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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이윤재목사

행11:19-30 안디옥교회(2) 예수님을 사랑하는 교회 2012.9.2(일)

11:19-30 2012.9.2()

안디옥교회(2) 예수님을 사랑하는 교회

9월 첫 주일입니다.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찌는 계절, 이번 가을은 우리에게 하늘이 열리고 영혼이 살찌는 가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가을을 기대하시나요? 이를 위해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교회나오고 하나님믿는 것이 행복하십니까?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느끼는 것중의 하나는 가끔 행복하지 않고 자주 기쁨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잡지에서 미국의 한 목사님이 쓰신 글을 보았습니다. 그 분은 잘 변화되지 않은 한 교인 하나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름은 데니입니다. 데니는 그 교회만 60년 다니는 고참신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평생 그 교회를 출석해 왔지만 한번도 웃고 다니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교인들이 데니씨. 얼굴 좀 펴고 다니세요”. 하면 무표정하게 하면서 도로 얼굴이 굳어 집니다. 그렇다고 데니가 교회에서 무슨 큰 일을 저지르고 다니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 참석으로 하면 누구보다도 모범자입니다. 그러나 누구하고 특별히 친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혼자 다닙니다. 가끔 자기 생각에 교회가 마음에 안 들면 뒤에서 콩당 콩당 합니다. 그렇다고 누구하고 멱살잡고 싸우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은 데니가 혼자 무표정하게 다니는 것에 익숙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혼자 다니고 가끔 콩닥 콩닥 교회에 대하여 불평하고 그러면서도 예배때마다 항상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데니의 모습에 익숙해 있다는 것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종교중독이라는 단어가 딱 떠올랐습니다. 중독중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종교중독입니다. 기쁨이 없어도 삶의 변화가 없어도 주일마다 교회나오고 사도신경, 주기도문하고 헌금하고 성찬식 참석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얼굴은 하나도 기쁘지 않고 마음은 조금도 행복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교회 생활, 교회직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분명, 정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비 정상이 정상처럼 여겨지고 용인되는 분위기, 그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왜 그럴까? 무엇이 문제일까? 내가 지금 교회 다니고 그것도 꽤 오래 다녔는 데 가끔 행복하지 않다면, 자주 기쁘지 않다면 그래서 무표정한 얼굴로 다니는 것에 익숙하다면 왜 그럴까? 왜 나는 그렇게 오래 교회를 나왔어도 잘 변화되지 않는걸까?

이 질문에 대하여 저는 이 아침 이렇게 간단하게 되묻고 싶습니다. “당신의 신앙의 초점은 무엇입니까? 그 초점에 예수님이 있습니까?“ ”당신은 얼마나 예수님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십니까? 얼마나 그 분을 매일 만나며 얼마나 그 분을 매일 따르려고 노력합니까?“. 우리가 우리 신앙생활을 바꾸려면 분명 쉽지 않은 이 질문앞에 용기있게 서야 합니다. 다른 것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목표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옛날 뱃사람들의 격언에 움직이는 배를 보고 항해하면 배가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다를 항해하는 배가 다른 배를 보고 가면 잘못 갈 수 있습니다. 북극성을 보고 가야 합니다. 뭔가 변하지 않는 것을 보고 가야 원하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북극성입니다. 벧후1:9절에 샛별“, 22:16절에 빛나는 새벽별이 북극성을 말합니다. 변하지 않는 위치에 고정된 북극성처럼,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를 따라야 기쁨도 행복도 삶의 변화도 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안디옥교회는 모범적인 교회였습니다. 지난 주에는 우리는 안디옥교회를 통하여 서로 사랑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았지만 오늘은 예수님이 중심이 된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주님이란 단어가 5번이나 등장합니다. 첫 번째 20절 뒷 부분, 주 예수를 전파하니”, 두 번째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세 번째 21절 뒤, “주께 돌아오더라”. 넷째, 23,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다섯 번째 24, “주께 더하여 지더라”. 이 짧은 내용에서 , 주님이란 말이 다섯 번 나옵니다. 그 뿐 아닙니다. 26절에 그리스도인이란 말이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 주님의 사람이란 뜻입니다. 이것까지 하면 여섯 번입니다.

 

여러분, 대단하지 않습니까? 19절에서 26절까지, 불과 7절에 , 주님, 그리스도가 여섯 번이나 나오다니 이것은 성경 전체에서 처음 있는 일입니다. 안디옥교회가 모범적인 교회요 이상적인 교회인 것은 다른 이유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중심”, 예수님께 돌아오고 예수님과 함께 머물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이 초점이요 목표였습니다. 그 교회가 크게 부흥되고 사람이 많아진 것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 중심, 예수님 사랑, 예수님 은혜, 그것이 있기 때문에 안디옥교회요 그래서 하나님이 사용하신 교회가 안디옥교회였습니다. 가을을 맞이하면서 우리 신앙생활에 다시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겠습니까? 이번 가을에 정말 예수님 중심, 예수님 사랑, 예수님 목표, 무엇을 하든지 예수님을 한 가운데 두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세 가지에 집중하셔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6번 나오는 주님, 그리스도를 셋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예수님께 나오고, 둘째 예수님안에 머물고, 셋째 예수님의 제자되고,

 

첫째 우리는 예수님께 나와야 합니다.

20절을 보시겠습니다. 11: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19-20절은 안디옥교회 성도들의 전도에 대하여 기록합니다. 안디옥교회 성도들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진 전도를 했습니다. 처음엔 소수의 사람들이 시작했습니다. 20절에 몇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나마 이름도 없습니다. 익명입니다. 전도하는 데 내 이름 나타내지 않습니다. 누가 전도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혼을 찾으면 됩니다. 두 번째는 처음에는 유대인에게 전도하다가 점차 이방인에게도 전도했습니다. 유대인은 동족입니다. 말도 통하고 쉽습니다. 그러다가 안디옥에 유대인만 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에게도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참 이상적인 전도입니다. 전도가 쉽지 않기 때문에 단계적으로 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소수의 사람이, 나중에는 많은 사람이, 처음에는 동족에게만 나중에는 이방인에게도. 이 원리가 우리가 할 전도의 원리입니다. 처음에는 나에게 가까운 몇사람만 합니다. 그러다가 점점 내가 모른 사람도 전도합니다. 처음에는 가족부터 전도합니다. 나중에는 가족 아닌 사람에게도 전도합니다. 이것이 순서입니다.

 

그런데 안디옥교회 전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20, “주 예수를 전파하니”. 안디옥교회는 전도할 때 다른 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말했습니다. 예수님만 증거했습니다. 이 사실이 왜 중요합니까? 당연하지 않습니까? 당연한 데 당연하지 않게 여겨지는 것이 오늘의 상황입니다. . 오늘날 우리가 전도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자랑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래서 좋고요, 저래서 좋구요. 또 목사님을 자랑합니다. “우리 교회 목사님은 아주 유명한 분입니다. T.V도 나오고요, 외국에서 박사했고요, 책도 많이 쓰셨고요, 설교는 얼마나 잘하시는지. 인물이요? 뿅 갑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는 예수님보다 목사님들이 더 많이 알려졌습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여러분은 서울대 총장 이름 아십니까? 잘 모르시죠? 서울대 병원장 이름은 아십니까? 그렇게 자주 분당 서울대 병원을 가도 병원장 이름은 잘 모르지 않습니까? 또 몰라도 상관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느 교회 목사님이 누군지 아십니까? 하면 다 압니다. 교회보다 목사님 이름이 더 많이 알려졌고 예수님보다도 목사님이 더 유명한 것 같습니다. 서울대 병원은 원장이 누군지 몰라도 가면서 교회는 목사가 누군가가 중요합니다. 거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교회는 사유화되어서는 안됩니다. 공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목회자가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계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대로 하는 것이 맞습니다. 5:42,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초대교회는 예수님을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얼마나 예수님 이름을 많이 이야기했는지 사도들이 제사장들에게 끌려가서 이런 협박을 받았습니다. 4:18,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예수의 이름, 이것이 초대교회의 전도였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예수의 이름20번 가량 나옵니다. 2:21절에서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고, 2:38절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받고 행3:6절에서 예수 이름으로 병고침받고, 4:17절에서 예수이름으로 전도했습니다. 10장애서 고넬료도 예수 이름으로 죄사함받고 성령받았고 행16장에서 간수도 주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그래서 행4:12절에 예수 이름 이외에 구원받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예수 이름으로 말미암습니다.

 

예수이름으로 전도해야 할 뿐 아니라 예수님께 나와야 합니다. 11: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다같이 주께 돌아오더라”. 왜 이것이 중요할까요? 전도받고 교회 나온 사람이 세 종류가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로 나온 사람, 종교인입니다. 교회로 나옵니다. 교인입니다. 예수님께 나옵니다.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 누구에게 나 오셨습니까? 그래서 네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교회안나온 불신자, 교회안나온 신자, 교회나온 불신자, 교회나오는 신자, 문제는 가장 심각한 것이 교회나오는 불신자입니다. 교회는 나오는 데 신자가 아닙니다.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교회는 나왔는 데 예수님께는 안 나왔기 때문입니다. 교회밖에 있는 불신자를 위해 전도가 필요하다면, 교회안에 있는 불신자를 위해 양육이 필요합니다. 어떤 분이 교회안에 있는 불신자의 특징을 네 가지로 말했습니다. 첫째 가치관에 있어서 자기중심적이다. 이 사람은 늘 자기 중심적으로 판단합니다. 미래학자 레너드 스위트는 이 사람을 자기애적 기독교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자기가 중심입니다. 둘째 본질적으로 영적이지 않다. 기도하고 예배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셋째 성향으로 볼 때 불순종적이다. 이 사람은 예수님이 중심이 아니고 자기가 중심이기 때문에 순종할 줄을 모릅니다. 순종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된 공동체를 이루어나기 보다 내 입장, 내 자존심을 먼저 생각합니다. 넷째 삶에 있어서 실천적이지 않다. 복종이 없다보니 실천도 없습니다.

 

불신자에게 예수님을 증거하여 교회로 들어오게 해야 하는 것처럼 교회 들어온 우리는 예수님께 가야 합니다. 다시 21절 뒤를 보십시오. “주께 돌아오더라”. 예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께 가야 합니다. ”예수께로 가면 나는 기뻐요. 나와 같은 아이 부르셨어요“. 아멘.

 

둘째 우리는 예수님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예수님께 왔으면 다음은 예수님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23절을 보시겠습니까? 11:23,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안디옥교회가 잘 한 것은 사람들을 예수님께 나올 뿐 아니라 예수님안에 머물게 했다는 것입니다. 안디옥 목회자인 바나바가 두 가지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했습니다. ”굳건한 마음으로 주께 함께 머물러 있으라“. 성도들에게는 주와 함께 머물러 있도록 권면했습니다. 그것도 굳건한 마음으로해야 합니다. ”굳건한 마음이란 흔들림이 없는 마음입니다. 주님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마음으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교회나와도 자주 기쁨이 사라지는 이유를 아세요? 우리가 그렇게 오래 예수믿어도 행복하지 않은 이유를 아세요? 제가 볼 때 문제는 이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 분을 아는 것 뿐, 그 분과 계속 함께 있지 않아요. 돌작밭에 떨어진 씨가 뿌리를 내리지 못했어요. 씨는 떨어졌는 데 뿌리가 없어요. 그러니까 공급받는 것이 없어요. 공급받는 것이 없으니까 조금 있다가 말라 비틀어져요.

 

어느 프랑스 교회 목회자가 교회에 부임하여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가정을 방문했는데 부인이 없어서 남편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집에 돌아온 부인은 남편에게 새로운 목사에 대해 묻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던가요?” “예수님께서 여기 사느냐고 물더군남편이 대답했습니다. “그리고요?” “다른 질문은 없었어. 그리스도께서 여기 사시냐고 묻는 것이 전부야.” “우리는 교회에 열심히 나가는 성도라고 대답했죠?” “그것은 안 물었어. 그리스도께서 여기 사시냐고만 물어 보셨어.” “3대가 믿고 할아버지가 목사라고 말씀드렸죠?”. “그렇게 안 물었어. 그리스도께서 여기 사시냐고만 물었지.” “주일 예배에 꼬박꼬박 참석하고 봉사도 잘 한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런 질문도 안 했어. 그리스도께서 여기 사시냐고만 물었다니까”. 그렇습니다. 사실 그것이 신앙생활의 전부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당신과 함께 살고 있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물을 최고의 질문입니다.

 

이를 위해 벧후1:3-11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베드로는 이 말씀에서 우리가 지속적으로 예수님안에 있어야 할 두 가지 이유를 말합니다. 하나는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기 위하여입니다. 세상이 부패해 있습니다. 우리도 본질적으로 부패해 있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두면 썩은대로 행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안에 있어야 합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기 위하여.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것입니다. 개발은 세상 사람이 하고 참여는 우리가 합니다. 참여란 이런 것입니다. 저수지에 파이프를 대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메마른 우리가 영적 수원지인 하나님의 은혜의 강에 우리 자신을 파이프로 대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의 파이프를 통해 은혜가 우리에게 흘러옵니다. 이것이 참여입니다. 우리는 은혜의 물을 한 방울도 만들지 못합니다. 거룩은 개발이 아닙니다. 참여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참여합니까?

 

벧후1:3절을 먼저 읽습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우리를 거룩하게 하려고 하나님이 먼저 주신 것이 있습니다. 생명과 경건입니다. 생명은 우리가 창조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미리 주신 것입니다. 경건도 우리의 노력의 산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생명이 거룩의 원천이라면 경건은 거룩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다 주셨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거기에 더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더 합니까? 벧후1:5-7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헝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다같이 더하라”. 생명과 경건은 우리에게 주어졌고 우리가 할 일은 더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더합니까? 순서대로 보십시오. 믿음에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우애, 사랑. 믿음으로 시작하여 사랑까지 이어집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안에 있는 이 모든 은혜의 선물들을 우리가 받아야 합니다. 믿음에, 덕에, 지식에 , 절제에, 인내에, 경건에, 형제 우애에 사랑. 모두 8가지입니다. 어느 것도 필요없는 것이 없습니다. 다 필요합니다. 이런 것을 공급받으려면 예수님안에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안에 다 있습니다. “예수안에 생명있네 주님이 빛이 되시네”. 예수님안에 생명있습니다. 믿음이 있습니다. 덕이 있습니다.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우애, 사랑, 다 있습니다. 교회생활은 교회나온 햇수대로 판단하지만 영적생활은 예수님안에 있는 시간대로 판단합니다. 양이 질을 낳습니다. 책상머리에 많이 앉아 있으면 공부 잘 합니다. 기도도 하는만큼 깊어집니다. 영적 생활은 예수님안에 머문 시간과 자세에 비례하여 자랍니다. “굳건한 마음으로 예수님과 함께 머무십시오”. 아멘.

 

셋째. 우리는 예수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안에 머문 사람이 결국 받는 축복이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25-26절입니다. 11:25-26,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안디옥교회에서 바나바가 바울과 함께 1년 동안 많은 무리를 가르친 결과는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제자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누가 그리스도인입니까? 하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제자입니다”.

 

제자란 헬라어로 마세테스라고 합니다. 이 말은 세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첫째 배우는 자, 제자는 배우는 자입니다. 배워야 제자입니다. 목회자로서 늘 갖는 생각이 있습니다. 교인중에 군중이 있고 제자가 있다. 그냥 설교듣는 사람은 군중입니다. 그러나 그 앞에 와서 배우려는 자는 제자입니다. 목회자와 교인의 좋은 관계는 스승이 되고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교회 나오면 군중입니다. 군중은 때가 되면 다 갑니다. 끝까지 남은 사람은 12제자입니다. 예수님에게 배운 사람만 끝까지 갔습니다. 교회에서 배우기를 즐겨하셔야 합니다. 지난 학기부터 제가 쓴 교재로 제자훈련을 열었습니다. 모두 4반이 하고 있고 이번에도 4반이 거의 찼습니다. 참여하세요. 제자는 배우는 자입니다.

 

제자는 증인입니다. 제자는 선생과 함께 거하기 때문에 선생의 고난을 함께 합니다. 가끔 돌아가신 선생님을 추모하는 자리에 가보면 선생님이 살아 있을 때 있었던 일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증인입니다. 듣고 본 것이 많기 때문에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제자도 예수님을 말합니다. 입반 열면 예수님 이야기를 합니다.

 

제자는 순교자입니다. 선생님을 위해 죽습니다. 이것이 최고의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도 모두 순교했습니다. 바울도 순교했습니다. 지난번 로마에 가서 카리스투스카타콤에 갔습니다. 이 카타콤 저 깊은 곳에 한 여성이 누어 있었습니다. 이름은 세실리아라고 합니다. 세실리아는 2세기경 로마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이교도인 남편과 오빠, 예수믿게 했습니다. 그러다가 붙잡혀 이방인의 신을 믿으라고 강요당하여 거절하자 체포되었습니다. 아무리 배교를 강요해도 듣지 않자 황제가 질식사 시키려고 끓는 물에 넣었습니다. 그래도 죽지 않았습니다. 결국 참수형에 처해 목을 베었는 데 형리가 잘못 베어 3번이나 목을 쳤는 데도 죽지 않아 3일동안이나 고통 속에 있다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시신을 버렷렸는 데 그리스도인 형제들이 시신을 갖다 카타콤에 모셨습니다. 그런데 얼마 있다 열어보니 조금도 썩지 않고 살아 있는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그리고 손가락 3개와 왼손 엄지손가락 1개를 내보이며 삼위일체를 표시하고 죽었습니다. 그 뒤에 중세기에 그 시신의 모양을 그대로 만들어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다고 합니다. 자세히 보면 머리가 없습니다. 머리를 베어 돌려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고통스럽게 죽었어도 평안하게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며 , 끝까지 주님의 제자로 사는 것은 순교자로 사는 것이구나“.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제자여야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예수님안에서 굳건히 머물러야 합니다. 그리고 끝까지 예수님 제자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안디옥교회가 보여준 이상적 신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