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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11:19-30 안디옥교회(1) 서로 사랑하는 교회 2012.8.26.(일)

11:19-30 2012.8.26.()

안디옥교회(1) 서로 사랑하는 교회

8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에 이상형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이상적인 여자, 이상적인 남자, 이상적인 사람, 이상적인 세상. 이번 유럽영성투어에서 이태리의 피렌체를 들렀습니다. 거기에서 문학가 단테가 이상적인 여인 베아뜨리체를 만났다는 다리를 지나갔습니다(사진 2). 단테는 이 다리에서 9살된 어린 베아트리체를 보고 첫 눈에 반했습니다. 그가 베아뜨리체를 만나는 순간, 이렇게 글을 썻습니다. “그때부터 사랑이 나를 지배했다”. 그러다가 9년뒤 또 한번 만납니다. 이번에는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신분 사회라 둘은 맺어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베아뜨리체가 24살의 나이로 죽습니다. 그때부터 단테는 평생 베아뜨리체를 사모하며 글을 씁니다. “신곡의 주인공도 베아뜨리체입니다. “신곡은 단테가 베아뜨리체와 함께 연옥을 넘어서 천국에 간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질문은 있습니다. “만일 베아뜨리체가 24살에 죽지 않고 살아 단테의 아내가 되었을 때도 베아뜨리체는 단테의 이상형이었을까?” 잘 모르겠습니다. 베아뜨리체가 단테의 평생 이상형이었던 것은 그가 일찍 죽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로미오와 쥴리엣도 비극으로 끝났기 때문에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모세도 느보산에서 죽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영웅으로 남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만일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 오래 오래 살았다면 다윗처럼 실수도 많이 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남자가 이상형을 발견해서 결혼했답니다. 그리고 입버릇처럼 늘 자기야, 자기 없으면 난 못살아했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달라집니다. 결혼 100일되는 날 길을 걸었습니다. 쏜살같이 차가 달려오자 자기 온 몸으로 여자를 감싸주며 말합니다. “자기, 괜찮아?”. 결혼 1년이 지났습니다. 또 차가 달려 왔습니다. 이번에는 여자를 감싸주는 척 하면서 얼른 뒤로 숨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아이쿠, 큰일 날뻔 했네”. 결혼 5년이 지났습니다. 또 차가 달려 옵니다. 이번에는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나무 뒤로 숨었습니다. 차가 지나가자 나와 말했습니다. “아직 살아 있었어?”. 이것이 인간입니다.

 

이 세상에 영원히 변치 않을 이상형은 없는 셈입니다. 사람도 그렇고 조직도 그렇고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어떨까요? 교회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완전한 교회는 없습니다. 완전한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하나님만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교회는 불완전한 교회가 완전한 하나님을 좇아가는 것입니다. 그래도 성경에 이상형에 가까운 교회가 있다면 어느 교회일까요? 안디옥교회입니다. 저는 가을을 시작하면서 우리가 본받고 싶은 이상적인 안디옥교회를 세 번에 걸쳐 함께 살피고자 합니다. 오늘은 서로 사랑하는 교회입니다.

 

19절을 먼저 보십시오. 11:19, “그때에 스테반의 일로 일어난 환란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르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 데”. 오늘의 주인공 안디옥은 지금의 터키 남쪽에 위치합니다. 지금도 작은 도시는 아닙니다만, 바울 당시 안디옥은 인구 50만으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 가는 로마 제국 세 번째로 도시였습니다. 지중해 변에 위치하고 있는 이 도시는 주전 300년전에 세워져 졌으며 로마의 부와 헬라의 미 그리고 동양의 풍요를 모두 가진 아름다운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에 역사적으로 이방인 도시로는 첫 번째 교회가 세웠졌는 데 재미 있는 것은 이 교회를 세운 사람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0절을 보시겠습니까? 11:20, “그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교회는 어떤 교회를 막론하고 세운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아예 주춧돌에 교회 창립일과 창립자를 새겨 넣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방인 첫 번째 교회인 안디옥교회는 창립자가 없습니다. 다시 20절을 보시면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했습니다. “몇 사람이 누구입니까? “몇 사람했으니까 한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이름도 없습니다. 그냥 몇 사람입니다. 사도행전을 쓴 사람은 누가입니다. 그는 의사로서 누구보다도 치밀하고 분석적인 사람입니다. 그가 신약성경의 중요한 두 책,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썻는 데 그냥 쓴 것이 아닙니다. 치밀한 정보와 자료에 의하여 썻습니다. 그런데 그도 안디옥교회를 처음 세운 사람의 이름을 모릅니다. 그냥 20,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입니다. 웬일일까요? 안디옥교회를 세운 사람이 실제 없었다는 것입니까?

 

아마 누군가가 세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를 모릅니다. 아마도 유대인 그리스도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에서 온 몇 사람이 이곳에 와서 처음 전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 전도한 것이 아니라 그냥 전도했고 전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교회가 생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이름을 기억할만큼 그렇게 유명한 사람들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도 특정한 사람의 이름을 기록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안디옥교회의 시작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세운 첫 번째 이방인 교회 안디옥 교회의 창립자를 우리가 모른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고 하나님이 움직여 간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만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교회를 섬길 뿐입니다. 목회자든 평신도든 교회에서는 사람이 나타나서는 안됩니다. 그저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면 됩니다. 굳이 누가 개척했다”. “누구 누구의 교회다. ”내가 이 교회 개척멤버다. “내가 이 교회 누구 누구다“. 해서는 안됩니다. 교회의 창립자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홀로 교회의 주인입니다. 아멘.

 

거기다 이름없는 교인들은 피난민들이기도 했습니다. 다시 19절을 보면 행11:19,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이름없는 사람들이 그나마 피난민이었다는 것이 안디옥교회 출발의 또 하나의 특징입니다. 여러분, 피난민이 무엇입니까? 쫓겨난 자입니다. 빼앗긴 자입니다. 이미 행8장에서 예루살렘에 큰 핍박이 일어났고 그 핍박을 피하여 사람들이 여기 저기 흩어졌습니다. 인간적으로 핍박은 고통스러웠지만 하나님은 핍박은 선교의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핍박받은 빌립이 행8장에서 사마리아에 전도했고, 핍박을 피해 욥바로 갔던 베드로가 행9, 10장에서 가이사랴의 고넬료를 전도했고, 핍박받고 국경을 넘은 사람들이 행11장에서 안디옥에서 전도했습니다. 핍박을 선교의 기회로 삼으신 하나님, 핍박을 전도의 기회로 순종한 성도들, 고난은 성도를 만들고 핍박은 교회를 만들었습니다. , 그렇게 해서 세워진 교회의 가장 큰 특징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크게 세 종류의 사랑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교회내 사랑입니다. 그들은 서로 사랑했습니다. 다음은 하나님 사랑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세 번째는 세상을 향한 사랑입니다. 그들은 잃어버린 영혼을 사랑했습니다. 이 사랑을 우리도 본받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 중에서 교회안에서 사랑한 사랑을 살피고 있습니다.

 

우리는 안디옥교회가 서로 사랑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안디옥교회는 이름없는 평신도들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나마도 피난민이었습니다. 핍박을 피하여 안디옥에 온 몇 사람의 피난민들이 순수하게 전도를 시작했는 데 하나님은 그들의 작은 순종을 통해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21절입니다. 11: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순수하게 전도만 했는 데 그 순수한 전도가 역사상 최초의 이방인 교회가 될줄 그들은 몰랐습니다. 중요한 말은 주의 손이입니다. 이 표현은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8:3-4절에 하나님의 손가락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지으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이 얼마나 강한지 하나님은 손가락으로 세상을 지었다고 말합니다. 왜 손가락입니까? 손가락은 손이 아닙니다. 팔뚝도 아닙니다. 손가락은 작고 보잘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작은 손가락으로 하늘과 땅을 지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바로의 압제에서 구해 낸 것도 하나님의 손가락이었습니다. 8:19입니다. “술객이 바로에게 고하되 이는 하나님의 손가락이니이다”. 우리말로는 술객이 바로에게 고하되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권능은 히브리어 원문에 하나님의 손가락”(에츠바 엘로힘)입니다. 애굽에서 그 백성을 바로의 손에서 구해낸 것은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쓴 것도 하나님의 손가락이었습니다. 31:18,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그 손가락으로 쓰신 것이라”. 영화 십계에 의하면 십계명의 말씀은 불로 새겨집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손가락으로 친히 쓰셨다고 말합니다. 이 하나님의 손이 훗날 예수님에게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실로암 맹인의 눈을 손으로 만져 치료하십니다. 부활이후에도 예수님은 손가락을 내밀어 도마를 깨닫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안디옥에서 전도한 이름없는 사람들, 그들의 그 작은 순종을 축복하사 위대한 교회가 되게 한 것은 하나님의 손이었습니다.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우리의 작은 일에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하면 우리의 일이 하나님의 일이 됩니다. 우리의 작은 일에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하면 우리의 일은 하나님의 위대한 일이 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작은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손은 우리의 작은 순종을 기적으로 바꿉니다. 안 하거서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단 믿음으로 행동하면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합니다. 세상의 교회는 이렇게 됩니다. 사람이 믿음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합니다. 그러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교회가 성장하자 예루살렘 교회가 사람을 파송했습니다. 그가 바나바였습니다. 그가 안디옥에 도착해 보니 과연 안디옥에서는 위대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손에 힘입어 연일 연야 부흥되고 있었습니다. 순종은 사람의 일이고 부흥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부흥을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은 순종밖에 없고 나머지는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더 큰 부흥을 위하여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이왕 부흥하던 교회가 더 위대하게 되기 위해 우리에게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안디옥교회도 그 요구를 받았습니다. 바나바가 예루살렘교회의 파송을 받고 왔지만 그가 할 일은 한 가지 밖에 없었습니다. 사랑이었습니다.

 

바나바의 하나님 사랑

어떤 사랑입니까? 11:23,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그는 먼저 하나님을 사랑해야 했습니다. 목회자인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없었습니다. 그가 전도한 것도 아니고 그가 부흥을 일으킨 것도 아닙니다. 전도는 소수의 이름없는 평신도들이 했고 부흥은 주의 손이 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할 일은 단 한 가지, 23,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기뻐하는 것이었습니다.

 

목회자로서 연륜이 쌓이면서 교회에 대하여 목회자가 할 일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젊을 때는 모든 일을 목회자가 하는 줄 알았습니다. 목회자가 아니면 교회가 무너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교회는 하나님이 하시고 목회자가 할 일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가장 좋은 목회자는 교회 일을 혼자 꿰어 차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그 자리를 내어 드리고 자신을 옆에서 하나님을 기뻐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성 프란치스코의 고향 이태리 아시시 프란치스코 교회애서 그림 한 점을 보았습니다. 지오토가 그린 <십자가상>이라는 그림이었습니다(그림). 예수님이 십자가에 계시고 프란치스코는 그 앞에 납작 엎드려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목회가 무엇일까 묻고 있던 저에게 이 그림이 모든 것이었습니다. 목회는 본질적으로 목회자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자는 교회를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을 기뻐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가 할 일은 무릎꿇는 일입니다. 목회자가 일을 줄이고 더 많이 하나님앞이 무릎꿇고 있을수록 하나님은 일을 많이 합니다. 11:23,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마치 마리아의 심정으로 하나님을 기뻐하면 됩니다. “내 영혼이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기뻐합니다”(찬양). 주님 사랑이 모든 일의 시작입니다.

 

바나바와 교인의 사랑

바나바가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며 주님발 앞에 엎드리자 교인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23절을 다시 보시겠습니까? 11:23,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에게 교회 사랑은 두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는 은혜를 선포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권면하는 일이었습니다. 목회자의 모든 메시지는 하나님의 은혜에 집중되어야 합니다. 목회자의 메시지가 교인들에게 무엇 무엇을 하라고 지시하면 잘 되지도 않고 부담만 됩니다. 성경의 중요한 메시지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행하셨습니다. 그가 창조하셨고 그가 구원하셨고 그가 돌보셨고 그가 일하셨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은혜에 머무는 것입니다.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슴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행위가 필요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순서가 있습니다. 은혜에서 믿음이 나오고 믿음에서 행위가 나옵니다. 마틴 루터가 한 명언이 이있습니다. 믿음은 은총의 자녀요 선행의 어머니이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은혜에서 나오고 믿음에서 선행이 나옵니다. 모든 것이 시작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들을 메시지가 이 메시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나바가 이 메시지를 권면의 형식으로 선포했다는 것입니다. 23절 마지막, “주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권한다는 이 말은 파라칼레이’, 이 말은 잘못을 빌다. 사정하다. 간청하다하는 뜻입니다. 바나나가 교회 지도자인데 교인들에게 간청했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지금 목회자인 바나나의 두 모습을 함께 보셔야 합니다. 메시지는 간절하고 핵심을 찔렀습니다. “교인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안에 머무십시오”. 그나마 굳은 마음으로 그렇게 하라고 말합니다. 굳은 마음이란 흔들림이 없는 마음입니다. 왔다 갔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은혜밖으로 나가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요한 메시지를 권면의 형식으로 말합니다. 메시지는 분명한데 부르럽게 표현합니다. 강요하지 않습니다. 강제하지 않습니다. 주눅들게 하지 않습니다.

 

목회자가 연륜이 들면서 깨닫는 또 하나는 신자들은 약하다는 사실입니다. 젊을 때는 왜 신자들이 그렇게 순종하지 않는지. 왜 말씀대로 살지 않는지. 답답했습니다. 지금도 그런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보니까 제일 말씀대로 못사는 것은 목회자 입니다. 그래서 점점 말씀대로 못사는 신자들이 이해가 되고 사랑스럽습니다. 한 주간동안 말씀대로 못사는 것을 자신도 알고 하나님도 아는 데 교회는 또 안 빠지고 나옵니다. 얼마나 믿음이 좋은지 예배드리다 자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크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조용히 권합니다. 제 친구 중에 서울에서 목회하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 분의 어머니가 몇 년 전 돌아가셨는데 그가 어머니 병상에서 100일을 간병하면서 어머니, 나의 어머니란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 그의 남동생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남동생 부부는 오랫동안 교회를 나오지 않았습니다. 형님이 목사고 어렵게 개척교회를 하는 데도 교회를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친구가 참다 못해 어머니에게 쏘아 붙였습니다. “어머니, 왜 개를 그냥 둬요? 나무라기라도 해서 교회로 확 끌어와야 할 것 아니예요?” 그때 어머니는 말했습니다. “다 돌아올 날이 있겠지. 언젠가 돌아올거야.” “언제 돌아와요? 나이 60넘어 환갑지나면 돌아와요? 왜 어머니는 다른 사람은 전도하면서 아들은 교회로 못 데리고 나오는 거예요?” 어머니는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도 고집피우던 동생이 어머니가 암에 걸리고 죽게 되자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어머니, 이제부터 교회 나갈께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때 어머니가 자식들을 앞에서 환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성범이 저 놈이 교회 나간다니 여한이 없다.” 그리고 나직히 한 마디 했습니다. “내 강요않고 기다렸는데.” 어머니 사랑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강요하지 않고 기다린 사랑입니다. 강요했다면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라 자기 욕심일 것입니다. 사실 어머니는 자식에게 얼마든지 강요할 입장에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강요하지 않습니다. 기다렸지만 강요하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이 어머니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 2천년 교회역사에 나타난 중요한 거룩의 원리가 있습니다. “강요로 거룩해지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역사안에 거룩해지기 위해 수많은 운동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종교개혁도 마틴 루터가 처음 한 것이 아닙니다. 14세기, 보헤미아의 죤 후스, 15세기, 이태리의 사보나롤라는 먼저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거의 폭력으로 그 도시를 개혁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의도는 좋았으나 결과적으로 실패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거룩은 강압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14세기의 성 프란치스코만이 성공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누구에게도 거룩을 강압하지 않았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을 죽여 남을 살린 예수님을 따라 살고 죽었습니다. 그는 아무 말없이 자기를 부정하고 살기만 했는 데 그가 죽자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며칠전 어느 교회에서 예배시간마다 교인들의 출석을 부른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교회 목회자의 마음을 이해하지만 교인들은 그런 식으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 교회는 교인들 출석을 부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변화는 힘으로 되지 않고 거룩은 강압으로 되지 않습니다. 두 가지로 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바나바와 사울의 사랑

바나바의 사랑은 또 한 가지 방향에서 빛났습니다. 그것은 동역자 사울에 대한 사랑입니다. 안디옥 교회가 성장하자 바나바의 한계를 넘어 섰습니다. 바나바 혼자로는 그 모든 일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다가 사울이 생각났습니다. 그때 사울은 고향인 다소에 있었는 데 안디옥에서 다소까지는 175킬로 이상의 먼 길이었습니다. 더구나 두 도시 사이에는 아마느스 산맥이라는 큰 산맥을 넘어야 했습니다. 저도 이 산을 1999, 2001, 두 번 넘었는 데 얼마나 산이 높고 험한지 모릅니다. 바나바가 그때 어떻게 했습니까? 11:25-26,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여러분, 지금 바나바가 안디옥교회를 잘 목회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커지긴 했지만 큰 무리없이 잘 나가가고 있는 데 굳이 자기보다 나은 사울을 데리고 와야 했을까요? 왜 혼자 하면 될 일을 왜 영광을 나누려고 합니까? 자기보다 똑똑하고 훌륭한 사울이 오면 바나바는 묻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바나바는 그 먼 데까지 가서 사울을 모시고 옵니다. 바보아닙니까? 미련한 것 아닙니까?

 

혼자 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함께 잘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일이 가능하려면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내가 하는 내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하나님의 일이 중요합니다. 가끔 교회에서 내가 하던 일을 남이 끼어 들면 어려워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나보다 잘 하면 더 견디기 어려운 일이 됩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합니다. 부족함이 보여서 유능한 사람 하나를 끼어 넣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불평이 나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내가 하면 내 식으로 잘 하는 데 잘 하는 사람과 함께 하면 그 사람이 하는 대로 따라 가야 합니다. 그것이 싫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경우에 생각할 것은 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나 혼자 하면 편하겠지만 내 한계를 못 벗어납니다. 그러나 유능한 사람이 오면 나는 죽지만 일이 삽니다. 문제는 나를 죽이고 하나님을 살리는 것입니다. 나보다 기관을, 나보다 교회를, 나보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가 잘된다면, 하나님이 기뻐한다면 나보다 잘한 사람이 와야지“. 이 생각이 중요합니다. 바나바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사울과 함께 일하면 나는 죽습니다. 그러나 대신 교회는 부흥됩니다. ”교회만 잘 되면 되지 않나?” 이런 생각이 필요합니다. 나보다 교회, 나보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면 내가 꼭 1인자 일 필요가 없습니다. 2인자가 되어도 좋습니다.

 

제가 이번에 독일 종교개혁지에 갔습니다. 마틴 루터가 살았던 현장을 갔습니다. 거기서 루터가 종교개혁을 성공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멜랑히톤이라는 사람이 루터의 오른팔이 되고 2인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멜랑히톤은 루터보다 한 살 밖에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루터보다 뛰어난 학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평생 루터를 멘토로, 스승으로, 아버지로 여겼습니다. 루터가 가는 곳마다 다 따라갔고 온갖 고난도 다 당했습니다. 루터가 보름스에 가서 종교재판받을 때도 같이 갔고 루터가 죽는 순간에도 같이 있었습니다. 루터가 죽자 루터가 남긴 온갖 문제를 다 풀어 내며 아우스부르그 신앙고백을 만들었습니다. 그래도 역사는 종교개혁은 멜랑히톤이 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종교개혁하면 마틴 루터고 멜랑히톤은 자리가 없습니다. 그래도 그는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기꺼히 2인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작곡자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뉴욕필하모닉의 지휘자였던 번스타인은, 오케스트라에서 가장 연주하기 어려운 악기는 2바이올린이라고 말했습니다. 2바이올린은 언제나 제1바이올린을 따라 갑니다. 언제나 2인자요 언제나 뒤에 따라 가지만 제2바이얼린이 없으면 음악은 아름답지 못합니다. 아론은 모세의 형이었지만 모세를 돕는 제2바이올린이었습니다. 요나단은 왕의 아들이었지만 언제나 다윗밑에 자기를 놓았습니다. 여호수아도 40년동안 모세의 시종이었습니다. 나 혼자 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팀을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25절 다시 보시면 둘이 함께 교회에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혼자서는 다 못 합니다. 큰 무리를 가르치려면 함께 해야 합니다. 교회안에서 우리가 경계할 것은 고립주의, 경쟁주의, 1인자 의식, 대장의식, 다 버려야 합니다. 팀이 되어야 하며 함께 일해야 하며 나보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목장이 서 있는 자리가 여기입니다. 목장은 모든 성도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의 팀을 이루게 합니다. 이때의 목자는 대장이나 1인자 일 필요가 없습니다. 스스로 2인자가 되어 하나님중심으로 모이게 하면 됩니다. 목장과 교회를 확대하면 한국교회가 됩니다. 이번 주로 100주념을 맞이하는 한국교회도 경쟁주의, 장자의식, 큰 교단, 큰 교회, 감투, 다 내려 놓아야 합니다. 큰 자는 섬겨야 하고 스스로 2인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의 민족교회로 가야 합니다. 안디옥교회, 2천년전 교회지만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교회”, 이 축복을 받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