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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로마서강해/제8강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2:6-11)

제8강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2:6-11)  


사도 바울은 롬 2:1~5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복음을 방해하고 복음을 대적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들에게 설명해주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 살펴본 것처럼 바울은 특별히 두 종류의 사람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었습니다.
첫째로는, 남을 판단하면서 자기 스스로를 의롭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복음의 필요성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은 죄를 짓지 않으니까 하나님의 심판은 자기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버렸습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무엇이라고 말씀해주었습니까? “남을 판단하는 너희들도 똑같이 죄를 짓고 있다.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느냐, 드러나지 아니하느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 너희들도 똑같은 죄인들이다.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너희에게도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잊지 말아라.”
두번째로, 하나님의 심판이 즉시 임하지 아니한다고 해서 심판 자체를 무시해버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복음 전파가 역시 막대한 지장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너희들을 즉시 심판하지 않는 것은 너희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이다. 그런데도 너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하나님의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너희가 멸시하고 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방해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아주 엄하게 경고의 말씀을 주었습니다. “너희가 계속해서 고집을 피우면서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진노의 날,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에 너희가 지금까지 쌓아놓은 진노가 한꺼번에 너희에게 임하게 될 것이다.”
곧 이어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러면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읽은 대로 모두 여섯 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내용상 두 절씩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6절은 마지막 11절과 짝을 이룹니다. 제가 6절과 11절을 연결해서 읽어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6절)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11절).”
여기서는 하나님의 판단이 어떻게 해서 의로운지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두번째로는 7절과 10절이 내용상의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7절과 10절을 함께 읽어봅니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7절)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10절).”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는 어떻게 나타났는지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 짝을 이루는 말씀이 본문 중간 부분에 나오는 8절과 9절입니다.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8절)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9절).”
여기서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예수를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설명해주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이 세 가지로 나누어서 잠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두번째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살펴보며, 세번째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는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먼저는 이미 복음을 받아들이고 어떻게 하든지 복음대로 살아보려고 애쓰는 여러 성도님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오는 은혜와 평강과 위로가 넘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아직도 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멸망의 길, 사망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불쌍한 영혼들을 돌아보고 그 사망의 길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건져내야겠다는 영혼 구원의 뜨거운 열정이 여러분 마음속에 불일 듯 일어나시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6절과 11절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6절)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11절).”
여러분은 성경을 보시면서 제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하시기 바랍니다. 6절 말씀입니다. 심판은 누가 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심판은 누구에게 하시는 것입니까? “각 사람에게.” 심판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그 행한 대로.”
심판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 우리를 위해서 판단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떠하신 하나님이십니까? 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하시는 판단도 의로운 판단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부정과 부패로 얼룩져 있습니다. 불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언뜻 보기에 오히려 예수를 믿지 않는 악한 사람들이 더 잘 사는 것 같습니다. 형통한 것 같습니다. 예수를 제대로 믿으려고 애를 쓰고 의롭게 살려고 하면 핍박을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의와 불의, 참과 거짓, 선과 악을 다 가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판단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믿기 때문에 참고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누구를 심판하신다고 했습니까? “각 사람에게”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라고 해서 전부 천국에 보내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방인이라고 모두 지옥에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판단이 의로우신 판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개별적으로 서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는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는 홀로 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때도 함께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시고,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나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님, 나를 위하여 사망의 권세를 깨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때도 우리 곁에 계시며 우리의 손을 붙들어주시고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변호해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두 손을 높이 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기 때문에 조금도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마음 든든한 일입니까?
또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응하신다고 했습니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임의대로, 자의대로 보응하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정확한 근거에 의해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판단이 의롭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심은 대로 거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벌을 주시고, 상을 받아야 할 사람에게는 잊지 않고 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판단은 의로우시다는 것입니다.
참고 선을 행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을 가지고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영생을 허락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고집을 피우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는 저들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신다고 했습니다. 저들에게는 환난과 곤고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 행한 대로 다 보응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판단은 의로우신 판단이 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11절에서 하나님의 판단이 의로우신 이유를 사도 바울이 다시 한번 반복해주었습니다. 1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여기서 “이는”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판단이 의로우신 이유는”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판단은 잘못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종종 외모로 평가를 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십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배웠느냐, 얼마나 돈을 많이 벌었느냐 등으로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 마음에 언제나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이 있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언제나 든든히 붙들고 주님을 위하여 눈물과 땀을 흘릴 각오가 되어 있느냐 하는 것들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미국 동부에 가면 보스턴이라고 하는 도시가 있습니다. 그 도시에 미국 최대의 명문 대학인 하버드 대학교가 있습니다. 그 하버드 대학교 정문에 비석이 하나 서 있는데 그 비석에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말라.” 이런 말이 새겨지게 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오래 전에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에 아주 돈 많은 억만장자 부부가 있었습니다. 저들은 자기들이 일평생 모은 돈을 사회의 뜻 있는 곳에 기증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저들은 평소에 후세 교육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당대 최대의 대학인 하버드 대학의 총장을 만나서 이 일을 상의하기로 했습니다. 서부에서 동부로 달려왔습니다. 학교에 도착했습니다. 정문에서 수위에게 총장을 만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수위가 그만 실수를 했습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평상시대로 수수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그 모양새를 보고 수위가 불친절하게 대한 것입니다. 그때 부인이 자기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이만한 대학을 하나 설립하려면 돈이 얼마나 들까요?” 수위가 옆에서 그 소리를 듣고는 기가 막혔습니다. 정신나간 사람처럼 취급했습니다. 결국 노부부는 하버드 대학교 총장을 만나지 못하고 쓸쓸하게 걸음을 돌이켰습니다.
노부부는 고향에 돌아와서 전재산을 다 기증해서 미국 동부의 하바드 대학교에 버금가는 좋은 대학을 설립하는데 기여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설립된 것이 미국 서부의 명문 대학인 스탠포드 대학입니다.
드디어 스탠포드 대학이 설립되던 날 하바드 대학의 총장이 축하를 하기 위해서 건너왔습니다. 뒤늦게 그 사연을 알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속이 상했겠습니까? 수위 한 사람이 외모로 사람을 취했기 때문에 학교는 엄청난 손실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학교에 돌아와서 정문에 비를 하나 세웠습니다. 큼지막하게 글씨를 새겼습니다.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말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을 볼 때 외모로 판단하는 옳지 못한 습성을 버려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 교회에 새로 나오는 새가족들을 외모로 판단하지 마세요. 한 사람 한 사람이 내 부모요, 내 형제요, 내 자매인 것처럼 친절하고 따뜻한 사랑으로 보살펴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 승동교회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랑의 공동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두번째로,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 과연 어떻게 나타났다고 했습니까?
7절과 10절에서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우선 7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여러분,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참고 선을 행하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복음대로 산다는 것, 예수 믿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에 저는 어떤 여집사님과 함께 전화로 이런 대화를 주고받았습니다. 너무나도 눈물어린 사연을 들었습니다. 그 집사님의 가정은 형편이 넉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붙잡고 그 뜻에 순종하면서 살려고 애를 쓰는 가정입니다. 아들이 군에서 제대했습니다. 용돈이 필요했습니다. “어머니, 용돈 좀 주세요.” “얘야, 지금 너에게 줄 돈이 없구나.” 아들에게 용돈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의 마음속에 문득 의심이 들었습니다. 과연 어머니가 돈이 없어서 용돈을 주지 못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있으면서도 주시지 않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없을 때 몰래 어머니의 가방을 뒤져보았습니다. 아들은 어머니의 가방에서 십일조 헌금봉투를 발견했습니다. 그 속에 돈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착했습니다. 그 돈에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뒤에 어머니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어머니, 봉투 속에 분명히 돈이 있던데 왜 제가 용돈을 달라고 할 때 없다고 하셨습니까?” 어머니는 아들을 타일렀습니다. “얘야, 그것은 내 돈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란다.”
저는 그 집사님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에게 용돈 하나 변변히 주지 못하는 심정이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속으로 많이 울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분명히 확신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복이 그 가정에 쌓여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에 그 가정에는 하나님의 엄청난 복이 폭포수와 같이 쏟아지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믿는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무엇을 보고 살아갑니까? 썩어질 육신을 보고 살아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7절에서 무엇을 추구하며 산다고 했습니까?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며 산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영광을 추구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롬 8:18에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그날에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면서 현재의 고난을 참고 견디며 선을 행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존귀를 추구하면서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세상 친구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멸시하고 조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에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높여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눈물과 땀을 씻어주실 것입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더 많은 일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 하나님께서 우리를 친히 높여주실 것입니다. 이것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 성도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또 썩지 아니함을 구한다고 했습니다. 썩어질 육신을 바라보면서 사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썩지 아니하는 것, 위엣것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 성도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은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무엇으로 갚아주신다고 했습니까? 7절 마지막 부분에 보니까 “영생으로 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날, 하나님의 손을 붙들고 저 영화로운 천국, 황금보석으로 꾸민 천성에서,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고 기쁨과 참된 평화가 있는 그곳에서 우리 주님과 더불어 영원토록 함께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10절에서 다시 한번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이 세상에서 우리가 눈물을 흘리면서 참고 선을 행하며 추구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다 허락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영광의 면류관을 우리에게 씌워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존귀케 해주실 것입니다. 썩지 아니하고 쇠하지 아니하는 참된 평강을 우리에게 허락해주실 것입니다.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내가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복음의 놀라운 혜택이 다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습니까? 낙심하지 마세요. 억울한 일을 당하셨습니까? 그것 때문에 너무 괴로워하지 마세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있습니다. 참고 선을 행하시기 바랍니다.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화롭게 해주실 것입니다. 존귀케 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강이 우리 마음에 차고 넘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세번째로,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어떻게 나타난다고 했습니까?
8절과 9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8∼9절을 우리 다 같이 한목소리로 읽어봅니다.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8절에 보면 예수를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 나타나는 세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첫째로 당을 짓고, 두번째로 진리를 좇지 않고, 세번째로 불의를 좇는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유대인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저들은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할례 받은 자기들을 할례당이라고 하고,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을 무할례당이라고 마음대로 판단하고 멸시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들은 또한 진리를 좇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진리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위하여 보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까? 그러나 저들은 그 진리를 받아들이지 아니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으려고 하지 않고 자기의 의를 끝까지 고집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저들은 불의를 좇게 되었습니다. 진리를 좇지 않으면 불의를 좇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람은 본질적으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좇지 아니하면 결국은 불의를 좇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은 불신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에 하나님께서 무엇으로 보응을 하신다고 했습니까? 8절 마지막 부분에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노라는 것은 원어로 보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는 뜻입니다. 분이라고 하는 것은 터져 버린다는 뜻입니다. 주전자에 물을 붓고 불을 때서 끓입니다. 그러면 부글부글 끓어오릅니다. 하나님께서 노하시는 모습입니다. 계속 가열을 하면 어떻게 됩니까? 한계에 이릅니다. 그러면 뚜껑이 날아갑니다. 터져 버립니다. 그것이 바로 분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 하나님의 진노가 화산처럼 터져 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은 당을 짓고,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들입니다. 이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육신은 잠시 잠깐입니다. 길어야 백 년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예수를 안 믿는 악인들도 잘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잠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영은 영원합니다. 저들이 지옥에서 당해야 할 고통은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다고 했습니다. 환난이라고 하는 것은 외부에서 오는 고통입니다. 곤고라는 것은 내적인 고통입니다. 저들이 앞으로 지옥에서 환난과 곤고를 세세토록 밤낮 없이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아무리 고통이 극심해도 그것이 끝날 것이라는 기대가 있으면 얼마든지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날 그날에 당할 환난과 곤고는, 지옥의 고통은 영원토록 끝나지 않습니다. 밤낮없이 세세토록 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가슴아픈 일입니까?
저는 요즘 목욕탕에 가서 은혜를 많이 받습니다. 깨닫는 것이 많습니다. 샤워를 하고 나서 제일 먼저 온탕에 들어갑니다. 그 다음에 냉탕에 들어갑니다. 제일 마지막에 들어가는 곳이 사우나 실입니다. 사우나 실에 가면 모래 시계가 있습니다. 모래 시계를 뒤집어놓으면 모래가 밑으로 떨어집니다. 시계가 없어서 시간을 재보지는 않았지만 모래가 다 떨어지기까지 3분을 초과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3분을 견디기가 쉽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몸이 벌겋게 달아오릅니다. 숨쉬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 3분을 채우려고 별 짓을 다 합니다. 우리말로 천천히 주기도문을 외워봅니다. 3분의 1도 안 내려갑니다. 그 다음에는 영어로 주기도문을 천천히 외워봅니다. 그래도 3분의 2도 채 내려가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헬라어로 주기도문을 천천히 외워봅니다. 그래도 끝나지 않아서 여러 가지 기도 제목을 가지고 기도를 해야 겨우 3분을 채울 수 있습니다. “이 3분 채우기도 어려운데 지옥의 고통은 얼마나 극심할까? 그래 맞아. 바르게 살자. 의롭게 살자. 믿음으로 살자.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자.” 이렇게 다짐하면서 3분이 되자마자 뛰쳐나옵니다.
미국의 대 전도자 빌리 그레함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죽는 것을 두려워하십니까? 나는 오히려 사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죽음으로 우리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고 난 뒤에는 우리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행한 대로 보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사는 것이 더 두렵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여 우리 주변에 아직도 복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사망의 길, 지옥의 길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는 이웃은 없습니까? 이번 한 주간 동안 우리가 저들을 위해서 더욱 기도합시다. 저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단 한 마디라도 좋습니다. 예수 믿으시라고, 교회에 나오시라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사시라고 단 한 마디라도 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여 저들이 지옥에 간다면 하나님께서 그 피 값을 우리에게 구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한 마디라도 이번 한 주간 동안 전도할 수 있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여러 가지 힘든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너무나도 괴로워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있기 때문입니다. 참고 선을 행하십시다.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해보십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화롭게 해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존귀케 해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평강을 허락해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영생의 길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흘린 눈물과 땀을 우리 주님께서 친히 다 씻어주실 것입니다. 이 귀한 약속을 믿음으로 붙들고 복음 위에 굳게 서서 오늘도 내일도 승리하시는 복된 삶이 여러분 모두에게 있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저희들을 불러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우리에게 있음을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사랑하는 우리 승동의 가족들이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을 붙들고 계속해서 참고 선을 행할 수 있는 아름다운 모습들이 다 되게 해주시옵소서.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할 수 있는 우리 승동의 권속들이 다 되게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신실하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의롭게 판단하시는 그날 우리를 영화롭게 해주시고 우리를 존귀케 해주시고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평강을 허락해주실 것을 믿고 모든 시련을 믿음으로 이기면서 승리할 수 있는 복된 삶이 우리 모두에게 있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합니다. 주님만을 바라보며 오늘도 눈물 흘리며 인내하는 성도들을 말씀으로 위로해주시고 허락하시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으로 덧입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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