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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로마서강해/제10강 어떤 모습으로 나오십니까?(2:17-24)

제10강 어떤 모습으로 나오십니까?(2:17-24)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날, 하나님 앞에서 어엿이 설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지난 주에 세 가지로 나누어서 간단하게 생각해보았습니다. 첫째로 모든 인간은 다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범죄한 자는 망하고, 범죄한 자는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피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율법이 있는 유대인도 피할 수 없고,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해보았습니다. 마지막 세번째로,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 하나님 앞에서 어엿이 설 수 있는 사람은 누구라고 했습니까?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은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 어엿이 설 수 있다는 사실을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이방인들에게는 율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방인들이 잘못을 범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것은 너무나도 가혹한 것이 아닙니까? 여기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도 바울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심어주셨다고 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천지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통해서 보여주셨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그 본성으로 얼마든지 율법의 일을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새긴 양심의 법에 따라서 율법의 행위를 얼마든지 나타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였던 D.L. 무디에게 하루는 어떤 청년이 찾아와서 이러한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우리 어머니가 얼마 전에 돌아가셨는데 우리 어머니는 비록 예수를 믿지는 않았지만 이 세상에서 남 못지 않게 착하게 사신 분이십니다. 법 없이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좋은 일도 많이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 어머니가 예수를 믿지 않았다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까?”
우리도 그와 같은 질문을 많이 합니다. 옛날 우리 나라에 복음이 전해지기 전에 살았던 우리 조상들, 착하게 살았던 우리 조상들이 다 지옥에 가야 하는가? 여러분 여기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답변을 하시겠습니까?
그때 무디가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대단히 죄송하지만 저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놓여 있는 생명책을 들여다 본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누가 천국에 갔는지, 누가 천국에 가지 못했는지에 대해서는 제가 감히 말씀드릴 권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한 가지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심판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가 천국에 가느냐, 지옥에 가느냐에 대해서는 우리가 감히 말할 권한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게 되면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 하나님 앞에서 어엿이 설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아무리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범죄한 자는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이 있는 유대인들은 어떠합니까? 자기들에게 율법이 있다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 하나님 앞에 어엿이 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아무리 율법이 있는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왜 하나님 앞에서 어엿이 설 수 없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우리들에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편의상 오늘 분문을 세 가지로 나누어서 간단하게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첫째는, 17~20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이 유대인들이 얼마나 율법을 자랑했는지 자세하게 설명해주었습니다. 두번째로, 21~22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자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율법대로 살지 못하고 율법을 범했다는 사실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가면서 우리들에게 설명해주었습니다. 마지막 세번째가 결론으로, 23~2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자랑했지만 그 율법을 범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오히려 욕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유대인들이 자기들에게 율법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 어찌 감히 하나님 앞에 어엿하게 설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간단간단하게 살펴보면서 행여 나의 모습에서는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고발한 것과 같은 모습이 발견되지는 않는지 반성해보시기 바랍니다. 쓸데 없는 권위의식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아야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대인처럼 외식적인 삶을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우리의 모습은 아니었는지 반성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올 때에 어떠한 모습으로 나와야 마땅한지, 어떠한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 받으시겠는지 말씀을 통해서 깨닫는 귀한 은혜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유대인들이 얼마나 율법을 자랑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7절 말씀에 보면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라는 말씀으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은 자기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굉장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었습니다. 첫째는 이방인들에게는 없는 율법이 있다는 것과, 두번째로는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율법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일에 살펴보게 될 본문에서는 할례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얼마나, 어떻게 율법을 자랑했는지 사도 바울은 17절 이하에서 다섯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제가 17절 말씀부터 19절 상반절까지 천천히 봉독하겠습니다.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첫째로는, 율법을 의지하며, 둘째로,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자랑하며, 세번째로,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네번째로,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다섯번째로,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첫째로, 율법을 의지했다고 했습니다. 자기들에게 율법이 있다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얼마든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여기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설명해주었습니까?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12절에서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 자기들이 의지하고 있는 율법이 오히려 자기들을 정죄할 것이라는 것을 유대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두번째로, 유대인들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자랑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유대인 남자들을 보면 머리에 베레모 같은 모자를 쓰고 다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감히 나를 건드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는 분이십니다. 유대인이든지 헬라인이든지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심판주시라는 것을 유대인들은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번째로는,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심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특별히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내려주셨습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분명하신 뜻을 계시해주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많이 준 자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네번째로,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겼다고 했습니다. 단순히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가를 구분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 가운데서도 최고로 선한 것이 무엇인지, 지극히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유대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또 마음에 좋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알고, 좋게 여겼다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실천을 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지 못하고 오히려 범죄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번째로, 19절에 보면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라고 했습니다. 규모라고 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규격과 모양이라는 것입니다. 뼈대, 골격, 본질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헬라 사람들처럼 철학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연구하고 탐구해낸 진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 나와 있는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신 진리를 유대인들은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삶을 살아야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쓸데 없는 권위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마음속에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을 멸시하고 경멸했습니다.
어떻게 경멸했는지 19절 하반부부터 2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여기에 나오는 소경이라든지 어두움에 있는 자, 어리석은 자, 어린아이는 누구를 가리키는 말입니까? 이방인을 가리켜서 하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을 경멸하고 멸시했습니다. 반면에 자기들은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인도하는 자요, 빛이요, 훈도요, 선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스스로 믿었다고 했습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의 발단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오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이 부족한 저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하는 마음으로 나오는 사람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항상 어떤 사람에게 문제가 있습니까? “나는 다른 사람보다 더 똑똑하고, 더 잘나고, 더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시험에 빠져들고 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주님 앞에 나올 때 어떤 마음으로 나오셨습니까? 목사로 나오지 마십시오. 권사로 나오지 마십시오. 장로로 나오지 마십시오. 직분을 감투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이와 같은 마음으로 나와야 할 것입니다. 죄인의 심정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우리가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령과 진정의 경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직분을 가지고 나오지 마십시오.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두번째로, 유대인들이 어떠한 죄를 지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유대인들이 과연 어떠한 잘못을 저질렀는지 21∼22절에서 사도 바울이 우리들에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유대인들은 자기들을 이방인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부터 먼저 가르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외식하는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남을 가르치는 자라면 그 가르침대로 자기 스스로 먼저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자기 말을 그대로 실천을 해야 하는데 유대인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위선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에게 무슨 설득력이 있겠습니까?
아이가 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아이를 타이릅니다. “이놈아, 링컨은 너만한 나이 때 형편이 어려워서 고학을 했지만 열심히 공부를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었어.” 아들을 볼 때마다 아버지가 그렇게 나무랐습니다. 아들이 듣다 못해서 아버지에게 한번은 대꾸를 했습니다. “아버지, 링컨은 아버지 나이 때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어요.” 무슨 말입니까? 대통령도 되지 못했으면서 그렇게 잔소리하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부모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아이들에게는 텔레비전을 보지 말라고 하면 무슨 설득력이 있겠습니까? 설득력이 없습니다. 남을 가르치기에 앞서서 먼저 자신을 가르쳐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세 가지의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첫째로, 21절 하반부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고 했습니다. 말로는 제8계명을 가르쳤지만 그들 자신은 8계명을 어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고로 유대인들은 부정직한 방법을 통해서 부당한 이득을 취하기로 유명한 사람들입니다. 구약 성경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장사꾼들은 저울 추를 속였습니다. 되박을 마음대로 변경해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부당한 이득을 취했습니다. 세익스피어가 쓴 『베니스의 상인』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철면피와 같이 돈을 긁어모으는데 열심이었던 샤일록 같은 사람이 전형적인 유대인의 모습입니다. 심지어 구약의 말라기 선지자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너희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구나.” 하나님의 것까지도 도적질한다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 마땅히 바쳐야 하는 십일조를 드리지 않고 떼먹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까지 도적질하는 사람이 어찌 사람의 것을 도적질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의 땀흘려 번 돈이 탐이 나서 십일조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질을 주실 때 그 물질을 잘 관리할 수 있는지를 시험해보기 위해서 우리들에게 십일조를 요구하신 것입니다. 더욱더 많은 물질적인 복을 받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에 22절을 보면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고 했습니다. 말로는 7계명을 부르짖으면서 실제로는 7계명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드는 여인이 있습니다. 그 여인을 취하기 위해서 자기 아내를 헌신짝처럼 버렸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혼증서만 써주면 되는 줄 알았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무엇이라고 가르치셨습니까?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를 제외하고 자기 아내를 버리는 자가 바로 간음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혹시 이런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옛날 독일에 한 어린아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집을 비울 때 옆집 아저씨가 이따금씩 자기 집에 놀러오곤 했습니다. 그 옆집 아저씨는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옆집 아저씨가 놀러올 때는 어머니가 이런 구실 저런 구실을 붙여서 자기를 집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었습니다.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하루는 밖에 나가서 노는 척하고 가만히 돌아와서 문틈으로 동정을 살폈습니다. 어머니와 옆집 유대인이 함께 침실로 가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한참 뒤에 두 사람이 나오는데 완전히 몸가짐이 흐트러진 상태였습니다. 그 아이는 그때부터 유대인에 대한 극도의 증오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아이가 자랐습니다. 급기야는 쓰레기와 같은 유대인을 지구상에서 완전히 없애야겠다고 작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6백만이나 되는 유대인을 학살하는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누구의 이야기입니까? 히틀러의 이야기입니다. 유대인 한 사람이 간음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죄없는 동족 6백만 명을 희생시키는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세번째로, 22절 하반부에 보니까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우상을 지극히도 가증히 여겼습니다. 예를 들어봅니다. 당시 로마의 화폐인 데나리온을 보면 당시 로마의 황제 가이사의 얼굴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이러한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존엄한 신의 존엄한 아들 디베리우스 가이사.”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화폐가 우상숭배적인 화폐라고 생각하면서 그 화폐를 만지기조차 꺼렸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우상을 가증스럽게 여겼지만 뒤에서는 자기들에게 돈이 된다고 생각이 되면 이방 신전에 몰래 들어가서 신사 물건을 훔친 사람들이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우상을 훔쳐서 이방인들에게 내다팔았습니다. 유대인들은 돈이 생겨서 좋고 이방인들은 그것을 싸게 살 수 있었기 때문에 서로 좋았다는 것입니다.
행 19:37에 보면 이런 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각의 물건을 도적질하지도 아니하였고 우리 여신을 훼방하지도 아니한 이 사람들을 너희가 잡아왔으니.”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이 에베소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였습니다. 우상을 만들어서 팔던 사람들이 바울 일행 때문에 장사가 되지 않는다고 백성들을 선동했습니다. 연극장에 수많은 사람들을 동원해놓고 두 시간 동안이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라고 하면서 소리소리 질렀습니다. 그때 그 마을의 서기장이 나서면서 백성들을 진정시켰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아 도대체 그 사람들이 무슨 잘못이 있느냐? 신전에 들어가서 신사의 물건을 훔치다가 발각된 것도 아니지 않느냐? 고소할 일이 있으면 총독에게 하여 정식으로 재판을 하라. 이와 같이 불법적으로 시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러면서 모인 사람들을 해산시켰습니다.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방 신전에 들어가서 신사 물건을 훔쳐서 파는 사람으로 소문이 나 있을 정도였습니다. 저들은 도적질했습니다. 저들은 간음을 했습니다. 신사 물건을 훔쳐서 내다 팔아서 이방인들로 하여금 우상을 숭배하도록 조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우리들에게 말하려는 것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그와 같이 행하고서도 율법이 있다는 한 가지 이유로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 하나님 앞에 어엿이 설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유대인들은 율법을 받았지만 율법을 범하고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23절과 24절에서 결론을 내렸습니다. 어떻게 결론을 내리고 있는지 먼저 2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바울은 우리가 읽은 본문 첫째 대지에서 그 당시 유대인들이 얼마나, 어떻게 율법을 자랑하는지 설명해주었습니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율법을 범했습니다. 그들은 도적질했습니다. 간음을 했습니다. 신사의 물건을 훔쳐서 팔았습니다. 그러한 유대인들의 모습은 이방인들에게도 소문이 날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결국은 유대인들이 믿는다는 하나님이 욕을 얻어먹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4절에서 사도 바울은 구약 성경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우리들에게 다시 한번 그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기록된 바”는 구약 성경 사 52:5에 있는 말씀을 말하는 것입니다. 범죄한 너희로 인하여 하나님의 존귀하신 이름이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라 모독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너희가 감히 하나님 앞에 어엿이 설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느냐? 그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성도가 살아가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의 잘못된 삶으로 인해서 행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는 않았는지 우리가 반성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만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을 구경했습니다. 천국을 보니까 사람의 모습은 없고 귀만 둥둥 떠다니고 있었습니다. 또 입술만 둥둥 떠다니고 있습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우리 기독교인들이 듣기는 많이 듣고, 말은 청산유수로 잘하는데 들은 그대로 살지 못하고, 말한 그대로 실천하지 못한다는 것을 꼬집어서 만화로 그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명심해야겠습니다.
길을 가다보면 물고기 모양의 장식을 붙이고 다니는 차들이 요즘 눈에 많이 띄고 있습니다. 이 물고기 모양이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헬라어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다섯 단어의 첫 글자를 모으면 물고기라는 단어가 됩니다. “나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다”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차에 물고기 모양을 붙이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보다도 교통법규를 잘 지켜야지요. 양보하면서 운전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물고기 모양을 붙이고 다니면서 얌체처럼 운전하는 것을 보면 속에서 부화가 치밀어오릅니다. 차라리 떼버리고 운전하지 예수 믿는 것을 드러내면서 왜 저렇게 하는지 속상합니다. 우리의 잘못된 삶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는 않는지 우리가 늘 조심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간단하게 세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첫째로, 유대인은 율법을 자랑했습니다. 두번째로, 그러나 저들은 율법을 범했습니다. 세번째로, 그 결과 저들은 하나님을 욕되게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꼭 깨닫고 넘어가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너희”라고 하는 복수형 2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지 않고 “네가”라고 하는 단수형 2인칭 대명사를 사용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너희들”이라고 하면 “나는 괜찮아, 나는 해당 사항이 없어”라고 하면서 빠져나갈 궁리를 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손가락으로 지목하듯이 “네가,” “네가” 할 때는 우리 가슴이 뜨끔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남을 가르친다는 네가”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과연 “네가”가 누구입니까? 장로라고 하는 네가 과연 누구입니까? 안수집사라고 하는 네가 과연 누구입니까? 권사라고 하는 네가 과연 누구냐는 것입니다. 쓸데 없는 권위의식에 사로잡혀서 내가 그래도 장로인데, 내가 그래도 권사인데 하면서 교회에 무슨 지적할 것이 없나 하는 마음으로 교회에 나오면 무슨 은혜를 받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자기 의를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죄인 된 심정으로 나아와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을 수 있습니다. 빈마음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예수님으로 우리 마음을 채울 수 있습니다. 빈손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든든히 붙잡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처음 믿었을 때의 그 심정, 겸손했던 그 마음, 낮아졌던 그 심정을 어찌하든지 오늘 회복할 수 있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있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의 잘못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저희들의 부족과 허물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되지도 못하고 된 줄로 생각했습니다. 서지도 못하면서 선 줄로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내 부족을 깨닫지 못하고 쓸데 없는 권위의식에 사로잡혀서 남을 멸시하고 비판하는 일에 바빴던 저희들이었습니다. 우리의 부족을 용서해주시고 이제부터 저희들이 주님 앞에 나올 때 잘못된 마음가짐을 다 떨쳐버리고 죄인 된 심정으로 나올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감히 무엇을 자랑할 수가 있겠습니까? 낮아진 심정, 겸손한 심정으로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우리 승동의 가족들이 다 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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