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강 어엿이 앞에 서리라(2:12-16)
지난 주에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에 대해서 세 가지로 나누어서 잠시 살펴보았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판단이 의로우신 까닭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행한 그대로 보응을 하신다고 했습니다. 또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판단은 의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두번째로,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는 어떻게 나타난다고 했습니까? 우리는 참고 선을 행합니다.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면서 살아갑니다. 이와 같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영생으로 보응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영화롭게 해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존귀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영원히 쇠하지 않는 평강을 허락해주신다고 했습니다.
세번째로,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예수를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는 어떻게 나타난다고 했습니까? 불신자에게 나타나는 세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저들은 당을 짓습니다. 진리를 좇지 않습니다. 불의를 좇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 하나님이 그들에게 노와 분으로 보응을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영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환난과 곤고가 임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속에서 그러면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그때에 하나님 앞에서 어엿이 설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누구인지를 우리들에게 다시 한번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쉽지 않습니다. 제가 머리가 나빠서 그런지 저는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여러 번 계속해서 반복해서 읽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말씀을 깨닫고 나니까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에게도 지혜를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에게도 귀한 은혜가 있게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엿이 설 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복음을 받아들인 우리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어엿이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오늘 본문 속에서 아주 논리적으로 설명해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생각을 해봅니다.
첫째는, 12절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 남김없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범죄한 자는 망하고, 범죄한 자는 심판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심판 받아 마땅한 존재라고 했습니다.
두번째로, 12절에서 15절까지를 보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유대인에게 율법이 있다 할지라도 유대인이라고 하는 것으로는 심판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또 이방인들에게 율법이 없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에서 면제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있는 유대인이든지,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든지 누구나 다 똑같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그러면 누가 하나님 앞에서 어엿이 설 수 있습니까? 마지막 16절이 우리들에게 말씀을 해주고 있습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는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 어엿이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우리가 차례대로 간단간단히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 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는 우리만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 어엿이 설 수 있다는 이 세 가지를 차례대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었을 때 얼마나 비참한 존재였는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나같은 죄인까지도 하나님께서 버리지 아니하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해주셨다고 하는 이 놀라운 은혜를 여러분께서 기억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고 내가 어엿이 서리라는 분명한 확신이 여러분 마음속에 뚜렷하게 세워지는 이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 있다는 사실을 살펴봅니다.
12절이 그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을 제가 읽어봅니다. 읽을 때 제가 강조하는 부분을 유심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강조한 것이 무엇입니까? 율법을 가졌느냐, 가지지 못하였느냐?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가 무엇입니까? “범죄한 자는 망하고, 범죄한 자는 심판을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죄 짓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 말씀 앞에 찔리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영국의 어떤 청년이 재미있는 장난을 한번 쳐보았습니다. 영국의 수도 런던에 살고 있는 유명한 인사 중에서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고 있는 20명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는 장난으로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내용으로 전보를 쳤습니다. 그 내용은 아주 간단합니다.
“모든 것이 탄로났음. 즉시 피하기 바람.”
장난으로 전보를 보냈는데 그 다음날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스무 명 가운데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런던에서 자취를 감춰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 에피소드가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 죄인 아닌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롬 3:10에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고 했습니다. 또 3:23에서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다 죄인들이라고 했습니다. “범죄한 사람은 망하고, 범죄한 사람은 심판을 받으리라.” 우리는 본질적으로 죄 때문에 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달아 알아야겠습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주지 않으면 안되었는지 그 이유를 비로소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의 중요성을 우리가 바로 깨달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옛날 영국에 존 뉴턴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배를 타고 다니는 선장이었습니다. 존 뉴턴의 어머니는 그가 여섯 살 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달리 그를 보살펴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따라 함께 배를 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뱃사람들이 얼마나 거칩니까? 그도 어릴 때부터 뱃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다니다보니까 자연히 성격이 거칠어졌습니다. 방탕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부도덕한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잘못을 저질러서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종래에는 완전히 구제불능인간이라고 하는 낙인이 찍혀서 사회에서 격리가 되었습니다. 일평생을 노예선을 타고 다녀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지 아니하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를 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배 안에서 우연히 토마스 아 켐피스라는 사람이 쓴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끌렸습니다. 읽고 또 읽는 가운데 아주 깊은 감화를 받았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했습니다. 자기의 모든 지저분한 과거를 청산하고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뒤에 신학을 해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목사가 되어서 그는 일평생 동안 자기와 같은 죄인까지도 버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면서 살았습니다. 아울러 자기처럼 죄에 매여서 종살이하는 불쌍한 영혼들을 한 사람이라도 더 건져내기 위해서 부지런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존 뉴턴이 이제 나이가 많아졌습니다. 자연히 기억력이 감퇴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설교를 하면서도, 전도를 하면서도 자기가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 조차도 기억을 하지 못하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늘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내가 다른 것은 다 잊어버린다 할지라도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한 가지는 내가 과거에 아주 몹쓸 죄인이었다는 것과, 또 한 가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불쌍히 여기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를 구원해주셨다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기 때문에 나는 내 목숨이 다하는 그 시간까지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다.”
그는 8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잠시도 쉬지 아니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 405장의 가사를 쓴 사람입니다. 그 가사를 생각하면서 우리 함께 405장 1절을 불러보겠습니다.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 죽어 마땅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나같은 죄인까지도 용서하시고 구원해주셨습니다. 생명을 허락해주셨습니다. 광명을 찾게 해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늘 잊지 말고 기억하는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두번째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3절에서, 아무리 유대인들에게 율법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심판에서 면제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13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대단히 중요한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제가 물어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유대인이 의롭다 함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까?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까? 지금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유대인이라고 해서 그 자체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회당에서 랍비가 율법을 낭독하는 것을 듣는 일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저들은 그것을 큰 특권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고, 율법을 듣는 그것만으로도 의롭다 인정을 받는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무엇이라고 말씀해주었습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아니라,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가지고 의롭다 함을 받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100% 완전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율법을 가지고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3:20을 찾아서 한 목소리로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있다는 것입니까? 없다는 것입니까?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기록한 사도 바울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 “나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라고 하는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난 뒤에, 모든 은밀한 것까지도 남김없이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자기를 세워놓게 되었을 때 무엇이라고 부르짖었습니까? 롬 7:24의 말씀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부르짖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건져내지 않으면 나는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 아무리 율법이 있는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그 자체로는 하나님 앞에 어엿이 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사도 바울은 14~15절에서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감히 설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14~15절 말씀을 제가 읽어봅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도 얼마든지 율법의 일을 행할 수 있습니다. 율법의 가르침을 전혀 받지 못한 사람이라도 사람을 죽이면 안된다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남의 물건을 훔치면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무엇으로 안다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서 본성으로 안다고 했습니다. 다 알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롬 1:19∼20에서 이미 우리에게 말씀해주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속에 이미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심어주셨다고 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만물 속에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분명히 보이기 때문에 알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4절 하반부에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이 사람”은 이방인을 말합니다. 즉 이방인은 성문화된 율법이 없어도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가지고 있는 자기가 자기 스스로에게 율법이 되어서 율법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날, 하나님 앞에서 감히 “나는 율법을 몰라서 그랬습니다”고 핑계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15절에서 더욱더 분명하게 설명해주었습니다.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저도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잘 깨닫지 못했습니다. 계속해서 읽고 또 읽고, 씹고 되씹고 나니까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이런 이들은”은 율법이 없는 이방인을 말합니다.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에게는 양심이 증인의 역할을 다 해준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아무 소리 안해도 내 양심이 다 말을 해준다는 것입니다. 양심의 지배를 받고, 양심에서 우러난 생각들이 송사를 합니다. 잘못된 일을 하면 마음이 괴롭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양심이 증인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너 그러면 안돼!”하고 양심이 고소를 합니다. 또 우리가 좋은 일을 하면 다른 사람이 몰라줘도 기분이 좋습니다. 양심이 증거가 되어서 변명해주고 “잘했어!”하고 칭찬을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비록 이방인들에게는 돌비에 새긴 성문화된 율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새긴 율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양심이라는 것입니다. 이 양심에 의해서 이방인들도 얼마든지 “하라!” 또는 “하지 말라!”는 율법의 행위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 분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알기 쉽게 설명을 해봅니다. 아프리카에 있는 어떤 부족의 이야기입니다. 부족 안에 범죄 행위가 발생했습니다. 범인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피의자가 있기는 있는데 물증은 없고 심증만 있습니다. 그러면 피의자를 데리고 가서 앞에 세웁니다. 어떻게 범인인 것을 알아내겠습니까? 끔찍하기는 하지만 효과적인 방법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피의자를 앞에 세워놓고 혀를 길게 빼게 합니다. 그리고 불에 달군 화젓가락을 길게 뺀 혀에 갖다 댄다고 합니다. 입 안이 촉촉하게 젖어 있으면 괜찮습니다. 화젓가락에 별로 다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입 안이 바싹 말라 있으면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범인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십니까? 어떤 원리를 이용한 것입니까? 사람에게는 누구나 다 양심이 있다는 것을 응용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무 소리 안하고 있어도 죄를 지으면 양심이 괴롭힙니다. “너 시치미 떼고 있지만 네가 그랬잖아? 이 나쁜 사람아!” 그러면서 양심이 고소를 한다는 것입니다. 찔리는 것이 있으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입 안이 바싹바싹 마릅니다. 그래서 화젓자락을 갖다 대면 물기가 없어서 상처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짓지 않았으면 떳떳합니다.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양심이 변호해줍니다. “괜찮아. 내가 다 알아. 너는 떳떳해.” 그러니까 마음이 편안해서 입 안이 촉촉하게 젖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13~15절에서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날 우리에게 율법이 있느냐, 없느냐가 심판의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율법이 있는 유대인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제외되지 못하고, 율법이 없는 이방인라고 그것 때문에 의로우신 심판에서 면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그러면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누가 과연 어엿이 설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 16절이 우리에게 그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16절을 우리 다 같이 한목소리로 읽어봅니다.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지금까지 사도 바울은 병에 대해서 정확하게 진단을 내렸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몹쓸 병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정확한 진단이 내려져야 비로소 올바른 처방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 장기를 두어보셨습니까? 장기를 둘 때 상대방이 “장군이요!”하고 치면 무엇으로 받아야 합니까? “멍군이요!”하고 받아야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범죄한 자는 망하고, 범죄한 자는 심판을 받으리라!” 이렇게 장군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받아야 합니까? 멍군입니다. 멍군이 무엇입니까? 지금 사도 바울은 16절에서 멍군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곧 내 복음에.” 이것이 바로 멍군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는 장군이 들어오면, “복음이요!”라는 멍군으로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것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전해준 복음의 핵심이 무엇이었습니까? 롬 1:17에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나의 추하고 더러운 의를 가지고는 도저히 하나님 앞에 제대로 설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친히 마련해주신 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의를 힘입기만 하면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어엿이 설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 의에 어떻게 이를 수 있습니까?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고 했습니다. 방법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 의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16절에서 다시 한번 그 사실을 밝히 말씀해주었습니다. 16절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하나님은 독생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심판하신다고 했습니다. 심판의 모든 권세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 맡기셨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율법을 자랑하는 유대인이라 해도, 아무리 양심대로 살아가는 도덕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없을 때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감히 서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들의 은밀한 것까지 다 남김없이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우리는 다릅니다. 내가 과거에 지은 죄가 아무리 주홍빛보다도 붉다 할지라도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말미암아 흰 눈보다도 더 희게 씻어졌습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결코 혼자 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해주실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고,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고, 나를 위하여 죽으셨고, 나를 위하여 사망의 권세를 깨치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때도 나와 함께 하시면서 나의 두 손을 붙들어주시고,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변호해주시고, 나의 두 손을 높이 들어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어엿이 설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뿐입니까? 모든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흘린 눈물과 땀을 다 씻어주실 것입니다. 참고 영생을 향하며,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추구하는 우리들을 영화롭게 해주실 것입니다. 존귀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평강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 땅에서 오직 주님을 생각하면서 주를 위하여 은밀하게 행했던 사랑과 기도를 하나님이 남김 없이 다 갚아주실 것입니다. 상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생각할 때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결론적으로 다시 한번 말씀을 드립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어엿이 설 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은 우리만이 어엿이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라던 천국 올라가 하나님 전에 뵈올 때
구주의 의를 힘입어 어엿이 앞에 서리라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은 저와 여러분만이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 앞에서 어엿이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늘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이 다음에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 “너는 과연 무슨 자격으로 이 자리에 섰느냐?”고 물으시면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예, 저는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고 이 자리에 어엿이 섰습니다.” 기쁨과 감격으로 자신 있게 답변하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말씀대로 저희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하나님께서 나같은 죄인까지도 버리지 아니하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해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장차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어엿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해주심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이 시간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저희들이 감사를 드립니다. 아버지 하나님, 구원의 이 감격을 저희들이 잊지 않고 늘 깨닫고 기억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해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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