 더 많습니다. 금요일마다 교사들이 수 백명이 기도합니다. 어린아이 하나 하나 이름을 불러가며 기도합니다. 그 교사들속에 타고 있는 불이 어린이들에게 그대로 전염됩니다. 그래서 부흥합니다. 미국의 무디도 100만명을 주께 인도했습니다. 그것은 그를 전도한 교사 킴볼 때문입니다. 킴볼이 구두방 점원으로 일하던 무디를 전도했고 그 열심히 그에게 전염된 것입니다. 출3:5, “네가 선 땅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교육은 살아계신 하나님앞에 무릎을 꿇게 하는 것입니다. 신을 벗는 것은 무장을 해제시키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신을 벗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철저히 복종하는 사람을 통해 자신의 일을 하십니다. 교육은 우리 자녀를 하나님께 복종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제가 작년에 영국에 가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침체에 빠진 가운데 거의 대부분의 교회에 교회학교가 사라졌습니다. 올해 우리 교회에 왔던 목사님이 시무하는 런던 브렌트우드의 트리니티 쳐치는 장년이 약 500명 모인 교회입니다. 영국에서는 아주 큰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도 교회학교는 없었습니다. 아이들이 수가 적어 모두 합반으로 간단히 모이고 있었습니다. 사실 교회학교는 영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780년, 평신도인 로버트 레이크스와 목사인 토머스 스톡이 주일학교를 창립해서 빈민가에서 처음으로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점점 자라 전 영국에서 실시했고 그것이 세계로 퍼져 주일학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학교가 본 고장에서 스톱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영국사회의 검은 먹구름입니다. 지금 교회가 침체한 것보다 교회학교에서 어린이들이 없다는 것이 영국 미래의 더 큰 먹구름입니다. 어차피 부모세대는 가는 데 그들에게 탓던 성령의 불이 자녀들에게도 타야 하는 데 그 불이 꺼진 것입니다.
우리 나라도 인구수의 감소와 함께 교회학교가 줄고 있습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의 절박한 희망은 교회학교를 통해 다음 세대를 기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국처럼 되지 않기 위해, 우리가 유럽처럼 되지 않기 위해 우리가 사력을 다해 지키고 가꿀 것은 교회학교입니다. 아직도 여러분의 자녀들을 교회학교에 보내지 않고 있습니까? 아직 어리니까 나이가 먹으면 알아서 교회 나오겠지 생각합니까? 현재 한국사회 교인의 85%가 10대에 교회 다닌 주일학교 출신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아직 여러분의 자녀가 10대인데도 교회 나오고 있지 않다면 그들의 남은 인생에 교회 나올 확률은 15%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리고 교회 나오더라도 할 수 있으면 부모와 자녀가 한 교회 나오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아십니까? 부모와 자녀가 한 신앙의 전승을 받아 함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좋습니다. 이를 위해 시급히 필요한 것이 교사입니다. 교사는 우리 자녀들을 키우는 영적 스승입니다. 우리도 다 어릴 때 교회학교 선생님들에게 배우고 자랐습니다. 저는 지금 제가 유치부부터 고등부, 대학부까지 가르쳤던 선생님들을 거의 기억합니다. 그들이 가르쳐준 노래, 율동, 동화가 제 어린 시절의 저를 형성했습니다. 한신교회 목사도 그냥 된 것이 아닙니다. 어릴 때 교회학교 선생님에게 배우고 자란 것입니다.
2008년 3월, 이스라엘에서 사고가 났습니다. 팔레스타인 청년 두 사람이 예루살렘 예시바 랍비학교에 들어와 갑자기 총을 난사하여 랍비 35명이 죽고 다치게 했습니다. 팔레스타인이 청년이 그렇게 한 것은 단 한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이스라엘을 이끌어 가는 것은 랍비들이다. 따라서 이들만 없애면 이스라엘은 무너진다“. 그들의 행동은 잘못되었지만 그들의 생각은 옳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율법과 성경이 지배하는 사회이고 그 성경은 랍비들이 가르치기 때문에 랍비가 무너지면 이스라엘은 무너집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희망은 다음 세대, 교회학교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교사들이 그 중심에 있습니다. 교사가 무너지면 다 무너집니다. 교사로 지망해 주십시오. 어릴 때 배운 은혜를 갚으십시오. 특히 이번 여름성경학교에 교사로 자원해 주십시오. 누구나 부족합니다. 그러나 자원하는 순간, 하나님이 도우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어린 자녀들이 미래 한국사회의 주인공들이 되게 합시다. 우리가 기르는 자녀들이 모세처럼 되고 다윗처럼 되고 베드로, 바울처럼 되게 합시다. 모세처럼 우리는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선포합시다. “너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아이다”. 그리고 거절할 것을 가르치고 선택할 것을 가르칩시다. 가슴에 모세처럼 하나님의 불을 품게 합시다. 그리하여 인물을 만듭시다. 주여, 우리 자녀가, 우리 한신의 교회학교가, 한국교회의 다음 세대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인물이 되고 역사의 주역이 되게 하옵소서.
'추천 설교 > 이윤재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9:23-31 2012.7.22.(일) 바나바가 필요합니다 (0) | 2017.01.02 |
---|---|
행9:1-22 2012.7.15.(일) 바울이 받은 은혜 (0) | 2017.01.02 |
행8:14-24 성령님은 능력입니다 2012.7.1(일) (0) | 2016.12.30 |
빌립의 사마리아 선교행8:1-8 2012.6.24(일) (0) | 2016.12.30 |
행7:54-60 스테반처럼 승리하게 하소서 2012.6.17(일) (0) | 2016.12.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