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12:1-12, 20:24 2012.9.16.(일)
고난, 반드시 이깁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늘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고난이 없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여, 고난은 저 멀리 사라지게 하시고 우리에게 좋은 일만 생기게 하소서“.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고 매달려도 우리에게 항상 따라 오는 것이 있습니다. 고난입니다. 이 고난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에게 언제 고난이 사라지고 좋은 일만 생길까요? 어느 가정에 아빠의 말을 잘 듣지 않은 고집센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어느날 아빠가 참다 못해 아들을 방으로 데리고 가서 한 대 때렸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네가 뭘 잘못했는지 한번 생각해 봐“. 한참 있다가 저녁시간이 되자 아빠가 말했습니다. ”그래도 저녁은 먹어야 하니까 내려와“. 그래서 아들이 내려왔습니다. 아빠와 함께 아들이 식탁에 앉았지만 아들이 아빠에게 혼이 났기 때문에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아빠가 말했습니다. ”네가 잘못 했으니까 하나님께 기도해“. 아들이 한참 있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어쩌자고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십니까?”
어떻습니까? 아빠가 원수입니까? 성경에도 나옵니다. 원수가 자기 집안에 있다고. 고난은 멀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집, 가까운 데 있습니다. 가정에서부터 우리가 사는 모든 삶의 정황에 고난이 있습니다. 우리는 늘 원수의 목전에서 살아갑니다. 행11장, 안디옥교회를 통해서 우리는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참 이상적인 교회였습니다. 서로 사랑했습니다. 특히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선교하는 교회요 영혼을 사랑하는 교회였습니다. 예루살렘에 흉년이 나자 힘대로 헌금하여 구제금을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보냈습니다. 참 대단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교회가 든든히 서가자 또 고난이 닥쳐 왔습니다. 행12:1절입니다. “그때에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이 헤롯은 헤롯 대왕의 손자입니다. 성경에는 여러 헤롯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헤롯은 헤롯 대왕입니다. 1대 헤롯입니다. 예수님을 재판했던 헤롯은 헤롯 대왕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였습니다. 그는 당시 갈릴리 분봉왕으로 2대 헤롯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헤롯은 헤롯의 3대, 헤롯대왕의 손자입니다. 헤롯대왕은 일생 9명의 아내가 있었고 그중 8명이 자녀를 낳았는 데 큰 부인 미리암이 낳은 아들중에 알렉산더와 아리스토블러스가 있었습니다. 헤롯은 이 두 아들이 반역을 꾀했다고 사마리아에서 직접 죽였습니다. 이때 죽은 아들 아리스토블러스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는 데 그가 자라 왕이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1절에 나오는 헤롯, 헤롯 아그립바입니다. 대개 독재자들, 폭군들 보면 상처가 많습니다. 히틀러도 그 아버지가 반은 유대인이고 사생아가 아니었습니까? 히틀러는 어릴 때부터 상처받은 아버지밑에서 자랐고 아버지의 미움과 상처를 그대로 전수받았습니다. 그래서 때가 되자 그 미움을 유대인들에게 쏟아낸 것입니다. 누구에게도 상처가 있습니다. 상처없이 자란 사람도 없고 상처없이 핀 꽃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상처가 있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 상처가 다른 사람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그러자면 상처를 치료해야 합니다.
그런데 헤롯 아그립바는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그 상처를 막 태어난 교회를 향해 쏟아붓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교회 지도자인 야고보를 칼로 죽이고 또 다른 지도자인 베드로를 감옥에 가둡니다. 2절에 나오는 야고보를 보십시오. 이 야고보가 요한의 형 야고보입니다. 베드로, 안드레와 함께 갈릴리 바다에서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제자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0장을 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는 데 그 어머니가 나와 예수님께 말합니다.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의 우편과 좌편에 앉게 하소서”. 그때 예수님이 말씀했습니다. “내 우편과 좌편에 앉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다. 너는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시겠느냐?” 여기서 잔은 “포도주잔”을 말하지만 잔을 또한 순교의 피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결국 야고보는 예수님의 예고대로 포도주같은 붉은 피를 흘리며 순교했습니다. 예수님의 한 마디 말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결과적으로 야고보는 순교자로 예수님 우편에 앉게 되었으니 야고보의 어머니는 아들의 출세를 염두에 두고 말했지만 하나님은 그말을 다른 뜻으로 바꿔 결국 그 뜻을 이루게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가 너무 세상적인 기준으로 성공하기만을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달라져야 합니다. 가장 좋은 기도가 이것입니다. “하나님, 우리 자녀가 하나님께 쓰임받게 하옵소서”. 자녀가 잘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쓰임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문제는 베드로입니다. 헤롯은 야고보는 죽이고 베드로를 감옥에 가뒀는 데 얼마나 깊은 감옥에 가뒀는지 6절을 보십시오. 행12:6, “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인 틈에서 쇠사슬에 매어 누어 자는 데 파수꾼들이 문 앞에서 옥을 지키더니”. 헤롯은 베드로를 예루살렘 성전 북쪽에 있었던 안토니오 성채 깊은 감옥에 가두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군인 네 사람씩 네 패로 지키게 했을 것입니다. 그 중 두 명은 감옥안에, 두 명은 감옥 밖에서 베드로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베드로는 쇠사슬을 차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얼마나 삼엄한 경계속에 있는 것입니까? 자,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도 가끔 이렇게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할 때가 있습니까? 그때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그때 세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안에서 평안해야 합니다.
감옥에 갇힌 베드로를 보십시오. 6절을 다시 봅니다. 행12:6, “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숫군들이 문 밖에서 목을 지키더니”.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어 자더니”입니다. 여러분, 정말 지금 베드로가 정신이 있는 사람입니까? 지금 감옥에 갇혀 내일이면 처형당할 수 밖에 없는 긴박한 상황에서 베드로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6절, “누어 자더니”. 쭈그리고 자는 것도 아닙니다. 걱정은 되지만 억지로 눈을 붙이고 자는 것도 아닙니다. 아예 큰 대자로 누어 잡니다. 7절이 중요합니다. 행12:7,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일어나라”. 여기 “옆구리를 쳤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헬라어 “파탓소”입니다. 이 말은 치긴 치는 것인데 그냥 치는 것이 아니라 무기나 주먹으로 세게 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감옥에서 잠시 눈을 붙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의 사자가 그의 옆구리를 무기로 쳐야만 겨우 일어날 정도로 깊히 잠들어 있었습니다. 몇 시간만 지나면 참수형을 당할 그 위험천만한 순간에 그토록 깊이 잠을 잘 수 있을까?
그래서 때로 단순하고 우직한 성격이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베드로의 혈액형은 O형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O형은 “단무지”라고 하지 않습니까? “단순하고 무식하식 지랄같다”. 제가 O형입니다. O형의 반대는 A형입니다. A형은 “소세지”입니다. “소심하고 세심하고 지랄같다”. 위급한 순간에는 A형보다는 O형이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 문제는 혈액형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O형이었기 때문에 위기의 순간에 잠을 잘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믿음 때문에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감옥에 간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이미 4장에서도 한번 붙잡혀 감옥에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전했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때 제사장들이 도무지 예수 이름으로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말라고 했지만 베드로는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유유히 감옥을 빠져 나왔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깨달았습니다. “아, 하나님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나를 지키신다”. 그 뒤로 또 한번 감옥에 갈뻔 했습니다. 행8장입니다. 다행히 그때 잡히지는 않고 욥바지역에 피신하며 고네료에게 전도했지만 이런 경험들을 통해 베드로가 믿은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당하나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신다”. 그리고 또 하나 있습니다. “지금 잘 나가는 악인을 두려워 말자”. 지금 소리 소리 치며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도 곧 사라질 것입니다. 17세기 존 트랩이란 사람이 말한 바와 같습니다. “당신이 악인의 시신 위에 놓인 꽃을 시기하지 않는 것처럼, 그의 형통을 시기하지 말라”. “악인의 형통을 무서워 할 필요가 없는 것은 그의 시신위에 놓인 꽃을 무서워함과 같다”. “하나님은 언제나 살아계신다. 내가 감옥밖에 있을 때나 감옥안에 있을 때, 내가 평안가운데 있을 때나 고난가운데 있을 때 그는 항상 살아 계신다“.
그래서 2차대전때 나찌에 잡혀 오랫동안 포로수용소에 있었던 코리 텐 붐 여사가 있습니다. 이 분이 전쟁이 끝나자 수용소에서 나왔는데 그가 세계 여러 곳을 다니며 간증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후원자의 도움으로 33년만에 집을 갖게 되었습니다. 너무 아름다운 집이었습니다. 친구가 그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코리, 이렇게 좋은 집을 준 하나님은 참 좋은 분이시네요”. 그때 코리 텐 붐이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포로수용소에 있을 때도 좋은 분이었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포로수용소 안이나 밖이나 좋은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평안할 때만 좋은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고난당할 때도 좋은 분입니다. 우리가 잘 나갈 때만 좋은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고통당하고 실패하고 낙심할 때도 좋은 분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때 몰랐을 뿐입니다. 그는 언제나 좋은 분입니다. 그래서 이 찬양을 아십니까? “좋으신 하니님 너무나 내게 좋은 분, 찬양하리. 영원히 참 좋은 분, 워워워. 난 노래하리라 내 평생 사는 동안 내 주님 함께 하시니 난 찬양하리라. 좋으신 하니님 너무나 내게 좋은 분, 찬양하리. 영원히 참 좋은 분”.
둘째. 하나님의 도움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위기가운데서도 평안히 잘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도움 때문입니다. 7절을 다시 봅니다. 행12:7,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여기서 “홀연히”가 중요합니다. 이 말은 “갑자기”라는 뜻의 부사입니다. 늘 하나님의 도움은 우리 눈에 “갑자기” 임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믿지만 하나님이 어떤 방법으로, 언제 도울지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 입장에서는 “갑자기”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은 반드시 오지만 때와 방법은 하나님이 정합니다. 대개 그 때는 기다림의 끝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오래 기다리게 합니다. 도울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하여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홀연히”라는 말을 원어로 보면 재미있습니다. “이두”입니다. 이 말은 감탄사입니다. 우리 말로는 “아, 오”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너무 기가 막히기 때문에 “아, 오” 하는 것입니다. 누가 천사를 통해 베드로를 구원할 줄 알았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주의 사자”는 대개 천사입니다. 성경에는 천사들이 성도들의 기도를응답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전한 이야기가 너무 많습니다. 반드시 공식이 있습니다. 먼저 사람이 고난당합니다. 그러면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고 천사를 보냅니다.
아브라함이 소돔에 살고 있는 조카 롯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러다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 롯을 구원했습니다. 야곱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때 장인 라반의 집을 빠져나오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천사들을 보내 야곱을 보호하셨습니다. 엘리야가 이세벨의 진노를 피하여 광야로 도망갔습니다. 낙심 가운데 기도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두번이나 천사를 보내 먹을 것을 제공해 주셨습니다. 엘리사가 아람군대에게 포위를 당했습니다. 엘리사가 살려달라고 기도하자 하나님은 수많은 천군천사를 보내 그를 보호하셨습니다. 다니엘은 사자굴 속에 던져지자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단6:22,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도다”. 신약 시대로 와서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기도하자 천사가 나타난 그의 기도를 듣고 입을 열어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여인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전해 준 것도 천사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 하늘로 승천하셨을 때에 제자들에게 나타났던 것도 천사들이었습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전도할 때 가사로 가는 남쪽 길로 가라고 지시하고 하고,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증거하라고 말한 것도 천사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을 때 성도들이 베드로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자 하나님이 보내 옥문을 열게 한 것도 천사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시 선교할 때 어려울 때마다 밤에 나타나고 지중해 풍랑에서 지켜준 것도 천사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 유배되어 기도하고 있을 때 요한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환상을 보여 글로 쓰라 한 것도 천사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천사의 존재를 믿지 않은 데 그렇다면 성경의 많은 부분은 다시 써야 할 것입니다. 천사는 존재하며 하나님도 응답합니다. 문제는 기도입니다. 기도해야 하나님이 응답하고 하나님이 응답할 때 천사가 활동합니다. 다시 7절을 보실까요? 행12:7,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여러분은 천사의 존재를 믿습니까?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시고 천사를 통해 돕는다는 것을 아십니까? 능력의 비결은 기도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행12:12,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라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 다같이 “기도하고 있더라”.
기도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불임환자도 기도를 받으면 임신성공률 2배로 높아진다는 보고가 나왔습니다. 1998∼1999년 서울 차병원에서 불임치료를 받은 환자 199명의 이름을 미국과 캐나다, 호주의 기독교인에게 넘겼습니다. 그들은 물론 이들이 누군지 모르고 환자들도 자기를 위해 누가 기도하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 결과 기도받은 여성들의 임신성공률이 기도해주는 사람이 없는 여성들보다 두 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을 공동으로 연구한 미국의 로보 박사는 “연구결과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이를 발표해야 할지 말지 고민했다”고 말했습니다. 그 자신이 기독교인이었지만 기도의 결과가 이렇게 클 줄 몰랐다고 했습니다. 뉴욕 타임스에서는 이 방법을 심장병 환자에게도 적용했습니다. 이름을 전혀 모르는 다른 기독교인에게 주고 기도하게 했습니다. 환자들은 기도하는 줄도 몰랐습니다. 치료가 배나 나타났습니다. 기도의 능력입니다.
얼굴을 모른 사람이 기도해도 치료가 임하는 데 얼굴도 알고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기도하면 얼마나 큰 능력이 나타나겠습니까? 이것이 중보기도의 능력입니다. 왜 안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까? 사65:24,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시편 21:2, “그의 마음의 소원을 들어 주셨으며 그의 입술의 요구를 거절하지 아니하셨나이다(셀라)” 렘29:13,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요일 5:14, “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아멘.
셋째. 반드시 최후에 승리함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베드로가 감옥에 나온 후에 일어난 또한 사건을 기록합니다. 그것은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감옥에 집어 넣었던 헤롯의 운명에 관한 기록입니다. 20절 이하에 의하면 어느날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백성들에게 연설을 시작했습니다. 20절에 “연설했다”는 말은 “열변을 토했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는 아니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를 쳐 충이 먹어 죽게 했다는 기록입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이 사건은 역사적 사건으로 성경 말고도 요세푸스의 역사책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세푸스는 이 사건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헤롯은 황제 시이저를 기념하는 축제에 참석하려고 두로에 갔다. 거기에서 그는 금은보석으로 꾸며진 화려한 옷을 입고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탁월한 연설가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 연설에 정신을 빼앗겼다. 그가 연설을 계속하자 사람들은 ‘이것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다. 신의 목소리다’고 소리쳤다. 분명 헤롯에 대한 아첨이었다. 그런데 그가 연설하는 도중 갑작스런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배를 움켜쥐더니 데굴 데굴 뒹구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 바라보는 데 헤롯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고통스러워 했다. 며칠 후 그는 죽었다”.
성경은 그 원인을 “헤롯이 충이 먹어 죽었다”고 말합니다. 충이 먹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학자는 그것을 구멍 뚫린 충양돌기로 인해 생긴 급성 복막염으로 봅니다. 렌들 쇼트 박사는 그것은 헤롯안에 있는 회충이었는 데 그것이 갑자기 “급성장폐색”을 일으켜 헤롯을 죽게 했다고 말했습니다. 어쨓든 헤롯은 통증 때문에 데굴 데굴 구르다가 왕궁으로 옮겨진 후 5일만에 죽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강조점은 이것입니다. “헤롯은 죽었으나 하나님은 죽지 않았다. 한때 잘 나가던 폭군은 죽었으나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 계신다”. 그래서 23절과 24절을 연속해서 읽어야 합니다. 23절, 행12:23,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24절, 행12:24,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헤롯은 죽으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더라“. 야고보를 칼로 죽이고 베드로를 감옥에 집어 넣은 헤롯은 비참하게 죽고 기도하던 교회는 흥왕하더라”. 아멘. 그래서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는 최후 승리한다고. 우리에게 많은 고난이 있으나 우리는 마침내 승리한다고. 여러분도 그렇게 믿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 한 가지 더 알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최후에 승리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오늘 감옥에서 나왔지만 베드로가 언제나 죽지 않고 살았습니까? 주후 64년에 로마에서 십자가를 거꾸로 메고 죽었습니다. 왜 감옥에서 나오게 한 하나님이 로마에서는 살려주지 않았나요?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이 살릴 때 살리시고 불러갈 때 불러가는 것입니다. 그 시점이 사명의 완수입니다. 하나님이 때가 되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다 완수되었다고 믿으면 우리를 더 이상 땅에 두지 않고 하늘나라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승리한다는 말은 우리가 이 땅에서 영원히 죽지 않고 산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사명을 다 하는 날, 우리는 베드로처럼 언젠가 죽을 것입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바울을 많이 도우신 하나님이 주후 64년 로마에서의 바울의 순교는 막지 않으셨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고난에서 건져주시기고 하고 때로 그냥 두시기도 합니다. 심지어 그 고난 때문에 우리가 죽을 수도 있습니디. 우리는 거기까지가 하나님의 영역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래도 그것까지가 우리의 승리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까지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계획하신 일을 우리가 하는 거기까지 하면 우리가 사나 죽으나, 살든지 죽든지 우리는 승리한 것입니다. 우리가 때가 되어 죽는 것이 실패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않는 것이 실패입니다. 우리가 살든지 죽든지 우리가 고난당하든지 우리가 평안하든지 우리를 통해 계획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우리는 승리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떻게 되든 하나님안에서 승리할 것입니다.
초대 교부 중에 ‘크리소스톰’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예수믿는다고 붙잡혀 황제앞에 섰습니다. 황제가 그에게 예수믿는 것을 포기하라고 말했습니다. 크리소스톰은 그렇게 못하겠다고 말했습니다. 화가 난 황제가 말했다. “저 놈을 독방에 집어 넣고 아무 하고도 대화하기 못하게 하라”. 그때 옆에 있던 신하가 말했습니다. “황제여, 그는 기독교인입니다.” 황제가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그가 기독교인이라는 게 어쨌단 말이야! 빨리 집어 넣어라”. 이때 신하가 말했습니다. “황제는 모르십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만일 혼자 두면 기도하는 시간이 많아졌다고 좋아할 것입니다. 예수믿는 사람은 자기들의 신과 무슨 이야기하듯 도란도란 이야기합니다. 그를 혼자 두면 그를 도와주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황제가 말했습니다. “고래?” “그렇다면 그를 극악 무도한 죄인들이 있는 곳으로 집어넣어라.” 신하가 또 다시 고개를 흔들며 말했습니다. “그것은 더더욱 안 됩니다. 그것은 그에게 전도하라는 말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사람을 보면 자기들의 신을 선전합니다. 그렇게 되면 감옥에 있는 모든 죄수들이 예수믿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황제가 또 말했습니다. “그래?그러면 그놈을 내어다 목을 쳐라.” 그러자 신하가 깜짝 놀라며 말했습니다. “황제님, 그것은 가장 안될 일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의 가장 큰 상급이 순교라고 믿고 있습니다. 저들을 죽이면 한 사람도 울지 않고 얼굴에 광채가 나고 기뻐합니다.” “그러면 그를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이냐?”. 신하가 말했습니다. “그냥 내 버려 두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크리소스톰은 석방되었습니다. 황제도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은 기독교인을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든 최후 승리한다는 것을 믿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안에 있으면 사나 죽으나 승리한다는 것을 믿습니까? 우리가 답답한 일을 당하고 박해를 당하고 버림바 되고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우리는 낙심치 아니하며 버린 바 되지 않고 망하지 않을 것을 믿습니까? 설령 고난을 당해도 현재의 고난은 장차 닥쳐올 영광과 비교할 바 없다는 것을 아십니까? 무엇보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두려워 하지 말 것은 고난은 그리 길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 우물에 동생이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물을 긷다가 우물속으로 빠졌는 데 다행히 밧줄을 잡았습니다. 제가 “야, 밧줄 놔. 우울 안 깊어” 했어도 동생은 우물이 깊다며 밧줄만 잡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우물은 30센티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바닥은 생각보다 깊지 않습니다. 믿고 줄을 놓으면 물속에 떨어지지만 다치지는 않는 것입니다. 인생 고난도 생각보다 깊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줄을 넣으십시오. 인생 고난 생각보다 오래 가지 않습니다. 언젠가 사라지고 옛날 이야기할 때가 옵니다. 고난, 반드시 이깁니다. 헤롯, 반드시 망합니다. 하나님의 교회, 반드시 승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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