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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로마서강해/제12강 죄를 정당화하는 유대인(3:1-8)

제12강 죄를 정당화하는 유대인(3:1-8)  


지난 주에 우리는 참 유대인에 관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보았습니다. 바울 당시의 유대인들은 자기들에게는 율법이 있고, 할례가 있어서 당연하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을 것처럼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의 그와 같은 생각이 얼마나 부질없는 노릇이고 또 잘못된 착각인지를 우리들에게 깨우쳐주었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표면적 유대인은 참 유대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면적인 유대인이 참 유대인이라고 했습니다. 할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체의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디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까?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피부의 가죽을 베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마음의 가죽을 베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참 유대인이 되는 길이 어디에 있다고 했습니까?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하다고 했습니다. 의문에 속한 사람은 참 유대인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참 유대인이 되기 위해서 이것은 사람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하나님에게로서 말미암는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적인 자기의 의를 내세우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참 유대인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에 나타난 의, 하나님의 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의를 가진 사람만이 참 유대인이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족합니다. 연약합니다. 할례 의식을 행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든든히 붙드는 우리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참 유대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와 같은 가르침은 그 당시 표면적인 유대인들을 몹시도 언짢게 만들었습니다. 저들의 감정이 대단히 상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디를 가든지 그곳에 있는 유대인들에게서 많은 공격을 받았습니다. 핍박을 받았습니다. 고후 11:24 이하에 보면 사도 바울이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자기는 유대인이면서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 사십에 한 번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다고 했습니다. 사십에 한 번 감한 매니까 한 차례 때릴 때 몇 대씩 때리는 것입니까? 서른아홉 대를 때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흔을 넘기면 죽기 쉽상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모진 매를 맞았습니다. 세 번은 태장으로 맞았다고 했습니다. 또 한 번은 돌로 맞았습니다. 왜 바울이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그와 같은 핍박을 받았겠습니까? 그의 가르침이 유대인의 감정을 상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또 사도행전 21장을 읽어보면 이러한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바울이 선교여행을 다 끝마치고 예루살렘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믿음의 형제들이 바울에게 이러한 말을 귀뜸해주었습니다. “형제여, 지금 유대인들 사이에는 당신이 모세를 배반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할례까지도 거부한다는 소문이 퍼져 있습니다. 그러니 몸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아니나 다를까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갔을 때였습니다. 유대인들이 그곳에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아시아로부터 건너온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저들이 바울을 알아보았습니다. 바울을 붙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소리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우리를 도우시오. 이 사람은 각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우리 백성을 거스려서 말하고, 또 율법을 거스리고 심지어는 이곳 성전까지도 거스리는 가르침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저들은 바울을 붙잡고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갔습니다. 바울에게 집단으로 폭행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만일 그때 군사들이 재빨리 출동하지 않았다면 바울은 자기 동족 유대인들에게 맞아서 죽을 뻔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바울은 자기의 가르침 때문에 몹시 유대인들의 미움을 받았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자기가 직접 당했던 유대인의 반발들을 세 가지로 소개해주었습니다.
첫번째 반발이 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의 말대로 한다면 우리 유대인이 이방인보다도 나은 것이 무엇이냐?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왜 우리가 할례를 받아야 되느냐?”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에게 따지고 들었습니다.
두번째 반발이 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도 알다시피 하나님께서 우리 유대인들에게 약속해주신 것이 얼마나 많이 있느냐? 그런데 우리가 믿지 않았다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신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유대인들에게 해주신 그 많은 약속들이 다 폐기된다는 말이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해주실 때는 언제고 일방적으로 약속을 폐하신다면 하나님의 신실성이 어떻게 되느냐? 왜 너는 하나님을 변덕스러운 하나님으로 만드느냐?” 유대인이 또 따지고 드는 것입니다.
세번째 반발이 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의 말대로 우리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해서 비로소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해져서 이방인들이 구원 받게 되었다면 우리 유대인들이 귀하게 쓰임을 받은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상을 주셔야지 왜 우리에게 벌을 주시느냐?” 억지 논리입니다. 여러분, 당시 유대인들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자기들의 죄를 인정하려고 들지 않은 것입니다. 끝까지 고집을 피웠습니다. 회개하지 아니했습니다. 괴변을 늘어놓으면서 자기의 죄를 정당화하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죄인 된 것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의를 받을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묵상해보면서 행여 우리들에게는 그와 같은 잘못된 모습은 없는지 반성해보는 이 아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유대인의 첫번째 반발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유대인의 첫번째 반발이 1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유대인들은 율법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율법을 범했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비록 육체의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무할례자처럼,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처럼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반문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우리 유대인들이 도대체 이방인보다도 나은 것이 뭐가 있냐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할례를 받아야 하느냐?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이러한 것들을 따지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무엇이라고 대답을 했습니까? 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범사에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뒤에 사도 바울은 롬 9:4~5에서 유대인들이 누리고 있는 특권을 여러 가지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제가 한번 읽어봅니다.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들에게는 양자 됨이 있었습니다. 영광이 있었습니다. 언약이 있었습니다. 율법이 있었습니다. 예배가 있었습니다. 약속들이 있었습니다. 조상들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육신으로 말하면 그리스도까지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여러 가지 특권 가운데서 가장 으뜸되는 특권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니까 범사에 많지만,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고 했습니다. 이방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지 아니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신의 뜻을 찾는다고 별의별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캄캄한 밤하늘의 별자리를 쳐다보기도 했습니다. 어항 속에 물고기를 집어넣고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을 보면서 신의 뜻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심지어는 뱀이 몸을 비트는 모습을 보면서 신의 뜻을 찾는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부질없는 일입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을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기록한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맡은 유대인이었기에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귀한 사명을 감당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유대인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말씀을 맡기는 했지만, 저들에게 말씀이 주어지기는 했지만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말씀을 어긴 것이 저들의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남들을 가르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자기를 가르치지 못하고 위선적인 삶을 살고 말았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권리를 주장했지만 말씀을 맡은 자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문제이지요.
오늘 본문의 말씀을 제가 이렇게 적용을 해봅니다. 제가 며칠 전에 어떤 젊은 분과 함께 저녁 식사를 같이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그분이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자기가 전에 다니던 교회에 그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제직들이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급기야 교회가 쪼개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깊은 상처와 마음에 회의가 들었다고 했습니다. “내가 꼭 교회를 다녀야 하는가? 그리고 차라리 평신도로 남지 왜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어 저렇게 싸워야 하는가?”
여러분! 이 질문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다시 말해서 교회에 다니는 것이 안 다니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교회 직분자의 유익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이라고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아마도 사도 바울처럼 답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범사에 많으니.” 범사에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첫째는 너의 신앙에 유익이 되느니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알기 쉽게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합니다. 고등학교에 가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대학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고학을 하면 됩니다. 검정고시를 치르면 대학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학생은 역시 고등학교에 다니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합니다. 선생님 밑에서 배우기도 하고, 가르침도 받고, 또 정해진 규율 속에서 엄격하게 공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주일 낮예배에 한번 빠져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구역장이 찾아갑니다. 교역자가 찾아갑니다. 들들 볶습니다. 견딜 수가 없어서 억지로라도 이 자리에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런 가운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앙이 자라나게 됩니다. 제가 단언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일년 내내 집에서 성경 읽고 기도드리겠다는 마음으로 교회에 한번도 안 나와보세요. 백이면 백 신앙이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래도 교회에 나와서 말씀을 들으면 집에 있을 때는 성경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 나오면 신앙의 선배들이 많이 있습니다. 신앙의 선배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신앙생활은 이렇게 하는 것이구나 하고 도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직분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평신도일 때는 담배를 피울 수가 있습니다. 또 술집에 드나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집사가 되면 “그래도 내가 집사인데 어떻게 담배를 피울 수가 있나? 어떻게 술집에 갈 수가 있나?”고 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 조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신앙에 유익이 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자기에게 주어진 권리를 주장하면서 책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도가 되어서 교회에 다니는 것과, 또 직분을 가지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이 많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성도로서, 내가 교회의 직분자로서 과연 거기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이것을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두번째 반발을 살펴보겠습니다.
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언뜻 읽어서는 무슨 내용인지 이해가 잘 안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말씀을 듣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알기 쉽게 설명을 해드립니다. 유대인들이 누리고 있는 특권 가운데서 가장 큰 특권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 속에서 유대인들에게 많은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그 가운데서 가장 핵심적인 약속이 무엇입니까? 메시야를 보내주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유대인들에게 메시야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정작 메시야가 왔을 때 메시야를 받아들이지 아니했습니다. 매정했습니다. 심지어는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유대인들이 믿지 아니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이와 같은 가르침에 지금 유대인들이 반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지금 바울에게 하고 있는 반발은 유대인 가운데 많은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믿지 않았기 때문에 다 버림을 받는다고 했는데, 너의 말대로 믿지 아니했다는 그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우리가 버림을 받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유대인들에게 약속해주신 그 많은 것들이 다 어떻게 되겠느냐?”고 반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해 주실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는 그 약속을 다 폐기해 버리느냐? 그렇다면 하나님은 미쁘신 하나님이 아니라 변덕스러운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니냐? 왜 너는 하나님을 그와 같이 변덕스러운 분으로 만드느냐?” 지금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에게 따지고 드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무엇이라고 답변을 합니까? 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미쁘심은 결코 폐하여지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거짓되다 할지라도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은 참되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4절 하반부에서 구약 성경에 있는 시편 51편 의 다윗의 시를 인용해서 이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해줍니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왜 하나님께서 신실하시고, 왜 하나님께서 미쁘시냐? 왜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이루시느냐? 왜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반드시 지키시느냐?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의롭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주께서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서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감히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거짓되다 할지라도 하나님만큼은 참되십니다. 신실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잊지 말고 꼭 붙들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약 2년 전에 미국에 유학의 길을 떠날 때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창 28:15에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이러한 말씀이었습니다. 지나간 2년 동안 이 말씀을 수십 번, 수백 번, 아니 수천 번이 넘도록 외우고 또 외웠을 것입니다. 힘이 들 때마다 이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부족합니다. 저는 미련합니다. 야곱처럼 열심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제게 말씀해주지 아니하셨습니까? 저와 함께 하시겠다고, 저를 지켜주시겠다고, 하나님이 제게 허락하신 것을 친히 다 이루어주시겠다고 약속해주지 아니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다 이루시고 저를 다시금 조국 땅으로 인도해주시겠다고 분명히 말씀하지 아니하셨습니까? 하나님, 저는 부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반드시 이루어주시옵소서.” 과연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인간적인 견지에서 보면 불가능한 일을 하나님은 가능케 하셨습니다. 제가 기대했던 것보다도 더 많은 것을 더 큰 것으로 더 빨리 다 이루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로마서 강해를 시작하기 전에 많이 망설였습니다. 기나긴 로마서 강해를 시작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로 고민을 했습니다. 저는 성질이 못돼서 덤벙덤벙 넘어가지 못합니다. 단어 하나라도 설명을 해야 직성이 풀리고, 좋은 말씀만 추려서 전하지 못하는 성격입니다. 그래서 이 긴 로마서 강해를 할까말까 많이 망설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제게 주셨던 말씀이 있었습니다. 약속이었습니다. 로마서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 모두에게 놀라운 변화의 역사, 축복의 역사, 기적의 역사를 허락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그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주신다면 힘들지만 제가 한번 시작해보겠습니다.” 그러면서 로마서 강해를 시작했습니다. 강단에 설 때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약속을 붙들고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저는 부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제가 이 자리에 섰습니다. 오늘 본문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너무 딱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제게 약속해주지 아니했습니까? 놀라운 변화의 역사, 축복의 역사, 기적의 역사를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기쁜 마음으로 성도들에게 전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주시옵소서.” 우리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유대인의 세번째 반발을 살펴보겠습니다.
유대인들의 세번째 반발이 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하리요.”
여기에 대해서 배경 설명이 필요한 줄 압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는 큰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메시야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러나 정작 메시야가 왔을 때 저들은 메시야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와 같은 일이 가능할 수가 있겠는가? 여기에 사도 바울의 고민이 있었습니다.
뒤에 바울은 로마서 9장 이하 11장에서 여기에 대해서 우리들에게 집중적으로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간략하게 말씀을 드리면 이러한 뜻입니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비로소 전도의 문이 이방인에게 활짝 열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비로소 나아가서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뒤에 일백이십 명의 성도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아니하고 저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오순절이 되었습니다. 놀라운 성령의 체험이 저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흩어져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은 다시 오실 주님만 바라보면서 흩어지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자기들끼리만 한 자리에 모여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저들을 억지로 흩어버렸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순교하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비로소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유대 땅으로 나아갔습니다. 사마리아로 갔습니다. 다메섹으로, 안디옥으로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흩어진 성도들이 비로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이방인의 수가 충만하게 차게 되면 나중에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을 긍휼히 여기신 것처럼 다시금 유대인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유대인들을 거국적으로 다 구원해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만일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다 믿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마 모르긴 해도 복음은 예루살렘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믿지 아니했기 때문에 그 복음의 물결이 이방인들에게 흘러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와 같은 설명을 하게 될 때 아마도 유대인들은 또 이렇게 반문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5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우리가 믿지 아니해서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구원 계획, 이방인들이 구원받는 그 일이 이루어졌다면 무슨 말할 것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벌 받아야 하느냐? 오히려 우리가 상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제가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합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가룟 유다가 우리들에게 이와 같은 주장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차피 죽어야 할 몸이 아니냐? 그래야 너희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지 않느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한 장본인이 누구냐? 내가 아니냐? 내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기 때문에 너희들이 구원의 길에 이르게 된 것이 아니냐? 그러니 너희들은 나에게 상을 주어야 한다. 내게 감사의 뜻을 표해야 마땅할 것이다.” 가룟 유다가 이렇게 주장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억지 논리이지요. 지금 유대인들이 그와 같은 논리를 펼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5절 중반부를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라는 말은 내가 너희 주장을 그대로 인용해서 말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희를 심판하시고 하나님이 너희에게 진노를 내리시는 것이 잘못이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6절을 보면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불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불의하시다면 하나님이 어찌 세상을 심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불의하신 하나님이, 무엇인가 잘못 판단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세상을 심판하실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7절에 가서 똑같은 억지 논리를 다시 한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여기서 “나”라는 것은 사도 바울이 자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유대인의 주장을 인용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다시 한번 예를 들어봅니다. 창세기를 보면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애굽의 종으로 팔아 먹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요셉이 애굽에 내려가서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습니까? 종살이를 했습니다.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서 지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셨습니다. 요셉이 모든 어려움을 다 극복을 하고 나중에는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보고서 요셉의 형들이 요셉에게 이와 같은 주장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요셉아, 네가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 것은 우리 덕분이다. 우리가 너를 애굽에 팔지 아니했다면 네가 어떻게 총리대신이 될 수가 있었겠느냐? 네가 총리대신이 된 것은 다 우리가 너를 애굽에 팔았기 때문인 줄 알아라. 그러니 너는 우리에게 감사해야 한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죄악까지라도 바꾸어서 구원 계획을 이루어나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잊지 말고 명심해야 할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은 내가 아니라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이지, 내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나의 잘못에 대해서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자기의 스승 예수님을 팔아먹은 죄 값을 반드시 치러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요셉의 형들도 자기 동생을 종으로 팔아먹은 죄 값을 반드시 치러야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억지 논리는 어디까지 발전되었습니까? 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
완전히 괴변입니다. 선을 이루기 위해서 악을 조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 가운데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8절 괄호 속을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사도 바울을 중상하고 모략했습니다. “바울은 선을 이루기 위해서 악을 조장하는 사람이다”라고 비방을 하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물론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몹시 강조했습니다. 인간의 의를 내세우는 것을 부인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유대인들 사이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율법도 폐하고, 선행도 부정하고, 도덕도 부인한다는 잘못된 오해를 사게 된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마지막으로 어떠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까? 8절 제일 끝부분을 보니까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고 했습니다.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려 들지 아니하고 끝까지 고집을 피우면서 죄를 정당화시키는 유대인들은 진노의 날,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모습이 없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자백하지 않고,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자기의 잘못을 정당화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정죄받아 마땅한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우리가 다시 한번 묵상하면서 좀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한번 교독해보겠습니다. 제가 유대인의 입장이 되어서 오늘 본문 말씀 중 유대인이 말한 구절을 읽어봅니다. 여러분은 사도 바울의 입장이 되어서 사도 바울이 말한 구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유대인이 반문을 합니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읽으시기 바랍니다.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다시 유대인들이 질문을 합니다.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여기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답을 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유대인의 반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하리요.”
사도 바울의 답입니다.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7절입니다. 다시 제가 유대인이 됩니다.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그러자 사도 바울이 답을 합니다.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
오늘 본문이 참 어려운 말씀인데 오늘 설교를 대단히 잘 들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의 잘못이 무엇이었습니까? 자기들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회개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고집을 피우고 괴변을 늘어놓으면서 자기들의 죄를 정당화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잘못이지요.
사도 요한이 요일 1:8~10에서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죄를 감추려고 하지 마십시오. 자기의 죄를 정당화시키려고 하지 마세요.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게 죄인 됨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하나님께 자백하시기 바랍니다. 사람 앞에서 고백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다 고백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미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죄가 아무리 주홍빛보다 더 붉다 할지라도 흰 눈보다 더 희게 씻어주신다고 약속해주셨습니다. 여러분이 마음에 품고 있는 모든 죄가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하게 씻음 받는 이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죄에서 자유함을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에 하나님의 위로가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넘치게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부족하고 연약한 저희들을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오늘도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인도하여 주심을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 우리의 모습을 돌아볼 때에 자기의 죄를 인정하려고 들지 아니했던 유대인의 못난 모습이 우리 속에도 존재하고 있음을 이 시간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에 유대인들처럼 외식적이고, 위선적이고, 형식적인 모습으로 나아오지 아니하도록 저희들을 붙들어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모습 그대로 진실되게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는 우리 승동의 가족들이 다 되게 해주시옵소서. 죄인의 심정으로 나아올 수 있게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주님의 십자가를 든든히 붙드는 저희들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보혈의 공로를 의지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로 이 시간도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씻어주시옵소서. 신실하신 하나님, 말씀하신 대로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 앞으로 로마서에 있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 성도님들이 놀라운 변화의 역사, 기적의 역사, 축복의 역사를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체험하고 맛볼 수 있도록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이루어주실 줄 믿사옵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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