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카게 살자 마 5:14-16
(2016년 7월 31일 주일)
빛의 중요성에 대해 과학자들이 실험을 했습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실험용 쥐들의 생존 능력을 실험했습니다. 먼저 완전히 깜깜한 장소에서 대야에 쥐를 한 마리 빠뜨린 후 익사하기까지의 시간을 쟀습니다. 그랬더니 3분을 넘지 못했습니다. 다음 다른 쥐를 대야에 넣었는데 이번에는 빛을 완전히 차단하지 않고 한 줄기 빛을 비추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쥐는 36시간이나 살아 있었습니다. 완전히 깜깜한 장소의 쥐보다 700배나 더 오래 버틴 셈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빛 때문입니다. 빛을 보고 희망이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고 소돔과 고모라 생각이 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소돔과 고모라에 죄악이 너무나 가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사랑하셔서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의 비밀을 알려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즉시 조카 롯을 생각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이 소돔성에 살고 있는데 그 성이 멸망하며 롯도 위험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망시키시는 분이 아니잖아요. 만약에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50명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의인 50명이 있다면 그 성을 멸망시키지 않겠다.” 롯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지만 안심이 되지 않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50명이 없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다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죄송한데요. 만약 의인이 45명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만약에 그곳에 의인 45명이 있어도 멸망시키지 않으시겠다고 응답해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계속해서 의인 40명, 30명, 20명 10명까지 내려가며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 10명만 있어도 그 곳을 멸망시키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세상의 빛이 되는 의인들이 세상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적인 원리입니다. 대한민국에 기독교인을 적게 잡으면 약 10%입니다. 10%의 기독교인이 세상의 빛으로 산다면 이 나라는 안전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기독교인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지 못한다면 이 나라는 미국이 사드를 배치고 핵항공모함을 보내줘도 아주 위험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기독교는 사회적 종교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고 세상의 빛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만 소금과 빛으로 살아서는 안 되고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 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단절하고 사는 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이 제자들과 변화산에 가셨습니다. 주님은 기도 중에 변화되셨습니다. 주님에게서 광채가 났습니다. 주님의 옷은 세상에서 어떤 방법을 써도 그렇게 될 수 없을 정도로 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서 주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베드로는 그곳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곳은 마치 천국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에게 자기가 그곳에 초막 셋을 지을테니 세상에 내려가지 말고 그곳에서 살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구름이 그곳을 덮었고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 일 후에 주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다시 산 아래로 내려가셨습니다. 기독교는 사회적 종교입니다. 신앙인들은 세상을 떠나서는 안 되고 세상 속에서 빛으로 소금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야 하지만 사람도 의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지만 사람들은 외모를 보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러므로 외모도 가꿀 필요가 있습니다. 예배드리러 교회에 올 때도 우리는 하나님을 의식하고 마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중심을 잘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과의 만남이기 때문에 최고로 단정한 옷을 입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등지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세상 속에서 세상의 일원으로 살 되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제가 몇 주 전에 교회사에 있었던 수도원 운동의 대표주자였던 기둥 위의 성자라고 불렸던 시므온 이야기를 했습니다. 광야에 약 3m의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서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몰려오자 기둥은 점점 높아졌습니다. 마지막에는 약 20m 높이의 기둥에서 생활했습니다. 제자들이 아침저녁으로 음식을 밧줄로 올렸고 배설물은 밧줄로 내렸습니다. 그는 자신을 기둥에 꽁꽁 묶어 학대했고 마지막엔 벌레가 몸을 갉아 먹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성자라고 불렀지만 저는 그분을 생각하면 안타깝습니다. 그분은 복음의 참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한 분이다. 성경의 진리를 오해한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세상을 멀리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소금이 되고 세상의 빛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세상이 어둡기 때문입니다. 특히 지금 이 시대는 마지막 시대가 되어서 그런지 더욱 어둡습니다. 전에는 부끄럽게 여기던 어둠의 일들을 이제는 아무 부끄러움 없이 공개적으로 행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오늘 설교는 참 빛이신 주님을 믿는 우리가 세상의 빛인데, 우리가 빛으로 산다는 말은 무슨 말이고 왜 빛으로 살아야 하고 어떻게 빛으로 살 수 있는가를 나누겠습니다.
1. 빛으로 산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한 마디로 말하면 착하게 산다는 말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오타가 아닙니다. 인터넷에서 보니 조폭 중에 팔에 ‘차카게 살자’라고 문신을 한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전에 TV에서 나오는 것도 본 일이 있습니다. 빛으로 사는 것은 착하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16절에 보면 우리의 빛을 사람들에게 비치게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이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빛으로 사는 것은 착한 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위가 착한 것을 말합니다.
엡 5:9을 보겠습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빛으로 사는 것은 참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착하게 보이는데 의롭지 못하고 거짓되다면 빛이 아닙니다. 빛으로 사는 것은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 있는 생활입니다.
여러분 생각에 여러분은 착하게 살고 있습니까? 한국교회는 착한 교회입니까? 제가 여러분을 개인적으로 어떻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한국교회는 어떻습니까? 한국기독교는 착한 교회인가요? 2015년에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라는 단체가 내놓은 자료가 있습니다. 이 자료는 기독교가 세상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종교관련 사회복지법인 총 372개. 그 중에 기독교 194(52.15%)개, 전국 종합사회복지관 총414개. 그 중에 기독교 188개(45%), 노인복지시설 88개. 그 중에 기독교 54개(62.85%) 지역아동센터 3,013개. 그 중에 기독교 1,601개(53.13%), 전국 사립 초,중,고 361개. 그 중에 기독교 259(72%)개, 대북지원민간단체 79개. 그 중에 기독교 22개(36%), 지난 3년간 총대북지원액중에 기독교 40.29%, 해외원조단체 협의회 47개중 기독교 17개(36%), 전국 종교병원 169개중 기독교 49개(29%),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 장기기증신청자 586,407명중 기독교 363,496명(62%), 서해안기름유출 봉사 1,226,730명중 기독교 700,000명(57.06%)” 기독교가 하나님 보시기에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타 종교와 불신자들과 비교했을 때 월등하게 사회봉사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는 통계입니다. 빛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착하게 살며 세상에 봉사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2. 왜 착하게 살아야 하는가?
14절에 보니 기독교인들은 산 위에 있는 동네와 같습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라는 말은 온 세상에 보여진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독특하게 집을 짓습니다. 우리는 보통 평지나 골짜기에 집을 짓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높은 데 집을 짓습니다. 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대부분의 동네가 산위에 있습니다. 예루살렘도 높은 산위에 서 있습니다. 나사렛도 높은 곳에 집들이 있습니다. 요즘 이스라엘로 돌아온 유대인들을 위하여 정착촌을 짓는데 대부분이 산 위에 건설합니다. 갈릴리에 가면 티베리우스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우리 기도팀이 이스라엘에 갔을 때 그곳에 있는 호텔에서 묵었습니다. 그 도시도 높은 산위에 있습니다. 갈릴리 바다가 내려다보입니다.
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렇게 높은 곳에 집을 지을 까요? 어느 목사님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크게 네 가지를 이야기를 했습니다. ① 우선 덥기 때문에 높이 올라가면 시원합니다. 기후적인 이유입니다. ② 다음은 이스라엘 산은 대부분 단단한 바위로 되어 있기 때문에 산에 집을 세우면 안전합니다. 지질적인 이유입니다. ③ 세 번째는 전쟁이 나면 적군이 골짜기를 통해 올라오기 때문에 방어할 시간을 갖게 됩니다. 전략적인 이유입니다. ④ 마지막은 산에 올라갈수록 하늘이 가깝고 기도가 빨리 응답됩니다. 영적인 이유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높은 곳에 집을 짓고 사는 관습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세 상에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언제나 노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높은 곳에 집이 있으니 다 본다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인을 보고 하나님을 찾습니다. 기독교인들이 경건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은 경건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인들이 불경건하게 사는 모습을 보면 하나님은 안 계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경건하게 살면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앞에서 제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라는 단체가 내놓은 통계자료를 말씀드렸습니다. 그 정도라면 기독교가 세상에서 찬한 일을 많이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기독교는 다른 종교보다 심지어 어떤 때는 정부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비판받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은 몇 가지 답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목사님의 말씀을 제가 정리해보면 두 가지입니다.
첫째, 교회는 자신이 한 일을 홍보하지 않습니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대로입니다.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한 번도 우리는 이렇게 많은 일을 하고 있다고 광고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많은 일을 하고도 하나님만 아시면 되지 하고 숨겨왔습니다. 이제는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래도 문제가 있다면 불쑥 불쑥 터져나오는 소수의 교회 지도자들의 문제입니다.
사실 다른 집단이나 개인은 잘못하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더 잘못을 많이 합니다. 문제는 드러나지 않을 뿐입니다. 장관이나 총리 청문회할 때 보면 겉으로 볼 때는 멀쩡한 데 속을 뒤집어 보니까 차마 볼 수 없습니다. 온갖 비리가 다 나옵니다. 요즘 검찰과 청와대 인사들의 비리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제 놀랍지도 않습니다. 왜요?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니까요. 문제는 그런 일들이 빙산의 일각이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어떤 비리, 어떤 부정이 아무도 모르는 데서 저질러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두 종류의 죄인이 있다고 합니다. 잡힌 죄인과 아직 잡히지 않은 죄인입니다. 모두가 다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또 하나는 교회에 대한 높은 기대치 때문입니다. 교회가 세상보다 더 나빠서 비난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깨끗한 데 교회만 유달리 더러워서 문제가 된 것이 아닙니다. 상대적으로 보면 교회는 훨씬 깨끗하고 좋은 일도 훨씬 많이 합니다. 다만 이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의 죄는 잘 안 드러나고 교회의 죄는 잘 드러납니다. 세상은 죄가 드러날 때까지 숨기다가 드러나면 끝까지 오리발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언제나 공개되어 있고 드러나면 숨길 수 없습니다. 세상은 본래 죄 짓는 곳이기 때문에 죄를 지어도 그런가 보다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본래 죄 없는 곳으로 생각하다가 무슨 죄가 드러나면 사람들이 “아니, 교회가?” 하고 놀랩니다. 일반인은 죄를 지어도 그런가 보다 합니다. 그런데 목회자는 죄를 지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 비판을 받습니다. 한마디로 교회는 산위에 선 동네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바라보고 있고 다 노출되어 있습니다. 교회에 하나님의 영광이 달려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착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3. 어떻게 착하게 살 수 있을까?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착하게 살 수 있는 몇 가지 비밀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이 확실히 하라.
내가 누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알면 내가 해야 할 일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족구를 좋아합니다. 족구는 세 개의 포지션이 있습니다. 공격수와 세터와 수비수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포지션을 세터로 꼽기도합니다. 저는 주로 공격을 하는데 공격을 잘하려면 세터가 아주 중요합니다. 세터는 공격수에게 어시스트 하는 포지션입니다. 수비수가 받은 공을 세터가 공격수가 공격하기 좋게 띄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족구 초보자들 중에는 세터의 역할을 모르고 공만 오면 자기가 공격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게임에 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세터가 자기 포지션을 이해하고 어시스트에 힘을 쓰면 그 경기는 이길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세터가 분명한 자기 정체성을 갖게 되면 자기 역할을 잘 감당하게 되고 그 결과는 경기의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입니다. 이걸 망각하기 때문에 어둠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빛이라는 자기 정체성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어둠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미국 인디언들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져 옵니다. 한 젊은이가 독수리 둥지를 발견했습니다. 젊은이는 장난삼아 독수리 둥지에서 알 하나를 꺼내어 뇌조 둥지에 옮겨 놓았습니다. 뇌조는 들꿩과에 속하는 날지 못하는 새입니다. 뇌조 둥지에서 태어난 독수리는 자기가 뇌조 새끼라고 여기며 자랐습니다. 그래서 뇌조처럼 소리를 질렀고 먹잇감을 사냥하는 대신 벌레를 찾아 흙속을 뒤적였습니다. 날개에 비해 몸집이 커서 사람 키 높이 정도밖에 날아오를 수 없는 동료들을 보며 자기가 날 수 있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독수리의 생명과 날개를 갖고 태어났으나 잘못된 정체성을 가졌던 독수리, 자기가 누구인지 몰랐던 독수리는 하늘을 날아 보지 못하고 뇌조처럼 살다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입니다. 이 정체성이 분명해야 세상의 빛으로 살 수 있습니다. 저를 따라합시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2) 하나님을 대면하라
우리가 예배에 힘을 쓰고 개인적으로 기도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예배 생활과 기도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는 세상의 빛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창 32:30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야곱이 20년 만에 밧단아람에서 고향으로 돌아올 때 자기를 죽이겠다는 에서 때문에 얍복강 가에서 기도를 하며 하나님을 대면했습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브니엘 즉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하나님을 대면하므로 일어난 변화가 있습니다. 창 32:28을 보겠습니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그는 이스라엘로 변화되었습니다.
출 34:29을 보겠습니다.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대면했습니다. 그 결과 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습니다. 모세의 얼굴에서 나는 빛 때문에 백성들은 모세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백성들을 만날 때에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날 때는 수건 벗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니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모세를 통해서 반사 되었던 것입니다.
발광체가 있고 반사체가 있습니다. 발광체는 스스로 빛을 내지만 반사체는 빛을 받아서 반사합니다. 하나님은 발광체요 우리는 반사체입니다. 반사체인 우리가 세상에 빛을 발하려면 먼저 발광체이신 하나님을 대면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 60:1이 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일어나서 빛을 발하려면 먼저 빛을 받아야 합니다. 그 빛은 여호와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중요하고 개인 기도생활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배 시간과 기도시간은 하나님의 빛을 받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2) 자신을 희생하라
초가 빛을 발하려면 기름과 심지를 태워야 합니다. 초는 태움이 없이는 빛을 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의 빛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자신을 희생해서 빛의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몇 개의 성경구절을 보겠습니다. 신앙생활은 자기희생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막 10:21입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주님이 부자 청년을 부리실 때 하신 말씀입니다. 그는 부자였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그가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주님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 부자에게 ‘네가 가진 것의 일부를 팔아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셨습니다. 자기희생입니다.
고전 9:27입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바울은 자기가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켰습니다. 자기를 포기하는 자기희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이 있다고 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매로 치듯이 복종시키며 자기를 포기해야 합니다. 자기희생입니다.
골 1:24입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자기의 육체에 채웁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비전교회를 위하여 우리의 육체에 채워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직분자가 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것은 자기희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어릴 때 수련회를 가면 꼭 하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켐프 파이어입니다. 주로 마지막 날 밤에 진행했습니다. 장작은 자기를 태워서 불을 내고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빛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은 장작이 타듯이 자기를 희생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3) 성령의 인도를 따르라
행 10:38입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 즉 착한 일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성령의 역사로 빛 된 생활을 하셨던 것입니다.
성령님은 착한 영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님이 역사하시면 착하게 살고 빛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조카 운전연수를 해준 일이 있습니다. 이틀을 하고 포기했습니다. 더 해주고 싶었지만 위험해서 더 이상 진행할 수 없었습니다. 조수석에 보조 브레이크라도 있으면 하겠는데 너무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니 ‘이러나 내가 죽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포기했습니다. 한번은 앞 차와 박을 뻔했습니다. 한번은 중앙선을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전문가에게 운전연수를 받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내 자동차가 그런 자동차가 아닌데 걔가 핸들을 잡으니 자동차가 미친 것 같았습니다. 자동차의 문제가 아니죠. 운전자의 문제입니다.
우리 인생의 핸들을 성령님께서 잡으시도록 하면 안전합니다. 그러면 착한 일을 하게 되고 빛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4) 예수 그리스도로 살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 속에는 참 빛이신 주님이 계십니다. 요 1:9입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주님은 우리 안에 오셨고 주님은 참 빛이기 때문에 우리는 당연히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 등이 있다고 가정합시다. 등불을 켰습니다. 그러면 빛이 나옵니다. 이게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 당연한 빛 된 생활이 안 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참 빛 되신 주님을 모시고 살면서도 빛 된 생활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빛이 빠져나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어릴 때는 등불을 켰습니다. 기름이 좋지 않아서 등을 자주 청소해주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유리관에 끄름이 묻기 때문입니다. 그 끄름이 빛을 차단했던 것입니다. 우리 속에 계시는 참 빛 이신 주님이 우리를 통해서 나가지 못하시는 것도 이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빛으로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빛이 우리를 통해서 나가지 못하는 이유는 첫째, 끄름이 유리관을 더럽혀서 빛이 나가지 못하는 것처럼 해결하지 못한 죄들 때문입니다. 둘째, 주님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범사에 주님을 인정하라고 하는데 그렇게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셋째, 내가 살아있어서 그렇습니다. 갈 2:20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리스도인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주님께서 사셔야 합니다. 주님이 나를 통해서 나가셔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살아서 주님을 가둬두고 나만 움직이기 때문에 주님의 빛이 나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을 통과해야 합니다. 이 강단에 있는 흰 수건이 노란 물감을 통과하면 노란 수건이 됩니다. 내 안에서 나오는 감동과 소원 그리고 아이디어 등이 나에게서 그냥 나가면 그것은 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에게 묻고 행하고, 기도하고 행하고, 주의 음성을 듣고 행하면 주님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든지 주님을 통과하면 그것이 바로 나를 통해서 주님의 빛이 나가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하라
제가 요즘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매일 1시간 이상 유튜브를 보면서 운동을 합니다. 날마다 속옷까지 젖을 정도로 운동을 합니다. 지난 45일 동안 4kg 정도 빠졌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 몇 분과 식사를 하다가 운동 이야기가 나왔고 제가 요즘 하는 운동 방법을 말했습니다. 두 분이 카톡에 제가 하는 운동을 올려달라고 해서 유튜브 주소를 순서대로 올렸습니다. 며칠이 지난 후에 한 분 목사님을 만나서 “운동 잘하고 계십니까?”라고 물었더니 목사님께서 “힘들어서 못하겠어요. 한 가지도 못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따라하는 운동이 7가지인데 그 목사님은 폐가 좋지 않아서 단 한 가지도 따라하지를 못한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은 제가 하는 운동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니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착하게 살고 빛으로 살려면 그렇게 살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그 능력을 줍니다. 딤후 3:16-17을 보겠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하게 합니다. 그리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읽다가 변화된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성경읽기 그래프를 만들고 스티커까지 붙여가며 성경을 읽게 하는 것은 여러분들을 힘들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하게 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만들어주시는 책입니다. 성경 말씀으로 충만하면 우리는 착하게 살 수 있고 빛으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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