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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11:19-30 안디옥교회(3) 영혼을 사랑하는 교회 2012.9.9(일)

11:19-30 2012.9.9()

안디옥교회(3) 영혼을 사랑하는 교회

 

여러분은 행복의 비결을 아십니까? 행복의 비결이 참 많지만 다른 사람을 예쁘게 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느 교회에 신학생이 하나 있었는 데 이 사람은 웬만한 여자는 예쁘다는 생각이 안들어 선을 봐도 늘 퇴짜를 놓습니다. 한번은 어느 권사님이 어렵게 중매를 하면서 말했습니다. “전도사님, 이번에는 웬만하면 하세요. 믿음도 좋고 착합니다. 전도사님이 그 여자를 만난 후 저에게 문자를 보내주세요. 예쁘면 사과“, 안 예쁘면 포도라고 보내주세요”. 몇 일 있다 문자가 왔습니다. 이렇게 한 마디가 쓰여 있었습니다. “거봉”. 물론 안 예뻣기 때문에 거봉했겠지만, 사람을 예쁘지 않게 보려면 한이 없습니다. 누구에게도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예쁘지 않게 보기 시작하면 먼저 나에게 문제가 생깁니다. 나에게 기쁨이 사라집니다. 행복이 사라집니다. 행복의 비결은 사람을 가능한 한 예쁘게 보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 두 젊은이가 서로 교제를 했습니다. 어느날 남자가 여자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그날따라 무슨 일인지 영어로 보냈습니다. “Ypu are so beauiful”.(당신은 참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여자가 자세히 보니까 beautiful 할 때 t가 없습니다. 여자가 남자에게 말했습니다. “아니, 영어를 쓰시려면 잘 쓰셔야지, beautiful에서 t가 없잖아요”. 그랬더니 남자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t 없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옆에 있는 분에게 축복합시다. “당신은 t 없이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하나님도 우리를 예뻐하실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예뻐하신다면 우리가 t 없이 아름답기 때문일까요? t 없이 아름답다면 누가 우리를 예뻐하지 않겠습니까?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티없이 아름답기 때문입니까? 선교는 여기서 출발합니다. 선교는 하나님이 사람들을 예쁘게 보는 것입니다. 흠과 티가 많지만 하나님이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역사는 흠많고 티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이 사랑하신 역사입니다. 아브라함부터 모세, 수많은 구약의 인물들, 예수님을 거쳐 지금까지 온 것은 하나님의 사랑때문이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곧 하나님의 선교의 역사였습니다.

 

우리가 지난 세 주동안 계속 안디옥교회를 살피고 있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완전한 교회는 아니었지만 이상적인 교회였습니다. 첫 번째로 서로 사랑하는 교회였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교회였습니다. 오늘은 영혼을 사랑하는 교회였습니다.

 

두 가지 전도가 있습니다.

19-20절을 보겠습니다. 11:19-20, “그 때에 스테반의 일로 일어난 환란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 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19-20절은 안디옥교회 성도들의 전도에 대하여 기록합니다. 먼저 19절을 유대인에게 전도한 이야기고 20절은 이방인에게 전도한 이야기입니다. 유대인에게 전도하다가 점차 이방인에게도 전도했습니다. 유대인은 동족입니다. 말도 통하고 쉽습니다. 그러다가 안디옥에 유대인말고 이방인도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에게도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래도 동족에게 전도하는 것이 쉽습니다. 언어도 같고 문화도 같습니다. 입만 열면 의사가 통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영혼을 사랑하여 전도하려고 해도 처음에는 모르는 사람에게 전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아는 사람, 가족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안디옥교회 성도들은 처음에는 동족인 유대인, 다음에 이방인에게 전도했습니다.

 

전도하는 방식도 달랐습니다. 19절 마지막을 보실까요?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 데”. 여기서 말씀을 전했다는 말은 소근소근 말했다는 뜻입니다. 친구끼리 귀속말로 하는 것입니다. 여행하는 사람끼리 조용 조용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동족인 유대인에게는 큰 소리로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사정도 다 알고 성경도 다 압니다. 다 같이 피난하는 형편에 누가 누구에게 큰 소리로 말할 필요가 있습니까? 가까운 사람에게는 사실 말이 필요없습니다. 말보다 더 좋은 것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성경 마5:13-14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14, “너희는 세상의 빗이라. 산위에 잇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소금과 빛의 말씀입니다. 소금과 빛은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세상을 사는 두 가지 방식을 가르칩니다. 소금은 녹는 것입니다. 음식속에서 맛을 내기 위해 먼저 녹는 것입니다. 빛은 드러내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둠이라면 빛은 어둠을 드러냅니다. 소금은 동화요 빛은 구별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먼저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습관대로 빛과 소금하는 데 성경의 순서는 소금과 빛입니다. 소금이 먼저 나오고 빛이 다음에 나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의 첫 번째는 먼저 그 속에 들어가 동화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둠을 향하여 강한 빛을 비추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들어가 녹아야 합니다. 이것은 전도와 선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도와 선교의 첫 번째는 그 속에 들어가 동화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세상의 회개를 촉구하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셨습니다.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예수님의 방식은 우리를 변화시키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는 방식은 먼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전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을 많이 해야 전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며칠전 한 가정을 심방했습니다. 70대 어르신 부부 집에 심방갔습니다. 먼저 할머니가 나오시고 최근에 할아버지가 나와서 할아버지를 만나려고 심방갔습니다. 할아버지가 스스로 교회 나오시고 낮에 심방받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어떻게 교회 나오셨어요?”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가르치며 말했습니다. “우리 집 사람이 교회 나가면서 좋아졌어, 마음도 편해지고 나에게도 잘하고 몸도 좋아졌어. 그래서 교회 나가게 되었어”. 할머니는 한번도 할아버지에게 교회나가자고 말한 적이 없지만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교회 나간 후 달라진 모습을 보았습니다. 전 보다 더 부드러워 지고 말도 친절하게 하고 할아버지를 더 챙기고 몸도 좋아지고, 말이 필요없었습니다. 자동적으로 전도되어 스스로 교회나오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 말을 많이 하기 윈하지만 세상을 우리에게서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를 보고 싶어 합니다. 교회에 처음 나온 약 85%의 사람이 누군가에 이끌려 교회를 나왔습니다. 그래서 전도한 사람에게 물어 봅니다. “뭐라고 하셨어요?” 그러면 대부분 이렇게 답변합니다. “, 아무 말도 안했어. 그저 잘 지냈지. 그러다가 어느날 교회 한번 나가볼까? 했더니 따라오더만”. 바로 이것입니다. 그 사람의 말을 듣고 따라온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좋아 따라온 것입니다.

 

좋은 관계가 우선입니다. 사랑해 주고 관심가져 주는 것이 먼저입니다. 좋은 사람이 되려면 그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관심을 가져줘야 합니다. 우리 교회 나오는 한 집사님이 어느날 같은 아파트에서 할아버지 한 분에게 말했답니다. “할아버지, 요즘 더 건강해 보여요. 운동하시나봐요?” 그리고 오후에 아파트내 헬스장에 갔더니 그 할아버지가 열심히 아령으로 운동하고 있더랍니다. 칭찬과 격려는 관계를 좋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아파트에서 이웃을 만나면 자주 인사해야 합니다. 그가 이야기하면 잘 들어야 합니다. 만날 때마다 미소를 지어야 합니다. 가끔 안부를 묻는 것도 좋습니다. 좋은 관계가 영혼을 사랑하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그렇다고 전도하는 데 말이 필요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20절에 나오는 이방인들에게는 말로 전도했습니다. 20절 뒷 부분 보십시오.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동족인 유대인에게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긴 말보다 사랑의 관계가 더 중요했습니다. 이심전심으로 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헬라인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유대인과 문화도 다르고 성경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말로 설명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전파했다는 뜻입니다. 전파했다는 말은 말로 설명했다는 것입니다. 전도에 말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로 할 때 상대방이 안 듣는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크게 네 가지 말을 안 듣습니다. 첫째 지루한 말을 안 듣습니다. 일단 말이 길면 안 듣습니다. 짧게 해야 합니다. 3분 정도가 좋습니다.

 

예수님의 언어를 연구한 학자가 예수님 언어의 몇 가지 특징을 말했습니다. 우선 짧습니다. 예수님은 긴 문장을 쓰지 않습니다. 다음 부드럽고 낮은 톤으로 말씀했습니다. 셋째 침묵과 영혼의 언어를 사용하셨습니다. 넷째 듣는 사람에게 익숙한 이야기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컴뮤니케이션에 능했습니다. 지루한 말은 안 듣습니다. 둘째 복잡한 말은 안 듣습니다. 이야기 하다가 옆으로 새서 나중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단순하고 핵심있게 말해야 합니다. 셋째 종교색이 짙은 이야기는 안 듣습니다. 옛날 어릴 때 누가 저에게 예수님이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고 해서 한동안 제가 시험들었습니다. 왜 우리를 지유케 하러 오신 예수님이 우리를 구속하셨을까? 그러면 지금 우리는 감옥에 있는가? 나중에 알고보니 구속은 감옥에 가는 구속이 아니라 돈주고 샀다구속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사셨습니다하면 됩니다. “거듭남”, 새로 났습니다. “칭의”, 의롭게 하셨습니다. “대속”, “대신 죽으셨습니다”. “예정”, “미리 정하셨습니다”. 쉽게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제일 안 듣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자랑하는 말입니다. “내가 언제 믿기 시작했는 데 우리 가문은 어떻고 저떻고 내가 이런 일을 했고“, 자기 자랑에 빠지면 사람들을 안 듣습니다. 어떻게 말해야 가장 좋습니까? 긴 성경 이야기나 어려운 신앙 이야기보다 예수믿고 변화된 자신의 간증이 좋습니다. 간증의 초점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나같이 부족한 사람을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이렇게 구원하셨다”. 이것이 가장 강력한 전도입니다.

 

이어령 교수를 알지 않습니까? 그가 예수믿게 된 배경을 길게 성경적으로 말했다면 사람들이 귀담아 들었을까요? “나는 원래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런데 내 딸이 암이 걸렸습니다. 제 손자도 몸이 아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고쳤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예수믿게 되었습니다”. 분명하지 않습니까? 살인자 지존파라면 어떻게 말했을까요?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나는 죽어야 마땅합니다. 그래서 감옥에 갔습니다. 감옥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데 어느날 간수가 와서 전도를 했습니다. 나는 너나 믿으라며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매일 와 따뜻한 말로 전도했습니다. 나같은 놈이 무엇이라고 이렇게 사랑하는가? 어느날 눈물이 확 쏟아졌습니다. 그때 예수믿게 되었습니다. 이제 내가 지은 죄를 회개하며 내 눈을 죄값을 바칩니다. 감사합니다”. 분명하지 않습니까? 내가 만난 예수, 그것이 최고의 전도입니다.

 

제 친구중에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오랫동안 변호사로 일한 친구가 있습니다. 이 친구는 지독한 무신론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 친구중에 가정을 버리다 싶이 하고 인생 방랑자가 된 친구가 있는 데 어느날부터 이 친구가 확 달라졌습니다. 처음 몇 달은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고 몇 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니다. 어느날 검사 친구가 교회를 나왔습니다. 그렇게 전도해도 안 나오더니 교회를 나왔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된 거야?” 그가 말했습니다. 친구 이름을 말하면서 강녕이 그놈 달라진 것 보니 뭔가 있어. 그래서 나왔어. 왜 안돼?”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른 사람의 변화를 보고 싶어 합니다. 자기는 못해도 다른 사람이 달라진 것을 보면 감동하고 놀랍니다. 누구나 다 스토리가 있습니다. 작거나 크거나 간에 누구에게나 예수믿고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이야길를 듣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최고의 사랑은 전도요 최고의 전도는 간증입니다.

 

주의 손이 함께 해야 합니다.

그런데 안디옥교회 교인이 영혼을 사랑하여 열심히 전도했지만 실제로 영혼들이 구원받은 능력의 비결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21절입니다. 11: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다같이 주의 손이”. 안디옥에서 전도한 작은 사람들, 그들의 순종을 위대한 부흥으로 축복한 것은 하나님의 손이었습니다.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우리의 작은 순종에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하면 우리의 일이 하나님의 일이 됩니다. 관건은 우리의 순종과 하나님의 손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붙잡아 줘야 우리가 승리합니다. 하나님의 손이 붙잡아 주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홍해 바다앞에서 모세가 들었던 막대기는 시내산 자락에서 자란 작은 가시나무였습니다. 그 보잘 것 없는 나무가 홍해를 가로지른 것은 그 막대기가 하나님의 손에 붙잡혔기 때문입니다. 벳새다 들녘에서 남자만 5천명을 먹였던 오병이어는 보잘 것 없는 한 소년의 점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 손에 붙잡혔을 때 5천명이 먹고 12광주리를 남겼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느냐 보다 하나님이 우리 손을 붙잡아 주느냐 그렇지 않으냐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전도와 선교에는 무엇보다 기도가 필요합니다. 4:3절입니다.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의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다같이 구하라”. 안디옥교회가 바나바와 바울을 해외선교사로 보낼 때도 기도했습니다. 13:3절입니다.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전도의 능력도 기도, 선교의 능력도 기도에서 옵니다. 제가 작년 안식월에 영국 웨일즈 지방을 갔습니다. 거기에 우리나라에 1866년에 와서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를 보러 갔지만 또 한 사람의 인물이 있었습니다. 이반 로버츠란 인물입니다. 이 사람이 1904, 웨일즈지역 부흥운동을 일으켜 1904년 한 해만 11만면이 예수믿고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는 데 이 사람은 본래 가난한 광부였습니다. 그러다 교회에서 어떤 장로님이 설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제목이 나를 굴복하게 하소서였습니다. 그때부터 그가 기도하기 시작했는 데 주여, 나를 굴복시키소서. 그리고 이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앞에 굴복하게 하소서“. 이 기도를 10년 동안 하루에 10시간 이상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한지 10, 어느날 설교가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 부탁했습니다. ”설교를 하게 해 달라고“. 그러나 나이 어린 탄광 노동자에게 누가 설교하게 하겠습니까? 하도 간청하니까 어느 수요저녁예배를 허락했습니다. 그러면서 누가 들을까 했습니다. 그날 밤 17명이 모여 이반 로버츠의 설교를 들었는 데 메시지는 단순했습니다. 첫째 우리는 생각나는 모든 죄를 하나님께 고백해야만 한다. 둘째 우리는 생활 속에서 좋지 않은 습관을 모두 제거해야 한다. 셋째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즉각 순종해야 한다. 넷째 우리는 예수님을 전도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나가야 한다. 이렇게 단순하게 설교했는 데 그 설교를 들은 목사님과 17명의 교인들이 하나님을 뜨겁게 체험했습니다. 그 다음날 밤에도 사람들이 모였고, 그 다음 날도 모이고, 순식간에 부흥의 불길이 다른 교회로 퍼져갔습니다. 그후 30일 안에, 37천명이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5개월 안에 10만명이 웨일즈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당시 신문은 그 사건을 이렇게 썼습니다. “이반 로버츠는 무명의 청년이지만, 어느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종하였다. 그는 자신이 지금의 사역에 인도된 것은, 성령님의 직접적인 인도에 의한 것이라고 말했다. 한번의 의심이나 망설임도 없이 그는 사람들에게 그 가 만난 그리스도를 선포했다. 어디를 가든지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불붙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다시 21절로 갑시다. 11: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다같이 주의 손이”. 다른 비결이 없습니다. 주의 손이 함께 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 전심으로 기도한 것입니다. 그의 일생을 보니까 부흥이 일어나기 전, 그리고 부흥이 일어날 때 그는 하루에 10시간 기도했고, 부흥이 끝난 후 말년에는 하루 18시간씩 기도해답니다. 기도외에는 이같은 류가 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적은 옛날만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최근 광주 어느 교회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났는 데 부흥회를 한 후 6주동안 3730명의 불신자가 교회로 몰려 왔습니다. 한 주에 600명 꼴로 새신자가 교회로 나온 것입니다. 100명 이상 전도한 사람만 12명입니다. 윤집사라는 분은 부흥회때 은혜받고 새벽 3시에 일어나 동네를 돌면서 환경미화원, 행상들을 200여명 전도했답니다. 주의 손이 함께 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습니다. 믿고 구하는 사람들에게 시대와 민족을 초월하여 역사합니다. 여러분도 부흥을 사모합니까? 판교 허허벌판에 교회 세운지 14, 드디어 부흥의 때가 온 것을 믿습니까? 성령이 임하면, 기도하면, 주의 손이 함께 하면 나도 전도하고 선교할 수 있음을 믿습니까?

 

필요한 것을 주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안디옥교회 선교는 다만 말로 예수님을 증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행동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증거했습니다. 27절부터 보겠습니다. 11:27-28, “그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핟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때 그렇게 되니라”. 글라우디오는 로마 황제로 AD 41년에서 54년까지 다스렸습니다. 역사가들은 이 시기에 전세계적인 기근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특히 지중해 연안 국가들에게 큰 기근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도 예외가 아니어서 예루살렘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안디옥교회가 어떻게 했습니까? 29,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부조는 구제금입니다. 안디옥교회 교인들이 힘을 다해 구제금을 보내기로 한 대상은 자신들의 동족이 아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 교인들은 이방인이 중심이 된 교회요 예루살렘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중심이 된 교회입니다. 그들이 힘을 다해 구제금을 보내기도 한 교회는 달동네의 빈민 교회가 아니라 모든 교회의 모교회요 유명한 사도들이 목회하는 교회요, 모든 교회 가운데 가장 큰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였습니다. 사도행전 6장에 의하면, 예루살렘 교회는 헌금 관리와 구제를 전담하는 집사 일곱 명을 따로 세울 정도로 상당한 규모와 재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제 막 태어난 개척교회가 그렇게 큰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로 한 것은 어떻게 보면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29, “작정하고”, 30, “이를 실행하여”. 안디옥교회는 이를 작정할 뿐 아니라 실행했습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고난당할 때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안타까워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도와 보자고 회의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안디옥교회는 작정했고 실행했고 그것을 다른 사람이 아닌 바나바와 사울을 통해 예루살렘 장로들에게 전달했습니다.

 

왜 이렇게 할 수 있을까요? 29절 다시 보시겠습니까? 11:29,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다같이 형제들에게”. 안디옥교회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안디옥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형제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여러분도 한국교회를 형제교회로 여깁니까? 다른 교회, 다른 교인들이 당하는 고난이 여러분에게도 고통이 됩니까? 우리 교회가 추구하는 선교가 이런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다 형제다“. ”기장이든 예장이든 다 형제다. 감리교, 성결교, 다 형제다“. 이번에도 엄청난 재해를 만나 이 나라가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 전북 장수에 있는 월계교회에 급히 연락해서 태풍에 떨어진 사과 140박스를 가져왔는 데 2부 예배가 끝나기 무섭게 다 나갔습니다. 3부 예배오신 분은 아무 것도 못 샀습니다. 오늘은 충북 음성에 있는 무극중앙교회 배를 팔겠습니다. 맛좋은 배를 싸게 팔겠습니다. 형제의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지난 주에는 예수영성대학 헌금하려는 헌금을 바꾸어 수헤지역교회 돕기를 위해 헌금했습니다. 정읍에 있는 교회가 이번 태풍으로 지붕이 날아가고 비가 새서 교회를 전면 수리해야 했습니다. 거기에 여러분의 헌금을 보냈습니다. 왜 이렇게 합니까?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감사한 것은 우리 교회 목장이 한국교회, 선교지 50여 군데와 형제관계를 맺고 선교를 시작한 것입니다. 아직은 초기입니다만, 흐뭇한 소식이 계속 들어오고 있습니다. 어떤 목장에서는 선교하는 교회에 가서 한달에 한번 전도해 줍니다. 어떤 목장에서는 막 창립한 개척교회를 방문해서 힘을 복돋아 주었습니다. 어떤 목장에서는 어려운 시골교회 목사님의 자녀 등록금을 대 주었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308, 311목장 신동희 집사님은 목원 12명과 함께 지난 주 12일 시간을 내서 전남 땅끝마을에 있는 섬 노화도에 있는 노화방주교회에 가서 한방, 이미용봉사를 하고 왔습니다. 신동희 집사님은 한의사인데 병원을 문 닫고 그 먼데까지 가서 동네 사람들에게 한방 치료를 했는 데 그 일로 동네 사람들이 많이 교회를 나오게 되었습니다. 교인이 다 해야 20, 그나마 할머니 밖에 없는 외로운 섬, 두 번의 태풍으로 피해를 입은 섬사람들에게 이번 봉사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크게 격려를 드리고 우리 모두 이렇게 이웃을 섬기고 사랑하면 하나님이 크게 축복하실 줄 믿습니다. 이것이 선교요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필요한 자에게 필요한 것을 주는 사랑이 사도행전의 선교입니다. 2: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 세상은 능력에 따라 주지만 하나님은 필요에 따라 줍니다. 사랑은 주는 것이고 주지 않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안디옥교회처럼 되고 싶지 않습니까? 서로 사랑하는 교회, 예수님이 중심인 교회, 그리고 영혼을 사랑하는 교회, 이번 가을에 우리가 이런 교회가 되고 이런 신앙을 갖도록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